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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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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종해는 1922년 황해도 안악면 출생으로, 1950년 경위에 임용되어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 지서장으로 근무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12명의 경찰과 대한청년단 단원 3명과 함께 춘천으로 진입하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내평지서에서 전투를 벌였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국군이 춘천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고, 춘천지구 전투 승리의 초석을 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경감으로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또한, 국가보훈처는 6.25전쟁영웅으로, 전쟁기념사업회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하여 그의 공훈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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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노종해
군 경력
임관1950년 경위 임용
근무1950년 강원 춘천경찰서 내평지서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춘천지구전투 내평지서 전투
최종 계급경감
서훈
서훈 내역2014년 충무무공훈장

2. 생애

노종해는 1922년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났다. 1950년 경위로 임용되어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 지서장으로 근무했다.[2] 6.25 전쟁 발발 직후, 그는 내평지서 전투에서 소수의 경찰 병력을 이끌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그의 희생은 춘천지구 전투에서 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1922년 1월 14일 황해도 안악면에서 태어났다. 1950년 2월 경위에 임용되어 강원도 춘성군[2] 북산면 내평 지서장으로 근무했다.

2. 2. 내평지서 전투

내평지서 전투에 대한 첫 기록은 1952년 강원경찰국이 발간한 "영광의 서곡"이라는 책자에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6.25 전쟁 당시 강원 경찰의 주요 임무는 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기 위해 적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종해 경위는 경찰 12명과 대한청년단 단원 3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춘천 시내로 진입하려는 북한군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북한군은 춘천을 빠르게 점령한 뒤 가평, 수원 방면으로 진출하여 수도권에 집중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노종해 경위가 방어하던 내평지서는 내평리 마을 한복판의 46번 도로변 약간 높은 곳에 위치했으며, 사실상 빈약한 참호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춘천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통신마저 두절되고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노종해 경위와 대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상대로 격렬하게 항전하자, 소규모 경찰 지서로 얕보았던 북한군은 결국 82mm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내평지서는 완전히 폐허가 된 뒤에야 점령당했다.

이 전투에서 노종해 지서장을 포함한 12명이 전사하는 큰 희생이 있었지만, 이들의 목숨을 건 항전은 약 3천 명에 달하는 북한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지연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덕분에 국군 6사단은 춘천 남쪽에 저지선을 구축하고 소양강 방어선을 준비할 귀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춘천지구 전투 승리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으며, 춘천-홍천-수원으로 이어지는 북한군의 남하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노종해 경감의 6.25 전쟁 초기 전투 공적을 인정하여 경감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2014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3] 같은 해 국가보훈처는 국가 수호에 대한 그의 기여와 공훈을 기리기 위해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2019년 5월에는 전쟁기념사업회가 대한민국 전쟁기념관에서 그를 이달의 호국인물로 지정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매년 춘천대첩 전승기념 행사가 열렸지만, 춘천 전투 승리의 중요한 발판이었던 내평지서 전투는 오랫동안 잊힌 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내평지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 소양강댐 건설로 물에 잠기면서, 그곳에서 싸우다 숨진 전사자들 역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이후 내평 전투 전사자를 비롯한 6.25 전쟁 전사자들의 희생과 공헌을 다시 기억하고 추모하는 노력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강원경찰 명예의 전당, 강원경찰충혼탑, 참전경찰 기념비 등이 세워졌다.

4. 평가

노종해 경감의 내평지서 전투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6.25 전쟁 초기 춘천대첩 승리의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전투로 평가된다. 그의 용기와 헌신은 대한민국을 지킨 호국정신의 귀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춘천대첩의 성공에 기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내평지서 전투와 전사자들은 교전 지역이 소양강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오랫동안 잊힌 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후 그의 공적을 재평가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노종해를 경감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2014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3] 같은 해 국가보훈처는 노종해 경감을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고, 2019년에는 전쟁기념사업회전쟁기념관의 '5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지정하였다. 최근에는 내평전투 전사자를 포함한 6.25 전사자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강원경찰 명예의 전당, 강원경찰충혼탑, 참전경찰 기념비 등이 건립되었다.

참조

[1] 문서 춘천으로 가는 46번 도로 내평리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내평의 소규모 경찰지서의 장
[2] 문서 현재의 춘천
[3] 문서 노종해 경감과 그의 부하들의 유해를 북한군은 전부 한 웅덩이에 묻어 놓았는데, 노종해 경위의 부인이 다시 돌아와 유해를 수습하여 인근 고등학교의 뒷산에 모셔두었다가, 다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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