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차일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전쟁 참전 군인, 경찰이다. 1930년대 초 홍성공업전수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중국에서 김지강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친일 경찰 처단에 참여했으며, 6.25 전쟁에 참전하여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 특히 문화재 보호에도 힘썼으며, 1958년 사망 후 훈장 추서 및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경찰공무원 사망자 - 노종해
6.25 전쟁 당시 춘성군 북산면 내평지서장이었던 노종해는 북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여 춘천 진격을 지연시킨 공로로 경감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전쟁영웅 및 호국인물로 기려지고 있다. - 군정기 - 이범승
이범승은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교토 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일제강점기에는 도서관 설립 운동을 펼쳤으며 해방 후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과 참의원을 지냈으나, 2002년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군정기 - 김대우 (1900년)
김대우는 일제강점기 관료이며 해방 및 정부 수립 이후의 활동 기록은 미상이다. -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격대원 - 김좌진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한국독립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다. -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격대원 - 김학철 (1916년)
김학철은 1916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으로, 항일 투쟁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이며, 중국과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문학 활동을 펼쳤다.
차일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차일혁 |
현지어 표기 | 車一赫 |
출생일 | 1920년 8월 20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성계리 |
사망일 | 1958년 8월 9일 (38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공주읍 금강 |
본관 | 연안 |
별명 | 차갑수(호적상 이름) 차용철(족보상 이름) 차철 |
배우자 | 진복희 |
자녀 | 차길진 |
손자 | 차현석 |
손녀 | 차소영 |
![]() | |
군사 경력 | |
복무 | 조선의용대 반공유격대 전투경찰 |
복무 기간 | 1938년 ~ 1943년(조선의용대) 1948년 ~ 1950년(반공유격대) 1950년 ~ 1953년(전투경찰) |
최종 계급 | 총경 |
근무 | 전북경찰국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충주경찰서 서장 진해경찰서 서장 충남경찰국 경비과장 공주경찰서 서장 |
지휘 | 청년방위대 옹골연 유격대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중일 전쟁 한국 전쟁 |
서훈 | |
서훈 내역 | 화랑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5) 대통령수장 종군기장(2) 공비토벌기장(2) 경무관 추서 보관문화훈장 추서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충주직업소년학원 설립 |
학력 | |
학력 | 홍성공업전수학교 황푸군관학교 |
2. 출생과 성장 배경
차일혁은 1920년 8월 20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현 김제시 금산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이 7월 2일로 알려지기도 했다.[1] 1935년, 15세에 홍성공업전수학교(현 국립한밭대학교)에 입학했다. 1936년, 홍성공업전수학교 2학년 재학 중 조선인 학생들에게 독립 의식을 가르치던 교사(혹은 일본에 욕을 한 동기생)를 붙잡아 가려는 일본 형사를 때리고 학교를 그만두면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었다.[2]
2. 1. 독립운동 투신
차일혁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도피 생활을 하다가 정읍 본가에서 형사들에게 붙잡혔으나, 압송 도중 탈주했다. 이후 전주 송광사와 대원사를 거쳐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피신했다.[3] 그곳에서 결혼한 후, 처가의 권유로 1936년 말 중국 상해의 금융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1937년, 17세의 차일혁은 중국에서 그의 스승이 될 김지강(金聖壽)을 만난다. 김지강은 경남 밀양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중국으로 건너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었다. 김지강은 차일혁에게 항일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유했고, 차일혁은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과의 연락도 끊은 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4] 차일혁은 김지강을 따라다니며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던 사람들과 교류했다. 김지강은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과 교분을 나누고, 의열단과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며, 일본군과 친일파 처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영역이 넓었다.[5]
1937년 김지강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해주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해방 후 풀려났다. 김지강이 체포된 후, 차일혁은 상해 일대에서 한국전지공작대로 활동했다.[6]
1940년, 20세가 된 차일혁은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중국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에 입학하여 7월에 졸업했다. 이곳에서 군사 지식과 전술을 배운 후, 중앙군 제1전구 32사단에서 중국 포병 장교, 정치 장교 등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42년, 22세에는 중앙군 제1전구 제32사단 포병 중대장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이후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며, 차철(車轍)과 차용철(車鏞徹)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7] 같은 해 2월, 일본군은 태항산 일대를 포위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조선의용대는 이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 일본군은 20개 사단 약 40만 명과 전차, 항공기까지 동원했다.[8]
차일혁은 조선의용대에서 모택동의 팔로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전투를 지휘했다. 일본군이 포위한 태항산 일대에서 중국 팔로군 포병사령관 무정(武亭)과 함께 전투하여 등소평을 포함한 중국 팔로군 지휘부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차일혁은 모택동식 유격전을 접하고 포병 전술을 익혔으며, 이는 훗날 빨치산 토벌 작전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9][10]
모택동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군보다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얻은 유격전으로 승리하여 중국 대륙을 차지했다. 차일혁은 이러한 모택동의 유격전 원칙을 철저히 따랐다. 이러한 경험은 지리산에 숨어있던 빨치산들의 유격전을 이해하고, 주민들을 빨치산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유격전을 역이용하여 토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빨치산에게 매수된 주민의 거짓 정보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도 차일혁은 주민에게 복수하지 않고 민심을 얻는 길을 택했다.[11]
2. 2. 조선의용대 활동
차일혁은 김지강이 체포된 후 그와 헤어져 상해 일대에서 한국전지공작대로 활동했다.[6] 1940년 2월, 20세에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중국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에 입학하고 7월에 졸업했다. 이곳에서 군사 지식과 전술을 배웠고, 졸업과 함께 중앙군 제1전구 32사단의 중국 포병장교, 정치 장교 등의 자격으로 항일전쟁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1942년, 22세에 중앙군 제1전구 제32사단 포병중대장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그 후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면서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다. 조선의용대에서 차일혁은 차철(車轍)과 차용철(車鏞徹)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7] 2월부터 일본군은 태항산 일대를 포위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조선의용대는 이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동원된 일본군의 병력은 20개 사단, 약 명이었으며 전차와 항공기까지 동원하였다.[8]
차일혁은 조선의용대에서 모택동의 팔로군과 함께 작전을 하며 전투를 지휘하였으며, 일본군이 포위한 태항산 일대를 중국 팔로군 포병사령관 무정과 함께 전투하여 등소평을 포함한 중국 팔로군 지휘부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 차일혁은 모택동식 전법인 유격전을 접하고 포병 전술을 익혔다. 차일혁의 포병 전술은 중공군 포병사령관이었던 무정으로부터 배운 것이다.[9] 포병 운용 전술은 후에 빨치산 토벌 작전에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10]
3.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광복 이후 남한은 좌우 이념 대립으로 혼란스러웠고, 친일 세력과 일부 일본 관료들은 미군정 하에서 활동했다. 일본군 사령관은 미군에게 조선인들 사이에 공산주의자와 독립 선동가들이 평화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미군은 조선총독부 출신 관리들을 거느리고 군정을 시작했다.
이 무렵 차일혁은 지강 김성수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좌익 세력에 대비하여 독립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자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차일혁은 '차리혁'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잔류 일본 관료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권총 3자루를 소지하고 다니며, 공형기와 함께 일제 경찰들을 사살했다. 특히 악명 높았던 고등경찰 사이가 시치로를 비롯해 하라다, 쓰보이 등을 저격하여 처단했다.[12] 이들의 의거로 조선총독부 핵심 잔존 세력은 처단되거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3. 1. 친일 경찰 처단
1945년 광복 이후, 차일혁은 일본 관료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했다. 그는 권총을 소지하고 다니며, 일제 경찰들을 사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악명 높은 사이가 시치로를 1945년 11월 2일 서울 원남동에서 사살했다.[12]또한, 차일혁은 동료들과 함께 악질 경찰이었던 하라다를 1945년 11월 9일 서울 저동 사거리에서, 전 총독부 상해 특파원 쓰보이를 11월 14일 백병원 앞에서 저격했다.
이들의 의거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핵심 잔존 세력인 경찰 핵심부가 처단되거나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나머지 세력도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3. 2. 전주 지역 치안 활동
차일혁은 1946년 26세에 일본 고등경찰 암살 수배를 피해 전주로 내려가, 이름을 차리혁(車利革)에서 차일혁(車一革)으로 바꾸었다. 전주에서 삼성제사공장 경비주임으로 근무하며 공장 파업을 유도하는 남로당원들과 대립하며 공장 시설을 보호했고, 노무과장으로서 회사 내 남로당 계열을 척결했다.[13][14]1947년 2월 5일 전라북도 노자(勞資)협회 이사가 되었다. 1949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예비군인 호국군 103연대 대장이 되었고, 광복군 출신 경력을 인정받아 대대장으로 특별 채용되었다. 호국군이 폐지되고 청년방위군이 조직되자, 차일혁은 전주시 중앙동에 본부를 둔 15청년방위대 총무처장에 선임되어 대원들과 훈련을 했다. 청년방위대는 시설과 장비가 부족했고, 복장도 통일되지 않은 채 목총으로 훈련을 했다.[15][16]
1950년 1월 19일 방위훈련학교 1기 고급간부후보를 졸업했다. 6.25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전북까지 빠르게 진격해 오자(7월 17일 강경 방어선, 19일 이리 함락) 국군과 청년방위대는 후퇴했다. 이때 차일혁은 현역 육군 대위로 복귀하여 제7사단에 배치되었고, 국군유격대(북한군 동향 파악 및 심리전 전개 등 목적) 편성 작전명령을 받았다.[17]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지역으로 진격하면서 전북지역 빨치산들은 회문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후방 치안을 위협했다. 차일혁은 고향인 전북을 지키기 위해 대원들을 모아 유격대를 조직, 19명의 대원들과 함께 '옹골연 유격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북한군 점령하의 전주와 임실 경각산 토굴에 숨어 지내며 인민군 보급차량을 습격하는 등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전북지역 수복 때까지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18]
9월 28일, 전북지역이 유엔군 제2사단에 의해 수복되자 차일혁은 임시로 전주시 치안대장에 임명되었다. 10월 1일 북상한 국군과 합류하여 유엔군 2사단 전주 치안대장으로 복무했으나, 유격대 활동 중 입은 팔 부상으로 제대했다. 이후 정읍경찰서(10월 26일까지) 및 고창경찰서(10월 27일~11월 27일) 수복작전에 참가했다.
3. 3. 한국전쟁 참전
1946년 26세에 일본 고등경찰 암살로 수배를 받던 중 전주로 내려가 차리혁(車利革)에서 차일혁(車一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전주에서 삼성제사공장 경비주임으로 근무하면서, 공장파업을 유도하는 남로당원들과 대립하며 공장시설을 보호하였고, 노무과장으로 회사 내에 침투한 남로당 계열을 척결하였다.[13][14]1947년 2월 5일 전라북도 노자(勞資)협회 이사가 되었다. 1949년 2월 차일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예비군인 호국 103연대 대장이 되었고, 광복군 출신 경력을 인정받아 대대장으로 특별 채용되었다. 12월에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오늘날 향토예비군과 같은 호국군이 폐지되고 청년방위군이 새롭게 조직되었는데, 차일혁은 전주시 중앙동에 본부를 둔 15청년방위대 총무처장에 선임되어 대원들과 유사시의 사태에 대비하는 훈련을 했다.[15][16]
1950년 1월 19일 방위훈련학교 1기 고급간부후보로 졸업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남한은 전쟁에 대한 사전 대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북한군은 순식간에 전북까지 밀고 내려왔다(7월 17일 강경 방어선, 19일 이리 함락). 이에 국군과 청년방위대는 후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차일혁은 현역 육군 대위로 복귀하여 새로 재편되는 제7사단에 배치됐다. 이곳에서 육군 제7사단 직속의 국군유격대(북한군 동향 파악 및 심리전 전개 등 목적)를 편성하라는 작전명령을 받았다.[17]
국군 제7사단이 재편되고 있을 때 북한군 제6사단이 충남 서해안으로 진출한 후 호남지역으로 진격했다. 전북지역의 빨치산들은 회문산에 도당사령부를 두고 산악지형으로 둘러싸인 정읍, 임실, 순창, 복흥, 쌍치 등에서 활동하며 후방치안을 위협했다.
차일혁은 고향인 전북을 사수하기 위해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 후퇴한 상황에서 차일혁을 포함한 19명의 대원들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빈약한 장비를 가지고 북한군이 점령한 전주와 임실에서 경각산에 토굴을 파고 숨어지내며 ‘옹골연 유격대’를 조직해 인민군 보급차량을 습격하는 등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북지역을 되찾을 때까지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18]
9월 28일, 전북지역이 UN군의 제2사단에 의해 수복되자 차일혁은 임시로 전주시 치안대장에 임명되었다. 10월 1일 북상한 국군과 합류하여 임시로 유엔군 2사단 전주 치안대장으로 복무하였으나 유격대 활동 과정에서 입은 한쪽 팔의 부상으로 부득이 제대하였다. 10월 26일까지 정읍경찰서 수복작전에 참가하였으며 10월 27일부터 11월 27일까지 고창경찰서 수복작전에 참가하였다.
4. 빨치산 토벌 작전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군 패잔병과 지방 공비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자, 국군과 함께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경찰대가 조직되었다. 차일혁은 전북도경(전라북도 경찰국) 제18전투경찰대대장(경감)으로 임명되어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19][20]
당시 차일혁이 상대해야 했던 빨치산은 국군 정규군 2개 군단과 맞먹는 6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전북 지역의 평야 지대와 지리산, 회문산, 내장산, 덕유산 등 산악 지대를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전을 펼쳤다. 차일혁은 빨치산 귀순자로 구성된 '수색대'를 편성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활용하여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22]
4. 1. 제18전투경찰대대장 임명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과 남한 점령 지역에서 활동하던 지방 공비들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빨치산을 조직해 유격전을 펼쳤다. 이들은 삐라를 살포하고 차량과 파출소를 습격했다. 빨치산들은 장악 지역에 '인민공화국 체제'를 모방한 통제기구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치안이 미치지 못하는 '해방구(解放區)'를 만들어 게릴라 활동의 군사기지로 이용했다. 이에 국군과 함께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경찰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전북도경(전라북도 경찰국)에서도 전투경찰대 신설을 위해 인재를 모집했고, 차일혁은 중국 항일전선 당시의 동지였던 최석용(崔錫傭) 전북지구 전투사령관 등의 권유로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군이 점령했던 전북지역으로 국군 제11사단 제13연대가 들어오고, 제18전투경찰대대가 창설되자 차일혁은 대대장이 되어 경감 직책으로 경찰에 투신했다.[19][20]1950년 12월 15일, 경상도 경찰간부학교를 졸업한 김근수, 이진찬, 조명제, 이원배 경위와 전쟁 초기 인민군과의 실전 경험이 있는 박기락, 이기린 경사 등 50명을 새로 배속받아 200여 명의 대원을 확보하고 김의택 도경국장, 김가전 전북지사, 이우식 법원장 등 지방유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18대대 창설식을 가졌다. 우희갑, 김진구 등 호국군 출신 부하들을 중대장에 임명하고 정동렬 경위를 중화기 대장에 임명하여 전투 대열을 갖추었다. 제18전투경찰대대는 후방을 교란하고 있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19][20]
차일혁은 제18전투경찰대대에서 군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전투 가능자와 불가능자를 파악하여 담력과 운동성이 뛰어난 자와 행정 능력을 갖춘 자로 구분하여 전투 편성을 했고, 전투 요원 중 정예 요원으로 척후정찰대를 편성하여 빨치산의 동정을 탐지하여 대책을 세운 뒤 작전을 실시했다. 또한 인민군에게 부모를 잃은 17~18세 청소년으로 구성된 대대를 만들어 신라 화랑의 이름을 따 '화랑소대'라 이름 붙이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한섭에게 통솔을 맡겼다. 화랑의 강한 정신을 심어주어 제18전투경찰대대의 핵심 전력으로 육성된 이들은 빨치산 토벌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다.[21]
당시 차일혁 대대장이 토벌해야 했던 빨치산 숫자는 국군 정규군 2개 군단과 맞먹는 6만 명에 달했다. 빨치산들이 전북 지역에 몰려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이 평야 지대로 식량을 얻기 쉬웠기 때문이다. 지리산에는 빨치산의 총본산 격인 '남부군사령부'가 있었으며, 지리산-회문산-내장산-덕유산 등의 산악 지대는 게릴라 활동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차일혁은 빨치산 귀순자로 구성된 ‘수색대’를 편성하여 공비 토벌에 활용하기도 했다.[22]
4. 2. 주요 전투
차일혁은 여러 주요 전투에서 뛰어난 지휘력과 전략을 발휘하여 빨치산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전투명 | 기간 | 내용 | 성과 |
---|---|---|---|
구이면 작전 | 1950년 12월 26일 ~ 12월 28일 | 제18전투경찰대대의 첫 출전. 차일혁은 열악한 장비와 훈련 부족에도 불구, 빨치산과의 교전에서 승리. 전투 중 빨치산 총기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등 뛰어난 담력과 전세 판단 능력 발휘. 생포한 빨치산들을 귀순자로 처리하여 전투력 향상.[23][24] | 빨치산 격퇴 |
고창 작전 | 1951년 3월 | 차일혁은 특유의 기지로 빨치산을 포위, 장연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여 큰 타격. 벼 700가마를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비인간적인 전과 보고에 항의.[25] 서정주 시인은 차일혁에게 선운사와 도솔암을 보호해달라고 부탁.[26] | 빨치산 격퇴, 지역 치안 확보 |
정읍 작전 | 1951년 4월 | 군경 합동작전으로 정문산, 입암산, 쌍치 등지의 빨치산을 8사단 작전지역으로 밀어붙임. 내장산과 백암산 등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을 격퇴하고, 총기와 실탄 압수.[27][28] | 빨치산 격퇴, 총기 및 실탄 압수 |
이현상과의 전투 | 1951년 7월 | 장수군 명덕리를 되찾고, 경찰관 25명과 양민 500명 구출. 무주군, 장수군, 거창군 방면 교통로 확보. | 명덕리 탈환, 인명 구출, 교통로 확보 |
가마골 탈환 작전 | 1951년 8월 15일 ~ 9월 25일 | 빨치산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가마골 탈환을 위해 외곽 고지 포위, 점령 작전 전개. 보아라부대도 이 작전에 참여.[34][35][37][38] | 빨치산 사살 135명, 생포 95명, 총기 78정 노획 |
무주군 작전 | 1951년 11월 ~ 1952년 | 백선엽 장군 지휘 백야전전투사령부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참여. 조선노동당 남부지도부 정치부책 여운철 사살.[41][42] | 금성화랑훈장 수여 |
임실군 작전 | 1952년 10월 | 사찰유격대 훈련, 많은 빨치산 사살 및 생포. 전라선 기습 주도한 이기붕 생포 후 귀순, 이상윤 사살에 도움.[43] | 빨치산 사살 및 생포, 이상윤 사살 |
4. 3. 이현상 사살
1951년 7월 15일 이후 차일혁은 남부군 사령관이던 이현상과의 전투를 벌여 명덕리를 되찾아 왔다. 이로써 무주, 장수, 거창 방면의 교통로가 다시 열렸고 빨치산들에게 잡혀간 경찰관 25명과 양민 500명을 구출하였다.1953년 5월 15일 차일혁은 총경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에 임명되어 이현상 생포 작전에 돌입했으며, '618부대'를 배속받아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였다.[44]
8월 3일, 화개장을 포위하여 집중 공격을 통해 이현상의 측근들을 하나둘씩 체포해 나갔다. 이현상의 호위대장이었던 송관일, 전남도당 병기과장 최달만, 전남도당 진위대 88부대장 이봉삼을 사살하였다.
9월 4일, 제5지구당 전속 의무관 이형련을 생포, 그가 이현상이 숨은 곳을 알려주고는 죽었다.[45][46]
휴전협정 체결 직후, 1953년 8~9월 지리산에서 개최된 조선인민유격대 회의에서 김일성이 행한 남로당계 숙청을 지지하면서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당하고 지리산 빗점골에 유폐되었다.[47] 차일혁은 이현상이 완전히 실권을 잃고 반 감금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9월 13일 이현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인 빗점골에 수색대를 매복, 9월 17일 이현상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618부대가 이현상의 호위병 둘을 사로잡았고, 그들이 이현상의 시신을 확인해주었다.[48] 차일혁은 이현상의 시신을 하동의 쌍계사로 옮겼는데, 몸에서 소련 권총, 일기와 한시, 염주가 나왔다. 이현상의 시신은 서울로 옮겨져 방부 처리하여 전시되었다. 전시를 마친 이현상의 시신은 차일혁이 불교식으로 화장해 자신의 철모를 벗어 이현상의 뼈를 모아 담고서는 Ml 소총으로 곱게 빻아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에 유골 가루를 뿌렸다.[49][50] 이로 인해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아서 부대원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이 3개나 수여되었지만, 차일혁은 받지 못하였다.[51]
이현상 사살 이후 지리산의 빨치산들은 힘을 잃고 소멸해갔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1948년 여순 10·19 사건과 6·25 전쟁 그리고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빨치산들을 완전히 토벌하고,후방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되찾게 됐다.[52]
이현상과 차일혁은 이념적 대립을 넘어 민족적 고통에 아파하면서 같은 민족으로서의 민족애를 발휘하였는데,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않아 포로로 잡은 사람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였다. 가장 치열하게 폭력의 현장에서 대립했던 이현상과 차일혁에게는 민족적 고통을 공유하는 측면이 있었고 생명을 존중하는 민족애가 있었던 것이다.[53]
5. 문화재 보호 활동
1951년 5월,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 신상묵을 비롯한 경찰 지휘관들과 최영희 사단장 및 8사단 참모들이 참석한 군경합동 회의에서 빨치산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을 불태우라는 지시가 내려졌다.[29] 차일혁은 이 명령에 대해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라며 반대했다. 그는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만 떼어내 소각하는 것으로 상부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사찰을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다.[29]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다른 사찰들도 폭격으로부터 최대한 보호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차일혁은 징계를 받고 감봉 처분을 받았다.[5][30] 하지만 1958년 조계종 초대종정 효봉 스님은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1998년에는 화엄사 경내에 차일혁 공적비가 세워졌고, 2022년 화엄사는 화엄문화제를 통해 차일혁 경무관 추모식을 거행했다. 2023년부터는 화엄사 각황전에서 차일혁 경무관 추모다례재를 올리고 있다.
6. 죽음과 사후 평가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으로부터 화엄사를 지킨 것에 대한 감사장을 받았다. 1998년 화엄사는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하였고,[5] 2023년부터 차일혁의 추모재를 드리고 있다.
6. 1. 갑작스러운 죽음
차일혁은 1954년 충주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아,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해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하여 학업 기회를 제공하였다.[54]그는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 당시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진해경찰서장 재직 중 좌익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후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되었으며, 1958년 금강 곰나루에서 가족과 물놀이를 하다가 38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54]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6. 2. 사후 재조명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으로부터 화엄사를 지킨 것에 대한 감사장을 수여받았다.[54] 1998년 화엄사는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하였고,[5] 2023년부터 차일혁의 추모재를 드리고 있다.1990년 그의 아들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출간하였다.
2008년 문화재청은 빨치산의 근거지인 화엄사 등의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절하여 명찰들을 보존한 공적이 있는 차일혁 경무관에게 감사장을 추서하였다.[5][55] 같은 해,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보관문화훈장을 서훈하였다. 경찰청에서는 2011년 8월 차일혁 총경을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하였다.
2013년 6·25전쟁 60주년사업위원회와 전쟁기념관 등은 ‘이달의 6·25전쟁영웅’ 12명에 차일혁을 선정하여 국가보훈처 9월의 달력 인물로 공식 지정하였다.[56] 같은 해, 전쟁기념사업회는 최무선 장군을 비롯한 62명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차일혁을 선정했다. 호국의 인물에 경찰이 포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9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57] 6·25동란 당시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구한 공로를 기려 화엄사에 차일혁 경무관 공덕비가 제막되었다.[58]
2014년 차일혁기념사업회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무명용사의 묘를 참배, 헌화하고 차일혁 경무관의 기념패를 미국 알링턴국립묘지의 메모리얼홀에 입성시켰다.[59] 같은 해, 9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차일혁 경무관의 추모 현양행사가 전쟁기념관에서 거행됐다. 전쟁기념사업회는 경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차일혁 경무관을 호국인물로 선정했다.[60]
2015년 호국영웅 10인 중 경찰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된 차일혁 경무관은 칠보발전소를 탈환한 공적을 인정받아 정읍시가 대표 공적지로 지정되었고, 6월 3일 차일혁 경무관의 영원우표 발행 기념식이 열렸다.[61]
2016년 국립대전현충원은 ‘9월의 현충인물’로 차일혁 경무관을 선정하였다.[62]
2017년 전북서부보훈지청은 정읍시 쌍암동 내장산 워터파크에서 차일혁 경무관의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63]
2019년 '한국 경찰의 혼(魂)'인 차일혁 경무관의 추모 흉상이 전북지방경찰청 현관에 제막됐다.[64]
2022년부터 화엄사 주최 '화엄문화제'에서 차일혁 경무관을 추모하고 있으며, 2023년부터는 유가족을 초대해 '차일혁 추모다례재'를 올리고 있다.
7. 가족 관계
참조
[1]
논문
한국경찰연구-경찰정신(警察精神)에 관한 연구-차일혁(車一赫)을 중심으로-
2012
[2]
서적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후아이엠
1990
[3]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4]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5]
웹사이트
https://www.whoim.kr[...]
null
[6]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7]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8]
논문
한국경찰연구, 「경찰정신(警察精神)에 관한 연구-차일혁(車一赫)을 중심으로-
2012
[9]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10]
논문
한국경찰연구, 「경찰정신(警察精神)에 관한 연구-차일혁(車一赫)을 중심으로-
2012
[11]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12]
학술대회
차일혁선생 호국선정기념학술대
2014
[13]
논문
한국경찰연구, 「경찰정신(警察精神)에 관한 연구-차일혁(車一赫)을 중심으로-
2012
[14]
학술대회
차일혁의 해방 후건국기와 6·25전쟁 후의 활동(1945^1950, 1954〜1956)
2014
[15]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16]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17]
학술대회
6·25전쟁 시 차일혁(車一»)의 후방지역 전투와 의의
2014
[18]
논문
한국경찰연구, 「경찰정신(警察精神)에 관한 연구-차일혁(車一赫)을 중심으로-
2012
[19]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20]
학술대회
6·25전쟁 시 차일혁(車一»)의 후방지역 전투와 의의
2014
[21]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22]
학술대회
6·25전쟁 시 차일혁(車一»)의 후방지역 전투와 의의
2014
[23]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24]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25]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26]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27]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28]
논문
한국경찰연구-경찰정신(警察精神)에 관한 연구-차일혁(車一赫)을 중심으로-
2012
[29]
서적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기린원
1990
[30]
학술대회
차일혁선생 호국선정기념학술대회
2014
[31]
학술대회
6·25전쟁 시 차일혁(車一»)의 후방지역 전투와 의의
2014
[32]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33]
서적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후아이엠
2011
[34]
서적
빨치산 토벌 전투경찰 유격대-보아라 부대
넷피플
2022
[35]
서적
빨치산 토벌 전투경찰 유격대-보아라 부대
넷피플
2022
[36]
서적
빨치산 토벌 전투경찰 유격대-보아라 부대
넷피플
2022
[37]
웹사이트
차일혁의 삶과 꿈
http://www.whoim.kr/[...]
[38]
서적
빨치산 토벌 전투경찰 유격대-보아라 부대
넷피플
2022
[39]
논문
6·25전쟁 시 차일혁(車一»)의 후방지역 전투와 의의
차일혁선생 호국선정기념학술대회
2014
[40]
간행물
한국경찰연구-경찰정신(警察精神)에 관한 연구-차일혁(車一赫)을 중심으로
한국경찰연구
2012
[41]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42]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43]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44]
서적
빨치산 토벌 전투경찰 유격대-보아라 부대
넷피플
2022
[45]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46]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47]
서적
빨치산 토벌 전투경찰 유격대-보아라 부대
넷피플
2022
[48]
서적
빨치산 토벌 전투경찰 유격대-보아라 부대
넷피플
2022
[49]
서적
차일혁의 삶과 꿈
후아이엠
2019
[50]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51]
간행물
문화재사랑
문화재청
2009-03
[52]
서적
또 하나의 전쟁
후아이엠
2014
[53]
논문
분단트라우마 형성기 민족적 화해 가능성 연구-이현상과 차일혁의 관계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null
[54]
웹사이트
이현상 평전
http://www.ohmynews.[...]
[55]
웹사이트
화엄사를 지킨 빨치산 토벌대장
http://news.chosun.c[...]
2008-06-05
[56]
웹사이트
올해 ‘이달의 6․25전쟁영웅’ 12명 선정
http://www.asiatoday[...]
[57]
웹사이트
경찰 최초 '호국의 인물'로 선정된 차일혁 경무관
http://www.whoim.kr/[...]
[58]
웹사이트
6·25 당시 화엄사 지킨 故차일혁 경무관 공덕비 제막
http://www.ibulgyo.c[...]
[59]
웹사이트
미국 알링턴국립묘지, 영웅 차일혁 기린다
http://www.newsis.co[...]
2014-02-12
[60]
웹사이트
차일혁 경무관, 고맙습니다…9월의 호국인물 현양식 현장
http://www.newsis.co[...]
2014-09-10
[61]
웹사이트
정읍署, 차일혁 경무관 영원우표 발행 기념식
http://www.jeonmin.c[...]
[62]
뉴스
국립대전현충원, ‘9월의 현충인물 차일혁 경무관’ 선정
http://www.asiatoday[...]
[63]
뉴스
‘호국영웅’ 차일혁 경무관 흉상 정읍서 제막
http://www.segye.com[...]
[64]
웹사이트
전북경찰청 '차일혁 경무관 추모 흉상' 제막
http://www.breaknews[...]
[65]
웹사이트
http://www.chosun.co[...]
[66]
웹사이트
http://www.hooam.com[...]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