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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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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루왕은 백제의 제3대 왕으로, 온조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28년에 즉위하여 77년에 사망했다. 재위 기간 동안 말갈과의 잦은 전투와 신라와의 영토 분쟁을 겪었다. 특히 말갈과의 전쟁은 초반에는 승리했으나 중반 이후에는 침략을 받았으며, 신라와는 와산성을 두고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신라에게 와산성을 빼앗겼다. 흉년으로 백성이 어려움을 겪자 양주를 금지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 민생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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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다루왕
한자 이름多婁王
로마자 표기Daru-wang
다른 이름부여다루(扶餘多婁)
작위어라하(於羅瑕), 건길지(鞬吉支)
직업백제 어라하
출생일10년 2월 이전
출생지백제 위례성
사망일77년 9월 (음력)
사망지백제 위례성
매장지미상
배우자다루왕비
자녀기루왕
부왕온조왕
모후온조왕비
형제자매미상
전임자온조왕
후임자기루왕
묘호없음
시호없음
법명없음
존호다루왕 어라하
묘소미상
능묘미상
거주지백제
국적백제
성별남성
가문부여
연호미상
왕조백제
종교미상
소속백제
호칭어라하, 건길지
목록백제의 2대 어라하
재위
재위 기간28년~77년 (음력)
즉위28년 2월 (음력)
퇴위77년 9월 (음력)
백제 국왕 계보
백제 국왕온조 18 BCE–28 CE
다루 28–77
기루 77–128
개루 128–166
초고 166–214
구수 214–234
사반 234
고이 234–286
책계 286–298
분서 298–304
비류 304–344
계 344–346
근초고 346–375
근구수 375–384
침류 384–385
진사 385–392
아신 392–405
전지 405–420
구이신 420–427
비유 427–455
개로 455–475
문주 475–477
삼근 477–479
동성 479–501
무령 501–523
성 523–554
위덕 554–598
혜 598–599
법 599–600
무 600–641
의자 641–660
기타
백제 역대 왕 (1대~5대)

2. 생애

28년 왕위에 오른 다루왕은 후덕한 성품과 위엄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29년 시조 주몽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33년 남부 지역에 벼농사를 장려하는 등 농업 발전에 힘썼다. 38년 흉년이 들자 양주(釀酒)를 금지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다루왕 재위 기간에는 동북쪽의 말갈과의 잦은 분쟁이 있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56년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방비를 강화해야 할 정도로 말갈의 침입이 잦아졌다.

63년 낭자곡성(娘子谷城, 현재의 청주)까지 영토를 넓힌 다루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회담을 제안했으나, 신라 탈해 이사금은 응하지 않았다. 64년부터 와산성을 둘러싼 신라와의 분쟁이 시작되어, 서로 성을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반복되었다.

2. 1. 즉위 전

다루왕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장남으로, 10년에 왕세자가 되었다. 온조왕이 28년(재위 46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그는 관대하고 위엄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2. 2. 재위 기간

28년에 왕위에 오른 다루왕의 재위 기간은 크게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눌 수 있다.

다루왕은 재위 기간 동안 동북쪽 변방의 말갈과의 잦은 전쟁을 치렀다. 초기에는 말갈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말갈의 침입이 잦아져 56년에는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방비를 강화해야 했다.

한편, 동쪽으로는 63년에 낭자곡성(娘子谷城, 현재의 청주)까지 영토를 넓혔다. 신라와는 64년부터 와산성을 두고 분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서로 성을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반복되었다.

77년 9월, 다루왕은 재위 5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 2. 1. 초반 (28년 ~ 38년)

28년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성격이 후덕하며 위망이 있었다고 한다.

29년 봄 정월에 시조의 묘에 배알하고 제사를 지냈으며,[1] 33년에는 남부 주군으로 하여금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1]

38년에는 흉년으로 백성의 살림이 곤란하자 전국적으로 양주(釀酒)를 금지시키고 지방을 순시하며 빈민을 구호했다.[2]

《삼국사기》에 기록된 다루왕 통치 초반(29년~38년)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주요 사건
29년
30년겨울 10월: 동부의 흘우(屹于)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고 왕으로부터 상을 받음.
31년
33년
34년
37년
38년


2. 2. 2. 중반 (48년 ~ 66년)

29년 봄 정월, 시조 주몽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3] 33년에는 나라 남쪽 군현에 벼농사를 시작하도록 명했다.[3]

38년에는 흉년으로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전국적으로 양주(釀酒)를 금지하고, 지방을 순행하며 빈민을 구호했다.

동북쪽 변방의 말갈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55년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국경을 공격해왔다.[3] 이에 56년에는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동북 지방의 방비를 강화했다.[3]

63년 10월, 낭자곡성(娘子谷城, 현재의 청주)까지 영토를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회담을 요청했으나, 신라 탈해 이사금은 응하지 않았다.[3]

64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10월에는 신라의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는데, 탈해 이사금이 이끄는 신라 기병 2천 명에게 크게 패하였다.[4]

66년,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고 수비병 200명을 주둔시켰으나, 신라가 이를 격퇴하였다.[5]

2. 2. 3. 후반 (70년 ~ 77년)

70년신라를 침공하였으나[6] 성과가 없었다. 74년에 다시 신라의 변방을 침공했으나, 탈해 이사금신라 중앙군을 보내 백제군이 패하였다.[7]

75년 10월, 신라의 와산성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하였다.[8] 76년 9월, 신라는 정예군을 보내 와산성을 회복하고 백제를 정벌하여, 주민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9]

3. 대외 관계

다루왕은 재위 초기부터 동북쪽 변방의 말갈과 잦은 전쟁을 치렀다. 초기에는 말갈을 제압하였으나, 점차 말갈의 침입이 잦아져 56년에는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방어해야 했다.[1] 한편, 동쪽의 신라와는 63년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영토를 확장한 후 화친을 시도했으나, 신라가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이후 64년부터 와산성(蛙山城)을 놓고 신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결국 와산성을 신라에게 빼앗긴 채 77년에 사망했다.[1]

3. 1. 말갈과의 관계

삼국사기》에는 다루왕 재위 기간 동안 말갈과의 많은 전투 기록이 있다. 그러나 '말갈'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모호(Mohe) 부족들은 고구려 북쪽, 만주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백제의 수도(오늘날 서울 지역으로 추정)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갈"은 백제를 건국한 부여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지도 않고, 백제에 정복당한 마한 부족들을 가리키는 것 같지도 않다. 이들은 초기 시대부터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 군현의 선동으로 백제를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들은 백제가 한반도 중부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다루왕 재위 기간 동안의 말갈과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내용
30년 | 동부의 흘우(屹于)가 마수산(Mt. Masu)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고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31년 | 고본(Gobon) 성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200명 이상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34년 | 말갈이 마수산성(Masu Fortress)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민가를 불태웠다. 이후 병산(Mt. Byeong)의 성벽을 공격했다.
55년 | 말갈이 북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56년 | 왕은 동부 백성들에게 우곡성(Ugok Fortress, 牛谷城)을 쌓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말갈에 대한 방비였다.



다루왕 치세 초반(30년, 31년)에는 백제가 말갈을 많이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나, 치세 중반에는 오히려 말갈의 침략을 받게 되어 56년에는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방비하였다.[1]

3. 2. 신라와의 관계

63년 10월, 다루왕은 영토를 낭자곡성(娘子谷城, 현재의 청주)까지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만남을 요청하였으나, 신라 탈해 이사금은 응하지 않았다.[3]

64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신라의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탈해 이사금이 이끄는 신라 기병 2천 명에게 크게 패하였다.[4]

66년,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수비병 2백 명을 주둔시켰으나, 신라가 이를 격퇴하였다.[5]

70년74년에 다시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6][7]

75년 10월, 신라의 와산성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하였다.[8] 그러나 76년 9월, 신라는 정예군을 보내 와산성을 회복하고 백제를 정벌하여 주민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9]

이처럼 다루왕 재위 기간에는 신라와 잦은 분쟁이 있었으며, 특히 와산성을 둘러싼 공방전이 반복되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의붓조부동명성왕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친조부우태(優台)생몰년 미상
조모소서노기원전 66년[10] ~ 기원전 6년
부왕온조왕? ~ 28년, 재위: 기원전 18년 ~ 28년
모후미상
왕비미상
장남기루왕? ~ 128년, 재위: 77년 ~ 128년
며느리미상
형제도쿠사왕? ~ ?, 일본서기 신선소지록에 여러 씨족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어 일본에 정착한 초기 백제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짐.


참조

[1] 서적 삼국사기
[2] 간행물 생애 문단 참조
[3] 서적 삼국사기
[4] 서적 삼국사기
[5] 서적 삼국사기
[6] 서적 삼국사기
[7] 서적 삼국사기
[8] 서적 삼국사기
[9] 서적 삼국사기
[10]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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