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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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난키파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로 기이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한 세력이다. 이이 나오스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마쓰다이라 요리타네 등이 주요 인물이며, 막부 독재의 지속과 개국 노선을 지향했다.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하여 안세이 대옥을 통해 승리했으나,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한 후 히토쓰바시파가 복귀하면서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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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 나오스케 - 안세이 대옥
안세이 대옥은 1858년 이이 나오스케가 서구 열강과의 통상 조약 체결 반대 세력과 쇼군 후계자 관련 세력을 탄압한 사건으로, 요시다 쇼인 등을 처벌하고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했으며, 메이지 유신의 배경이 되었다. - 이이 나오스케 - 사쿠라다문 밖의 변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1860년 3월 24일 에도에서 미토 번 낭인 등이 이이 나오스케 다이로를 암살한 사건으로, 안세이 대옥, 개항 정책, 존왕양이 운동, 쇼군 후계자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막부 권위 실추와 막말 격동기의 서막을 알렸다. - 에도 시대의 정치 - 참근교대
참근교대는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가 다이묘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에도에 머물게 한 제도로, 다이묘의 재정 약화와 도로망 발전, 에도 문화 확산 등 사회·경제적 영향을 미쳤다. - 에도 시대의 정치 - 공무합체
공무합체는 1850년대 일본에서 막부와 조정의 협력을 통해 외세에 대응하고 국론을 통일하려던 정치적 시도였으나, 존왕양이 운동과 다이묘들의 반대에 부딪혀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으로 실패했다. - 막말 -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1868년부터 18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의 급격한 개혁으로, 도쿠가와 막부 붕괴 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폐번치현, 징병제, 학제 개혁, 서구 문물 수용 등을 통해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나 사회적 혼란과 불평등을 야기하여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시기이다. - 막말 - 공무합체
공무합체는 1850년대 일본에서 막부와 조정의 협력을 통해 외세에 대응하고 국론을 통일하려던 정치적 시도였으나, 존왕양이 운동과 다이묘들의 반대에 부딪혀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으로 실패했다.
난키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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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키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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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주요 인물 | 도쿠가와 미츠사다 도쿠가와 쓰나노리 도쿠가와 요시무네 |
근거지 | 기슈번 |
관련 인물 | 하기와라 시게히데 가나오리 사부로자에몬 오오오카 다다스케 무라오카 마사타케 |
상세 내용 | |
설명 | 난키파는 에도 막부 중기에 기슈번을 기반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임. |
배경 | 도쿠가와 미츠사다와 도쿠가와 쓰나노리 시대에 기슈번은 막부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됨. |
요시무네의 등용 |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으로 임명되면서 난키파는 막부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됨. |
주요 정책 | 쇼군의 권력 강화 재정 재건 인재 등용 |
영향력 | 난키파는 교호의 개혁을 주도하며 막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침. |
2. 주요 인물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여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때 기이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한 세력이 난키파이다. 난키파는 혈통을 중시하는 보수파로, "조법 제일"이라는 명분으로 요시토미를 지지했다. 요시토미는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동생의 아들로, 이에사다와는 사촌 관계였다.
이에사다는 히토쓰바시파가 '연장하고 영명한 쇼군'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자신과 나이가 가까운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보다는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오오쿠는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검소하고 여색을 멀리하여 인기가 없었던 반면, 도쿠가와 요시토미는 미소년이라 인기가 많아 난키파를 지지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2. 1. 이이 나오스케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타네 등 유마즈메의 다이묘와 로주마쓰다이라 타다카타, 기슈 도쿠가와 가문 가로미즈노 타다오, 오소바구닌히라오카 미치히로・야쿠시지 모토자네, 오오쿠 등이 난키파를 지지했다. 이들은 국내 정책에서 막부 독재의 지속, 외교 정책에서는 개국 노선의 지속을 지향했다.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후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한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했지만, 이이 나오스케가 타이로가 됨으로써 이를 물리치고,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쇼군 후계자가 되었다.[2]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사후 도쿠가와 요시토미는 14대 쇼군 이에모치가 되었다.[2] 이에사다의 사망 전후에 이이가 히토쓰바시파의 제후와 지사를 탄압한 것이 이른바 안세이 대옥이다.[2]
그러나, 나오스케가 안세이 대옥의 보복으로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암살당하자 히토쓰바시파가 복귀, 난키파는 처벌받았다. 타다오와 모토자네는 강제 은거당했으며(타다카타는 그 이전에 나오스케와 대립, 근신당해 나오스케보다 먼저 사망), 나오스케의 차남 나오노리는 10만 석 감봉,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쇼군 후견직, 정사총재직으로 복귀했다.[2] 슌가쿠의 동생이자 이에모치의 후견인인 다야스 요리노리가 관위를 강등당하고 은거한 것도 그가 난키파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2]
2. 2.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한 난키파에는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속해 있었다. 난키파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문제에서 기이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했으며, 국내 정책으로는 막부 독재를 지속하고 외교 정책으로는 개국 노선을 지속하려 했다.2. 3. 마쓰다이라 요리타네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타네 등 유마즈메의 다이묘와 로주 마쓰다이라 다다카타, 기슈 도쿠가와 가문 가로 미즈노 다다오, 오소바구닌 히라오카 미치히로・야쿠시지 모토자네, 오오쿠 등이 난키파를 지지했다.2. 4. 마쓰다이라 타다카타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하는 난키파에는 로주 마쓰다이라 타다카타가 있었다.[1] 그는 막부 독재와 개국 노선을 지속하려 했다.[1]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암살당하기 전, 마쓰다이라 타다카타는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하다 근신 처분을 받고 먼저 사망했다.[1]2. 5. 미즈노 타다오
기슈 도쿠가와 가의 가로로서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쇼군으로 만들기 위해 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2. 6. 히라오카 미치히로
히라오카 미치히로는 오소바구닌으로서,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한 난키파에 속하여 개국 노선의 지속을 지향했다.2. 7. 야쿠시지 모토자네
야쿠시지 모토자네는 오소바구닌으로서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하는 난키파에 속했다. 난키파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문제에서 기이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했으며, 개국 노선을 지속하고자 했다. 이들은 히토쓰바시 요시노부(후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한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했다.이이 나오스케가 타이로가 되면서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쇼군 후계자가 되었고, 이에사다 사후 14대 쇼군 이에모치가 되었다.[2]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암살당한 후 히토쓰바시파가 복귀하면서 난키파는 처벌받았고, 야쿠시지 모토자네는 강제 은거당했다.[2]
3. 난키파의 주장과 활동
난키파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문제로 발생한 파벌로, 기이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후의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했다. 이들은 혈통을 중시하며 막부 독재와 개국 노선을 지속하려 했다.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타네 등 유력 다이묘들과 막부 관료, 오오쿠 등이 난키파를 지지했다. 이들은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옹립한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했다.
오오쿠에서는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검소하고 여색을 밝히지 않아 인기가 없었던 반면, 도쿠가와 요시토미는 미소년이라 인기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사다 역시 히토쓰바시파에 불만을 품고 난키파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이이 나오스케가 타이로에 취임하면서 난키파가 승리하여 요시토미가 쇼군 후계자가 되었고, 안세이 대옥을 통해 히토쓰바시파를 탄압했다. 그러나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한 후 히토쓰바시파가 복권되고 난키파는 몰락했다.
3. 1. 도쿠가와 요시토미 옹립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여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사다의 가까운 친척인 기이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하는 세력이 난키파이다.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타네 등 유마즈메의 다이묘와 로주마쓰다이라 타다카타, 기슈 도쿠가와 가문 가로미즈노 타다오, 오소바구닌히라오카 미치히로・야쿠시지 모토자네, 오오쿠 등이 지지했다. 이들은 국내 정책으로는 막부 독재를 지속하고, 외교 정책으로는 개국 노선을 지속하는 것을 지향했다.
9대 도쿠가와 이에시게・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같이 "능력보다 혈통 우선"의 선정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난키파의 혈통 중시론은 보수파에게 호응을 얻었다. 요시토미는 이에사다와 사촌이었지만, 요시노부는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혈연이 연결되는 먼 친척이었다.
이에사다 자신도 히토쓰바시파가 요시노부를 옹립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난키파에 기울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후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한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했지만, 이이 나오스케가 타이로가 되면서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쇼군 후계자가 되었다. 이에사다 사후 요시토미는 14대 쇼군 이에모치가 되었다. 이에사다 사망 전후에 이이가 히토쓰바시파를 탄압한 것이 안세이 대옥이다.
그러나,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암살당하자 히토쓰바시파가 복귀하여 난키파는 처벌받았다. 타다오와 모토자네는 강제 은거당했고, 나오스케의 차남 나오노리는 10만 석 감봉,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쇼군 후견직, 정사총재직으로 복귀했다. 슌가쿠의 동생이자 이에모치의 후견인인 다야스 요리노리가 관위를 강등당하고 은거한 것도 난키파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3. 2. 국내 정책: 막부 독재 지속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했고, 당시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수나 후계자 탄생은 절망적으로 여겨졌다. 자연스럽게 후계자 문제가 발발했지만, 이에사다의 근친임을 중시하여 기이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한 세력이 난키파이다.[1]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타네 등 유마즈메의 다이묘와 로주마쓰다이라 타다카타, 기슈 도쿠가와 가문 가로미즈노 타다오, 오소바구닌히라오카 미치히로・야쿠시지 모토자네, 오오쿠 등이 지지했다. 국내 정책에서는 막부 독재의 지속을 지향했다.[1]
9대 도쿠가와 이에시게・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같이 "능력보다 혈통 우선"의 선정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조법 제일"로 하는 보수파에게 혈통 중시론은 호응을 얻었다. 요시토미의 아버지는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동생으로 이에사다와 요시토미는 사촌이지만, 요시노부의 경우에는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이에사다와 혈연이 연결되지 않았고, 평민이라면 타인과 다름없는 상태였다.[1]
3. 3. 외교 정책: 개국 노선 지속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한 난키파는 국내 정책에서 막부 독재를 지속하고, 외교 정책에서는 개국 노선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히토쓰바시파에도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 개국을 지향하는 다이묘가 많았다. 난키파는 히토쓰바시 요시노부(후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한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했다.4. 히토쓰바시파와의 대립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옹립한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했다. 난키파는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이에사다와 가까운 친척인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지지했으며, 개국 노선을 지지했다.
이이 나오스케가 타이로에 취임하면서 요시토미가 쇼군 후계자가 되었고, 히토쓰바시파를 탄압하기 위해 안세이 대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암살당하면서 히토쓰바시파가 복귀하고 난키파는 처벌을 받았다. 주요 인물들은 강제 은거, 영지 삭감 등의 처분을 받았고, 히토쓰바시파의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막부 요직에 복귀했다.
4. 1. 안세이 대옥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여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기이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한 세력이 난키파이다.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타네 등 유마즈메의 다이묘와 로주마쓰다이라 타다카타, 기슈 도쿠가와 가문 가로미즈노 타다오, 오소바구닌히라오카 미치히로・야쿠시지 모토자네, 오오쿠 등이 지지했다. 이들은 막부 독재와 개국 노선 유지를 지향했다.
9대 도쿠가와 이에시게・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같이 "능력보다 혈통 우선"의 선정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조법 제일"로 하는 보수파에게 혈통 중시론은 호응을 얻었다. 요시토미의 아버지는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동생으로 이에사다와 요시토미는 사촌이었지만, 요시노부의 경우에는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이에사다와 혈연이 연결되지 않았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후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한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했지만, 이이 나오스케가 타이로가 되면서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쇼군 후계자가 되었다. 이에사다 사후 14대 쇼군 이에모치가 되었다. 이에사다의 사망 전후에 이이가 히토쓰바시파의 제후와 지사를 탄압한 것이 안세이 대옥이다.
그러나, 나오스케가 안세이 대옥의 보복으로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암살당하자 히토쓰바시파가 복귀, 난키파는 처벌받았다. 타다오와 모토자네는 강제 은거당했으며, 나오스케의 차남 나오노리는 10만 석 감봉,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쇼군 후견직, 정사총재직으로 복귀했다.
5. 몰락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문제로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하는 난키파는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후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한 히토쓰바시파와 대립했다. 이이 나오스케가 타이로가 되면서 히토쓰바시파를 물리치고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쇼군 후계자가 되어, 이에사다의 사후 14대 쇼군 이에모치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에사다의 사망 전후에 이이가 히토쓰바시파 제후와 지사를 탄압한 것이 안세이 대옥이다.
그러나, 나오스케가 안세이 대옥의 보복으로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암살당하자 히토쓰바시파가 복귀, 난키파는 처벌을 받았다.
5. 1. 사쿠라다몬 밖의 변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한 난키파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히토쓰바시파를 탄압했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미토 번의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5. 2. 히토쓰바시파의 복귀와 난키파 처벌
이이 나오스케가 타이로에 취임하면서 히토쓰바시파를 제압하고, 도쿠가와 요시토미(이후의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쇼군 후계자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사다 사망 전후, 이이 나오스케는 히토쓰바시파 제후와 지사들을 탄압했는데, 이를 안세이 대옥이라 한다.그러나 나오스케가 안세이 대옥에 대한 보복으로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암살당하면서 히토쓰바시파가 복권되고 난키파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미즈노 타다오와 야쿠시지 모토자네는 강제 은거당했고, 마쓰다이라 타다카타는 그 이전에 나오스케와 대립하다 근신 처분을 받아 나오스케보다 먼저 사망했다. 나오스케의 차남 이이 나오노리는 10만 석 감봉 조치되었으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각각 쇼군 후견직과 정사총재직에 복귀했다. 슌가쿠의 동생이자 이에모치의 후견인이었던 도쿠가와 요리노리가 관위를 강등당하고 은거한 것 역시 그가 난키파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참조
[1]
서적
西郷隆盛
朝日文庫
[2]
서적
幕末の将軍
講談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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