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기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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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기 카툰은 콩기라트 씨족 출신으로, 원나라 황태자 다르마발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남편 사후, 아들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얻었고, 특히 아들 아유르바르와다가 황제가 된 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기는 융복궁을 계승하여 흥성궁을 세우고, 콩기라트부 출신 황후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며 정치적 실세를 장악했다. 손자 시데발라를 옹립했으나, 시데발라가 친정을 시도하자 이를 후회했으며, 시데발라 사후 소헌원성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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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 카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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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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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
작위 | 원 왕조의 황후 |
재위 기간 | 1307년 6월 1일 – 1320년 3월 1일 |
유형 | 재위 |
이전 | 쾨케진 황후 |
다음 | 라드나시리 황후 |
작위 | 원 왕조의 태후 |
재위 기간 | 1320년 4월 19일 – 1322년 11월 1일 |
유형 | 재위 |
이전 | 사도청 (남송 시대) |
다음 | 부다시리 태후 |
개인 정보 | |
출생 추정 | 기원후 1262년경 |
사망 일자 | 1322년 11월 1일 |
배우자 | 다르마발라 |
자녀 | 퀼리그 칸 |
자녀 | 아유르바르와다 부얀투 칸 |
가문 | 홍기라트 |
아버지 | 쿤두 테무르 |
종교 | 불교 |
칭호 | |
시호 | 소헌원성황후(昭獻元聖皇后) |
몽골어 이름 | |
로마자 표기 | Taji |
2. 생애
콩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원나라 황태자 다르마바라와 혼인하여 훗날 무종이 되는 카이산과 인종이 되는 아유르바르와다 두 아들을 낳았다. 남편 다르마바라가 일찍 사망한 후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아들들을 칸위에 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황태후와 태황태후로서 흥성궁(興聖宮)을 중심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원나라 후기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1. 초기 활동
옹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성씨는 보시쿠르(孛思忽兒)씨족이다. 1266년경 혹은 1260년경, 1262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생일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기는 데이 세첸의 후손으로, 증조부 안진(按陳)은 칭기즈 칸의 정비 보르테 우진 카툰의 형제이자,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정비 차브이 카툰의 친정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안진 노얀의 넷째 아들 나친(納陳)이고, 아버지는 노왕(魯王) 혼도 테무르(渾都帖木兒, Хүндтөмөр)이다. 쿠빌라이 칸의 계비 남브이 카툰과는 6촌 관계이다. 이름은 한자로 탑자(搭子), 단기(妲己)로도 표기하며, 중세 몽골어로 '섬단' 또는 '화려한 비단'을 의미한다.어린 시절과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연왕 친킴 (후의 황태자)의 궁정에서 지내며 그의 차남 다르마발라를 모셨고, 성인이 된 후 1278년경 다르마발라와 혼인했다.[1] 1281년 첫 아들 카이산 (후일의 무종), 1285년 둘째 아들 아유르바르와다 (후일의 인종)를 낳았고, 딸 한 명도 두었으나 이름이나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카이산이 태어난 후 남편 다르마발라는 고려 제주도 주둔군의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다녀오기도 했다.
1292년 남편 다르마발라가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다기는 친킴의 미망인 쾨케진과 동맹을 맺고 홀로 아들들을 키웠다. 당시 유목민 사회의 관습인 형사취수제에 따라 남편의 동생인 테무르 칸과의 재혼이 검토되기도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테무르 칸의 황후 불루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테무르 칸 말년인 1305년에는 불루간에 의해 수도 대도에서 멀리 떨어진 회주의 다르마발라 가문 영지로 아들 아유르바르와다와 함께 보내졌다.
1307년 테무르 칸이 사망하자, 불루간 황후는 무슬림인 안서왕(安西王) 아난다를 새로운 카안으로 옹립하려 했다. 아난다는 오고타이 울루스 및 차가타이 칸국 군대에 맞서 원나라 서부 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인기가 있었고 안서(安西) 지역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수도에서의 기반은 약했다. 이에 반대한 중신들은 비밀리에 다기와 아유르바르와다를 하남(河南)에서 대도로 불러들였다. 다기와 아유르바르와다는 아쿠타이 등 비서성 고위 관료들의 지지를 받아 불루간과 아난다를 제거하는 쿠데타에 성공했다. 이후 알타이 산맥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장남 카이산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상두에서 카안으로 즉위했다(원 무종). 아유르바르와다는 황태자가 되었고, 다기는 황태후로 책봉되었다. 이때 사망한 남편 다르마발라도 소성연효황제(昭聖衍孝皇帝)로 추존되고 묘호는 순종으로 정해졌다. 다기는 시어머니 쾨케진이 소유했던 융복궁을 물려받았고, 곧이어 다기를 위한 흥성궁이 세워져 융복궁을 통합했다. 흥성궁은 대대로 옹기라트 부족 출신 황후들이 소유해 온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계승하여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일설에는 다르마발라의 본부인이 불임이었고, 위왕(魏王) 에무게, 카이산, 아유르바르와다 및 노국대장공주 상가라기(桑哥剌吉)는 모두 편비 곽씨(郭氏)의 소생이며, 다기가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를 입적하여 자신의 아들처럼 키웠다는 루머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2. 2. 남편 사망 이후
1294년 1월 쿠빌라이 카안이 사망하고 그해 4월 테무르가 성종으로 즉위하였다. 성종은 어머니 코코친 카툰을 황태후로 책봉했다. 시어머니 코코진 카툰의 배려로 다기와 그녀의 아들들은 황궁에서 지낼 수 있었으며, 다기는 이맹 등 저명한 유학자를 초빙하여 둘째 아들 아유르바르와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성종의 계비가 된 불루간 대카툰은 영민한 다기를 경계하였다. 당시 유목민의 풍습인 수계(형사취수제)에 따라 남편 다르마발라의 동생인 성종과의 재혼이 논의되었으나, 성종의 황후 불루간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 일로 다기와 불루간은 서로 적대하게 되었고, 불루간은 다기의 강인하고 영리한 성품을 더욱 경계하였다. 결국 1305년 12월, 혹은 성종 즉위 직후 불루간에 의해 다기와 아들 아유르바르와다는 수도 대도에서 멀리 떨어진 회주(懷州, 현 허난 성 자오쭤 시)의 남편 영지로 추방되었다.
1307년 성종 테무르가 사망하자, 불루간은 방계 황족인 아난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이에 반대하는 중신들은 비밀리에 다기와 아유르바르와다를 대도로 불러들였고, 이들은 쿠데타에 가담하여 불루간과 아난다를 제거했다. 이후 알타이 산맥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다기의 장남 카이산이 귀환하여 카안(원 무종)으로 즉위했다. 아유르바르와다는 황태자가 되었고, 다기는 황태후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 사망한 남편 다르마발라도 소성연효황제로 추존되고 묘호는 순종(順宗)으로 정해졌다.
황태후가 된 다기는 시어머니 코코진이 소유했던 융복궁을 물려받았고, 곧이어 자신을 위한 흥성궁이 세워져 융복궁을 병합했다. 흥성궁은 대대로 콩기라트 부족 출신 황후들이 소유해 온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관리하는 기구가 되었으며, 그 규모는 하나의 왕국에 필적할 정도였다. 역사학자 오카다 히데히로는 콩기라트 출신 황후가 흥성궁을 통해 실권을 장악했던 이 시기를 "훈기라트 (콩기라트) 시대"라고 칭하기도 했다.
1311년, 카이산(무종)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자, 다기가 총애하던 아들 아유르바르와다가 인종으로 즉위했다. 인종 즉위 후 카이산의 측근들은 대거 숙청되었고, 다기의 총신 테무델을 비롯한 흥성궁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본래 카이산은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세우는 대신 다음 칸위는 자신의 아들 코실라에게 넘기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다기는 코실라가 어리고 영특하여 장차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기 어려울 것을 우려하여 이 약속을 파기하고,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들이자 유순한 성격의 시데바라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아유르바르와다(인종)의 치세 동안 칸은 실권이 거의 없었고, 다기와 그녀의 측근 테무델이 정치를 좌우했다. 칸의 칙령보다 황태후의 명령이 더 큰 권위를 가졌으며, 시데바라의 황태자 책봉 역시 다기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1315년 3월, 아유르바르와다는 다기에게 '의천흥성자인소의수원전덕태녕복경황태후'(儀天興聖慈仁昭懿壽元全德泰寧福慶皇太后)라는 긴 존호를 올렸다.
1320년 아유르바르와다(인종)마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10대의 어린 시데바라가 영종으로 즉위했고 다기는 태황태후가 되었다. 시데바라 치세 초반 다기의 권세는 더욱 강해져, 인종 말년에 파면되었던 테무델이 다시 우승상으로 복귀하는 등 다기의 의지가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시데바라는 성장하면서 점차 직접 정치에 나서려는 의지를 보였고, 이에 다기는 그를 옹립한 것을 후회하며 1322년 사망했다. 다기가 죽자 시데바라는 테무델의 세력을 숙청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는 등 강경한 개혁을 추진하여 다기의 영향력을 일소했다.
2. 3. 황태후 시절
1307년 테무르 사후 정치적 혼란기에 다기는 차남 아유르바르와다와 함께 쿠데타에 관여하여 정국 안정에 기여했다. 장남 카이산이 칸으로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었으며, 사망한 남편 다르마바라는 황제로 추존되었다. 황태후로서 다기는 콩기라트 부족 출신 황후들이 대대로 소유해 온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관리하는 흥성궁(興聖宮)을 기반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1311년 카이산이 급사하고 아유르바르와다가 인종으로 즉위하면서 다기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녀는 카이산의 측근을 배제하고 자신의 총신 테무델 등을 중용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또한, 카이산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손자이자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들인 시데바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장차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5] 인종 치세 동안 다기의 권위는 칸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1315년에는 긴 존호를 받아 그 위세를 공식화했다.
1320년 인종이 사망하고 시데바라가 영종으로 즉위하자 태황태후가 되었다. 초기에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성장한 영종이 직접 정치에 나서려 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다기는 시데바라를 옹립한 것을 후회하며 1322년 사망했다. 그녀의 사후 영종은 테무델 세력을 숙청하며 다기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친정을 강화했다.
2. 3. 1. 무종 치세기
1307년 1월 테무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몽골 제국의 고질적인 후계자 분쟁이 다시 불거졌다. 테무르의 황후 불루간은 곤기라트부 출신이 아니었기에, 곤기라트부를 중심으로 한 궁정 귀족들의 힘을 누르고자 좌승상 아구타이 등과 모의하여 테무르의 종제인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방계 혈통인 아난다의 즉위에 반발하고 그가 이슬람 신자인 것에 반감을 품은 중신들과 몽골 귀족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불루간, 아난다, 아구타이를 살해했다.이 쿠데타에는 대도에서 멀리 떨어진 회주에 머물던 다기와 차남 아유르바르와다가 비밀리에 불려와 관여했다. 1307년 3월 아유르바르와다는 대도를 장악하고 불루간, 아난다 등을 처형한 뒤 감국(監國)이 되어 국정을 임시로 맡았다. 한편, 몽골고원 방위를 맡고 있던 다기의 장남 카이산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처음 다기는 카이산에게 동생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제위를 양보하라고 권했지만, 카이산은 캉글리 톡토 등과 논의 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아유르바르와다가 형에게 제위를 양보하면서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다기는 조종하기 쉽다고 판단한 아유르바르와다를 지지했으나, 카이산이 황제가 되는 대신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제(皇太弟)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카이산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직 어려 후계자로 삼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를 수락했다.
1307년 6월 21일, 카이산이 카간으로 즉위(원 무종)하자 다기는 황태후로 책봉되었고, 사망한 남편 다르마발라는 소성연효황제(昭聖衍孝皇帝)로 추존되고 묘호는 순종(順宗)으로 추증되었다. 황태후가 된 다기는 자신의 측근인 테무데르를 재상으로 등용하려 했다. 테무데르는 운남 지역 근무 태만으로 처벌 위기에 놓였으나, 다기의 압력으로 무사했으며 오히려 중앙 정계로 발탁되었다. 테무데르를 비롯한 다기의 측근들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며 옹기라트부의 대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로 인해 아들 아유르바르와다는 테무데르를 미워했고, 무종은 황태후 다기와 옹기라트 세력, 그리고 동생 아유르바르와다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다기는 시어머니 코코친 카툰이 소유했던 융복궁(隆福宮)과 대대로 옹기라트부 출신 황후들이 소유해 온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상속받았다. 1308년에는 흥성궁(興聖宮)을 하사받았고, 이후 융복궁을 병합했다. 이 흥성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에 필적할 규모와 관리 기구를 갖추었다. 1310년 10월 무종은 다기의 거처를 흥성궁이라 칭하고, '의천흥성자인소의수원황태후(儀天興聖慈仁昭懿壽元皇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로 인해 다기는 '흥성황태후' 또는 '흥성태후'로 불리게 되었다.
다기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고려 충선왕과도 친분을 맺고 함께 오대산에서 열린 불교 법회에 참석하기도 했다.[1] 그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옹기라트부와 측근 세력은 무종 치세 동안 권력의 중심에 섰다.
2. 3. 2. 인종 치세기
1311년 장남 카이산(무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인종)가 제위를 이었다. 하지만 인종의 치세 동안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어머니이자 옹기라트 부족 출신인 다기 카툰에게 있었다. 다기는 대대로 옹기라트 출신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을 기반으로 궁정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칸의 명령보다 모후인 다기의 명령이 더 큰 권위를 가질 정도였다고 전해진다.[5] 다기는 남편 다르마바라의 어머니 코코진이 소유했던 융복궁을 계승했고, 이후 그녀를 위해 세워진 흥성궁은 융복궁을 병합하며 하나의 왕국에 필적할 만한 규모와 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이 되었다. 역사학자 오카다 히데히로는 이 시기를 콩기라트(옹기라트) 출신 황후가 다스리는 흥성궁이 정치 실권을 잡았던 "훈기라트 시대"라고 칭하기도 했다.다기는 인종 즉위 후, 카이산의 두 아들인 주왕(周王) 쿠살라와 회왕(懷王) 투그테무르가 옹기라트 부족 출신 여인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탐탁지 않게 여겨 변방인 윈난 성으로 좌천시켰다. 또한 카이산파의 장교들을 숙청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
다기의 총신이었던 테무데르는 인종 치세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카이산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유교 반대자들을 숙청했으며, 재정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려 했다. 이러한 테무데르의 전횡에 대해 성리학자들은 그를 사악한 간신이라 비판했고, 반대 세력은 그의 비리와 정치 부패 의혹을 꾸준히 제기했다. 아유르바르와다 역시 테무데르의 행동을 불편하게 여겼지만, 어머니 다기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다만 1317년에는 여론에 밀려 잠시 테무데르를 해임하기도 했다.[3]
한편, 1302년 아유르바르와다가 같은 옹기라트 부족 출신인 라드나시리에게서 아들 시데발라를 얻자, 다기는 자신의 손자를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이는 카이산이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세울 때 다음 칸은 카이산의 아들 코실라(쿠살라)로 하기로 약속했던 것을[5]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었다. 다기는 코실라가 영특하여 장래에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을 우려했고, 상대적으로 유약해 보이는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세우려 했다. 1316년 시데발라 본인은 자신이 어리고 능력이 부족하며 형(코실라)이 있으니 형을 세우고 자신은 보좌하겠다("신은 어리고 능력이 없으며 또한 형이 있으니, 마땅히 형을 세우고 신이 보좌해야 합니다", 臣幼無能 且有兄在, 宜立兄. 以臣輔之)고 말했지만, 다기와 옹기라트 귀족들은 어린 시데발라를 조종하기 쉽다고 판단하여 그의 황태자 책봉을 강행했다. 결국 다기의 의지대로 시데발라가 황태자가 되었다.
다기의 위상은 인종 치세 동안 더욱 높아졌다. 1315년 3월, 인종은 다기에게 의천흥성자인소의수원전덕태녕복경황태후(儀天興聖慈仁昭懿壽元全德泰寧福慶皇太后)라는 긴 존호를 올렸으며, 이는 중국 역사상 매우 긴 존호를 받은 여성 중 한 명으로 기록되게 했다.[5]
그러나 1316년 12월 황태자가 된 시데발라는 점차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과 군권을 장악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고, 이는 옹기라트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옹기라트 세력이 시데발라를 폐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인종은 아들에게 양위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320년 3월 1일, 아유르바르와다(인종)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치세는 막을 내렸다.
2. 4. 생애 후반
지대 4년 (1311년), 아들 카이산(무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다기가 아끼던 차남 아유르바르와다(인종)가 칸으로 즉위하면서 다기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카이산의 측근들은 축출되었고, 다기의 총애를 받던 테무데르를 비롯한 흥성궁의 중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본래 카이산은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세우면서 다음 칸은 자신의 아들 코실라에게 넘기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다기는 코실라가 어리고 영특하여 장래에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기 어려울 것을 우려하여 이 약속을 깨고,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들이자 유약하다고 평가받던 시디발라(영종)를 황태자로 세웠다.[4]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 동안 칸 본인에게는 실권이 거의 없었으며, 사실상 다기와 그녀의 측근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칸의 명령보다 황태후인 다기의 의지가 더 큰 권위를 가졌다고 평가될 정도였고, 시디발라를 황태자로 세운 것 역시 다기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아유르바르와다는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연우 2년(1315년) 3월, 다기에게 의천흥성자인소의수원전덕태녕복경황태후(儀天興聖慈仁昭懿壽元全德泰寧福慶皇太后)라는 긴 존호를 올려 그녀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2]
연우 7년(1320년), 아유르바르와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시디발라가 10대의 나이로 칸에 즉위했고(영종), 다기는 태황태후가 되었다. 시디발라의 즉위 초반, 다기의 권세는 더욱 막강해졌다. 아유르바르와다 말년에 재정 문제 등으로 파면되었던 테무데르가 다시 우승상으로 복귀하는 등, 다기의 의도대로 정치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시디발라는 성장하면서 점차 독자적으로 정치에 나서려는 의지를 보였고, 바이주를 중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며 다기의 측근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다기와 시디발라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다기는 옹기라트 부족의 강력한 세력을 배경으로 손자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시디발라를 황제로 세운 것을 후회하며 "내가 이 아이가 이토록 완고할 줄 미리 알았다면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322년 10월 26일 테무데르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1일 다기 역시 사망했다. 다기가 사망하자 시디발라는 테무데르의 남은 세력을 숙청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강경한 개혁을 추진하며 다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시디발라는 1323년 3월 22일, 할머니 다기를 사후에 昭獻元聖皇后|자오셴 위안성 황후중국어로 추존했다.
3. 사후
다기 카툰은 테무데르와 같은 권신들을 중용하여 원 제국의 쇠퇴를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가 사망한 후, 손자인 영종 시데발라의 친위 세력과 옹기라트 부족 사이에 다시 정치적 갈등이 불거졌다.
1323년 4월 22일, 영종 시데발라의 명에 따라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 도타이(朵台)는 다기 카툰에게 시호를 추서하고 태묘의 순종실에 부묘하였다. 이때 추서된 중국식 시호는 '''소헌원성황후'''(昭獻元聖皇后)이다.
한편, 영종 시데발라는 할머니 다기 카툰의 영향 아래 있던 옹기라트 부족과 테무데르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도리어 테무데르의 양자인 어사대부 테크시 등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남파의 변). 이는 다기 카툰 사후에도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복잡한 정쟁의 불씨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4. 가족 관계
- 남편 : 다루마바라 (? - 1292년)
- * 차남 : 카이산 (원 무종)
- ** 손자 : 쿠살라 (후일의 원 문종)
- ** 손자 : 투그테무르 (후일의 원 명종)
- * 삼남 : 아유르바르와다 (원 인종)
- ** 손자 : 시디발라 (원 영종)
- ** 손자 : 우투시부카 (아유르바르와다의 서장자 혹은 시디발라의 동생이라는 설이 있음)
- * 딸 : 상가나길 (노국휘문의복정수대장공주, 魯國徽文懿福貞壽大長公主 祥哥那吉zho, 상가랄길(桑哥剌吉), 상가길랄(桑哥吉剌)이라고도 함) - 노왕 동가불랄(魯王 潼坷不剌zho)에게 시집감.
- ** 외손녀 : 부다시리 황후 (원 문종 쿠살라의 황후)
콩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칭기스 칸의 정비 보르테의 남동생인 알치 노얀의 증손녀이다. 아버지는 알치 노얀의 손자인 쿠르두 템르이며, 쿠빌라이 칸의 황후 차부이는 다기의 큰고모가 된다.
참조
[1]
서적
T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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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ledge
201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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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arriage as political strategy and cultural expression : Mongolian royal marriages from world empire to Yuan dynasty
https://www.worldcat[...]
Peter Lang Pub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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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https://www.cambri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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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Lang Pub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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