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보브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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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이 보브리코프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898년부터 1904년까지 핀란드 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핀란드를 러시아화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여 핀란드인들의 반발을 샀으며, 1904년 핀란드 민족주의자 에우겐 샤우만에게 암살당했다. 보브리코프는 1858년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복무했으며, 1898년 핀란드 총독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여러 군직을 거쳤다. 핀란드 총독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핀란드 군대의 러시아화, 러시아어 사용 의무화 등 핀란드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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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보브리코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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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839년 1월 27일 |
사망일 | 1904년 6월 17일 (65세) |
출생지 | 스트렐나, 페테르고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
사망지 | 헬싱키, 핀란드 대공국 |
안장 장소 | 성 세르기우스 삼위일체 대수도원 |
통치 | |
군주 | 니콜라이 2세 |
직위 | 핀란드 총독 |
임기 시작 | 1898년 8월 29일 |
임기 종료 | 1904년 6월 17일 |
전임 | 프레데리크 헤이덴 |
후임 | 이반 오볼렌스키 |
군사 복무 | |
소속 | 러시아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58년–1904년 |
계급 | 보병대장 |
지휘 | (핀란드 군관구) |
참전 |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 |
훈장 및 표창 | |
훈장 및 표창 | 아래 참조 |
이름 | |
원어 이름 (러시아어) |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보브리코프) |
로마자 표기 | Nikolai Ivanovich Bobrikov |
2. 약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이다.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858년 | 러시아 제국군 입대 및 장교 임관, 니콜라이 응용과학학교 학위 취득 |
- | 카잔 군관구 근무 |
1867년 | 노브고로드 보병사단 참모부 근무 |
1869년 | 대령 승진 |
1870년 |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친위대(근위 연대) 근무. 이 시기 궁정과의 접촉 기회를 얻었다. |
1876년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주재 무관 근무 |
1877년-1878년 |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78년 | 소장 승진 |
1880년 | 혁명분자 진압 특수위원회 근무 |
1884년 | 중장 승진, 상트페테르부르크 친위대 및 군관구 참모장 근무 |
1897년 | 보병대장 승진 |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스트렐나 출신으로, 아버지는 군의관이었다. 1858년 제1 사관후보생 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으며, 이후 니콜라이 참모본부 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카잔 군관구와 노브고로드 등지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고, 1870년대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근위대 근무, 루마니아 주재 무관 파견,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등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소장(1878), 중장(1884), 보병대장(1897)으로 진급했다.[4][2][5]
1898년, 니콜라이 2세 황제에 의해 핀란드 대공국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보브리코프는 핀란드에서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여 핀란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899년, 니콜라이 2세는 '2월 칙령'에 서명했는데, 이는 고조되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러시아 제국의 법률이 핀란드의 법률보다 우선한다고 규정한 것이었다. 이 칙령은 1809년부터 러시아의 보호 아래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누려왔던 핀란드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조치였다. 핀란드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50만 명의 서명을 모아 칙령 철회를 청원했으나, 황제의 절대 권력을 중시했던 니콜라이 2세는 청원 사절단의 접견조차 거부했다.
1900년, 보브리코프 총독은 핀란드 내 모든 관청의 공문서를 러시아어로 작성하도록 하고, 학교 교육에서도 러시아어 교육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01년에는 핀란드군을 해체하고, 핀란드인들을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하여 러시아 전역으로 파견하도록 강제했다. (핀란드에서의 징병은 1905년에 폐지되었다.)
1903년, 보브리코프는 핀란드 내에서 관료 임명권, 신문 발행 정지권 등 사실상의 독재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결국 1904년 6월 16일, 핀란드 민족주의자 Eugen Schauman|오이겐 샤우만fi에 의해 헬싱키에서 암살되었다. 샤우만은 보브리코프에게 세 발의 총을 쏘았고, 보브리코프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밤 사망했다. 샤우만은 총격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생애
1898년, 니콜라이 2세 황제에 의해 핀란드 총독 겸 핀란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핀란드의 자치권을 축소하고 러시아 제국으로 통합시키려는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는 핀란드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강압적인 통치 시기는 핀란드 역사에서 '압제 시대'(sortovuodet|소르토부오데트fi)로 불린다.[1]
결국 1904년 6월 16일, 헬싱키에서 핀란드 민족주의자 예겐 샤우만에게 암살당했다.[1]
3. 1. 유년 시절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보브리코프는 1839년 1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스트렐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의관으로 군의학 위원회 위원까지 지낸 이반 바실리예비치 보브리코프(1798–1883)였고, 어머니는 발트 독일인 혈통의 알렉산드라 시랜드였다.
보브리코프는 제1 사관후보생 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하여 러시아 제국 근위대에서 복무했다. 이후 카잔 군관구와 노브고로드에서 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했으며, 1869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1년 뒤인 1870년, 황실 근위대에서 특별 임무를 맡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전출되면서 황실과 가까워질 기회를 얻었다. 1878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개인적인 삶에서 보브리코프는 1867년 카잔에서 올가 페트로브나 레온티예바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1895년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장군의 딸인 예카테리나 슈타엘 폰 홀스타인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더 낳았다. 그의 아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브리코프(1882–1956)는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어 대령까지 진급했다. 사위 중 한 명은 노르웨이 출신의 핀란드 장교 요하네스 홀름센으로, 그는 훗날 중장 계급에 올랐다. 보브리코프의 딸 리온보우 보브리코프-홀름센(1880–1939)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의 시녀였으며, 요하네스 홀름센과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남편 홀름센 장군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 노르웨이에서 여생을 보냈고, 리온보우는 러시아 혁명 이후 자녀들과 함께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런던, 베를린, 파리 등지에서 난민 생활을 하다가 1939년 파리에서 사망했다.[3]
보브리코프는 활기차고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견해는 매우 강한 러시아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2]
3. 2. 군 경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인 니콜라이 보브리코프는 1858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다. 이후 니콜라이 참모본부 학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카잔 군관구 참모부에서 근무했다. 노브고로드에서는 사단 참모장을 역임했으며, 1867년부터는 제22 보병 사단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1869년 대령으로 진급했고,[4][2] 이듬해인 1870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전출되어 근위 연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궁정과의 접촉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876년에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러시아 군사 관계자로 파견되었으며,[4]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1878년 소장으로 진급했다.[4]
1880년, 알렉산드르 2세는 보브리코프를 미하일 로리스-멜리코프가 이끄는 혁명분자 진압 특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는 겨울 궁전에서 발생한 폭탄 공격 사건 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 1884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의 경비대 참모장이 되었고, 1897년에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2][4][5]
3. 3. 핀란드 총독
1898년, 니콜라이 2세 황제는 보브리코프를 핀란드 총독 겸 핀란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총독으로 부임한 보브리코프는 핀란드 대공국이 누리고 있던 광범위한 자치권을 축소하고 러시아 제국으로 완전히 통합시키려는 러시아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는 통일된 러시아 국가를 만들려는 제국의 목표와 맞닿아 있었으나, 핀란드의 고유한 지위와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보브리코프는 핀란드 군대의 해체, 러시아어 사용 강제, 국무장관 권한 제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러시아화를 밀어붙였다.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은 핀란드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보브리코프는 핀란드에서 극도의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정책은 핀란드 역사에서 '압제 시대'(sortovuodet|소르토부오데트fi)로 불리는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1899년 니콜라이 2세가 서명한 2월 선언은 핀란드 의회의 입법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조치로, 핀란드 헌정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핀란드인들은 대규모 청원을 통해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보브리코프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압하기 위해 1903년 니콜라이 2세로부터 관료 해임권, 언론 폐쇄권 등 독재적인 권한을 부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강압 통치는 계속되는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1904년 6월 16일 핀란드 민족주의자 Eugen Schauman|에우겐 샤우만fi에 의해 헬싱키에서 암살되었다. 샤우만은 보브리코프를 저격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3. 1. 2월 선언
1898년, 니콜라이 2세 황제는 보브리코프를 핀란드 총독 겸 핀란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임명 직후 보브리코프는 대공국의 광범위한 자치권을 축소하고 러시아화 정책을 도입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는 통일되고 불가분한 러시아 국가를 만들려는 제정 러시아의 목표와 맞닿아 있었으며, 핀란드 고유의 자치권과 충돌했다. 보브리코프의 이러한 정책 방향은 핀란드 내에서 큰 반발을 샀고, 그는 핀란드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1]
1899년, 니콜라이 2세는 보브리코프의 구상을 반영하여 2월 선언(Helmikuun manifesti|헬미쿤 마니페스티fi)에 서명했다. 이 선언은 러시아 제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핀란드 신분 의회의 입법권을 무시하고 러시아법을 우선 적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핀란드인들은 이 선언을 기존 헌법 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핀란드 전통적 관점에서 최초의 "압제 시대"(sortovuodet|소르토부오데트fi)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핀란드 전역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선언 철회를 요구하는 대 청원에 서명하여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 황제는 청원서를 가져온 대표단과의 만남조차 거부했다.[1][2][9] 보브리코프는 핀란드인들의 대규모 청원 운동에 놀라움과 분노를 표하며 이를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했다.[2][9] 그는 선언 발표 후 스웨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핀란드의 사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황제의 선언에 만족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6]
2월 선언은 핀란드의 체계적인 러시아화의 초석이 되었다.[5][8] 보브리코프는 선언 이후 러시아화 정책을 더욱 강하게 추진했다. 1900년에는 정부 기관의 모든 공문서를 러시아어로 작성하고 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육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 지원을 받아 러시아어 신문인 ''핀란드스카야 가제타''(Финляндская газета|핀란드스카야 가제타ru)를 창간하기도 했다.[10] 1901년에는 핀란드 군대를 해체하고, 핀란드 징집병들이 러시아 제국 전역의 러시아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항으로 1902년 첫 소집 당시 징집 대상자의 42%만이 응소했으며, 결국 1905년 핀란드에서의 징병 제도는 폐지되었다.[1] 1903년 보브리코프는 니콜라이 2세로부터 정부 관리를 임의로 해임하고 신문을 폐쇄할 수 있는 독재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3. 3. 2. 러시아화 정책
1898년, 니콜라이 2세 황제는 보브리코프를 핀란드 총독 겸 핀란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임명 직후 보브리코프는 핀란드 대공국의 광범위한 자치권을 축소하고 러시아 제국으로 통합하려는 러시아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는 통일되고 불가분한 러시아 국가를 만들려는 제국의 야망과 핀란드의 자치권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보브리코프는 이러한 정책 추진으로 인해 핀란드 내에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추진한 주요 러시아화 정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브리코프는 핀란드의 체계적인 러시아화의 기반이 된 2월 선언(1899년)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5][8] 1899년 니콜라이 2세가 서명한 이 선언은 러시아 제국의 이익에 부합할 경우, 황제가 핀란드 신분 의회의 입법을 무시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핀란드에서는 이 선언을 핀란드 헌법에 대한 쿠데타로 간주했으며, 이 시기를 최초의 '압제 시대(sortovuodet|소르토부오데트fi)'로 부른다. 이에 핀란드인 50만 명이 선언 철회를 요구하는 대 청원에 서명하여 니콜라이 2세에게 제출했으나, 황제는 청원서를 가져온 대표단조차 만나주지 않았다.[1] 보브리코프는 이러한 대규모 청원 운동에 놀라움과 분노를 표하며 불법으로 간주했고,[2][9] 선언 발표 후 "핀란드의 사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황제의 선언에 만족한다"고 말하기도 했다.[6]
1900년, 보브리코프는 정부 기관의 모든 공문서를 러시아어로 작성하고 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육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 지원을 받아 러시아어 신문인 ''핀란드스카야 가제타''를 창간했으며, 초기에는 ''수오멘 사노맛''이라는 이름의 핀란드어판도 발행했다.[10]
1901년에는 핀란드군이 해체되었고, 핀란드 징집병들은 러시아 제국 어디에서든 러시아 군대와 함께 복무하도록 강제되었다. 그러나 1902년 첫 소집 당시 징집 대상자의 42%만이 응소하는 등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핀란드인들의 저항과 불신으로 인해 1905년 핀란드에서의 징병은 폐지되었다.[1]
1903년, 보브리코프는 니콜라이 2세로부터 정부 관리를 임의로 해임하고 신문을 폐쇄할 수 있는 독재적인 권한을 부여받아 핀란드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3. 3. 3. 러시아 행상인과 토지 재분배 소문
핀란드 총독이었던 보브리코프는 핀란드의 토지 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핀란드인들은 보브리코프의 약속을 믿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 제국의 의도를 의심하며 음모로 간주했다.
당시 약 1,000명에서 2,0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라우쿠르뤼새"(laukkuryssäfi, "가방 러시아인"이라는 뜻으로, 주로 백 카렐리아 출신의 행상인을 지칭) 들이 핀란드 전역을 돌아다녔다. 이들은 러시아가 토지 없는 사람들과 농민들을 위해 얼마나 훌륭하게 일을 처리했는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며, 곧 무상으로 토지 재분배가 시작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소문은 1899년 2월부터 점점 더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핀란드의 노동 운동, 청년 단체, 그리고 에우겐 사우만과 같은 학생들은 러시아의 실제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며 소문에 반박하는 활동을 벌였다. 포르보에 본사를 둔 신문 ''우시마''는 이 소문이 ''모스코프스키예 베도모스티''의 비밀 핀란드 특파원이었던 P. I. 메사로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메사로시는 1897년에 핀란드를 러시아 제국에 동화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책을 출판한 인물로, 보브리코프의 정보원 역할을 했다. 그는 1900년 봄에 핀란드를 떠났다.
스웨덴 기자 발프리드 스펭베리는 러시아가 이미 발트해 연안 국가들에서 사람들을 정교회로 개종시키려 했던 것처럼, 핀란드의 토지 없는 사람들 사이에도 요원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법학 교수 빌헬름 키데니우스는 보브리코프가 소문을 퍼뜨리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1900년, 보브리코프가 창간한 러시아어 신문 ''핀란드스카야 가제타''는 러시아 관리만이 핀란드 농민의 진정한 친구라고 주장하며 선전을 뒷받침했다. 상원 의원 그리펜베르크는 러시아 행상인들의 선동이 핀란드 사회 각 계급 사이에 의도적으로 불신을 퍼뜨리려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대체로 핀란드 사람들은 러시아 행상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고, 소문은 일부 시골 지역에서만 통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브리코프의 주도로 1900년 7월 2일, 러시아 행상인들의 무역 활동을 합법화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3. 4. 암살
1898년, 니콜라이 2세에 의해 핀란드 총독으로 임명된 보브리코프는 핀란드 국민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899년, 니콜라이 2세는 2월 칙령에 서명했는데, 이는 고조되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러시아 제국의 법률이 핀란드의 법률보다 우선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칙령은 1809년부터 러시아의 보호 아래 일정 수준의 자치를 누려온 핀란드의 자치권을 사실상 무너뜨리는 조치였다. 핀란드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50만 명의 서명을 모아 황제에게 칙령 철회를 청원했으나, 전제 권력을 중시한 니콜라이 2세는 사절단의 알현조차 거부했다.
1900년, 보브리코프 총독은 핀란드의 모든 관청 공문서를 러시아어로 작성하도록 하고, 학교에서도 러시아어 교육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01년에는 핀란드군을 폐지하고 핀란드인을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하여 러시아 전역으로 파견하도록 강제했으며, 1905년에는 핀란드에서의 징병 자체를 폐지했다. 1903년에는 관료 인사권과 신문 발행 정지권을 포함한 독재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에 대한 반발로, 1904년 6월 16일, 보브리코프는 헬싱키에서 핀란드 민족주의자 예겐 샤우만에게 암살당했다. 샤우만은 보브리코프에게 세 발의 총을 쏜 뒤, 자신에게 두 발을 쏘아 즉사했다. 치명상을 입은 보브리코프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새벽 사망했다.[1] 당시 사건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날짜는 구력)6월 3일 오전 11시, 상원 건물 2층 계단에서 핀란드 총독 겸 군 사령관이자 부관인 N. I. 보브리코프의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핀란드 주요 학교 관리의 관리이자 전 상원 직원, 전 상원 의원의 아들인 예브게니 샤우만이 총독에게 세 발의 총을 쐈습니다. 한 발은 목에 맞아 치명적이지 않았고, 다른 발은 훈장을 맞았으며, 세 번째는 복부에 맞았습니다. 러시아 의사가 응급 처치를 했고, 총독은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의사들은 즉시 수술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인지했습니다. 부상자는 성찬을 받았습니다. 복부에서 총알이 제거되었습니다. 많은 혈전이 발견되었고, 총알에 의해 손상된 소장의 일부가 제거되었습니다. 부상자는 6월 4일 밤 조용히 사망했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자살했습니다.
4. 수상 내역
훈장 이미지 | 훈장 이름 | 등급 | 수여 날짜 | 비고 |
---|---|---|---|---|
성 안나 훈장 | 3등급 | 1865년 4월 14일 |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 2등급 | |||
성 안나 훈장 | 2등급 | 1869년 11월 17일 | 황실 왕관 추가 (1873년 8월 30일) | |
![]()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4등급 | 1871년 8월 30일 |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3등급 | 1875년 8월 30일 |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 1등급 | 1878년 8월 30일 | ||
성 안나 훈장 | 1등급 | 1880년 8월 30일 |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2등급 | 1883년 5월 15일 | ||
백색 독수리 훈장 | 1887년 8월 30일 | |||
성 알렉산더 넵스키 훈장 | 1891년 8월 30일 | 다이아몬드 추가 (1896년 5월 14일) |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1등급 | 1902년 1월 1일 |
참조
[1]
저널
Chemistry and Politics: Edvard Immanuel Hjelt (1855–1921)
http://chemeducator.[...]
[2]
서적
Kansallinen elämänkerrasto, volume 1
WSOY
[3]
뉴스
Suomen ent. kenr. kuvernöörin Bobrikoffin tytär kuollut
https://digi.kansall[...]
Helsingin Sanomat
1939-01-30
[4]
서적
Valtakunta ja rajamaa. N. I. Bobrikov Suomen kenraalikuvernöörinä 1898 - 1904
WSOY
[5]
서적
Suomen kansan aikakirjat VIII
Otava
[6]
서적
Coup d'etat in Finland in 1899. A few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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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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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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