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와 나가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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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와 나가쿠니는 일본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니혼마츠 번의 마지막 번주였다. 그는 1834년에 태어나 1858년 아버지 니와 나가토미의 은퇴로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막부 말기 혼란 속에서 교토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츠 열번 동맹에 가담했으나 패배하여 은거했고, 이후 근신에서 풀려나 1902년 양손자의 사망으로 가문을 다시 상속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04년에 사망했으며, 묘소는 다이린지로 이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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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와 나가쿠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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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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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니와 나가쿠니 (丹羽長国) |
옛 이름 | 호조 (保蔵) |
별칭 | 고로자에몬 (五郎左衛門) |
작위 | 자작 |
사망 장소 | 아오야마 묘지, 도쿄, 일본 |
가문 | |
씨족 | 니와 씨 |
가주 | 12대 (1858년 ~ 1868년), 15대 (1902년 ~ 1904년) |
아버지 | 니와 나가토미 |
어머니 | 마츠오 씨 |
배우자 | 도다 우지마사의 딸 |
자녀 | 미네, 이나바 마사쿠니의 양녀, 쇼시, 하나코 등 |
양자 | 니와 나가히로, 니와 나가노리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에치젠노카미, 종4위하 사쿄다이부 겸 시종, 종4위상, 정4위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모치 → 도쿠가와 요시노부 → 메이지 천황 |
번주 | |
번 | 무쓰국니혼마쓰 번 번주 |
임기 | 1858년 ~ 1868년 |
이전 번주 | 니와 나가토미 |
다음 번주 | 니와 나가히로 |
생애 | |
출생 | 1834년 5월 22일 |
사망 | 1904년 1월 15일 |
기타 | |
묘소 | 아오야마 묘지, 도쿄, 일본 |
2. 생애
니와 나가쿠니는 1834년(덴포 5년) 니혼마츠 번의 9대 번주 니와 나가토미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1858년(안세이 5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문을 계승하여 10대 번주가 되었으며, 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아이즈 번과의 공동 해안 방어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2]
번주 시절, 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에 따라 여러 차례 교토 경비를 위해 병력을 파견해야 했다. 이러한 군사적 부담과 니혼마츠 조카마치의 화재, 덴포 기근 이후 지속된 경제난 등이 겹쳐 번의 재정은 막부 말기에 이르러 심각하게 악화되었다.[2]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오우에츠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맞섰으나 연이어 패배했다. 니혼마츠성이 함락된 후 요네자와 번으로 피신했다가 신정부에 항복하여 근신 처분을 받았다.[1] 이후 메이지 정부는 그의 은거를 명하고 영지를 대폭 삭감했으며, 가문은 양자 니와 나가히로가 이었다.
1869년(메이지 2년) 근신에서 해제된 나가쿠니는 아들과 손자보다 오래 살았으며, 1902년(메이지 35년) 양손자 니와 나가야스가 사망하자 다시 가문을 상속받아 화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3][4] 그는 1904년(메이지 37년) 71세(만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24년 니혼마츠 시의 다이린지 내 니와 가문 묘소로 이장될 예정이다.[5][6]
2. 1. 초기 생애
니와 나가쿠니는 1834년 5월 22일(덴포 5년 4월 14일) 니혼마츠 번의 9대 번주 니와 나가토미의 여섯째 아들로 니혼마츠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호조(保蔵)였다. 1846년(고카 3년) 12월 18일 종5위하 에치젠노카미(越前守)에 서임되었고, 이듬해인 1847년(고카 4년) 12월 16일 종4위하로 승진했다. 1858년 11월 15일(안세이 5년 10월 11일)[1] 아버지 나가토미가 은거함에 따라 가문을 계승하여 니혼마츠 번의 10대 번주가 되었다.2. 2. 번주 시절
1858년 11월 15일(안세이 5년 음력 10월 11일)[1], 아버지 니와 나가토미의 은거로 가문을 계승하여 니혼마츠 번의 10대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시종(侍従)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친이 시작한 아이즈 번과의 공동 해안 방어 임무(토미츠)를 계속 수행했다.[2]1864년(겐지 원년) 4월, 존왕양이파의 활동이 거세지자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교토 경비 강화를 위해 병력 파견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 종4위상으로 승진했다. 1865년(게이오 원년) 9월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겨울철 교토 경비를 위해 다시 병력을 파견해야 했다. 이러한 거듭된 군사 동원과 니혼마츠 조카마치의 화재, 덴포 기근 이후 지속된 경제난 및 관료 부패가 겹치면서 번의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어 막부 말기에는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1868년(게이오 4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니혼마츠 번은 오우에츠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삿초 동맹)과 싸웠으나 각지에서 패배했다. 같은 해 9월 15일(음력 7월 29일), 니혼마츠 전투에서 니혼마츠성이 함락되자 나가쿠니는 요네자와 번으로 피신했다. 9월 24일(음력 9월 10일), 니혼마츠 번은 신정부에 항복했고 나가쿠니는 근신 명령을 받았다. 이후 메이지 정부와 화해하고 도쿄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아 마에바시 번의 저택에서 가택 연금되었다. 12월 7일, 신정부는 나가쿠니에게 은거를 명령하고 니혼마츠 번의 고쿠다카를 기존 10만 700곡(石)에서 5만 700곡으로 대폭 삭감했다. 가문 상속은 양자인 니와 나가히로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모치노리의 동생)에게 이루어졌다.
2. 3. 보신 전쟁과 패배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니혼마츠 번은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관군)과 맞섰다.[2] 그러나 니혼마츠 번은 모든 교전에서 삿초 동맹 군대에 패배했다. 게이오 4년(1868년) 7월 29일, 니혼마츠 전투에서 니혼마츠성이 함락되었고, 번주 나가쿠니는 요네자와 번으로 도주했다.[1]같은 해 9월 10일, 니혼마츠 번은 신정부에 항복했으며 나가쿠니는 근신 명령을 받았다. 10월 23일에는 도쿄의 마에바시 번 저택으로 이송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12월 7일, 신정부는 나가쿠니에게 은거를 명령하고 니혼마츠 번의 고쿠다카 10만 700석 중 5만 700석을 몰수하는 처분을 내렸다.[1] 가문은 양자인 니와 나가히로(요네자와 번 우에스기 모치노리의 형제)가 상속했다.[1]
메이지 2년(1869년) 9월 28일, 나가쿠니는 근신에서 해제되었다.[1] 그는 아들과 손자 니와 나가야스보다 오래 살았으며, 메이지 35년(1902년) 5월 3일 양손자 나가야스가 사망하자 다시 가문을 상속받아 화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3][4] 메이지 37년(1904년) 1월 15일에 향년 71세(만 69세)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었으나, 2024년에 니혼마츠 시의 다이린지에 새로 정비되는 니와 가문 묘소로 이장하여 합장될 예정이다.[5][6]
2. 4. 메이지 시대
1868년 보신 전쟁(戊辰戦争)에서 니혼마츠 번은 오우에츠 열번 동맹(奥羽越列藩同盟)에 가담했으나, 삿초 동맹(薩長同盟)이 주축이 된 신정부군에게 연이어 패배했다. 같은 해 9월 15일 (게이오 4년 7월 29일), 니혼마츠성(二本松城)이 니혼마츠 전투(二本松の戦い)에서 함락되자 나가쿠니는 요네자와 번(米沢藩)으로 피신했다.[2]이후 나가쿠니는 메이지 정부(明治政府)에 항복하고 10월 23일 (게이오 4년 9월 10일) 근신 명령을 받았다. 12월 7일 (메이지 원년 10월 23일)에는 도쿄(東京)의 마에바시 번(前橋藩) 저택으로 이송되어 가택 연금(家宅監禁) 상태에 놓였다.[1] 신정부는 나가쿠니에게 은거를 명령하는 동시에 니혼마츠 번의 고쿠다카(石高)를 기존 10만 700곡(石)에서 5만 700곡으로 대폭 삭감했다. 가문은 요네자와 번(米沢藩) 출신이자 우에스기 모치노리(上杉茂憲)의 동생인 양자 니와 나가히로(丹羽長裕)가 상속받았다.
1869년 11월 1일 (메이지 2년 9월 28일), 나가쿠니는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그는 아들과 손자보다 오래 살았으며, 1902년(메이지 35년) 5월 3일, 양손자인 니와 나가야스(丹羽長保)가 사망하자 다시 니와 가문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고 화족(華族)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3][4] 나가야스는 나가히로의 친동생이었다.
나가쿠니는 1904년(메이지 37년) 1월 15일에 71세(만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문은 양자 니와 나가노리(丹羽長徳)가 이었다. 그의 묘는 본래 도쿄 아오야마 묘지(青山霊園)에 있었으나, 2024년 니혼마츠 시의 보리사인 다이린지(大隣寺)에 새로 조성되는 니와 가문 묘소로 이장되어 합장될 예정이다.[5][6]
3.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니와 나가토미 | |
어머니 | 마츠오 씨 | 측실 |
정실 | 히사코[8] | 토다 우지마사의 딸 |
측실 | 타마루 씨 | |
카와쿠보 씨 | ||
자녀 | 미네 (장녀) | 니와 나가히로 정실, 생모는 히사코 (정실) |
이름 미상 (딸) | 이나바 마사요리의 부인 (후 이혼), 이나바 마사쿠니의 양녀, 생모는 타마루 씨 (측실) | |
소시 (다섯째 딸) | 니와 나가노리의 부인, 생모는 타마루 씨 (측실) | |
하나코 (여섯째 딸) | 니와 나가야스의 부인, 생모는 카와쿠보 씨 (측실) | |
양자 | 니와 나가히로 | 우에스기 나리노리의 아홉째 아들 |
니와 나가노리 | 다테 무네노리의 여섯째 아들 |
4. 서훈
참조
[1]
문서
[2]
웹사이트
歴史の勉強・丹羽氏
http://roadsite.road[...]
[3]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4]
간행물
官報
1902-05-05
[5]
웹사이트
二本松藩主の墓、東京から帰還へ 今秋には完了、竣工法要
https://www.minyu-ne[...]
2024-04-22
[6]
웹사이트
丹羽家歴代藩主の墓を一カ所に 福島県二本松市の菩提寺・大隣寺に東京の墓所を移設統合
https://www.minpo.jp[...]
福島民報
2024-07-12
[7]
간행물
官報
1889-08-02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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