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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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대중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상업중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해운회사를 운영하며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당 대변인,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박정희의 5·16 군사 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1973년에는 납치 사건을 겪는 등 고난을 겪었다. 이후 유신 헌법에 반대하며 미국으로 망명, 반독재 투쟁을 벌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IMF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측근 비리와 대북 송금 사건 등으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0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03년 퇴임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200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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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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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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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대중 |
로마자 표기 | Gim Daejung |
한자 표기 | 金大中 |
별칭 | 후광 |
로마자 표기 (별칭) | Hugwang |
출생일 | 1924년 1월 6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하의도 |
사망일 | 2009년 8월 18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안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
배우자 | 차용애(1945년–1959년, 사별) 이희호(1962년~) |
자녀 | 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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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 |
학력 | |
최종 학력 | 목포상업고등학교 |
대통령 재임 | |
직책 | 대한민국 대통령 |
임기 시작 | 1998년 2월 25일 |
임기 종료 | 2003년 2월 24일 |
국무총리 |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장상 (대행) 장대환 (대행) 김석수 |
이전 대통령 | 김영삼 |
다음 대통령 | 노무현 |
정당 활동 | |
소속 정당 | 민주당 (1955–1961, 1963–1965) 인민당 (1965–1967) 신민당 (1967–1972) 통일민주당 (1987) 평화민주당 (1987–1991) 민주당 (1991–1995) 새정치국민회의 (1995–2000) 새천년민주당 (2000–2002) |
새천년민주당 총재 | 임기 시작: 2000년 1월 20일 임기 종료: 2001년 11월 8일 이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서 직책 설립) 다음: 한광옥 (대행) |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 임기 시작: 1995년 9월 5일 임기 종료: 2000년 1월 20일 |
국회의원 | |
의원 | 국회의원 |
임기 시작 | 1988년 5월 30일 |
임기 종료 | 1992년 12월 19일 |
지역구 | 비례대표 |
임기 시작 | 1971년 7월 1일 |
임기 종료 | 1972년 10월 17일 |
지역구 | 비례대표 |
임기 시작 | 1963년 12월 17일 |
임기 종료 | 1971년 6월 30일 |
지역구 | 목포시 (전라남도) |
임기 시작 | 1961년 5월 14일 |
임기 종료 | 1961년 5월 16일 |
지역구 | 인제군 (강원도) |
수상 | |
수상 | 노벨 평화상 (2000년) 필라델피아 자유 훈장 (1999년) |
2. 생애 초반
김대중은 1944년 목포상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 첫 번째 부인 차용애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되자, 회사 경영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공산주의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를 포함하는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지만, 공산주의 지지자들과의 의견 차이로 탈퇴했다.[18] 이는 훗날 그의 정치 경력에서 정적들의 빨갱이 매도 공격에 취약하게 작용했다. 1947년에는 배를 구입하여 자신의 해운회사를 설립했고,[6] 1948년에는 목포 일간 신문의 발행인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김대중은 서울에서 출장 중이었다. 도보로 목포로 돌아오던 중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7]
2. 1. 출생과 가계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당시 전라남도, 일제 강점기)에서 태어났다.[4] 이후 징병을 피하기 위해 출생년도를 1925년 12월 3일로 수정하였다. 그는 일곱 형제 중 둘째였다. 아버지 김운식은 농부였다.[5] 김대중은 조선 시대 병조참판이자 관상감 건립에 참여했던 문신 김익수(金益壽)의 12대손이었다. 김익수는 김해 김씨 김영정(金永貞)의 손자이기에, 그는 김종필과는 먼 친척 관계였다.
2. 2. 학창 시절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다.[4] 이후 일제 강점기 징병을 피하기 위해 출생년도를 1925년 12월 3일로 수정하였다.[4] 창씨개명 조례에 따라 豊田大中|도요다 다이추일본어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1939년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현재의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목포공립상업학교(현재의 목상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67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고,[164] 1970년에는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해외 국가 국제 경영 경제학 연수과정을 수료하였다.[165]
2. 3. 청년사업가 시절
김대중은 1944년 목포상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5] 1945년에는 첫 번째 부인 차용애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되자, 김대중은 회사 경영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8]1946년, 김대중은 공산주의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를 포함하는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지만, 공산주의 지지자들과의 의견 차이로 탈퇴했다.[18] 1947년에는 배를 구입하여 자신의 해운회사를 설립했고,[6] 1948년에는 목포 일간 신문의 발행인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김대중은 서울에서 출장 중이었다. 그는 도보로 목포로 돌아오던 중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7]
2. 4. 해방과 6.25 전쟁 전후
어린 시절 김대중은 친구들과 놀다가 엿장수의 짐에서 담뱃대를 훔쳤는데, 이를 안 어머니가 크게 혼내며 올바른 가치관을 가르쳤다고 회고했다.[171] 하의도에 학교가 없던 시절에는 서당에서 공부했다.[172][173] 아버지 덕분에 매일신보를 접하며 8살 때부터 신문의 정치면을 주의 깊게 읽었다.[171]1935년 하의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 1938년 목포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172][173] 어머니의 교육열로 목포시로 유학, 여관을 운영하는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학업에 전념했다. 소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목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174] 3학년 때까지 반장을 맡는 등 통솔력을 보였고,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와 평생 친구가 되었다.
독서를 좋아하고 정치,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김대중은 작문, 역사 성적이 뛰어났고 웅변에도 소질이 있었다. 고교 시절 학적부에는 "언변은 늘 정확, 명료하다"라고 기록되었다. 훗날 서울에서 웅변학원을 운영하며 김상현을 만나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일본인 교관의 강연에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질문을 하여 교관을 당황하게 한 일화도 있다.[169] 3학년 때 취직반에서 진학반으로 옮겼으나, 견문이 넓어지고 미국의 봉쇄령으로 일본 대학 진학이 어려워지자 진학을 포기했다.
4학년 때 반일 사상이 생겨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반일 작문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175] 만주국 건국대학 진학도 고려했지만, 졸업 후 일본군 강제 징집 때문에 포기했다.[175][176] 1938년 15세에 '''도요타 다이주'''(豊田大中일본어)로 창씨개명했다.[177]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에 태어났으나,[4] 징병을 피하기 위해 1925년 12월 3일로 출생년도를 수정했다. 일제 강점기하에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5] 고등학교를 위해 가족이 목포로 이사했고, 창씨개명으로 도요타 다이주(豊田大中일본어)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1944년 목포상업중학교 졸업 후 일본인 회사에 취직했다. 1945년 차용애와 결혼, 두 아들을 얻었다. 해방 후 회사 경영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으나 공산주의 지지자들과의 의견 차이로 탈퇴했다.[18] 1947년 자신의 해운회사를 설립했고,[6] 1948년 목포 일간 신문 발행인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서울 출장 중이었고, 목포로 돌아가던 중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다.[7]
3. 정치 활동
목포상업학교(현 목상고등학교)를 졸업한 김대중은 1945년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서 선전부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조선신민당 조직부장,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4년 제3대 총선에 출마하며 정계에 입문, 1956년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의 대변인이 되었다.[18] 196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83] 이후 김영삼과 함께 야당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부각, 1963년과 1967년 제6대, 제7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석패한 후에는 암살 위협으로 고관절 장애를 입었다.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을 겪었고, 1976년에는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국제사회의 구명 운동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노력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다.[228][229]
1985년 귀국 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는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낙선했고,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7]
3. 1. 1950년대 후반 ~ 1960년대 초반
김대중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상경하여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사상계》에 '한국노동운동의 진로' 등 여러 편의 노동 문제 관련 글을 기고하며 정계 진출의 꿈을 키웠다.[191]1956년에는 장면이 이끄는 야당 민주당의 공식 당 대변인이 되었다.[18] 1959년 부인 차용애가 사망했고, 이후 김대중은 천주교로 개종했다.
1961년 5월 14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이틀 후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다.[7] 김대중은 잠시 체포되었지만 이후 권리가 회복되었다.
1962년 김대중은 기독교 운동가인 이희호와 결혼하여 아들을 한 명 더 두었다.
3. 2. 야권의 주요 정치인으로 부각
1961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으나, 당선 3일 만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강제 해산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83] 이후 김영삼과 함께 야당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63년과 1967년 제6대,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속 당선되었으며, 1970년에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현직이었던 박정희에게 97만 표 차이로 석패했다. (박정희 634만 표, 김대중 537만 표). 이 선거 직후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가장한 암살 시도로 고관절 장애를 입었다.[11]
3. 2. 1. 국회의원 활동 및 신민당 창당 참여
김대중은 1954년 제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82] 1955년 민주당에 입당, 장면의 발탁을 받아 민주당 대변인을 역임했다.[18] 1957년 8월에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및 노농부 차장이 되었다.1958년 제4대 총선에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 나상근 후보가 중복추천을 하여 등록무효가 되면서 출마하지 못했다. 이후 나상근 당선인이 당선무효 판정을 받자 1959년 재보궐선거에 다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자유당 전형산 후보의 색깔론 공세에 밀려 낙선했다. 같은 해 7월, 민주당 강원도지구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1월에는 민주당 강원도 인제군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치러진 제5대 총선에 인제군 후보로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했다. 한편, 1946년 2월 김두봉이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180]
3. 2. 2. 1971년 대통령 선거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친 후,[8]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여당의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야당 후보로 출마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 제한을 없애고 3선에 도전했다. 뛰어난 연설가였던 김대중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확고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었다. 김대중은 다른 민주화 운동가인 김영삼을 제치고 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김대중은 "현 향토예비군은 이중 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위헌적인 것이며, 경찰의 보조 기관으로 전락되고 지휘 계통이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 이중으로 되어 있어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고 생업에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민폐를 조성, 부정부패를 가져올 뿐"이라며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196] 그 밖에 4대국 평화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남북대화, 노사위원회 구성 등을 공약으로 내걸으며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치자!"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복지 지향적인 "대중 경제"를 약속했고, 북한과의 긴장 완화를 주장하면서 박정희가 재선되면 "최고 사령관"이 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9]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은 539만 표를 얻어 634만 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패배하였다.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과 신민당은 100만 표 이상 조작된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였다.[197]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는 고향인 전라도에서 나왔는데, 그는 이 지역에서 95%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집권 세력이 그의 후보 자격에 제한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45%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10]
당시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후보보다 39만 표를 더 얻어 승리하였고 부산에서도 40% 가량을 득표해 선전을 벌인 반면,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등 영남 지역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75% 가량의 득표를 하였다. 정부, 여당과 인구가 많은 영남의 적극적 지지를 배경으로 한 박정희 후보는 6,342,828표로 김대중 후보의 5,395,900표보다 946,928표를 더 확보하였다.[198] 하지만, 야당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였는데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본인의 투표를 포함하여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투표가 선관위 관계자의 확인이 없다는 이유로 통째로 무효 처리되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선에서 서울에서만도 약 7천 4백여 표의 유효표가 투표구 선거관리위원장이 서명 대신 직인을 찍었다는 이유로 무효 처리되기도 하였다.[199]
야당의 이러한 의혹과 관권선거 주장 논란과 더불어, 신민당 일각에서는 표 차가 제6대 대통령 선거보다 상당히 줄어들었고 국민 전체적으로 신민당이 46%나 득표하는 선전을 벌였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로서는 더 이상 현행 헌법으로는 장기 집권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박정희의 임기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는 얼마 뒤 치러진 제8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개헌 저지선(204석 가운데 69석이 개헌 저지선이며, 실제로 확보한 의석은 89석)보다 많은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더욱 확실해진다.
특히 영남의 박정희와 호남의 김대중이 격돌하는 대선의 특성상 선거 운동 과정에서 지역감정 선동이 극심했는데, 김대중은 "호남 푸대접"론을 내세워 당시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소외되었던 호남 지역의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200]
박정희 측 지지자들은 "신라 대통령론"과 선거 3일 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 전단을 뿌려 영남 지역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이는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 결과로도 나타났다.
반면 이러한 대결 구도는 다른 지역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지난 63년 대선과 67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의 대결이었던 선거는 동여서야가 두드러졌지만, 71년 대선에서 충청도에서는 김대중보다 박정희가 20만 표를 더 얻어 많은 지지를 보냈다.[201] 이것은 박정희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충청도 출신이라는 점과 호남 출신인 김대중의 연고지 차이라는 분석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선거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영호남 지역 갈등을 부추긴 씨앗이라고 보아 두 정당을 비판하기도 한다. 당시의 수많은 지식인들도 대선이 끝난 후, 71년 대선에서 벌어진 지역감정 유발 행위와 그로 인한 유권자들의 지역감정적인 투표,[202] 대선 기간 중 벌어진 지역감정 갈등에 대해 개탄하였고 앞으로 벌어질 지역감정 갈등에 대해 큰 우려를 하게 된다.[203] 71년 대선 이후에 벌어진 지역감정은 현재까지의 유권자들에게도 많은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204] 이러한 강세에 박정희는 김대중을 자신의 통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대통령 선거 한 달 후, 김대중이 국회의원 선거 유세 중이던 중 트럭이 그의 차량 앞으로 돌진하여 그와 두 보좌관이 중상을 입었다. 고관절 부상[18]으로 인해 그는 평생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 사고는 박정희 정권의 암살 시도였던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11]
3. 2. 3. 진산 파동과 당권 장악 실패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 목포에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1954년 총선부터 1960년까지 네 번의 선거에서 패배했다. 1956년에는 전직 국무총리 장면이 이끄는 야당 민주당의 공식 당 대변인이 되었다.[18] 1960년에 치러진 제5대 총선 인제지구에선 자유당의 전형산 후보에 패했다. 이후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민주당 측에서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전형산 의원을 선정하여 의원 자격을 박탈하였고, 이듬해 1961년 5월 14일에 강원도 인제에선 재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이때 김대중은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지만 이틀 뒤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결국 의원 활동은 하지 못했다.3. 3. 유신 시절 활동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을 40여 표 차로 꺾고 역전승하여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169] 그는 1970년 1월 24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면서 '만일 71년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169] 1971년 4월 18일 장충공원 유세에서 총통제 가능성을 다시 언급했고, 이로 인해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169] 그러나 같은 해 10월 10월 유신이 발생하자 "이처럼 되었는데도 내가 선동가냐"며 반문하였다.[169]1973년 8월,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 비판에 대한 보복으로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KCIA)(국정원)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살해 위기에 놓였다.[12]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대중은 가택 연금되었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76년에는 반정부 선언에 참여한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78년 12월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10]
3. 3. 1. 1차 미국 망명과 한민통 조직
1982년 12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169] 미국 망명 기간 동안 김대중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1983년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69]
3. 3. 2. 김대중 납치 사건
김대중은 1973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 공포 이후 그의 비판에 대한 보복으로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KCIA)(국정원)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살해 위기에 놓였다.[12] 김대중은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저는 하나님이 항상 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경험을 통해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1973년 8월,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도쿄 호텔 방에서 당시 한국 군사 정부의 정보 요원들에게 납치당했습니다. 이 사건 소식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요원들은 저를 해안가에 정박해 있던 그들의 배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저를 묶고 눈을 가리고 입을 막았습니다. 그들이 저를 바다에 던져 버리려는 바로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앞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붙잡고 구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서 비행기를 보내 저를 죽음의 순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필립 해비브는 한국 정부에 김대중을 위해 중재했고, 김대중이 언급한 "비행기"는 납치범들을 추적하던 일본 해상자위대의 순찰 비행기였다.[13]
김대중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가택 연금되었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76년 반정부 선언에 참여한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78년 12월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10] 이 기간 동안 그는 국제앰네스티로부터 양심수로 지정되었다.[14]
2007년 10월,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은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을 기획했음을 인정했다. 국정원은 유감을 표명하며 김대중을 살해하고 바다에 버리려 했다고 밝혔다. 국정원 조사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적어도 수동적으로 승인했다"고 밝혔지만, 당시 박 대통령이 직접 납치를 지시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덧붙였다.[15]
3. 3. 3.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을 40여 표 차로 꺾고 역전승하여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169] 1970년 1월 24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며 '만일 71년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169] 1971년 4월 18일 장충공원 유세에서 총통제 가능성을 다시 언급했다.[169] 이 유세로 인해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으나,[169] 같은 해 10월 10월 유신이 발생하자 "이처럼 되었는데도 내가 선동가냐"며 반문하였다.[169]3. 4. 유신 붕괴 직후 ~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1979년 12월, 박정희 암살 이후 최규하 권한대행에 의해 김대중의 정치적 권리가 잠시 회복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소장에 의한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9]쿠데타 이후 전두환 정권은 새로운 탄압을 시작했고, 김대중을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당시 광주는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다)을 선동한 혐의로 허위 고발하여 반란 및 음모 혐의로 체포했다. 그는 1980년 9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16]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시 한국 대통령 전두환에게 가톨릭 신자인 김대중에 대한 사면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17] 미국 정보당국은 전두환이 미국 대통령직 이양 기간(지미 카터에서 로널드 레이건으로)에 김대중을 처형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 정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퇴임하는 카터 행정부는 레이건의 새 국가안보보좌관 리처드 V. 앨런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앨런은 레이건 행정부가 처형의 책임을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전두환에게 레이건이 김대중의 처형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앨런은 김대중의 형 집행을 유예해줄 것을 요청했고, 1980년 쿠데타 이후 미국의 통치 승인을 갈망했던 전두환은 1981년 2월 백악관에서 새 레이건 행정부를 방문하는 최초의 외국 지도자 중 한 명이 되는 초청을 받는 대가로 이를 받아들였다.[18][19][20][21] 김대중의 사형은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82년 12월,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보스턴에 잠시 정착했고 하버드 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의 방문 교수로 재직했다.[22] 해외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주요 서구 신문에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여러 칼럼을 기고했다. 1983년 3월 30일, 김대중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교에서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연설을 하고,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5. 1987년 대통령 선거
1985년 2월, 김대중은 미국의 인권 담당 국무부 차관보였던 패트리샤 M. 데리안(Patricia M. Derian)을 비롯한 37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귀국했다. 이들 중에는 두 명의 미국 국회의원과 여러 저명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동행자들 중 많은 수가 한국 중앙정보부(KCIA)에 의해 폭행을 당했고, 김대중과 그의 부인 이희호(Lee Hee-ho)는 곧바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9]1985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한 후, 전두환은 14명의 야당 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했지만, 김대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9]
3. 5. 1. 대선 불출마 선언과 번복, 단일화 실패
1992년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대통령직에 도전했으나, 1990년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통합민주당을 합쳐 민주자유당(이후 한나라당이 됨)을 만든 김영삼에게 패배하고,[7]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3. 5. 2. 1987년 대선 낙선
1987년 신동아 10월호에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터뷰 기사가 수록되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이후락은 김대중을 암살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해외 망명정부를 세울 것을 우려해 납치를 계획한 것이라고 밝혔다. 안기부는 이 인터뷰 기사가 한일간 외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1987년 9월 신동아 10월호가 인쇄되던 인쇄소에 안기부 요원을 파견하여 인쇄 작업을 중단시켰다. 이 일로 신동아 기자들은 철야 농성을 벌였고 외신에까지 보도가 되는 등 파문이 확대되자 안기부에선 인쇄 중단 방침을 철회하게 된다.[217][218]3. 6. 노태우 정부 시절 ~ 1992년 대통령 선거
1980년, 12·12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김대중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김대중은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라고 하였다.[225]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에 나섰고, 레이건 정권은 김대중 사형 시 양국관계에 대한 압박을 가했다.[225]전두환은 김대중의 형을 감형해주는 대신 자신을 레이건의 취임식에 초청해달라는 제안을 했고 미국은 이를 수용했다.[226] 1981년 1월 23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김대중 및 관련자들에 대한 감형을 실시했다. 정부는 김대중 사건이 구시대정치의 슬픈 유산이며, 우방 및 국내외 인사들의 인도적 견지에 입각한 관용 요청이 있었다고 설명했다.[227] 전두환의 관용적인 조치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김대중은 2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신병치료를 위한 형집행정지로 198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했다.[228][229]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탄원서를 보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국가 발전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230] 그러나 훗날 이 탄원서는 자의가 아니었다고 밝혔다.[231] 김대중의 망명 직후, 전두환은 김대중이 정치에 손 떼고 건강에 유의하며 살겠다며 각서를 쓰고 미국으로 갔는데, 1년도 안 돼 기자 인터뷰를 통해 정치 활동을 했다며 비난하였다.[232]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 의원은 김대중을 지지하며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망명 생활과 귀국 때도 도움을 줬다.[233]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고, 김대중은 그레그 CIA 지부장이 1989년에 주한 대사로 부임하자 감사 편지를 보냈다.[234]
독일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재는 김대중 사형 선고에 대해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235]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1980년 김대중이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자 하원에서 '김대중 구명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23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2월 11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237] 1983년 1월 31일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다. 김대중은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238]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1985년 2월 8일에 귀국하였다.
1983년 8월,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가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기에 김대중의 귀국 결정에 대해 주변과 미국 정부는 만류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하였고,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미국 하원 의원들이 김대중을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했지만, 김대중은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239] 1985년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228]
리처드 앨런은 김대중 구명운동에 관한 비화를 공개하며 레이건은 전두환이 아닌 김대중을 지지했으며 당시 김대중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한미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240]
1995년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김대중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와 명예 회복이 이어졌다. 김대중은 2004년 1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김대중의 행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할 아무런 위험성이 없었고 내란음모죄의 구성요건인 국헌문란의 목적과 범죄주체가 되는 집단이 특정되지 아니하는 등 공소는 부적법하다고 판결했다.[241][242]
3. 7. 정계 복귀와 1997년 대통령 선거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7]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 클레어홀 방문 학자가 되었다.4. 대통령 재임 시절
김대중은 1986년 11월 5일 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 등으로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준비하자 조건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243] 1987년 7월 9일 사면복권된 후, 다음 날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이 되는데 관심 없다"라고 발표했지만, 하루 만에 불출마 의사를 번복했다.[243]
7월 11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밝혔다.[243] 7월 17일, 김대중 지지 단체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하면서 불출마 선언은 무효화되었다.[243]
이후 김대중은 통일민주당 입당을 결심, 8월 8일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고문으로 취임했다.[244] 8월 11일 김영삼과 만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44]
4. 1. 국정 방향
1986년 11월 5일, 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 등으로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준비하자 조건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987년 7월 9일 사면복권되었고, 다음날인 7월 10일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이 되는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하루 만에 불출마 의사를 번복한다.[243]7월 11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밝혔다.[243]
7월 17일 김대중을 지지하는 단체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함으로써 김대중의 불출마 선언 무효를 공식화했다.[243] 8월 8일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고문으로 취임했고,[244] 8월 11일 김영삼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44]
1987년 9월 9일, 전라남도 목포를 방문했다. 9월 14일 김영삼과 만나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244] 9월 29일 김영삼·김대중 간 후보단일화 회담이 열렸으나 이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245]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했고, 10월 18일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246]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와 김영삼에게 밀려 611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선거 직후 그는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것"임을 주장하며 투쟁을 선언했다.[247]
4. 2. 외교 정책
김대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김정일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회담을 통해 남북은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이산가족 상봉, 경제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49]6·15 남북 공동선언 주요 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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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
2. |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3. |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
4. |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
5. |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6. |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
그러나 대북 송금 사건으로 인해 햇볕정책의 투명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402] 현대가 정상회담 직전 북한에 5억달러를 송금한 사실이 밝혀졌고, 이 중 1억달러가 정상회담 대가로 의심받았다. 또한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 등 북한의 무력 도발이 계속되면서 햇볕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402] 특히 제2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의 대응은 늦장 대응이라는 비판을 받았다.[406]
대일 정책과 관련해서는, 1998년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한일어업협정 일방적 파기 이후 신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으나,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417]
김대중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아래는 김대중이 받은 명예 학위 목록이다.
수여 년도 | 수여 대학교 | 국가 | 학위 종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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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 에모리 대학교 | 미국 | 명예 법학박사 |
1992년 | 미국 가톨릭 대학교 | 미국 | 명예 법학박사 |
1992년 | 러시아 연방 외교 아카데미 | 러시아 | 정치학 박사[166] |
1992년 | 모스크바 대학교 | 러시아 | 명예 정치학 박사[167] 및 객원초빙교수 |
1994년 | 원광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정치학 박사 |
1995년 | 포틀랜드 주립 대학교 | 미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96년 | 시드니 대학교 | 오스트레일리아 | 명예 법학박사[168] |
1998년 | 조지타운 대학교 | 미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98년 | 경희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경제학 박사 |
1998년 | 고려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경제학 박사 |
1998년 | 워시번 대학교 | 미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1년 | 케임브리지 대학교 | 영국 | 명예 법학박사 |
2002년 |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 미국 | 명예 문학박사 |
2006년 | 영남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정치학 박사 |
2006년 | 전남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6년 | 공주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교육학 박사 |
2007년 | 전북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법학박사 |
2007년 | 리츠메이칸 대학교 | 일본 | 명예 법학박사 |
2008년 | 포틀랜드 대학교 | 미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8년 | 말라야 대학교 | 말레이시아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89년 히로히토 사망 당시, 김대중은 평화민주당 총재로서 주한 일본 대사관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248]
4. 2. 1. 대미 정책
김대중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주로 학술 및 인권 관련 교류에 힘썼다. 1983년 에모리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2년 미국 가톨릭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포틀랜드 주립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과학 박사 학위를, 1998년 조지타운 대학교와 워시번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2008년 포틀랜드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과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미국 여러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166]4. 2. 2. 대일 정책
1998년 1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김대중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 25일 타결짓게 된다.[415][416] 그러나 이 협정은 독도 영유권 문제 등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고 있다.[417]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제성호 교수는 "현재 한일어업협정은 영토 훼손의 우려가 포함돼 있고 특히 일본학자들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며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418]그러나 김대중 정권 때 타결된 신한일어업협정의 문제가 되는 조항을 수용하게 만든 여건은 김영삼 정권이 조성했고, 독도가 한일중간수역에 포함되어서 영유권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김영삼은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을 하며 감정 일변도의 외교를 벌인 바 있다.[419] 일본이 이 발언에 대한 보복으로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을 근거로 새 어업협정을 주장하며 기존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것이다. 1997년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협상을 종용하던 일본은 '적선영해기선'을 임의로 설정해서 이를 침범한 한국 어선을 나포했고, 결국 1997년 10월에 김영삼 정부는 동해의 독도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하는 안에 동의하게 된다.[420] 그러나 결국 일본은 1998년 1월 IMF 사태와 정권교체로 인해 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완전히 파기한다.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라고 새 어업협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419]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대해선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1965년 한일협정과 독도밀약이 독도가 우리 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덧붙였다.[424]
4. 2. 3. 대북 정책


김대중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교류 정책은 햇볕정책으로 불린다.[40]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체주의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시작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는 2000년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 김정일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이는 남북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000년 10월 13일, 그는 이러한 노력과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한 그의 활동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49] 이러한 노력의 큰 결과로 2000년 9월 15일 통일기가 처음으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림픽 개회식에서 게양되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통해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사건은 최소 수억 달러가 북한에 지불되었다는 의혹, 즉 정상회담 돈 거래 스캔들로 인해 상당히 훼손되었다. 현대는 정상회담 불과 몇 달 전에 북한에 5억달러를 이체했는데, 이는 한국 정부가 정상회담 비용을 지불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현대는 이 돈이 북한의 발전 시설, 통신망, 산업 단지, 국경을 넘나드는 도로와 철도에 대한 독점적 사업권에 대한 대가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지원은 현대의 북한에 대한 비밀 자금 이체를 주도하면서 외환거래 및 남북협력 관련 국내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박지원은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주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6년 5월 그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박지원은 2007년 2월 출소하여 2007년 12월 사면되었다.[50] 또한 북한을 정상회담에 참석시키기 위해 한국이 구금하고 있던 여러 명의 "장기 수감자"가 석방되어 북한으로 돌아갔다.[51]
햇볕정책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대북 원조에도 북한의 무력 도발로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자 햇볕정책이 북한의 무력 도발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북측에 5억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현대의 대북 7대 사업권 구입을 위한 송금액 중 1억달러가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밝혀져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다.[402]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교전 수칙을 지시했다.[403][404] 이후 제2연평해전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교전 지침 때문이라는 증언이 있었다.[405]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발발 이후 김대중의 행동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등의 늦장 대응을 했다.[406] 군통수권자인 김대중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407] 이회창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408]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요코하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지만 부상당한 해군들이 입원해 있던 국군수도병원은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만을 보냈을 뿐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다. 김대중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다. 김대중은 회담에서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409]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410] 이러한 김대중 정부의 행보에 대해선 당시 남북관계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411]
한편 총리실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이전에도 각 군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할 경우 대통령과 총리는 참석하지 않고 각군 참모총장 이하만 참석했던 것이 관례"라고 해명했다.[412] 김대중이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월드컵 공동개최국 국가원수로서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대한민국 국군이 안보태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확고히 하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413]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고 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410]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밝혔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414]
4. 2. 4. 기타 외교 정책
김대중은 여러 국가의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다음은 김대중이 받은 명예 학위 목록이다.수여 년도 | 수여 대학교 | 국가 | 학위 종류 |
---|---|---|---|
1983년 | 에모리 대학교 | 미국 | 명예 법학박사 |
1992년 | 미국 가톨릭 대학교 | 미국 | 명예 법학박사 |
1992년 | 러시아 연방 외교 아카데미 | 러시아 | 정치학 박사[166] |
1992년 | 모스크바 대학교 | 러시아 | 명예 정치학 박사[167] 및 객원초빙교수 |
1994년 | 원광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정치학 박사 |
1995년 | 포틀랜드 주립 대학교 | 미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96년 | 시드니 대학교 | 오스트레일리아 | 명예 법학박사[168] |
1998년 | 조지타운 대학교 | 미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98년 | 경희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경제학 박사 |
1998년 | 고려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경제학 박사 |
1998년 | 워시번 대학교 | 미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1년 | 케임브리지 대학교 | 영국 | 명예 법학박사 |
2002년 |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 미국 | 명예 문학박사 |
2006년 | 영남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정치학 박사 |
2006년 | 전남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6년 | 공주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교육학 박사 |
2007년 | 전북대학교 | 대한민국 | 명예 법학박사 |
2007년 | 리츠메이칸 대학교 | 일본 | 명예 법학박사 |
2008년 | 포틀랜드 대학교 | 미국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8년 | 말라야 대학교 | 말레이시아 |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89년 1월 9일 히로히토 일본 왕이 사망하자,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김대중은 주한 일본 대사관저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히로히토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조문했다.[248]
4. 3. 경제 정책
김대중 정부는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국란으로 평가받는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 지급 능력을 나타내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382] 경제가 파탄난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기 때문에 경제성장률과 고용 측면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국가적인 재앙인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만으로도 김대중 정부가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역대 정권 중 김대중 정권에서 대한민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났다. 한국은행과 통계청에 따르면 김대중의 집권 시기(1998년 ~ 2002년)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 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1.3999999999999억달러로 가장 많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경상 흑자에 따른 외화 유입 증가로 외환보유액도 많이 늘어났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말 204.60000000000002억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말에는 1214.1299999999999억달러로 늘어나면서 5년간 1010.6999999999999억달러 증가했다. 이로 인해 세계 4대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김대중 정부 때는 물가도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였다.[382]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 부도 등의 여파로 경제성장률과 고용률은 이전 정권들보다 크게 낮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4.5%였으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성장률이 -6.9%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1998년 이후 성장률은 1999년 9.5%, 2000년 8.5%, 2001년 4.0%, 2002년 7.2% 등으로 4년 평균 7.3%였다. 연평균 고용률은 58.1%로 김영삼 정부(60.3%)보다는 부진했다. 하지만 연간 고용률 추이를 보면 1998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56.4%까지 떨어진 후 2000년 58.5%, 2001년 59.0%, 2002년 60.0%로 매년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382]
김대중의 경제적 성과는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다는 점으로 평가된다. 그는 정보기술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 8개월 만에 갚을 수 있었다.[382]
이내영 고려대학교 교수는 "DJ 정권은 최초의 개혁정권"이라며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소외계층, 서민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주력했다"고 평가했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는 "고인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 반열에 선 지도자였고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라고 평가했다. 성균관대학교 김성주 교수는 "전직 대통령을 포함,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DJ는 국가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국난 극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라고 평가했다.[382]
이명박 대통령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은 특별기고문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업적을 극찬했다.[383] 중앙일보는 '경제고비마다 직접 뛴 DJ'라는 제목으로 김대중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다.[385]
매일경제 신문이 2012년 5월 1일, 정부별로 집권기간 중 '경제업적지수' 평균을 분석한 결과 김대중 정부는 82점을 기록했다. 참고로 노무현 정부는 68.9, 이명박 정부는 44.1을 기록했다.[386][387]
2004년 감사원은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과 경기증진에 관련하여 감사를 실시했다. 당시 정부가 투입한 164조 원의 공적자금이 IMF 경제위기 극복은 물론 경제회복과 성장에 큰 도움이 됐던 것으로 감사원의 감사결과 드러 공적자금 투입은 적절한 정책이었던 것으로 평가했다.[388]
삼성경제연구소는 공적자금 지원을 통해 GDP 626조 원, 재정수입 134조 원의 증대 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389]
한국금융연구원은 공적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1998년 GDP는 △12.7%, 1999년에는 △22.0%, 2000년에는 △34.9%로 계속 급락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공적자금 투입의 성과는 커, 정책은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389]
4. 3. 1. IMF 외환위기 극복
김대중 정부는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국란으로 불리는 외환위기 직후 출범했지만, 대외 지급 능력을 나타내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382]한국은행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김대중의 집권 기간(1998년~2002년) 동안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 달러 증가했으며,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 1,4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김영삼 정부 말기(1997년 말) 204억 6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은 김대중 정부 말기(2002년 말) 1,214억 1,300만 달러로 늘어나 5년간 1,010억 700만 달러가 증가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4대 외환보유국으로 발돋움했다.[382] 연평균 증가액은 202억 100만 달러로 노무현 정부의 281억 6,200만 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김대중 정부는 물가 안정에도 성공했다.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5%로 노무현 정부(3.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이는 전두환 정부(6.1%), 노태우 정부(7.4%), 김영삼 정부(5.0%) 등 이전 정부에 비해 상당히 안정적인 수치였다.[382]
다만, 외환위기로 인한 기업 부도 등의 여파로 경제성장률과 고용률은 이전 정부들보다 낮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연평균 4.5%였지만, 1998년 성장률이 -6.9%였음을 감안하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평균 성장률은 7.3%였다. 연평균 고용률은 58.1%였지만, 1998년 56.4%에서 2002년 60.0%로 꾸준히 회복세를 보였다.[382]
김대중의 가장 큰 경제적 성과는 '국가 부도' 직전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한 것이다. 정보기술(IT) 산업을 육성하여 역대 최대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고,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 8개월 만에 상환했다.[382]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이 IMF 외환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선언했으며,[440] 2001년 8월 23일에는 IMF 구제금융 자금 총 195억 달러를 완전히 상환하고, IMF 관리체제를 공식 '졸업'했다.[440]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은 "중화학 공업과 IT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고환율과 선진국 경기 호조라는 유리한 여건을 활용한 것이 IMF 조기 졸업의 비결"이라고 평가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IT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고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하여 IMF 졸업 이후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382]
2004년 감사원은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과 경기 증진에 대한 감사를 실시, 164조 원의 공적자금 투입이 IMF 경제위기 극복과 경제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부실채권 감소, 은행 BIS 비율 증가, 금융시장 안정, 설비투자 및 제조업 성장률 증가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388] 삼성경제연구소는 공적자금 지원을 통해 GDP 626조 원, 재정수입 134조 원의 증대 효과가 있었다고 추정했다.[389] 한국금융연구원은 공적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GDP가 급락했을 것이라며 공적자금 투입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89]
이명박 대통령은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문에서 김대중 정부의 IMF 위기 극복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383][384] 중앙일보는 김대중의 리더십, 국민 설득, 능력 위주 경제팀 구성, 4대 부문 개혁 추진 등을 외환위기 조기 극복의 요인으로 분석했다.[385]
매일경제 신문이 2012년 분석한 정부별 '경제업적지수' 평균에서 김대중 정부는 82점을 기록, 노무현 정부(68.9점)와 이명박 정부(44.1점)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386][387]
4. 3. 2. IT·벤처기업 육성
김대중 정부는 전국적인 고속 ICT 인프라를 구축하고 미래 성장 동력으로 IT 및 벤처 사업을 육성하였다. 김대중은 취임사에서 한국이 "산업 사회의 계층에서…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 및 정보 기반 사회의 계층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44][45] 오늘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발전된 국가 중 하나이며,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구축되고 육성된 잘 연결된 사이버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4. 4. 사회 정책
김대중 정부는 복지 정책 확대에 힘썼다. 특히 실업 문제 해결과 취약 계층 지원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김대중 정부 시절 사회보호 분야 지출은 1997년 2.6조원(GDP의 0.6%)에서 1999년 9.1조원(GDP의 2.0%)으로 3배 증가했다.[46] 주요 정책으로는 실업급여 프로그램 확대, 임시 공공근로 사업 도입, 임시 생계 보호 프로그램, 비기여형 사회연금 도입 등이 있다.[47]
4. 4. 1.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The Act on Guarantee of National Basic Livelihood영어김대중 정부 시절 사회보호 분야 지출은 1997년 2.6조원(GDP의 0.6%)에서 1999년 9.1조원(GDP의 2.0%)으로 3배 증가했다.[46]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47]
- 실업급여 프로그램 확대: 모든 기업으로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기존에는 직원 30명 이상 기업만 적용), 급여 자격 요건 기간 단축, 실업급여 지급 기간을 연장했다. 이를 통해 1998년 초 570만 명이던 수혜 대상 근로자 수가 연말에는 870만 명으로 증가했다.
- 1998년 5월, 임시 공공근로 사업 도입: 7만 6천 명이 참여하기 시작하여, 1999년 1월까지 43만 7천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 75만 명을 대상으로 하는 임시 생계 보호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또한 60만 명의 노인을 대상으로 소득 수준에 따라 지급 여부가 결정되는 비기여형 사회연금을 도입했다.
4. 4. 2.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공포하였다. 관련 법률은 다음과 같다.법률명 | 내용 |
---|---|
국가인권위원회법 |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 근거 법률로, 위원회 구성과 운영, 업무와 권한, 인권 침해 및 차별 행위 조사와 구제 등을 규정하고 있다. |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 2008년 4월 13일 시행되었다.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로, 장애 차별을 받은 당사자나 제3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 차별로 결정하면 시정 권고를 하며, 이 권고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법무부가 시정 명령을 할 수 있다. 시정 명령 불이행 시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 2010년 3월 21일 시행되었다. 연령을 이유로 한 고용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로, 당사자나 제3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연령 차별이라고 결정하면 시정 권고를 하며, 권고 불이행 시 노동부가 시정 명령을 할 수 있다. 시정 명령 불이행 시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모집·채용 위반 사업주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
4. 5. 임기 중 논란
1999년 2월, 김대중은 취임 1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른바 '옷로비 사건'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이형자가 김태정 검찰총장의 아내 연정희에게 고급 옷을 선물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형자는 언론에 밝힌 경위서에서 검찰총장 부인 등이 고가의 옷을 사면서 자신에게 옷 값을 대신 지불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이를 거부했다고 폭로했다. 언론 보도 사흘 후인 1999년 5월 28일 연정희가 이형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하였고, 결국 1999년 6월 2일 검찰은 수사를 발표하게 되었다.
2000년 2월 9일 용산 미8군 기지 영안실에서 군무원이 독성을 가진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무단으로 한강에 방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맥팔랜드에 대한 처벌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강에 유독물질을 무단 방류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 외에도, 미군 군무원이 대한민국의 사법기관을 무시하는 듯한 행위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사건의 당사자가 소파 협정을 핑계로 재판에 응하지 않으려 하면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의 반미감정을 증폭시켰으며, 결국 맥팔랜드에 대해 실질적인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소파 협정의 불평등성에 대한 논의가 형성되었다.


햇볕정책은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했다. 같은 해 말,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고 독재 정권 시절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과 잡음도 있었다. 김대중은 2000년 2월 8일 일본 TBS 지쿠시 데쓰야 NEWS23 특별 회견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발언하여[311][312] 한나라당에게 색깔론 공세를 받았다.[313] 대북 불법 송금 사건으로 햇볕정책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전인 2000년 6월 12일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5억달러를 송금한 사실이 2003년 특검으로 드러났다.[314] 특검 도중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고,[315] 김대중의 측근 박지원은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 및 대북 불법 송금 혐의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316] 김대중은 2004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북한에 1억달러를 지원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317]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등 도발을 감행했고, 2003년엔 핵실험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318]
안기부의 불법도청은 국정원으로 개명된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국정원은 야권 및 반정부 인사, 일부 여권 인사를 상대로 휴대전화 상시도청을 했으며,[319]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인물과 그 어머니도 도청 대상에 포함되었다.[320] 2002년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국정원 도청문건을 제시하며 문제를 제기했고, 2006년 불법 도청을 지시한 국정원장 임동원, 신건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321]
4. 5. 1. 측근 비리와 최규선 게이트
김대중의 아들 김홍업은 1998년 한국전력 석탄 납품과 관련해 최재승 의원의 주선으로 석탄 수입업자 구씨의 청탁을 받고 3억 원의 금품을 받았다가 돌려준 혐의로 2004년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322] 3남 김홍걸은 2000년 최규선과 체육복표사업자 선정 및 각종 이권에 개입해 금품을 수수한,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어 파문이 일었다. 2002년 최규선의 운전기사가 이 사건을 폭로하면서 수사가 진행되었고, 같은 해 11월 김홍걸은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았다.[323] 이 사건으로 김대중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324] 최규선 게이트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최규선이 김홍걸과 함께 이권에 개입하고, 이를 대가로 김홍걸에게 3억 원을 건넨 혐의를 받는 사건이다.[325] 이 사건으로 2002년 5월 6일 김대중은 당시 집권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326]김대중의 처남 이상호(당시 77세)는 서울 C호텔에서 여모(17) 양과 두 차례 성관계를 가진 원조교제 후 200여만 원을 건넸으며, 2002년 "내게 돈을 주면 정부보조금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속여 경남 합천 해인사로부터 로비 자금 명목으로 1억 원을 받는 등 각종 청탁 해결 명목으로 총 1억 8000만 원을 받았다. 2004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는 구속 기소된 이상호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527]
4. 5. 2. 제2연평해전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6월 29일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 및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김대중은 이러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일본을 방문한다.[327] 이날 교전사태가 발생한 직후 임성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사태 발생 사실을 보고받고 NSC 소집과 함께 대응책을 마련했다. 또 이날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월드컵 3∼4위전 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도 취소했다.[328][329] 이어 정부는 6월 30일 서해 도발 과정에서 전사 또는 실종된 해군 장병 5명에게 일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을 추서했다.[330]2002년 6월 30일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에는 이한동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군 장병 등이 방문했다. 이 총리 등 국무위원 일행 21명은 이날 합동분향소를 방문, 헌화 및 묵념하고 고(故) 윤영하 소령에게 충무무공훈장, 고(故) 조천형 중사 등 사망 및 실종 병사 4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이 총리는 이어 병실을 찾아 부상 장병 19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훌륭하게 싸웠소. 용감했소"라고 짤막한 격려의 말을 건넸다.[331] 2002년 7월 2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대중은 국군수도병원을 방문, 서해교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위로했다.[332] 7월 23일 김대중은 서해교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북한의 불법적이고 무도한 도발행위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333]
일부 보수단체는 연평해전 순국 장병들에 대한 정부의 보상금이 약 3000만원에서 5600만원으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334][335] 이 당시 정부는 박정희 정권 당시 헌법에 삽입된 이중배상을 금지하는 제29조 2항으로 인해 일정 액수 이상의 보상이 불가능했다.[335][336] 김대중 정부는 2차 연평해전 전사자 유족들에게 국민성금을 통해 우회적으로 추가 보상했고 2002년 연금법 개정 법안을 발의했다.[337] 이 법안은 2004년에 통과되었다.
2002년 7월 16일 서해교전에서 희생된 순국 장병과 실종자의 유가족들에게 성금 24억 원이 전달됐다.[338]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교전 수칙을 지시했다.[403][404] 이후 제2연평해전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교전 지침 때문이라는 증언이 있었다.[405]
김대중의 행동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에도 불구하고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 만에 여는 등의 늦장 대응을 했다.[406]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 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407] 이회창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 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408]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 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요코하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지만, 부상당한 해군들이 입원해 있던 국군수도병원은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만을 보냈을 뿐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다. 김대중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함께 했다. 김대중은 회담에서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409]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합동 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410] 이러한 김대중 정부의 행보에 대해선 당시 남북관계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411]
한편 총리실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이전에도 각 군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할 경우 대통령과 총리는 참석하지 않고 각군 참모총장 이하만 참석했던 것이 관례"라고 해명했다.[412] 김대중이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월드컵 공동 개최국 국가원수로서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대한민국 국군이 안보 태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확고히 하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413]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고 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 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410]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 평화 회담 미국 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밝혔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 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414]
5. 퇴임 이후
2003년 2월 24일,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직후 동교동 사저 옆에 김대중 도서관을 개관했다. 김대중 도서관에는 김대중의 생전 유품과 저서 등 많은 관련 자료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2004년 1월 29일,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241] 3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해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했다.[339] 5월 10일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순방과 함께 OECD와 노벨 위원회, WHO에서 연설했다.[228] 8월에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박정희 시절 정치탄압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하자, 한 방송 인터뷰에서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340]
11월 14일, 8박 9일 동안의 유럽 순방을 마치고 인천 공항을 통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귀국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11월 18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열리는 클린턴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순방 피로 누적으로 미국 방문을 취소하고 조기 귀국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방문 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고, 세계식량계획(WFP)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북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고 핵문제에 있어서 이중잣대는 안된다는 점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반영된 최종 선언문이 채택됐다"라고 말했다.[341]
새천년민주당은 2004년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김대중은 2003년 1월 퇴임을 앞두고 "퇴임 뒤 국내 정치문제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실제로 퇴임 후 열린우리당이나 새천년민주당 인사들에게 덕담만 할 뿐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았다.[342] 이후 2007년 열린우리당은 탈당파들이 결성한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통합되었는데, 이때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던 김대중은 열린우리당을 비판하며 '민주당 분당사태'(2003), '대북송금 특검'(2003), '안기부 X파일 사건'(2005)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86세대 정치인들에게는 "국민들의 뜻에 부응하지 못했다", "정치를 계속하고 싶으면 가방을 메고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국민에게 잘못한 것은 사과하고 직접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343]
2008년 10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100억 원대 CD를 비자금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박지원 의원은 의혹이 있으면 즉각 수사하라며 반박했다.[344] 검찰 관계자는 "자금 추적 결과 김 전 대통령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말했다.[345]
2009년 6월 11일,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해 북한의 2차 핵실험,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민주주의 위기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을 동시에 비판했다.[346]
2009년 8월 12일, 최경환 비서관은 중앙일보의 《문창극 칼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예와 인격을 훼손했다며 "중앙일보와 문창극 대기자에게 깊은 유감을 표한다"라고 밝혔다. 중앙일보는 김대중 측이 최경환 비서관 이름으로 낸 반론보도문을 실었다. 최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은 불법 비자금을 가진 적도 만들어 본 적도 없다", "문 대기자의 주장은 어떠한 근거도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문 대기자가 근거로 삼은 월간조선 기사나 일부 인사들의 발언 등은 언론들의 사과와 확인, 법원의 판결과 검찰의 공식발표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그 사례를 밝혔다.[347]
2009년 8월 18일,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KRB 한국라디오방송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로 얼어붙은 북미관계를 풀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2009년 초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북미 관계 발전을 위한 조언을 요청했고, 이에 김 전 대통령이 5월 북한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348][349] 김대중 사후 이희호 여사와 클린턴 전 대통령의 통화에서 김대중은 "미국의 (대북) 정책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께서 늘 하셨던 일을 발판 삼아 했을 뿐", "제가 할 수 있었다는 건 큰 영광이었다"며 억류 여기자 2명 송환이 김 전 대통령의 영향이었음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나를 지원해준 친구였다", "김 전 대통령을 평생의 친구로 생각할 것"이라고 애도했다.[350]
2009년 9월 23일, 뉴스위크는 김대중을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선정했다. 2009년 12월 19일에는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잊혀지지 않을 저명인사'로 김대중 전 대통령 등 36명을 선정했다. 뉴스위크는 "김 전 대통령은 군부 독재에 항거하고 망명과 투옥, 납치, 암살 위협 등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야권 지도자"였다며 "재임시 남북 화해 증진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라고 덧붙였다.[351]
2011년 8월, 김대중이 사망 전 '6ㆍ15와 9ㆍ19로 돌아가라', '민주당과 야당, 시민세력은 단결하고 연합하라', '이명박 정부는 불행한 길을 걷지 말라',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 등 네 가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352]
2009년 8월 20일, 한국·미국·일본 지식인 110명의 남북화해와 동북아 평화 촉구 공동성명이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발표되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 교수는 "성명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북한의 로켓 발사와 유엔 제재 등 악순환이 이어지자 3국 지식인들에게 공동선언을 제안했고, 지식인들이 호응하여 문안 작성에 착수했으나, 문구 수정 작업에 반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와다 교수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벌인 후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지한파이다.[353]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354] 이명박, 김영삼[355], 전두환[356], 박근혜,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정세균 민주당 대표,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 반기문 UN 사무총장 등 각계 인사들이 문병했고, 쾌유기원 촛불 집회가 열렸다.[357][358][359]
초기엔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1달에 걸친 투병 끝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향년 86세에 서거하였다.[360]
장례는 국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가 단독으로 맡았다. 이는 사망 다음 날인 2009년 8월 19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으며, 유족 측과 이명박 정부는 합의하여 국장으로 치르되 경제위기를 고려해 6일장으로 결정하였다.[373]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 국립 5∙18민주묘지, 고향 신안군 하의도, 용인 가족묘 등이 거론되었으나, 유족들의 뜻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에 매장되었다.[374]
2009년 10월 5일, 묘비가 세워졌는데 충남 보령 오석(烏石)으로 제작되었으며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란 문구와 주요 공적, 경력, 가족 사항 등이 기록돼 있다.[375]
김대중은 북한의 핵무기 실험에 대해 자제를 촉구하고,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햇볕정책을 평양에 대해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8년 4월 17일 포틀랜드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도전, 대응, 그리고 신"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62]
6. 평가
김대중은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햇볕 정책을 통해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81] 2021년 갤럽코리아 여론조사에서는 긍정적 유산을 남긴 대통령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40대에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69]
그러나 햇볕 정책은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등 북한의 무력 도발을 막지 못했고, 대북 송금 사건에서 투명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비판을 받았다.[402] 제2연평해전 당시 늦장 대응과 일본 방문, 영결식 불참 등으로 비판받았으며,[406][409][410]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잊혀진 전쟁'이라며 당시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기도 했다.[410]
신한일어업협정 체결 과정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있다.[417] 뉴라이트는 중간수역 설정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418] 하지만 이는 김영삼 정부의 외교 실패와 IMF 사태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며, 어업협정은 영유권 문제와 무관하다는 반론도 있다.[419][420][424]
자유민주연합과의 연정 과정에서 '의원 꿔주기'로 원내 과반수를 확보한 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았다.[425] 아들들의 비리 문제,[429]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를 "성공한 지도자"로 칭송한 점,[454] 김정일을 "식견 있는 지도자"로 평가한 점[456] 등도 논란이 되었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 유세에서 경상도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463]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합의를 깨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것은 지역감정에 기댄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이 있다.[464] 1992년 대선에서는 농촌 유권자의 여당 지지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 책임론을 제기하기도 했다.[470]
6. 1. 긍정적 평가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81]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 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 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381] APEC이나 ASEM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김대중은 거의 언제나 첫 번째 발언권을 부여받았고,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다.[381]1999년 5월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대구·경북을 방문해 지역 원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기념사업에 대해 정부 차원의 지원 의사를 밝혔다.[391] 김대중은 당시 만찬에서 "물러난 대통령은 모두 부정적인 평가만 받아 왔지만 공적은 평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지 여부를 막론하고 그가 6·25 폐허 속에서 근대화를 이루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 공은 인정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김대중이 자신을 핍박하고 민주화를 거부했던 박정희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의 발언에는 지역 화해 의지도 배어 있다. 대구ㆍ경북, 나아가 영남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를 끌어안음으로써 영·호남 화해를 모색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92]
노무현은 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구와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378]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과 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379]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그린은 "DJ는 주변 4강과 모두 친하면서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한국에 꼭 필요하나 실현하긴 힘든 난제를 풀어낸 전무후무한 지도자"라 극찬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였으며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이자 한미관계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 "1980년 필자의 대담에서 일부 고위 군 관련 인사들은 김대중이 과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현재까지도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해온 필자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1980년대 말 CIA 전문 요원 출신인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는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한 뒤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기술하였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는 "김 대통령처럼 한국 경제에 공헌한 대통령은 없기 때문에 한국민은 떠나가는 김대중씨를 마음으로부터 감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에서 단임 5년에 지금처럼 많은 변화를 이뤄낸 대통령은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며 "5년 사이에 한국 경제를 V자 회복 시킨 김 대통령은 희대의 명대통령"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한국과 일본 경제를 비교하며, "한국은 혼미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뒤로 하고 여러 분야에서 전망이 좋아졌다"면서 "장거리 트랙경기로 친다면 일본보다 2 바퀴정도 뒤쳐졌던 한국이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다가온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살아남아 더욱 강해진 재벌의 총수들은 결코 김대중씨에게 감사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394] 세계적 경제전문 통신인 블룸버그는 "김 대통령은 경제ㆍ정치ㆍ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블룸버그는 "77세의 김대중씨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지도자의 업적을 이뤘다"며 극찬했다.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그는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소개됐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고 덧붙였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했다.[400]
2011년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김대중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는 김대중을 "세계적으로 알려진 정치적 인물로, 외교 정책의 모든 측면에서 능숙했다"고 평가했다.[401]
6. 2. 부정적 평가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자 햇볕정책이 북한의 무력 도발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북측에 5억 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현대의 대북 7대 사업권 구입을 위한 송금액 중 1억 달러가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밝혀져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다.[402]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교전 수칙을 지시했고,[403][404] 이후 제2연평해전에서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교전 지침 때문이라는 증언이 있었다.[405]2002년 한일 월드컵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발발 이후 김대중의 행동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 만에 여는 등 늦장 대응을 했다.[406]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 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407] 이회창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 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408]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 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요코하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지만, 부상당한 해군들이 입원해 있던 국군수도병원은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만을 보냈을 뿐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다. 김대중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함께 했다. 김대중은 회담에서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409]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410] 이러한 김대중 정부의 행보에 대해선 당시 남북관계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411]
총리실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이전에도 각 군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할 경우 대통령과 총리는 참석하지 않고 각군 참모총장 이하만 참석했던 것이 관례"라고 해명했다.[412] 김대중이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월드컵 공동개최국 국가원수로서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대한민국 국군이 안보 태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확고히 하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413]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고 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한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다."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410]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 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밝혔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414]
1998년 1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김대중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 25일 타결짓게 된다. 그러나 이 협정은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고 있다.[415][416] 대표적으로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 발생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꼽을 수 있다. 1999년 양국 간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할 때 자원의 공동 관리가 이루어지는 중간수역 내에 독도가 포함되었고, 이 협정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하여 일본 측 주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417]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 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제성호 교수는 "현재 한일어업협정은 영토 훼손의 우려가 포함돼 있고 특히 일본 학자들에게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며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418]
그러나 김대중 정권 때 타결된 신한일어업협정의 문제가 되는 조항을 수용하게 만든 여건은 김영삼 정권이 조성했고 독도가 한일 중간수역에 포함되어서 영유권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김영삼은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을 하며 감정 일변도의 외교를 벌인 바 있다.[419] 일본이 이 발언에 대한 보복으로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을 근거로 새 어업협정을 주장하며 기존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1997년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협상을 종용하던 일본은 '적선영해기선'을 임의로 설정해서 이를 침범한 한국 어선을 나포했고 결국 1997년 10월에 김영삼 정부는 동해의 독도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하는 안에 동의하게 된다.[420] 지리한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 주변 수역을 제외하고 협정을 체결하려는 의사를 표하고[421] 김영삼 정부도 독도에 접안시설을 건립해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를 했다.[422] 그러나 결국 일본은 1998년 1월 IMF 사태와 정권교체로 인해 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완전히 파기한다.
또한 독도가 한일 중간수역에 들어갔으므로 신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효성이 없다"라고 일축한 바 있다.[423] 그는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라고 새 어업협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419]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 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대해선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1965년 한일협정과 독도밀약이 독도가 우리 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덧붙였다.[424]
김대중은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했다. 그러나 곧 이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했고 연정 상대였던 자유민주연합은 17석으로 원내교섭단체 요건인 20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김대중이 총재(1995.09~2001.11)였던 여당은 의회 과반수를 점유하지 못하자 자유민주연합에 의원 3명(배기선, 송석찬, 송영진)을 입당시키는 이른바 '의원 꿔주기'를 통해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의회 민주주의의 왜곡", "정치 후퇴"라는 비판을 받았다.[425] 해외에서까지 화제로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426] 이에 자유민주연합의 강창희 의원이 꿔주기에 반발하여 출당 당하게 되자 장재식 의원을 추가로 자민련에 입당시켜 끝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427] 김대중은 의원 꿔주기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428] 그가 김종필 등과 연합한 것을 계기로 1960년대부터 그를 지지하던 최기일은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집권 기간 중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어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김홍업은 2003년 5월 기업체로부터 이권 청탁 명목으로 25억원을 받고,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원을 받은 후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김홍걸은 2001년 3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관련 로비와 공사 수주 로비 대가 등으로 36.9억원을 뇌물로 받고 2.2억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을 지낸 김홍업은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1년 6개월간 복역 중, 우울증 등의 증세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석방됐다. 김홍걸은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청탁 등의 대가로 기업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7년 8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집권 기간 중 아들들이 비리 혐의로 수감되어 청렴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429]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 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비판도 있다.[430]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 못 한다는 비판이 있다. "누가 그에게 비판적인 말을 하면 그는 얼굴에 불쾌감을 나타낼 것이다. 우호적인 충고도 작별의 키스임을 그는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451] "사람들을 이용하고는 쓸모가 없으면 저버린다"[452]는 비판도 있다.
1999년 1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소학관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를 "성공한 지도자"라고 칭송해 논란이 일었다.[454] 한나라당은 "독재자를 칭송한다"며 즉각 비판했고 당시 정부 대변인조차도 "국가원수의 역사관이 이렇다면 걱정을 넘어서 분노할 일이라며 자라나는 2세들의 교육에 염려스럽다"며 강력 비판했다.[455]
2000년 경에는 일본의 도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을 "식견 있는 지도자"로 평가했다.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협상에 대해서는 "일본은 북한에 큰돈을 지원할 수 있는 나라인 만큼 수교협상에서 나름대로의 주도권을 갖고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456] 이로 인해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457]
1969년 당시 신민당과 3선 개헌 반대 범투위 소속으로 유세에 참여한 김대중은 다른 연사들과 더불어 "영남 지방은 고속도로까지 개설해주는 정부가 호남선은 복선마저 제대로 않고 푸대접하고 있다."며 경상도 정권 타도를 주장한 바 있다.[463] 여기에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합의를 깨고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것도 지역감정에 기댄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이 있다. 당시 단일화 합의를 했던 김영삼은 "지역 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라고 최근까지도 주장하고 있다.[464] 또한 87년 대선에 평화민주당 김대중은 4자 필승론을 주장하며 대선에 출마하였는데 이는 노태우(TK 대구경북), 김영삼(PK 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각자 그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선 결과 수도권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김대중 후보가 3위를 차지하였고 전국 투표수에서도 3위를 차지하여 4자 필승론은 무위로 끝났다.[465][466]
1992년 대선에서 여당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 맞선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여당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은 13대 국회에서 수세·농지세 감면, 농어가 부채의 상환 연기, 농·수·축협 조합장 직선제 도입 등 농민을 위해 일한 유일한 정당"이라면서 "364일 야당 하다가 선거날에만 여당 하는 농촌 유권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30여 년간의 군정 기간 중 가장 많은 차별과 천대를 받은 계층이 바로 여러분 농민들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뭐가 좋다고 선거 때만 되면 여당을 찍고 선거가 끝나면 후회를 하곤 합니까"라고 주장했다. 이미 30년 전인 1992년 대선 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470][471]
7. 상훈
- 1981년 -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 1987년 -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 인권상(조지 미니상)
- 1987년 -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 1993년 - 한국애서가클럽 애서가상
- 1994년 - 미국 유니온신학대학교 유니온메달
- 1998년 -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 1998년 - 무궁화 대훈장
- 1998년 - UN 인권협회 인권상
- 1999년 -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 2000년 - 라프토 인권상
- 2000년 - 노벨 평화상
- 2000년 - 국제평화상
- 2001년 - 세계정치지도자상
- 2002년 - 국제행동을 위한 의원연합의 민주주의 수호자상
- 2003년 - 늦봄통일상
- 2003년 - 제7회 만해상
- 2003년 - 칠레 대십자 훈장
- 2003년 - 제11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공로상
- 2006년 - 코리아 소사이어티 선정 밴플리트상
- 2007년 - 제1회 자유상(베를린 자유대학)
- 2011년 - 제1회 동학농민혁명대상
8. 저서
- 《분노의 메아리》 (1967년)
- 《내가 걷는 70년대》 (1970년)
- 《독재와 나의 투쟁》 (1973년, 일본어판)
- 《김대중 옥중서신》 (1984년)
- 《행동하는 양심으로》 (1985년 6월 8일) [독재와 나의 투쟁 - 개정판]
- 《대중 경제론》 (1986년, 한국어판·영어판)
-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1987년 8월 15일)
- 《공화국 연합제》 (1991년 9월 25일)
-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1992년 5월 15일)
-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1992년 10월 29일)
-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1992년) [대중 경제론 - 개정증보판]
- 《한국의 통일》 (1993년)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년 12월 10일)
- 《나의 길 나의 사상》 (1994년 1월 26일)
-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1995년 9월 12일)
- 《김대중의 21세기 시민 경제 이야기》 (1997년 3월 20일)
- 《대중 참여 경제론》 (1997년 3월 25일) [대중 경제론/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 개정증보판]
-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 (1997년 10월 22일)
- 《내가 사랑한 여성》 (1997년 11월 5일)
- 《나의 삶 나의 길》 (1997년 11월 15일)
-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 개정판]
-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9년)
- 《경천애인》 (2002년, 공저: 김대중 외 28인)
- 《21세기와 한민족》 (2004년 12월 22일)
- 《통일 지향의 평화를 향하여》 (2007년 5월 7일)
-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2009년)
- 《옥중서신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2009년) [김대중 옥중서신 - 개정증보판]
- 《옥중서신 2: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2009년)
- 《김대중 자서전》 (2010년)
9. 기타
- 1989년 MBC TV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 황인식이 연기하였다.[70]
- 1993년 MBC TV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백윤식이 연기하였다.[70]
- 1995년 MBC TV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최민식이 연기하였다.[70]
- 1995년 SBS TV 드라마 《Koreagate》에서 민욱이 연기하였다.
- 1998년 SBS TV 드라마 《삼김시대》에서 유인촌이 연기하였다.[71]
- 2002~2003년 SBS TV 드라마 《서쪽으로》에서 한영수가 연기하였다.
- 2002년 영화 《재밌는 영화》에서 김인문이 연기하였다.
- 2002년 영화 《KT》에서 최일화가 연기하였다.[72]
- 2003년 영화 《주글래 살래》에서 송양규가 피자집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영감을 받은 캐릭터를 연기하였다.[73]
- 2004~2005년 MBC TV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김동석이 연기하였다.
- 2005년 MBC TV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임동진이 연기하였다.[70]
- 2008년 MBC 표준FM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한국어》에서 이철용[74]과 김명수가 목소리 연기를 하였다.
- 2022년 영화 《킹메이커》에서 설경구가 김운범이라는 이름으로 영감을 받은 캐릭터를 연기하였다.[75][76]
10.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김운식(金雲植) | 1894년 12월 11일 | 1974년 2월 10일 | |
전모 | 김순례(金順禮) | 1894년 5월 13일 | ? | |
김순례 소생 | ||||
이복누나 | 김매월(金每月) | 1917년 | 1980년 | |
이복누나 | 김용례(金容禮) | |||
이복형 | 김대봉(金大奉) | 1920년 12월 15일 | 1972년 11월 4일 | |
형수 | 박공심(朴公心) | |||
조카 | 김만선(金萬宣) | 1944년 | ||
조카 | 김맹임(金孟任) | 1952년 | ||
조카 | 김관선(金寬宣) | 1957년 | ||
조카 | 김홍선(金弘宣) | 1964년 | ||
이복누나 | 김안례(金安禮) | 1921년 | ||
장수금 소생 | ||||
생모 | 장수금(張守錦) | 1893년 7월 29일 | 1972년 6월 20일 | |
남동생 | 김대의(金大義) | 1926년 | 1997년 | |
제수 | 민병숙(閔炳淑) | 1931년 | ||
조카 | 김홍준(金弘準) | 1956년 | ||
조카 | 김혜영(金惠英) | 1963년 | ||
조카 | 김홍훈(金弘勳) | 1966년 | ||
남동생 | 김대현(金大賢) | 1933년 | ||
제수 | 이숙자(李淑子) | 1940년 | ||
조카 | 김홍석(金弘錫) | 1963년 | ||
조카 | 김홍민(金弘敏) | 1966년 | ||
조카 | 김연학(金娟鶴) | 1971년 | ||
여동생 | 김진찬(金眞贊) | 1935년 | 1976년 | |
차용애 소생 | ||||
첫번째 배우자 | 차용애(車龍愛) | 1927년 4월 28일 | 1959년 6월 25일 | |
장녀 | 김소희(金昭熙) | 1946년 4월 15일 | 1947년 2월 19일 | |
장남 | 김홍일(金弘一) | 1948년 1월 21일 | 2019년 4월 20일 | |
며느리 | 윤혜라(尹惠羅) | 1951년 9월 6일 | ||
손녀 | 김지영(金志英) | 1976년 4월 20일 | ||
손서 | 장상현 | 1976년 | ||
손녀 | 김정화(金貞華) | 1978년 7월 9일 | ||
손서 | 주성호 | 1974년 | ||
손녀 | 김화영(金華英) | 1984년 2월 6일 | ||
차남 | 김홍업(金弘業) | 1950년 7월 29일 | ||
며느리 | 신선련(申善蓮) | 1954년 12월 13일 | ||
손자 | 김종대(金鍾大) | 1986년 9월 3일 | ||
손부 | 최자현 | 1985년 | ||
손자 | 김종민(金鍾民) | 1989년 3월 10일 | ||
이희호 소생 | ||||
두번째 배우자 | 이희호(李姬鎬) | 1922년 9월 21일 | 2019년 6월 10일 | |
3남 | 김홍걸(金弘傑) | 1963년 11월 12일 | ||
며느리 | 임미경(林美京) | 1964년 1월 17일 | ||
손자 | 김종화(金鍾和) | 1993년 10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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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 증서 1964 - 김대중 도서관 전시물 (민주화를 향한 김대중-야당의 정책이론가로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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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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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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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前 대통령 서거] 고문 후유증으로 몸 불편한 큰아들에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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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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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시대별로 본 험란한 정치역정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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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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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여야 지도부, 故 김대중 대통령 6주기 추도식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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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뉴스투데이
201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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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前 대통령 지석(誌石) 전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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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0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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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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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2009-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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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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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말뿐인 '정쟁 중단' 與 '친일 시비' 잇단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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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前대통령 서거]민주화의 거목 김대중, 그 파란만장했던 삶
http://www.inews24.c[...]
아이뉴스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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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가택연금 55회...투옥 6년...망명...사형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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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20-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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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6)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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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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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경천애인
맑은물
200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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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건준ㆍ신민당 참여, 좌익 발호에 발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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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김대중 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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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국민회의 金총재 사상시비 반박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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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997-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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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정보기관, 71·87년 대선 조직적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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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출범직전 안기부과거자료 불태워"
https://news.naver.c[...]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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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5·18 민주화운동' 30돌>끝나지 않은 재판, 前 대통령 등 관련 재판 일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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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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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죽어서도 못 뗀 빨갱이 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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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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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단독 인터뷰 제1탄 '북풍사건' 진실 밝힌 전 국정원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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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대통령 되면 수류탄 들겠다"... 군은 왜 DJ를 미워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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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
사상계
19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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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경천애인
맑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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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공정성-정확성 결여 논란 '한국어판 위키피디아'… 전직 대통령-북한 관련 내용 분석해보니…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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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1964년 필리버스터 DJ 정치터전은 의회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0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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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치권, 개혁 큰틀 깨 유감":작은 정부에서 다시 큰 정부 돼 버렸다
http://ww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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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벼리2] 예비군, 이제 폐지하자
http://hr-oreum.net/[...]
인권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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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大中(김대중)후보聲明(성명) "「不正(부정)」默認(묵인)할수없다「百萬票差(백만표차)」이상造作(조작)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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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제 7대 대통령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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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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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選管委長(선관위장) 職印(직인)찍어 無效(무효) 서울서만 7千餘(천여)장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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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4.27 状况室(상황실) (2) 版圖(판도) 가름하는決戰場(결전장)…全南(전남)·北(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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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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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 선거정보시스템, 제 7대 대통령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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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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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걱정되는 民族國家(민족국가)의 앞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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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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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地域(지역)감정의 極限(극한)대결 말초心理(심리) 자극선동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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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시급한課題(과제) 地域(지역)대립解消(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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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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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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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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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81회] 한민통 발족위해 동분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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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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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 이것이 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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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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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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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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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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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박정희에게 한방 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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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김대중납치의 내막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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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4> 1987년 민주화 물꼬 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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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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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된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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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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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평화통일에 평생 바친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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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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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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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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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大中씨 會見 北傀의 過渡期 틈탄 暴力 음모 警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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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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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동아, DJ에 화해의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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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협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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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大中(김대중) 카드」로 푼 韓美(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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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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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발췌] DJ 구명운동과 신군부 대미관계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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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200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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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카드로 푼 한미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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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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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김대중 사이버 기념관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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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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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大中 無期로減刑 閣議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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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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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탄원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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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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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카드로 푼 한미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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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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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DJ, 당신은 한국의 J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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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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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지킴이' 그레그와 DJ의 관포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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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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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트 前 獨 총리 DJ 구명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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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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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고르비, 만델라도 "DJ 그리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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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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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둔 DJ 구한 '교황의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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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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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부부 訪美… 박지원 前실장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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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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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반독재’ 거센 바람…다시 강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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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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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DJ 구명운동과 신군부 대미관계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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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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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24년만의 무죄 "신군부 대항 정당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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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내란음모 사건, 재심서 '무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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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평민당 총재 기자회견[강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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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DJ, 'A급 전범' 히로히토 일왕에 머리 숙인 지 20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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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티어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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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평민당 김대중 총재 문동환 전 부총재 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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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 "3당합당 전후 YS에 40억+α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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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 저명인사 1300명 사찰 - 탈영사병 양심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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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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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총리 폭행 사건 계기로 반체제 색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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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뉴스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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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민자당의 압승을 안겨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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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뉴스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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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김대중 대표, 대통령후보 경선출마 공식 선언[김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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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14대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 후보 확정[김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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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후보 政界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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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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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에서 DJ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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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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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이사장, 신당 창당 선언
http://imnews.imbc.c[...]
MBC
199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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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국민회의 전당대회 결과 김대중 후보 78% 지지 얻어
http://imnews.imbc.c[...]
MBC
1997-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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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이회창.김대중.김종필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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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뉴스데스크
1997-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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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총재, TV 토론회에서 야권 후보는 반드시 자신으로 단일화되어야 한다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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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뉴스데스크
199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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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권 못 바꾸면 국정 파탄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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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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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이회창 대표 아들의 병적기록표 오늘 공개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199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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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30.5%—이인제 24.5%—이회창 22.9%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9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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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신한국당, DJ 비자금 670억 조성했다 주장
http://imnews.imbc.c[...]
MBC
1997-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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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15대 대통령 선거(Ⅱ) - 역대 대통령선거 캠페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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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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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총재, 89년 1월 200억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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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199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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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치인 호주머니는 돈의 정거장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신문
199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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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비자금 전쟁 여야 표정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10-12
[270]
뉴스
경찰, 여야 지구당 경비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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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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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총재, 관훈 토론회에서 670억 비자금은 사실무근
http://imnews.imbc.c[...]
MBC
199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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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신한국당, 김대중 비자금 입출금 계좌와 수표 일련번호 공개
http://imnews.imbc.c[...]
MBC
1997-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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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신한국당 김대중 총재 검찰에 고발, 국민회의는 맞고발 준비
http://imnews.imbc.c[...]
MBC
199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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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자금 수사 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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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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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검찰,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자금 수사 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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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1997-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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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회담 결과에 만족
http://imnews.imbc.c[...]
MBC
199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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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국민회의. 자민련 대선후보 단일화 서명, 김대중 야당후보로
http://imnews.imbc.c[...]
MBC
1997-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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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선택 97] 3김 청산 내건 한나라당 공식 출범
http://imnews.imbc.c[...]
MBC
199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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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통합추진회의 8명 국민회의 입당키로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9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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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대선 후보 TV토론회] IMF 책임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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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안된 정치 슬로건, 창조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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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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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정부 대북정책 한국입장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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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공동선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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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對日외교는 ‘햇볕정책’… 文, ‘98년 DJ’에게 배우라”-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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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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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서 :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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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일본국회 연설(21세기의 새로운 한·일 동반자 관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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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현명한 분노 표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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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 "日 올바른 역사인식 가져야"(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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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동티모르 대통령과 환담…묘소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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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정부 최대 경상흑자…경제성적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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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5년 정책 평가해 보니] 환란 극복·정보화 구축 'B+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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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성장 강조한 인간적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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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조직 대대적 개편 金(김)당선자 部處(부처)통·폐합등 준비착수…출범6개월 내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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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명칭 '국가정보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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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周永명예회장 오늘 소몰고 訪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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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誌, 아시아의 영향력 큰 인물 50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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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강국 도약 속 벤처 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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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企,정권따라 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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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다음 등 "DJ께 많은 빚 졌다", 국내 인터넷 관련 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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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前대통령서거]벤처協 "우리를 키워주셨던 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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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안테나> 연평해전 자축에 북한 불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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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23 多事争論 パックオ(変え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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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T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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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의 진단>왜 색깔 공방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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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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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송금] "현대건설도 1억5천만弗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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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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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헌 회장 돌연 투신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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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씨 징역3년 법정구속 현대비자금 150억은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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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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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대북 송금은 후회 안한다"-FT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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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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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美와 대화 진전없으면 곧 核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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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3-07-28
[319]
뉴스
임동원ㆍ신건씨 전격구속 파장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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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200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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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은성 전 차장 "'DJ 숨겨진 딸' 도청했다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06-03-14
[321]
뉴스
'도청사건' 임동원·신건 前 국정원장 '집행유예 4년' 선고
http://www.nocutnews[...]
노컷뉴스
200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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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석탄비리' 김홍업씨 징역 10월 선고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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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weekly chosun] 최규선 게이트는
http://news.chosun.c[...]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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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아들들 비리, 대국민 사과 성명
http://www.kdjhall.c[...]
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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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최규선 게이트' 주인공 다시 수사 선상 올라 검찰, 유아이에너지 압수수색..최씨 출국금지 '이라크 천연가스 발견' 허위공시 혐의도
http://www.newstomat[...]
뉴스토마토
201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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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들 관련 물의 사과, 국정에 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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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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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통령 월드컵 폐막식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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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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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부 긴급 대응>-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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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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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남북교전] 金대통령 "단호·의연하게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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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0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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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해교전 전사자 훈장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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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00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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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해교전 순국장병 조문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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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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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부상병 위로하는 김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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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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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대통령 6·29서해교전 유가족 12명 청와대 초청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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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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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연평해전 보상금 3천만원?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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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데일리
201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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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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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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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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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군경 이중배상 금지규정 삭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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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200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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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해교전 유가족에 성금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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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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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 "매우 심각한 상황" , YS "사필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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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0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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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박정희의 관계…저항과 탄압의 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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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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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 유럽순방 마치고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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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0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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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치권 "DJ를 우리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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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 "우리당 대통합때 사과할 건 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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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법사위 국감, 'DJ 비자금추정 100억CD' 유무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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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0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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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대검 "주성영 의원 공개 100억CD, DJ와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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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200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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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이대로 가면 MB도 국민도 불행해질 것 행동하는 양심 돼야... 방관하는 자, 악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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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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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측 "<중앙> 문창극 칼럼,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오늘자 <중앙일보>에 반론 게재... "비자금 조성 의혹 보도들 모두 허위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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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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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린턴의 방북 뒤에는 'DJ'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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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스앤뉴스
200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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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美여기자 석방 DJ가 도와" 그레그 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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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스앤뉴스
200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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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린턴, 이희호 여사와 통화.."DJ, 미국 정책 바꿀 것 조언"
http://www.vop.co.kr[...]
민중의소리
200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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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세상 떠났지만 잊혀지지 않을 저명인사
http://news.nate.com[...]
노컷뉴스
20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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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 가장 큰 걱정거리는 MB정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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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2011-08-00
[353]
뉴스
DJ 유지 잇자” 110명 평화선언, 日하루키 교수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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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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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김대중 전 대통령 폐렴 증세…중환자실로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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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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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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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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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李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문병
https://news.naver.c[...]
뉴시스
200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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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도 DJ 문병 "틀림없이 완쾌될 것"
http://sisa-issue.in[...]
아이뉴스24
20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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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 쾌유 닷새 동안 800여명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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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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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2보)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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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베네딕토 16세,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애도
http://media.daum.ne[...]
뉴시스
200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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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린턴 부부 “김 前대통령 그리울 것”
http://media.daum.ne[...]
헤럴드경제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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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그레그 "DJ, 용감하고 위대했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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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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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이니 전 대사 "DJ삶은 민주화.인권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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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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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는 한국 민주주의·경제발전의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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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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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英 여왕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
http://media.daum.ne[...]
연합뉴스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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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 정치인들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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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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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 前대통령 서거, 세계 지도자들 반응>
http://news.nate.com[...]
연합뉴스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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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 前대통령 서거 세계 언론 반응>
http://news.nate.com[...]
연합뉴스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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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경제계 "DJ, 환란위기 극복에 큰 기여"
http://www.fnnews.co[...]
파이낸셜뉴스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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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를 '형님'이라 부른 김동길…잇단 추모의 변 눈길
http://news.nate.com[...]
국민일보
2009-08-22
[372]
뉴스
일본 정계·학계 200여명 ‘DJ추도회’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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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8.19(水) 21:00 박지원 비서실장 브리핑 내용
http://www.cbs.co.kr[...]
노컷뉴스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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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장지(葬地), 왜 서울현충원으로 정했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8-19
[375]
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 묘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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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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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의 또 다른 이름 ‘동교동’
https://m.khan.co.kr[...]
경향신문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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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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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인용
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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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김삼웅의 후광(後廣) 김대중 평전
http://blog.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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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92년 김영삼 후보에 대선자금 3000억 줬다” 노태우, 뒤늦은 ‘과거사’ 고백
http://media.daum.ne[...]
한겨레
20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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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굿바이 DJ
http://www.ytn.co.kr[...]
YTN
200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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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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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B "한국,금융위기 극복 비결은" WSJ에 기고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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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B, 국제사회에 김대중 정부 업적 자랑
http://www.breaknews[...]
브레이크뉴스
200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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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 리더십 극찬한 중앙일보
http://breaknews.com[...]
브레이크뉴스
2008-11-03
[386]
뉴스
MB정부, 물가에 발목잡혀…성장률은 기대수준 못미쳐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2-05-01
[387]
뉴스
MB, 두차례 글로벌위기 넘겼지만 가계·공공부채는 늘어 '경제 부담'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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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IMF극복 위한 공적자금 투입은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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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일보
200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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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된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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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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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공적자금에 대한 무지, 오해,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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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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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지원 발표
http://imnews.imbc.c[...]
mbc뉴스
199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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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와 박정희, 납치사건ㆍ가택연금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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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 대통령 시절 가장 행복했다
http://www.ytn.co.kr[...]
YTN
20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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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고맙다 김대중'이라고 말하라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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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대통령되면 수류탄 들겠다"... 군은 왜 DJ 미워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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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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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 전 대통령 쾌유 메시지 세계에서 답지
http://breaknews.com[...]
브레이크뉴스
200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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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특파원 리포트]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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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0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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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퇴임 김대중 대통령과 독일인들의 평가
http://www.hani.co.k[...]
한겨레
200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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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DJ에 경탄했던 세계적 지도자와 석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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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null
[400]
뉴스
김대중 前대통령 '트랜스포머' 11인에 꼽혀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9-09-23
[401]
뉴스
폭로사이트 위키리크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평가자료 공개
https://news.naver.c[...]
서울신문
2011-05-01
[402]
뉴스
특검, 5억달러 정상회담 대가 결론
https://news.naver.c[...]
YTN
200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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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null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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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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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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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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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침몰원인, 어떤 경우든 단호히 대응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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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null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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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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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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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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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뉴스
[제복이 존경받는 사회]제2연평해전 6인의 용사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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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10-05-24
[412]
뉴스
총리실 영결식 불참비판에 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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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통령 월드컵 폐막식 참석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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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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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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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뉴스
일본,한일 어업협정 일방 파기 선언-정부 강력 대응
http://imnews.imbc.c[...]
MBC
199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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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韓-日 새 어업협정 타결
http://d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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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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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한일 어업협정, 그 치명적인 실수
http://h21.hani.co.k[...]
한겨레21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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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성호 중앙大교수, 중간수역제도 폐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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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매일
200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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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데스크 시각> 현명한 분노 표출법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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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국가 기본입장의 재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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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l
null
[421]
뉴스
日 '새 어업협정 독도 제외'제의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97-10-22
[422]
뉴스
독도접안시설 정부,日(일)에 강력대응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9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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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前 해수부장관 "新한일어업협정 수정, 실효성 없어"
http://www.cbs.co.kr[...]
노컷뉴스
200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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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정희 정권 "독도도 사실상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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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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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민주당 3인 자민련 입당]'의원 꿔주기' 쇼크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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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워싱턴 저널] 한국의 '의원 꿔주기'
https://news.naver.c[...]
한국경제
200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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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장재식 자민련 이적] 자민련 교섭단체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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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0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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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어경택칼럼]국민은 세 번 속았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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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패밀리=비리종합판 악순환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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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엽기국회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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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12월 실업률 3%돌파 65만8000여명, 1998년 1월 31일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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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곳 없는 실직자들, 노숙자 실태 취재 1998년 3월 30일 mbc뉴스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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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구조 조정 요구, 예상보다 ''가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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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살리기 국민대통합 총력 김대중당선자, 1998년 1월 1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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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률 사상 최악 6.9%로 15년만에 최고 1998년 6월 24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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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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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대동 국민 동남 주택 동화 신한 경기 한미 충청 하나 퇴출—인수銀(은) 확정 오늘새벽 업무장악, 1998년 6월 29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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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98-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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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교육공무원 제외, 공무원 2년내 5만명 감축 1998년 1월 30일 mbc뉴스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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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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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대책 實效(실효)없다 1999.3.5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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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률은 떨어졌다지만 1999.11.25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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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김대중 전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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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은행 떠맡은 국민등 5개은행에 공적자금 9조 6,747억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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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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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일은행 미국 뉴 브리지 GE 캐피털에 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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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뉴스데스크
199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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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설상가상'지역경제 휘청 지방은행 퇴출로 기업들 큰타격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8-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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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국세청, 뉴브리지캐피탈 세무조사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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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아이디' 전신 '패스21' 어떤 회사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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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롬기술 오대표, 각종 탈법으로 출국금지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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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코스닥 60선 붕괴 사상 최저치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200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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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진승현 불법대출사건 이후 리젠트종금 최종 부도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200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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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올해 증권시장, 우울한 폐장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200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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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재경부·금감위·금감원 카드대란 '합작'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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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미·일 3국인의 삶을 산 최기일 박사 자서전: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 나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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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나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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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3국인의 삶을 산 최기일 박사 자서전: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 나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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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가장 성공한 지도자는 진시황" 金(김)대통령 평가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9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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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중국 진시황은 전형적 독재자"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9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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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중국 진시황은 전형적 독재자
http://www.munhw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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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의 진단>왜 색깔 공방 인가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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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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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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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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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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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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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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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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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푸대접을막자 新民,光州 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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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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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대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http://www.sdjs.co.k[...]
계간 시대정신
2007
[465]
뉴스
새 정치의 열망, 부동산 넘지 못했고 세대만 가르다.
http://www.mediaus.c[...]
미디어스
2012-12-28
[466]
뉴스
[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49> '2단계투쟁론'에 따라 김대중의 양보 촉구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0-06-20
[467]
서적
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후마니타스
2009
[468]
뉴스인용
[분수대] 흑색선전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0-06-01
[469]
뉴스
초원복집 "안 좋은 일로 회자돼 유감"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7-30
[470]
뉴스
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2-12-05
[471]
뉴스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2-12-05
[472]
뉴스
아버지 김대중 전대통령 호적에"…DJ '숨겨진 딸' 방송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5-04-20
[473]
뉴스
< People in the News > "DJ 가 내 아버지라고 생각 안해"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6-03-16
[474]
뉴스
DJ쪽 "숨겨진 딸, 사실과 달라"
https://news.naver.c[...]
한겨레
2005-04-21
[475]
뉴스
정치권 'DJ딸·국정원개입 논란' 반응
http://www.hani.co.k[...]
한겨레
2005-04-20
[476]
뉴스
여성동아 - 방송에서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 주장한 김정아씨
https://woman.donga.[...]
여성동아
[477]
뉴스
SBS 뉴스추적 328회 - 나는 DJ의 딸입니다, 진승현 게이트와 국정원 특수사업의 실체
https://programs.sbs[...]
SBS
[478]
뉴스
DJ 평전에 쓰려했던 '숨겨놓은 딸' 이야기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479]
뉴스
DJ 시절 4대 게이트 모두 도청?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480]
뉴스
김은성 前국정원 차장 항소심서도 실형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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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481]
뉴스
김은성 전 국정원차장 징역 2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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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482]
블로그
김삼웅의 김대중 평전 221회 노태우 돈 20억원 수수 도덕성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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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
간행물
[484]
뉴스
個人行事간주,政治發言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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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0-05-09
[485]
간행물
生前의 유일한 인터뷰 -「金大中 출생 비밀 10년 추적자」孫昌植씨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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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5-01
[486]
뉴스
'한길소식'발간 DJ비방 咸允植씨 소환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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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1997-12-08
[487]
뉴스
김대중, 그는 金大中인가? 尹大中인가? 諸葛(제갈)大中인가?
http://usinsideworld[...]
인사이드월드
2009-10-12
[488]
뉴스
DJ 노벨상 수상 막전막후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3-03-26
[489]
뉴스
한 "자진 반납해야" 靑 "명예걸고 대응"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2-10-10
[490]
뉴스
세계가 개탄하는 보수집단의 도넘은 노벨상 모독
http://breaknews.com[...]
브레이크뉴스
2008-05-07
[491]
뉴스
노벨상 시비 지나치다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2-12-13
[492]
뉴스
한국의 비참
https://news.naver.c[...]
문화일보
2002-10-15
[493]
뉴스
안기부 불법 도·감청 폭로 김기삼 씨 정치적 망명 허용
http://www.ytn.co.kr[...]
YTN
2008-04-17
[494]
웹인용
김대중과 대한민국에 대해 말한다:전직 국정원직원의 양심선언
https://web.archive.[...]
2010-09-21
[495]
뉴스
김기삼씨, 김대중 전대통령 노벨상 수상을 위한 '공작' 주장
https://news.naver.c[...]
뉴시스
2008-05-04
[496]
뉴스
정정보도문
http://www.ilyoseoul[...]
일요서울
2009-03-23
[497]
뉴스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 국정원 극비문서 '공개'
http://www.ilyoseoul[...]
일요서울
2010-09-13
[498]
뉴스
김대통령과 노벨상 후보 15번만에 영광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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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노벨평화상의 나라 노르웨이 '추모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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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9-08-19
[500]
뉴스
노벨상위원회, 김대중 대통령 평화상 로비설 일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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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10
[501]
뉴스
DJ '노벨상 로비설'은 무지의 소치외부로비 있을 땐 해당자 제외해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2-10
[502]
뉴스
노벨상 로비 가능한가?
http://news.kbs.co.k[...]
KBS
[503]
뉴스
한국인 노벨상 후보, 고은 외 여성정치인 1명 더 있다
https://news.naver.c[...]
조선일보
2011-02
[504]
뉴스
DJ는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평화상 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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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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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교수·연예인등의 허위학력에 열올리는 언론 前대통령 학력날조엔 왜 눈감나?
한국논단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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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김대중 대통령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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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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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김영삼과 김대중
신동아
198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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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金大中,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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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김대중은 학력 위조를 안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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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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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학력조작의 원조=김대중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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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5
[511]
뉴스
金大中총재 TV토크쇼 출연 이모저모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7-08-05
[512]
뉴스
[97대선 제2차 TV 합동 토론회] 병역 공방 치열
http://imnews.imbc.c[...]
MBC
1997-12-07
[513]
뉴스
국민회의 金大中총재 병역의혹 반박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7-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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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아태평화포럼
아태평화재단
1997-08
[515]
뉴스
국민회의 金총재 사상시비 반박자료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7-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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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J 복무 해상방위대 실재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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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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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김대중 목포해상방위대 복무 관련 민원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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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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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英国人記者が見た連合国戦勝史観の虚妄
祥伝社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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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김대중 대통령의 승용차와 충돌한 트럭 운전기사 권중억씨의 27년간 숨어지내는 인생 "대통령님, 오해를 푸십시오"
월간조선
1998-09
[520]
간행물
1盧3金의 약점
월간조선
1985-11
[521]
뉴스
金大中씨宅 마당에 私製爆發物터져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1-01-28
[522]
뉴스
爆發物사건 金大中후보 조카(15세) 拘束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1-02-11
[523]
뉴스
金大中후보宅 爆發物사건 金군 自白 번복한듯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71-02-12
[524]
뉴스
金弘準군 適否審서 釋放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71-02-15
[525]
뉴스
金大中후보宅 爆發物사건 로스만스 담배갑 發見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71-02-16
[526]
뉴스
金候補 光州유세 士兵服務 2年으로
http://dna.naver.com[...]
매일경제
1971-04-24
[527]
뉴스인용
''원조교제'' DJ처남 이상호씨 집유 선고
https://n.news.naver[...]
네이버 뉴스
2004-02-17
[528]
영화
[529]
인물
[530]
인물
[531]
인물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한국교회의 갈 길을 묻다’
‘소년공 출신 대통령’은 노동에 진심일 수밖에 없다
김정은 뒤로 다가간 박지원 "위원장님!" 불렀더니…
교육감 선거 앞두고 ‘DJ’ 이름 필요했나···석연찮은 마라톤대회 통합
비전향 장기수 송환 또 보고 싶다 [뉴스룸에서]
김동연 경기지사 “가족 삶 무너진다…간병의 ‘국가적 책임’ 강화해야”
당신의 종교는 어디에 해당됩니까
조국혁신당의 ‘반극우연대’, 민주당은 화답할까
‘중국 전승절 참석’ 박지원 “김정은은 리설주·김여정·현송월이 수행 예측”
박수현 "검찰개혁, 단일안 만들되 이견시 대통령 결단 있을 수도"
이 대통령, 미국 서재필기념관 방문···DJ 이후 26년 만
이 대통령, 필리조선소 방문하며 순방 마무리…"미래형 포괄적 전략동맹"
광주 ‘전두환 비석’ 밟은 조국 “윤석열 운명도 이렇게”
조국, 광주서 전두환 표지석 밟으며 "윤 운명도 이럴 것 확신"
박지원 “이 대통령 ‘피스 메이커’ 언급은 신의 한수”
내란범 재산 몰수해 피해자 보상해야 [왜냐면]
이 대통령, 워싱턴 도착…오늘 밤 '운명의 한미정상회담'
첫 ‘노동운동가 출신 노동부 장관’ 방용석 전 의원 별세
‘노동운동가 출신’ 첫 노동부 장관···방용석 전 의원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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