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와 나가히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와 나가히데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긴 무장으로, 이노 전투와 오케하자마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아즈치 성 건설을 지원하는 등 정치적 능력도 발휘했으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돕는 등 공을 세워 에치젠, 가가 지역을 다스렸다.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오다 노부타카를 보좌하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하는 데 기여했으나, 1585년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니와 나가시게는 시라카와 번주가 되었고, 손자 니와 미쓰시게 대에 니혼마쓰 번으로 영지가 옮겨져 에도 시대 내내 그곳에 정착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35년 출생 - 성혼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 1535년 출생 -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규슈 통일과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등 굵직한 사건들에 참여했으며 뛰어난 무용과 지략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임진왜란 침략에 대한 책임 논란도 있는 인물이다. - 1585년 사망 - 다테 데루무네
다테 데루무네는 1544년에 태어나 1585년에 사망한 다테 가문의 16대 당주이며,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하다가 아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 1585년 사망 -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는 16세기 후반 시베리아 칸국을 정복한 코사크 지도자로,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지원을 받아 시베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러시아의 동방 확장에 기여했으나, 이르티시 강 전투에서 전사했고 정복 과정에서의 폭력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재정가 - 오쿠보 나가야스
오쿠보 나가야스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다케다 가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막부 운영에 기여했으나, 말년에 부정 축재 의혹으로 실각하고 가문이 몰락했다. - 재정가 - 오쿠마 시게노부
오쿠마 시게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자 교육자로, 두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재정 개혁, 철도 건설, 헌법 제정, 와세다 대학 설립 등에 기여했으나, 제국주의적 정책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니와 나가히데 | |
---|---|
기본 정보 | |
이름 | 니와 나가히데 |
일본어 이름 | 丹羽 長秀 |
출생일 | 1535년 10월 16일 |
사망일 | 1585년 5월 15일 |
출생지 | 나고야시니시구, 오와리국 |
사망지 | 나가쿠테시 |
별명 | 고로자에몬 () 고메 고로자 () 오니 고로자 () |
가명 | 만치요 |
계명 | 소코지 다이린소토쿠 |
묘소 | 후쿠이현 기타노쇼 소코지 내 소토쿠지 |
관위 | 에치젠노카미 |
가문 정보 | |
가문 | 니와씨 |
씨족 | 미나모토성 니와씨 (유이주 증성, 하시바씨) |
아버지 | 니와 나가마사 |
어머니 | 노로씨 여 |
형제 | 나가타다 니와 나가히데 히데시게 여 (마쓰바라 이가노카미실) 여 (오쓰 나가마사실, 후에 하치야 요리타카실) |
배우자 및 자녀 | |
정실 | 게이호인 (후카미쓰인, 오다 노부히로의 딸, 오다 노부나가의 양녀) |
측실 | 스기노와카 무신 딸 |
자녀 | 나가시게 나가마사 도도 다카요시 하치야 나오마사 나가토시 나가쓰구 (나가쓰기) 겟코인 (아카다 겐실) 게이린인 (아와야 가쓰히사 실) 조코인 (이나바 노리미치 정실) 조세이인 (아오야마 무네카쓰 실) 엔코인 (후루타 시게하루 정실) 에이키인 (야마다 다카사다 실) 여 (이기 다다쓰구 실) 다네하시 시게아키 실 (다네하시 가즈아키 모) |
직책 | |
가문 수장 | 니와씨 가문 수장 |
임기 시작 | 1573년 |
임기 종료 | 1585년 |
후임 | 니와 나가시게 |
와카사 국 영주 | 와카사 영주 |
영주 임기 시작 | 1573년 |
영주 임기 종료 | 1585년 |
영주 전임 | 아사쿠라씨 |
영주 후임 | 야마우치 가즈토요 |
소속 및 지휘 | |
소속 | 오다 가문 도요토미 가문 |
부대 | 니와씨 |
지휘 | 사와야마성 |
주요 전투 | |
전투 | 이노 전투 우키노 전투 이나바야마 전투 간논지 전투 아네가와 전투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히에이산 포위전 사이묘지 포위전 이치조다니성 포위전 나가시노 전투 미쓰지 포위전 데도리가와 전투 덴쇼 이가 전투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Niwa Nagahide |
통칭 | 고로자에몬 () |
관직명 | 하시바 에치젠노카미 () |
2. 생애
니와 나가히데는 1535년 오와리 국 가스가이 군 고다마(현재의 나고야 시 니시구)에서 니와 나가마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다니와 씨는 원래 시바 씨의 가신이었다. 1550년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1553년 우메즈노하라 전투에서 19세의 나이로 첫 출전했고, 1556년 이나이의 전투에서는 노부나가 측에 붙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공격 부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종군했다.
《신장공기》 등에 따르면, 사이토 료쿠와의 미노 국에서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여겨지며,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노부나가가 상락했을 때, 남오미의 롯카쿠 씨 정벌에서 미나세키 성을 공격하는 등 무공을 세웠다(간논지 성 전투).
아네가와 전투 직후 노부나가는 8개월에 걸쳐 오미 사와야마 성을 포위했지만, 1571년 2월 24일 성주 이소노 가즈마사가 개성 권고를 받고 성을 나가자, 그를 대신하여 나가히데가 사와야마 성주가 되었다.[7]
1573년 8월, 에치젠 국과 와카사 국에서 세력을 떨치던 아사쿠라 요시카게 토벌에 참가하여 요시카게의 어머니(고토쿠인)와 아들 아이오마루를 처형했다.[8] 9월, 오미 사와야마 영지에 더해 와카사 일국을 하사받아 오다 가신으로서는 최초의 국지 다이묘가 되었다. 와카사 국내 초기의 대략적인 지행 배분은 오이즈미 군이 나가히데, 미카타 군이 아와야 가쓰히사·구마가이 덴자에몬, 오이 군이 이타미 마사쓰네였으며, 각 영주는 소령 내에 독립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9]
이 무렵 나가히데의 가신으로는 미조구치 히데카쓰·나가쓰카 마사이에·다테베 도시노리·야마다 요시시게·누마다 요시노부 등이 있었고, 조력자로는 신장 직신이 된 와카사 슈(다케다 모토아키·아와야 가쓰히사·이타미 마사쓰네·야마가타 히데마사·나이토·구마가이 등의 와카사 다케다 씨 및 구신)가 타국 출병 시 나가히데의 지휘하에 군사 편제에 포함되었다. 군사 외에도 와카사의 치안 유지와 유통 통제 등 일국 단위의 정리도 나가히데가 담당했다.
이후 나가히데는 고야 성 전투, 나가시노 전투, 에치젠 일향일규 진압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공을 세웠고, 군사적인 면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아즈치 성 축성의 총봉행을 맡았다.
1579년, 다지마 국의 하시바 히데나가와 함께 단바 국에 쳐들어가 히카미 성의 하타노 무네나가를 물리쳤다.
1581년, 에치고 국 기부네 성주 이시구로 시게쓰나를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오미에서 처형했고, 에치고 국 간카이지 성주 데라사키 모리나가 부자도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나가히데가 성주를 맡고 있던 오미 사와야마 성에서 유폐된 후 할복했다. 같은 해 교토 고마조로에에서는 가장 먼저 입장하는 특전을 받았으며, 덴쇼 이가의 난에도 종군하여 히지야마 성 전투 등에서 싸웠다.
가로 서열에서는 사쿠마 노부모리 실각 후 그 자리에 오른 시바타 가쓰이에에 이어 2번째 가로 지위를 부여받았고, 두 사람은 오다 가문의 쌍벽이라 불렸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공격받아 사망하자, 나가히데는 시코쿠 원정을 포기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합류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죽여 복수했다. 나가히데는 오다 노부타카를 보좌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의 사위인 쓰다 노부스미를 공모자로 여겨 살해했다.[7] 이후 기요스 회의에서 이케다 쓰네오키와 함께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삼법사를 추대하는 것을 지지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5]에서 히데요시를 도왔고, 에치젠 국과 가가 국을 다스리게 되어 1,230,000 곡 이상의 영지를 얻었다. 전후, 와카사 국과 오미 국 시가·다카시마 2군의 대신으로, 에치젠 국(쓰루가 군·난조 군의 일부·오노 군의 일부를 제외) 및 가가 국 에누마·노미 2군을 받았고, 에치젠 국 호쿠쇼에 입부했다.[10][11]
나가히데는 1585년 4월 16일에 지병(적취(積聚), 기생충병)으로 사망했다.[14] 향년 51세였다. 그러나 『수길보(秀吉譜)』에 따르면, 나가히데는 평소 "적취"로 고통받다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고 한다.
2. 1. 오다 가신 시대
나가히데는 현재의 니시구, 나고야에서 태어났으나, 당시에는 아이치군, 오와리국에 속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1555년 이노 전투에서 그의 형제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1558년 우키노 전투에서도 노부나가의 곁을 지켰다.[2]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군무를 수행했으나 주력 부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신장공기》에 따르면, 1567년 이나바야마 공성전에 참여하여 사이토 다쓰오키를 상대로 노부나가의 주력 부대에 속했다.
1568년 오미 국 정벌(오미 전역)에서 관음사 성(관음사 전투) 함락에 기여했으며 노부나가의 친위대에 속해 있었다. 그의 공로로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는 1570년 아자이-아사쿠라 씨와의 아네가와 전투, 1570년~1580년 이시야마 홍간사 전투(홍간사 전투)에도 참전했다.
1571년 2월, 이소노 카즈마사가 철수한 후 니와 나가히데는 사와야마 성에 입성하여 가와지리 히데타카와 함께 성주로 활동했다. 1571년 9월, 노부나가는 히에이산 공성전에서 연락사에 속한 천태종 사찰들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고, 나가히데와 히데타카는 사묘지(고라)를 불태웠다.[7]
나가히데는 1573년 이치조다니 성 공성전, 1575년 다케다 씨와의 나가시노 전투, 1577년 시바타 가쓰이에 휘하에서 우에스기 켄신과의 테도리가와 전투에도 참전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때는 노부나가의 정복 사업을 지원하며 정치적 업무를 처리했고, 1576년에 착공하여 1579년에 완공된 아즈치 성 건설을 담당했다.[2][3] 그의 가문 이름의 한 글자가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공로는 노부나가의 총애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4] 노부나가의 신임의 정도는 나가히데가 노부나가의 조카와 결혼했고 그의 아들이 니와 나가시게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공로로 나가히데는 와카사 국의 오바마 번과 오미 국의 사와야마 성을 다스리게 되었다.[2]
1581년, 교토에서 일본 천황과 외국 선교사들 앞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서 나가히데는 행렬을 이끌 영광을 안았다. 같은 해 그는 이가 주민들과의 두 번째 덴쇼 이가 전쟁에 참전했다.
1582년, 오다 노부타카의 부사령관으로 나가히데는 시코쿠 원정을 시작했으나, 진전을 보이기 전에 아케치 미쓰히데의 공격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했다. 나가히데는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합세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죽여 복수했다. 이후 키요스 성에서 열린 오다 씨의 미래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나가히데는 히데요시의 입장을 지지했다.
가로의 서열에서는 수장이었던 사쿠마 노부모리 실각 후 그 자리에 오른 시바타 카츠이에에 이어 2번째 가로의 지위를 부여받았고, 두 사람은 오다 가문의 쌍벽이라 불렸다.
2. 2. 오다 가문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는 현재 니시구, 나고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태어났으나, 당시는 아이치군, 오와리국에 속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1555년 이노 전투에서 그의 형제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1558년 우키노 전투에서도 노부나가의 곁을 지켰다.[2]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군무를 수행했으나 주력 부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노부나가 공기》에 따르면, 1567년 이나바야마 공성전에 참여하여 사이토 다쓰오키를 상대로 노부나가의 주력 부대에 속했다.
1568년 오미 국 정벌(오미 전역)에서 관음사 성(관음사 전투) 함락에 기여했으며 노부나가의 친위대에 속해 있었다. 그의 공로로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는 1570년 아자이-아사쿠라 씨와의 아네가와 전투, 1570년~1580년 이시야마 홍간사 전투(홍간사 전투)에도 참전했다.
1571년 2월, 이소노 가즈마사가 철수한 후 니와 나가히데는 사와야마 성에 입성하여 가와지리 히데타카와 함께 성주로 활동했다. 같은 해 9월, 노부나가는 히에이산 공성전에서 연락사에 속한 천태종 사찰들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고, 나가히데와 히데타카는 사묘지(고라)를 불태웠다.
나가히데는 1573년 이치조다니 성 공성전, 1575년 다케다 씨와의 나가시노 전투, 1577년 시바타 가쓰이에 휘하에서 우에스기 겐신과의 테도리가와 전투에도 참전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때는 노부나가의 정복 사업을 지원하며 정치적 업무를 처리했고, 1576년에 착공하여 1579년에 완공된 아즈치 성 건설을 담당했다.[3] 그의 가문 이름의 한 글자가 하시바(羽柴) 성씨의 히데요시(秀吉)에게 하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공로는 노부나가의 총애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4] 노부나가의 신임의 정도는 나가히데가 노부나가의 조카와 결혼했고 그의 아들이 니와 나가시게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공로로 나가히데는 와카사 국의 오바마 번과 오미 국의 사와야마 성을 다스리게 되었다.[2]
1581년, 교토에서 일본 천황과 외국 선교사들 앞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서 나가히데는 행렬을 이끌 영광을 안았다. 같은 해 그는 이가 주민들과의 두 번째 덴쇼 이가 전쟁에 참전했다.
1582년, 오다 노부타카의 부사령관으로 나가히데는 시코쿠 원정을 시작했으나, 진전을 보이기 전에 아케치 미쓰히데의 공격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했다. 나가히데는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합세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죽여 복수했다. 이후 기요스 성에서 열린 오다 씨의 미래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나가히데는 히데요시의 입장을 지지했다.
1583년, 나가히데는 시즈가타케 전투[5]에서 히데요시를 도왔고 에치젠 국과 가가 국을 다스리게 되어 1,230,000 곡 이상의 영지를 얻었다. 그는 이로써 가장 강력한 가신이자 다이묘 중 한 명이 되었다.
덴분 4년(1535년) 9월 20일, 니와 나가마사의 차남으로 오와리 국 가스가이 군 고다마(현재의 나고야 시 니시구)에서 태어났다. 다니와 씨는 원래 시바 씨의 가신이었다.
덴분 19년(1550년)부터 나가히데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덴분 22년(1553년), 우메즈노하라 전투에서 19세의 나이로 첫 출전을 했다.
고지 2년(1556년), 이나이의 전투에서는 노부나가 측에 붙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공격 부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종군은 했다.
『신장공기』 등을 통해 사이토 료쿠와의 미노 국에서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생각되며, 에이로쿠 11년(1568년)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노부나가가 상락했을 때, 남오미의 롯카쿠 씨 정벌에서 미나세키 성을 공격하는 등 무공을 세웠다(간논지 성 전투).
아네가와 전투 직후부터 노부나가는 8개월에 걸쳐 오미 사와야마 성의 포위를 계속했지만, 겐키 2년(1571년) 2월 24일에 성주 이소노 가즈마사가 개성 권고를 받고 성을 나가자, 그를 대신하여 나가히데가 사와야마 성주가 되었다.[7]
덴쇼 원년(1573년) 8월, 에치젠 국과 와카사 국에서 세력을 떨치던 아사쿠라 요시카게 토벌에 참가했다. 전쟁 후, 요시카게의 어머니(고토쿠인)과 아들 아이오마루를 처형했다(「엣슈군키」).[8]
9월, 나가히데는 오미 사와야마 영지에 더해 와카사 일국을 하사받아, 오다 가신으로서는 최초의 국지 다이묘가 되었다. 와카사 국내 초기의 대략적인 지행(知行) 배분은 오이즈미 군이 나가히데, 미카타 군이 아와야 가쓰히사·구마가이 덴자에몬, 오이 군이 이타미 마사쓰네였으며, 각 영주는 소령 내에 독립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9]
이 무렵 나가히데의 가신으로는 미조구치 히데카쓰·나가쓰카 마사이에·다테베 도시노리·야마다 요시시게·누마다 요시노부 등이 있었고, 조력자로는 신장 직신이 된 와카사 슈(다케다 모토아키·아와야 가쓰히사·이타미 마사쓰네·야마가타 히데마사·나이토·구마가이 등의 와카사 다케다 씨 및 구신)가 타국으로의 출병 시 나가히데의 지휘하에 군사 편제에 포함되었다. 더욱이 군사 외에도 와카사의 치안 유지와 유통 통제 등 일국 단위의 정리에도 나가히데가 담당했다.
참고로, 오이 군은 이타미 마사쓰네의 죽음으로 인해 미조구치 히데카쓰가 나가히데 가신에서 신장 직신으로 승격되어 독립적인 지행을 받았다. 혼노지의 변에 있어 와카사에서는 다케다 모토아키가 아케치 측에 가담하여 몰락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와야·구마가이·야마가타·데라니시 등의 조력자 각 씨는 나가히데의 지배하에 들어가 가신이 되었다.
나가히데는 그 후에도 고야 성 전투, 나가시노 전투, 에치젠 일향일규 진압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공을 세웠다. 더 나아가 나가히데는 군사적인 면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아즈치 성 축성의 총봉행을 맡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덴쇼 7년(1579년), 다지마 국의 하시바 히데나가와 함께 단바 국에 쳐들어가 히카미 성의 하타노 무네나가를 물리쳤다.
덴쇼 9년(1581년), 에치고 국 기부네 성주 이시구로 시게쓰나를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오미에서 처형했다. 에치고 국 간카이지 성주 데라사키 모리나가 부자도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나가히데가 성주를 맡고 있던 오미 사와야마 성에서 유폐된 후 할복했다. 같은 해 교토 고마조로에에서는 가장 먼저 입장하는 특전을 받았다. 또한 덴쇼 이가의 난에도 종군하여 히지야마 성 전투 등에서 싸웠다.
가로의 서열에서는 수장이었던 사쿠마 노부모리 실각 후 그 자리에 오른 시바타 가쓰이에에 이어 2번째 가로의 지위를 부여받았고, 두 사람은 오다 가문의 쌍벽이라 불렸다.
2. 3. 혼노지의 변 이후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공격받아 사망하자, 니와 나가히데는 시코쿠 원정을 포기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합류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죽여 복수했다. 나가히데는 오다 노부타카를 보좌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의 사위인 쓰다 노부스미를 공모자로 여겨 살해했다.[7] 이후 기요스 회의에서 이케다 쓰네오키와 함께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삼법사를 추대하는 것을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여러 장수들이 히데요시에 의한 오다가의 사업 계속을 인정하는 형태가 되었다.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5]에서 히데요시를 도왔고, 에치젠 국과 가가 국을 다스리게 되어 1,230,000 곡 이상의 영지를 얻었다. 그는 이로써 가장 강력한 가신이자 다이묘 중 한 명이 되었다. 전후, 와카사 국과 오미 국 시가·다카시마 2군의 대신으로, 에치젠 국(쓰루가 군·난조 군의 일부·오노 군의 일부를 제외) 및 가가 국 에누마·노미 2군을 받았고, 에치젠 국 호쿠쇼에 입부했다.[10][11] 석고는 약 60만 석으로 추정되고 있다.[13]
2. 4. 최후
니와 나가히데는 天正일본어 13년(1585년) 4월 16일에 지병(적취(積聚), 기생충병)으로 사망했다.[14] 향년 51세였다. 그러나 『수길보(秀吉譜)』에 따르면, 나가히데는 평소 "적취"로 고통받다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고 한다. 화장 후 재 속에서 발견된 타다 남은 적취는 주먹만 한 크기로, 석거북 모양에 새처럼 뾰족하고 굽은 부리가 있었으며 등에는 칼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을 보고 "기묘한 물건"이라며 다케다 법인(竹田法印)에게 하사했다.[14]마쓰우라 시즈야마(松浦静山)가 간세이(寛政) 6년(1793년)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나가히데는 오랫동안 복중의 병인 "적충(積蟲)"을 앓았고, "어찌 적충 때문에 죽어야 하는가"라며 단도로 배를 찔러 벌레를 꺼내고 사망했다. 이 벌레는 자라와 비슷하게 생겼고 걸어 다녔으며, 히데요시가 시의(侍醫)에게 명하여 약을 투여했으나 죽지 않다가 다케다 법인 정가(定加)가 준 약을 먹고서야 죽었다. 히데요시는 이를 치하하며 벌레를 하사했고, 가보로 전해지게 되었다.[14]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석거북과 비슷하고 새와 같은 부리를 가진 괴물은 촌백충(寸白蟲, 회충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4] 할복 후 이틀 뒤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할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4]
아들 니와 나가시게는 나중에 시라카와 성의 영주가 되었고, 손자 니와 미쓰시게 시대에는 가문의 10만 석(koku)에 달하는 영지가 니혼마쓰로 옮겨져 에도 시대 내내 그곳에 남아 있었다.
3. 인물
- 니와씨(丹羽氏)와 오다가(織田家)는 친척 관계였다. 나가히데는 노부나가의 형인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広)의 딸(노부나가의 조카이자 양녀)을 아내로 맞이했고, 장남 나가시게(長重)도 노부나가의 다섯째 딸과 결혼했다. 나가히데는 노부나가로부터 '장(長)' 자를 받을 정도로 친밀한 주종 관계였다. 2대에 걸쳐 노부나가의 인척이 된 것은 다른 가신들에게는 없던 일로, 나가히데는 노부나가에게 "나가히데는 친구이자 형제다"라고 불릴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3]
- 오다가 가신들 사이에서는 "목면(木綿) 후지키치(藤吉), 쌀 오고로자(五郎左), 시바타(柴田)에게 걸리고, 사쿠마(佐久間)에게 물러난다"라는 평판이 있었다. 목면(하시바 히데요시)은 화려하지 않지만 귀중한 존재인 반면, '''쌀 오고로자'''는 나가히데를 평한 것으로, 매우 능숙하여 어떤 임무라도 수행하고 쌀처럼 상하 모두에게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의미이다.[4]
- 나가히데는 방면군 사령관 지위는 얻지 못했지만, 아즈치성(安土城) 축성 등 기내(畿内) 행정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각 방면 원군으로서 보급로 확보와 현지 전후 처리에 활약하는 등 행정과 군사 양면에서 쌀 오고로자라는 이름에 걸맞는 활동을 계속하여 노부나가의 신임도 변함없었다.[5]
- 1575년 7월, 노부나가가 가신들에게 관위와 성씨를 하사할 때, 나가히데에게도 큐슈의 명문가인 이레즈미(惟住) 성씨가 주어졌으나, "저는 평생 오고로자(五郎左)로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며 거절했다.[8]
- 나가히데는 명검 "아자마루(あざ丸)"를 소유했었으나, 손에 넣은 후 안질에 시달렸다. 이 검은 아쓰타 신궁(熱田神宮) 신직이었던 오다 측 무장 센슈키 미쓰히로(千秋季光)가 소유했던 것으로, 가나구치 전투(加納口の戦い)에서 센슈키가 전사했을 때 사이토 도산(斎藤道三) 가신 카게야마 카즈나리(陰山一景)가 노획했지만, 직후 오다 측과의 싸움에서 양쪽 눈을 맞아 죽었다는 불길한 검이었다. 나가히데는 주변 충고에 따라 아쓰타 신궁에 "아자마루"를 봉납했고, 이후 안질에서 벗어났다고 한다.[2]
- 다케다가(武田家) 멸망 후, 나가히데는 노부나가의 배려로 휴가를 받고,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쓰다 노부스미(多賀常則)와 함께 구사쓰 온천(草津温泉)에서 온천 요양을 했다.[9]
4. 가신
출신 | 이름 |
---|---|
오와리 슈 | 오타 우시카즈, 도다 가쓰나리, 미조구치 히데카쓰, 우에다 시게야스, 우에다 시게우지, 아오야마 무네카쓰, 오타니 요시히데, 오타니 모토히데, 오카다 요시타무, 오쿠야마 시게사다, 오쿠야마 마사유키, 쿠와야마 시게하루, 다네하시 나리아키, 다네하시 가즈아키, 데라니시 마사카쓰, 데라니시 고레나리, 나리타 미치노리, 무라카미 요리카쓰, 무라카미 다다카쓰, 야마다 다카사다 |
미노 슈 | 도쿠야마 노리히데, 아오키 가즈시게, 아오키 시게나오, 오타 가즈요시, 이비 미쓰마사, 오시마 미쓰요시, 오시마 미쓰나리, 오시마 미쓰마사, 나가에 가케타카 |
오미 슈 | 에구치 마사요시, 나가쓰카 마사이에, 나가쓰카 나오요시, 아사미 다다자네, 아카타 겐, 안요지 다카아키, 이가이 히데사다, 구니료 한베에, 다가 사다요시, 다테베 도시토쿠, 와타나베 한자에몬 |
와카사 슈 | 아와야 가쓰히사, 구마가이 나오유키, 다케다 모토아키, 이치미 마사쓰네, 시라이 마사타네 |
에치젠 슈 | 사카이 나오마사, 쓰쓰미 노리토시, 마쓰바라 나오모토 |
5. 후손
니와 나가시게는 나중에 일본 북부 시라카와 성의 영주가 되었고, 나가히데의 손자 니와 미쓰시게 시대에는 가문의 10만 석(koku)에 달하는 영지가 니혼마쓰로 옮겨졌으며, 에도 시대 내내 그곳에 남아 있었다.[15]
나가히데의 사후, 뒤를 이은 나가시게는 군율 위반으로 히데요시에게 영지와 나가히데 시대의 유력 가신을 빼앗겼다. 이는 히데요시에 의한 니와 가문의 세력 삭감 정책이었다고 한다. 나가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개역되었지만, 후에 후루와타리 번주가 되어 다이묘로 부활했다. 이후 니와 가문은 에자키 번, 다나구라 번, 시라카와 번으로 전봉되었고, 나가시게의 아들 미쓰시게 대에 무쓰 니혼마쓰 번으로 전봉되어, 이후 대대로 니혼마쓰 번주로서 메이지를 맞이했다. 12대 니와 나가쿠니는 아들이 없어 여러 양자를 맞이했는데, 우와지마 다테 가문에서 온 사위 나가노리의 자손이 뒤를 이어 본가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 셋째 아들 후지 도타카 요시는 당초 하시바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의 양자가 되었지만, 이후 히데나가의 가신 도도 다카토라의 양자가 되었다. 타카요시는 도도 씨의 분가 나바리 도도가의 시조가 되었고, 이 가계도 메이지 시대를 맞이했다.
- 넷째 아들 하치야 나오마사는 하치야 요리타카의 양자가 되었지만, 요절했다.
- 여섯째 아들 나가쓰구(나가쓰구)는 막부 하타모토로서 1,500석으로 섬겼다. 나가쓰구 이후 나가요시(나가이치?) - 나가모리 - 나가미치로 이어졌지만, 본가인 니혼마쓰 번 제3대 번주 니와 히데노부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나가미치의 장남을 양자로 삼고 히데노부의 여동생을 그 아내로 삼았다. 이 양자가 제4대 번주 다카히로가 되었다. 하타모토 가문은 차남 나가토시가 상속하여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이나바 노리미치의 부인을 통해 닌코 천황의 선조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혈통은 현재의 황실로 이어지고 있다.
- 격투가 니와 게이스케, 프로 축구 선수 니와 다이키 형제는 자손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으며,[15] 특히 다이키는 후손을 자칭하지만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16]
6. 평가
- 오다 가문(織田家) 가신들 사이에서는 "목면(木綿) 후지키치(藤吉), 쌀 오고로자(五郎左), 시바타(柴田)에게 걸리고, 사쿠마(佐久間)에게 물러난다"라는 평판이 있었다(翁草일본어). 여기서 목면은 하시바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말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귀중한 존재라는 뜻이다. '''쌀 오고로자'''는 나가히데를 비유한 것으로, 매우 능숙하여 어떤 임무라도 수행하고 쌀처럼 상하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의미이다.[1]
- 나가히데는 방면군 사령관 지위는 얻지 못했지만, 아즈치성(安土城) 불사봉행(普請奉行) 등 기나이(畿内) 행정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했다. 또한 각 방면 원군으로서 보급로 확보와 현지 전후 처리에 활약하는 등 행정과 군사 양면에서 쌀 오고로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활동을 계속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았다.
- 기슈 회의(清洲会議)에서도 오다 가문 앞날을 결정하는 원로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이 무렵 나가히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와 대등한 입장이 아니었고, 그 세력 차이는 명백했다.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 후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히데요시 가신인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正勝)와, 지위상으로는 오다가 중신인 나가히데에게 보낸 승전 축하 선물 내용과 첨부된 서한 내용이 일치했다. 이를 통해 다른 다이묘들에게도 "히데요시의 가신"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1575년 7월, 노부나가가 가신들에게 관위 하사와 증성(贈姓)을 상소했을 때,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는 이레토우(惟任)라는 큐슈(九州) 명문가 성씨를 받았다. 이때 나가히데에게도 이레즈미(惟住)라는 큐슈 명문가 성씨가 주어졌지만, "저는 평생 오고로자(五郎左)로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며 거절했다.
- 나가히데는 명도(名刀) "아자마루(あざ丸)"를 소유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칼을 얻은 후 나가히데는 안질(眼疾)에 시달렸다. 이 칼은 아쓰타 신궁(熱田神宮) 신직이었던 오다 측 무장 센슈키 미쓰히로(千秋季光)가 소유했던 것이었다. 가나구치 전투(加納口の戦い)에서 센슈키가 전사했을 때 사이토 도산(斎藤道三) 가신 카게야마 카즈나리(陰山一景)가 노획했지만, 곧 오다 측과의 싸움에서 양쪽 눈을 잃고 죽었다는 불길한 사연이 있었다. 나가히데는 주변 사람들 충고에 따라 "아자마루"를 아쓰타 신궁에 봉납했고, 이후 안질이 나았다고 한다(信長公記일본어).
- 다케다 가문(武田家) 멸망 후, 나가히데는 노부나가 배려로 휴가를 받아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타가 쓰네노리(多賀常則)와 함께 구사쓰 온천(草津温泉)에서 온천 요양을 했다.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3]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1
[4]
서적
The Samurai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7
[5]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1
[6]
서적
大日本史料第10巻、第24号
[7]
서적
新修彦根市史 第1巻(通史編 古代・中世)
彦根市史編集委員会
2007-01
[8]
웹사이트
『福井県史』通史編|通史編2 中世|第四章 戦国大名の領国支配|第四節 朝倉・武田両氏の滅亡|五 朝倉義景の近江出兵と滅亡|再三の近江出兵と滅亡
https://www.library-[...]
福井県文書館
2022-12-03
[9]
웹사이트
『福井県史』通史編|通史編3 近世一|第一章 織豊期の越前・若狭|第二節 織田期の大名|三 丹羽長秀の若狭支配|若狭三郡の支配
https://www.library-[...]
福井県文書館
2022-12-03
[10]
간행물
丹羽長秀――信長・秀吉が重んじた男
2022-03
[11]
간행물
豊臣期における越前・若狭の領主
1994
[12]
웹사이트
『福井県史』通史編|通史編3 近世一|第一章 織豊期の越前・若狭|第三節 豊臣政権と若越|一 越前・若狭の大名配置|賎ケ嶽の戦い後
https://www.library-[...]
福井県文書館
2022-12-03
[13]
서적
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吉川弘文館
[14]
서적
甲子夜話続篇
平凡社
[15]
웹사이트
「丹羽長秀の血を引く男」万能DFの丹羽、初選出に“武者震い”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15-08-02
[16]
서적
エル・ゴラッソJリーグプレーヤーズガイド2017(スクワッド)
[17]
웹사이트
麒麟がくる:“仮面ライダー斬鬼”松田賢二が出演 丹羽長秀役で明日放送第43回に登場
https://mantan-web.j[...]
MANTANWEB(まんたんウェブ)
2021-01-3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