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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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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백작은 러시아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그는 1827년 페이지 군단을 졸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11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이후 코카서스 지역에서 복무하며 캅카스 전쟁에 참전했고, 1847년 동시베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아무르 강 유역을 탐험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858년 아이훈 조약을 통해 아무르 강을 국경으로 확정하고, '아무르스키 백작' 칭호를 받았다. 말년에는 국가평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 그의 이름을 딴 반도가 존재하고, 하바롭스크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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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1863); 콘스탄틴 마코프스키의 초상화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1863); 콘스탄틴 마코프스키의 초상화
이름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로마자 표기Nikolay Nikolayevich Muravyov-Amursky
별칭아무르스키 (코그노멘)
출생1809년 8월 23일
출생지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사망1881년 11월 30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묻힌 곳파리, 프랑스 (1992년 이전)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1992년 이후)
서명200px
군사 경력
소속러시아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27년–1861년
최종 계급보병대장
참전 전투캅카스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1828년~1829년)
11월 봉기
크림 전쟁
훈장성 게오르기우스 훈장
성 블라디미르 훈장
기타 정보
활동
경력총독

2. 초기 생애 및 경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827년 페이지 군단을 졸업했다. 1828~1829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바르나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831년 폴란드에서 11월 봉기 진압에도 참여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1833년 군에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했다. 그러나 1838년 예브게니 골로빈 장군의 부관으로 코카서스 지역에서 복무하기 위해 현역으로 복귀했다. 캅카스 전쟁 중 산악 민족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1840년 무라비요프는 흑해 연안 방어선의 한 구역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 기간 동안 우비흐인 진압에 참여했다. 1841년에 소장으로 진급했지만, 질병으로 인해 군에서 영구적으로 은퇴해야 했다. 그는 내무부로 전출되어 1846년 툴라주의 군정 및 민정 총독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열망으로 현(구베르니야) 농업 협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무라비요프는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농노제 폐지를 제안한 최초의 총독이었으며, 9명의 지역 토지 소유주가 서명한 동의안이었다. 차르는 이 청원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무라비요프를 항상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

3. 동시베리아 총독

1847년 9월 5일, 무라비요프이르쿠츠크예니세이스크 (동시베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 당시 38세였던 무라비요프의 임명은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카를 네셀로데 외무부 장관은 반대했지만,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중국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2]

무라비요프는 동시베리아 총독으로서 공금 횡령을 근절하고, 원주민에게 러시아어 교육을 의무화했다. 또한 미하일 바쿠닌과 같은 정치적 망명자들을 활용하여 아무르강 북쪽 지역을 탐험하고 정착을 추진하여, 정부의 경계를 사기도 했다. 그는 종교를 지역 통제 수단으로 활용하여 기독교 교회 건설을 지원하는 한편, 샤머니즘불교 등 지역 종교 신념도 장려했다.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는 아무르 강 항행권을 잃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아무르강 하류의 하구부 항행권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않았다. 무라비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겐나디 네벨스코이의 탐험을 지원하여 아무르강 하구와 사할린에 니콜라예프스크를 비롯한 러시아 정착지를 건설하며 청나라에 대한 강경 정책을 추진했다.

3. 1. 크림 전쟁과 극동 방어

1853년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니콜라이 1세는 무라비요프에게 아무르강 하구로 군대를 파병할 권한을 부여했다.[2] 1854년 5월, 무라비요프는 증기선에 이끌린 77척의 바지선과 뗏목으로 이루어진 선대를 아무르강 하구로 향하게 했다.[2] 이 선대의 일부는 오호츠크해를 건너 캄차카반도의 아바차 만으로 이동하여, 페트로파블롭스크를 방어하기 위한 포병대를 설치했다.[2] 당시 크림 전쟁의 여파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아바차 만을 공격해오고 있었는데, 무라비요프가 보급한 포병대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하는 데 큰 기여[2]를 했다. 1855년에는 최초의 러시아인 식민자들이 아무르강 하구에 도착했다.[2]

4.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1858년, 무라비요프는 청나라 관리 이산아이훈 조약을 체결했다. 청나라는 처음에는 아무르강을 경계로 하는 것에 반대하며, 인접 영토를 러시아청나라가 공동 통제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러나 무라비요프는 러시아의 의도가 평화롭고 건설적임을 청나라에 설득하여, 아무르강을 국경으로 하고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공로로 무라비요프는 '아무르스키 백작'(아무르강의 백작) 칭호를 받았다. 조약 체결은 베이징의 대규모 조명 행사와 시베리아 주요 도시들의 축제로 기념되었다.[3]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아이훈 조약은 재확인되고 확장되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우수리강 동쪽 지역(프리모리예)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여 영토를 추가로 넓혔다.

4. 1. 일본과의 관계

1853년부터 1854년에 걸쳐 무라비요프는 사할린의 영유권을 두고 일본과 갈등을 빚었다. 1859년에는 군함을 이끌고 일본 에도 만에 진입하여 사할린 전역이 러시아 영토임을 주장했으나, 에도 막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5. 말년 및 평가

1861년 동시베리아 총독직에서 물러나 국가평의회 위원이 되었다.[1] 1868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1881년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1] 그의 업적을 기려 하바롭스크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가 위치한 반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로 명명되었다.[1] 1992년 유해는 파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장되어 재매장되었다.[1]

6. 기념

그를 기념하여 표트르 대제 만에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가 있으며, 그 끝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위치한다. 1992년 그의 유해는 파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져 시내 중심지에 재매장되었다.

1891년 하바롭스크에 그의 청동상이 세워졌으나, 1929년 철거되었다가 1993년 재건되었다. 이 동상은 2006년 발행된 5000 루블 지폐에 하바롭스크 다리와 함께 인쇄되어 있다. 하바롭스크 중심 번화가는 소련 붕괴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되었다.

6. 1. 하바롭스크 동상

하바롭스크에 있는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기념비, 5000 루블 지폐에 묘사됨


1891년 하바롭스크 근처 아무르강 절벽 위에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의 청동상이 세워졌다. 1929년 이 동상은 철거되고 레닌의 동상으로 대체되었으며, 1989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993년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기념비가 복원되었다.

이 기념비는 아무르강을 가로지르는 하바롭스크 대교와 함께 2006년 7월 31일 러시아 연방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5000 루블 지폐에 묘사되어 있다.

6. 2.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

블라디보스토크는 표트르 대제 만의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에 위치해 있으며, 이 반도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1992년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의 유해는 파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져 시내 중심지에 재매장되었다.

6. 3. 기타

1891년, 하바롭스크 근처 아무르 강가의 절벽을 마주보며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의 청동상이 세워졌다. 1929년에 이 상은 철거되어 레닌상으로 대체되었지만, 1989년에는 레닌상이 철거되었고, 1993년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의 상이 재건되었다.

1992년,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의 유해가 파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중심부로 옮겨져 재매장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이 정치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에 위치해 있다. 2012년에는 그가 1850년대에 방문했던 골든 혼 만을 내려다보는 그의 묘 위에 총독의 청동상이 설치되었다.

아무르 강을 건너는 하바롭스크 다리를 바라보는 이 청동상은 2006년 7월 31일 러시아 연방 중앙은행이 발행한 최고액 지폐인 5000 루블 지폐에 인쇄되어 있다. 하바롭스크 중심에 있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번화가는 소련 붕괴 후, 카를 마르크스 거리에서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거리로 개명되었다.

표트르 대제 만에는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라는 반도가 있으며, 그 끝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위치한다.

참조

[1] 서적 Imperial rivals: China, Russia, and their disputed frontier https://books.google[...] M.E. Sharpe
[2] 서적 Philipp Franz von Siebold and Russian Policy and Action on Opening Japan to the West in the Middle of the Nineteenth Century Iudicum
[3] 뉴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Муравьёв-Амурский http://www.peoples.r[...] Алфави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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