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시리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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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다시리 카툰은 1305년 원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원 문종의 황후이자 린친발, 토곤 테무르의 섭정을 맡았던 인물이다. 옹기라트부 출신으로, 칭기즈 칸의 정비 보르테 카툰의 친족이었다. 문종 사후 린친발을 옹립했으나, 린친발의 급사 후 토곤 테무르를 옹립하여 태황태후가 되었지만, 권신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폐위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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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시리 카툰 | |
---|---|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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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
직위 | 원나라 황후 및 몽골 카툰 |
재위 기간 | 1328년 10월 16일 ~ 1329년 2월 26일 |
이전 | 바부칸 |
이후 | 바부샤 |
직위 1 | 재위 |
재위 기간 1 | 1329년 9월 8일 ~ 1332년 9월 2일 |
이전 1 | 바부샤 |
이후 1 | 달리에테미시 |
직위 2 | 원나라 황태후 |
재위 기간 2 | 1332년 9월 2일 ~ 1333년 7월 19일 |
이전 2 | 황태후 바부칸 |
이후 2 | 여태후 (명나라) |
직위 3 | 원나라 태황태후 |
재위 기간 3 | 1333년 7월 19일 ~ 1340년경 |
이전 3 | 태황태후 다기 |
이후 3 | 태황태후 장씨 (명나라) |
출생 및 사망 정보 | |
출생일 | 1307년경 |
사망일 | 1340년경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자야아투 칸 투그 테무르 |
자녀 | 아라트나다라 엘 테구스 타이핑나 |
가문 | |
씨족 | 옹기라트 |
아버지 | 디와발라 |
어머니 | 노나라의 센게 라기 |
2. 생애
부다시리 카툰은 옹기라트부 출신의 명문가 딸로, 칸 가문과 대대로 혼인해 왔다. 토크 테무르의 정실 부인이 되었고, 토크 테무르가 회왕으로 봉해져 강남에 거주할 때 함께했다. 1328년 토크 테무르가 엘 테무르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하자 황후로 책봉되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엘 테구스 등의 자녀를 두었다.
1332년 토크 테무르가 사망하자 엘 테무르는 엘 테구스를 옹립하려 했으나, 부다시리는 토크 테무르의 유언에 따라 명종의 유복자를 후계자로 옹립할 것을 주장했다. 엘 테무르는 명종의 유복자를 옹립하면서,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토곤 테무르 대신 어린 린친발을 선택했다. 린친발이 즉위하자 부다시리는 황태후가 되었지만, 2개월 만에 병사했다.
엘 테무르는 다시 엘 테구스의 옹립을 요청했지만, 부다시리는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명종의 장남 토곤 테무르를 옹립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부다시리의 뜻에 따라 토곤 테무르가 즉위했고, 부다시리는 태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정치 실권은 엘 테무르, 엘 테무르 사후에는 바얀에게 있었다.
1340년 토곤 테무르는 바얀의 전제 정치에 불만을 품고 바얀의 조카 토크토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바얀을 타도했다. 이 정변으로 엘 테구스는 황태자에서 폐위되었고, 부다시리와 함께 추방되었다.[7] 엘 테구스는 고려로 유배 도중 살해되었고, 부다시리 역시 동안주에서 급사했다.
2. 1. 생애 초반
1305년 원나라 옹기라트부 노왕 동가불랄(魯王 潼坷不剌)과 세조 쿠빌라이의 손녀 노국휘문의복정수대장공주 상가나길(魯國徽文懿福貞壽大長公主 祥哥那吉)의 딸로 태어났다. 정확한 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원 무종과 원 인종은 그의 외삼촌이며, 남편 투그테무르는 원 무종의 아들이자 부다시리의 외사촌이자 고종사촌이었다.부다시리의 친정은 칭기즈 칸의 정비 보르테 카툰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부다시리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것이 없다. 투그테무르가 소년일 때 혼인하였고, 투그테무르가 회왕으로 봉해지자 그를 따라 강남으로 갔다. 투그테무르와의 사이에서 아나트라나다, 엘 테구스로 개명한 구나시리, 타이핑누 등이 태어났다.[7]
2. 2. 황후 시절
1328년 남편 투그테무르가 천순제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다시리는 황후로 책봉되었다.[7] 1329년 초, 황제의 인장을 받았다. 같은 해 투그테무르가 형 명종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황태제비로 강등되었다. 얼마 뒤 명종 쿠살라가 급사하고 투그테무르가 복위하면서 부다시리도 황후로 복위하였다. 복위 후, 부다시리는 자신의 심복 환관 바이주와 함께 명종의 미망인 바부샤를 살해하는 모략을 꾸몄다. 이는 투그테무르 세력이 쿠살라 세력, 즉 명종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로 추정된다.[7]1330년 8월 어사대의 신하들이 부다시리의 장남 아나트라나다를 황태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으나, 문종은 이를 미루었다.[7] 같은 해 12월, 아나트라나다가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331년 1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7] 문종은 형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자신의 후계자로 명종의 아들을 지명하려 했고, 이로 인해 부다시리의 차남 구나시리(엘 테구스)는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권신 엘 테무르의 집에서 양육되었다.[7]
2. 3. 섭정 시절
1332년 린친발(영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다시리는 황태후가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섭정이었으나, 정치적 실권은 엘 테무르에게 있었다. 그러나 린친발은 즉위 2개월 만에 갑자기 사망했다.[4] 엘 테무르는 다시 투그테무르의 차남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려 했으나, 부다시리는 엘 테구스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엘 테무르의 권세가 커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자기 아들이 정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부다시리는 린친발의 이복형 토곤 테무르를 즉위시켰다. 1333년 2월 토곤 테무르는 린친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대도로 올라오려 했으나, 엘 테무르가 이를 막았다.원통 원년(1333년) 토곤 테무르(순제)가 즉위하면서 부다시리는 태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였고, 자신의 아들 엘 테구스를 황태자로 삼으려 했다. 엘 테무르는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은 제거되었지만, 조정의 실권은 메르키트 바얀에게 있었다.[7]
부다시리는 쿠툴루그 칸 쿠살라(명종)의 아들인 어린 토곤 테무르를 고려로, 그 다음에는 허난성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녀는 토곤 테무르가 투그 테무르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토곤 테무르가 유배된 동안 그의 계모인 바부샤를 처형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는 그녀가 고인이 된 남편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투그 테무르가 1332년에 사망하자, 부다시리는 투그 테무르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투그 테무르는 임종 시 형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를 표명했으며, 형의 장남인 토곤 테무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부다시리는 자신의 아들 엘 테구스를 황위에 올리지 않았고, 토곤 테무르도 임명하지 않았다. 대신, 쿠살라의 둘째 아들인 여섯 살의 린친발이 1332년 10월 13일에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섭정인 부다시리가 엘 테무르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는데, 엘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가 부친을 독살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그가 즉위하는 것을 반대했다. 린친발을 임명한 지 한 달 후, 부다시리는 태황태후 지위를 받았으며 섭정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불과 두 달(53일) 후, 어린 황제가 사망했다.[4]
엘 테무르는 부다시리에게 엘 테구스를 황위에 올릴 것을 계속 주장했지만, 부다시리는 이를 거부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故)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 있으며, 엘 테구스가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주장했다. 대신, 그녀는 열세 살의 토곤 테무르를 불러들여 1333년에 그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1336년에 그녀는 태상황태후 지위로 격상되었다.
부다시리는 7년 이상 섭정으로 사실상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1340년, 황제가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갖게 되자,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계모가 겪었던 부당함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또한 태상황태후가 자신에게 저지른 다양한 잘못들을 지적했다. 그 결과, 1340년 중반, 그는 부다시리가 모든 칭호를 박탈당하고 동안 부(현재의 허베이 성의 랑팡 시)로 유배되도록 명령했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곧 죽음을 맞이했다. 토곤 테무르는 유배 생활 동안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추가적인 보복으로 엘 테구스 또한 추방했으며, 엘 테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했다. 부다시리는 사망 당시 33세 정도였다.[5]
2. 4. 폐출과 최후
1340년 2월, 권신 바얀이 실각되어 유배를 가던 도중 광둥에서 사망했다. 바얀은 자신이 조종하기 쉬운 엘 테구스를 차기 황제로 세우려 했고, 부다시리는 이에 동의하였다.[4] 혜종 토곤테무르는 바얀의 권력이 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친정을 원했고, 이를 눈치챈 바얀의 조카 토크토아는 혜종과 짜고 바얀을 실각시켰다.그해 6월, 부다시리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황태자 연첩고사와 반역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인해 태황태후에서 폐위되어 대도(大都)에서 추방된 뒤, 동안주(東安州)로 유배가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4] 일설에는 토곤 테무르가 사사했다는 설이 있다.
6월 14일 혜종 토곤테무르는 조서를 내려 부다시리가 바부샤 카툰을 살해한 것, 자신 대신 린친발을 추대한 것, 자신을 명종 쿠살라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다시리를 폐위한다고 발표했다.[4] 부다시리는 향년 36세였다. 연첩고사는 고려에 귀향가는 도중 살해되었다.[4] 부다시리가 음모를 꾸몄다는 정황은 원사, 원사연의 등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일설에는 기황후의 공작이었다는 설이 있다.[4]
3.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부친 | 옹기라트부 노왕 조아불랄(魯王 雕阿不剌) |
모친 | 노국대장공주 상가랄길(魯國大長公主 桑哥剌吉) |
남편 | 원 문종 투그테무르 |
장남 | 연왕(燕王) 아랄특납답랄(阿剌忒納答剌, ? ~ 1331년) |
차남 | 황태자 연첩고사 (燕帖古思, ? ~ 1340년) |
삼남 | 태평눌 황자(太平訥 皇子) |
4. 평가
부다시리 카툰은 원나라 말기 격동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황후, 황태후, 태황태후의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329년 쿠살라(원 명종)가 죽자 투그테무르(원 문종)가 황제로 복위하고 부다시리도 황후로 복위하였다. 부다시리는 복위 후 자신의 심복 환관 바이주와 함께 모략을 꾸며 쿠살라의 미망인 바부샤를 살해했다.[7]
1330년 신하들이 그녀의 아들 아나트라나다를 황태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으나, 문종은 이를 미루었다. 계속된 상소에 1330년 12월 아나트라나다를 황태자로 책봉했지만, 그는 1331년 2월 22일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문종은 형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자신의 아들 대신 형 명종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지명하게 하였다. 1332년 문종이 사망하면서 명종의 아들을 계승하도록 유언을 남겼지만, 권신 엘 테무르는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부다시리 카툰은 선왕의 유언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7]
혜종 토곤테무르는 1333년 6월 14일 칙령에서 부다시리가 자신의 권세를 믿고 명종이 총애했던 자신을 옹립하지 않고 어린 동생 린친발(이린지발)을 옹립했다고 비판했다.
4. 1. 긍정적 평가
부다시리는 몽골 제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고 선왕의 유언을 따르려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권신 엘 테무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 엘 테구스 대신 명종의 아들들을 황제로 옹립한 것은 정치적 판단력과 도덕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7] 문종의 유언에 따라 1332년 10월과 12월, 자신의 차남 엘 테구스를 옹립하려는 엘 테무르의 주장을 거부하고 명종의 아들을 칸으로 세운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7]4. 2. 부정적 평가
부다시리는 권력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특히 1329년 바부샤를 살해한 사건[7]은 그녀의 잔혹함과 정치적 야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1332년 린친발이 즉위하면서 부다시리는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엘 테무르에게 있었다.[7] 린친발이 사망한 후에도 엘 테무르는 엘 테구스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부다시리는 이를 반대하고 토곤테무르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1333년 엘 테무르가 토곤테무르의 즉위를 방해하면서, 부다시리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엘 테무르, 바얀 등 권신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7]
1340년 바얀이 실각된 후, 부다시리는 엘 테구스와 함께 반역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폐위되어 유배를 가던 중 사망했다.[7] 혜종 토곤테무르는 조서를 통해 부다시리가 바부샤 카툰을 살해한 것 등을 폐위 이유로 들었다.[7]
4. 3. 중립적 평가
부다시리 카툰은 원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카안 가문과 혼인했으며, 남편 토크 테무르가 회왕으로 봉해져 강남에 거주할 때 동행했다. 1328년 토크 테무르가 황제로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고, 엘 테구스 등을 낳았다. 1332년 남편이 사망한 후, 권신 엘 테무르는 엘 테구스를 옹립하려 했으나, 부다시리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명종의 아들을 후계자로 옹립할 것을 주장했다. 엘 테무르는 명종의 아들을 옹립하면서도, 나이가 많은 토곤 테무르 대신 어린 린친발을 선택했다. 린친발이 즉위하면서 부다시리는 황태후가 되었으나, 린친발은 즉위 2개월 만에 사망했다.엘 테무르는 다시 엘 테구스 옹립을 요청했으나, 부다시리는 엘 테구스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명종의 장남 토곤 테무르를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토곤 테무르가 즉위하고 부다시리는 태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맡았지만, 실권은 엘 테무르와 바얀에게 있었다. 1340년 성장한 토곤 테무르는 바얀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토크토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바얀을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엘 테구스는 황태자에서 폐위되어 고려로 유배되던 중 살해되었고, 부다시리 역시 추방지 동안주에서 급사했다.[7]
이처럼 부다시리는 격동하는 원나라 말기 정치 상황 속에서 황후, 황태후, 태황태후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결국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기타
김서형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MBC에서 방영한 월화드라마 <기황후>에서 부다시리 역을 연기했다.[1]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2]
웹사이트
Heads of State of Mongolia
http://www.guide2wom[...]
[3]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1644
[4]
서적
The Mongols: A history
[5]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1644
[6]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1644
[7]
문서
『元史』巻40順帝本紀1,「至元六年」六月丙申、詔撤文宗廟主、徙太皇太后不答失里東安州安置、放太子燕帖古思於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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