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가네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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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라노 가네모리는 광효 천황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946년 종5위하에 서작된 후 991년 사망했다. 그는 대학료에서 기전도를 배우고 료시에 급제했으며, 에치젠곤노카미, 야마시로노스케, 스루가노카미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와카 작가로서도 활동하여, 덴토쿠 내리 우타아와세에서 미부노 타다미와의 대결로 유명하며, 대표작 중 하나는 "숨기려 해도 얼굴에 묻어나는 님 향한 사랑 내 마음도 모른 채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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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가네모리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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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씨명 | 다이라 |
이름 | 가네모리 |
성 | 다이라 |
출생 | 알 수 없음 |
사망 | 쇼랴쿠 원년 12월 28일 (991년1월 16일) |
개명 | 가네모리 왕 → 다이라노 가네모리 |
관위 | 종5위상・스가노카미 |
주군 | 무라카미 천황 → 레이제이 천황 → 엔유 천황 |
씨족 | 고코 다이라 씨 |
부모 | 아버지: 다이라노 아쓰유키 |
자녀 | 아카조메 에몬? |
기타 정보 | |
시대 | 헤이안 시대 중기 |
2. 출자
『존비분맥』에 따르면, 광효 천황의 현손으로 다음과 같은 계보를 가지고 있다.
: 광효 천황 - 시충 친왕 - 흥아왕 - 평독행 - 다이라노 가네모리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은 모순점이 지적되고 있다[1]。
- 조간 2년(860년) 흥아왕은 종5위하에 서작되었으므로, 천안 원년(857년)에 태어난 시충 친왕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다.
- 가네모리는 처음에는 제왕이었으므로, 닌와 2년(886년) 평조신을 받아 신적강하한 평독행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다음과 같은 복원 계보가 제시되어 있다[2]。
: 광효 천황 - 시충 친왕 - 독망왕 - 다이라노 가네모리
- 가네모리 왕은 '닌와 어후'로서 종5위하에 왕씨작을 받았으므로, 광효 천황 후예의 삼세왕(증손)이라고 생각된다.
- 『가네모리집』의 간기에 "지쿠젠노카미(筑前守) 독망왕의 삼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3]。 또한 독망왕은 스자쿠 천황 시대(930년대)에 활동 기록이 있으며, 연대적으로도 모순이 없다.
- 광효 천황의 자식으로 친왕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시충 친왕과 시정 친왕 두 사람뿐이다. 또한 시충 친왕의 자식으로 충망왕이 있으며, 당시 이미 형제간에 이름의 한 글자를 동일하게 맞추는 경향이 보인다. 따라서 독망왕과 충망왕은 형제라고 생각된다.
3. 생애
대학료에서 기전도를 배우고 료시에 급제하여 의문장생이 되었으나, 946년 무라카미 천황 즉위 때 왕씨작에 참여할 사람이 없어 종5위하에 서작되었다. 950년 평조신 성을 받아 신적강하하여 에치젠곤노카미에 임명되는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964년 다이겐모쓰로서 경관으로 복귀, 966년 종5위상에 서임되었다. 977년 스루가노카미에 임명되어 다시 지방관이 되었다. 991년 12월 28일 졸거하였다. 최종 관위는 전 스루가노카미 종5위상이다.
슈이와카슈, 고슈이와카슈에서 대표적인 가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고센와카슈 이후 칙찬와카슈에 약 90수가 채록되었다. 가집으로 『가네모리슈』가 있다.
3. 1. 관직 생활
대학료에서 기전도를 배우고 료시에 급제하여 의문장생이 되었으나, 덴교 9년(946년) 무라카미 천황 즉위에 즈음하여 왕씨작에 참여할 제반 왕이 없었기 때문에, 가네모리 왕이 종5위하에 서작되었다. 덴랴쿠 4년(950년) 평조신 성을 받아 신적강하하여 에치젠곤노카미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도, 오와 원년(961년) 야마시로노스케로 지방관을 역임했다.오와 3년(964년) 다이겐모쓰로서 경관으로 복귀하여, 고호 3년(966년) 종5위상에 서임되었다. 엔유조의 덴겐 2년(977년) 스루가노카미에 임명되어 다시 지방관으로 전임되었다.
쇼랴쿠 원년(991년) 12월 28일 졸거. 최종 관위는 전 스루가노카미 종5위상.
3. 2. 와카 작가로서의 활동
숨기려 해도 얼굴에 묻어나는 님 향한 사랑, 내 마음도 모른 채 걱정하는 사람들 忍ぶれど色に出でにけりわが恋はものや思ふと人の問ふまで일본어다이라노 가네모리는 『슈이와카슈』와 『고슈이와카슈』에서 대표적인 가인 중 한 명이며, 『고센와카슈』 이후의 칙찬와카슈에 약 90수가 채록되었다. 개인 가집으로는 『가네모리슈』가 있다. 그의 가풍은 한 수를 깊이 생각하여 짓는 것이었지만, 난해하지 않고 비교적 알기 쉬운 솔직한 표현의 노래가 많다.[1]
4. 일화
미부노 타다미와 덴토쿠 내리 우타아와세에서 대결(이때의 노래가 백인일수에도 실린 "숨기려 해도, 얼굴에 나타났네, 나의 사랑은, 무언가 생각하는가, 하고 사람이 물을 정도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다양한 우타아와세·가회·병풍가(屏風歌)의 유력한 가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생존 중부터 다양한 삽화, 일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가네모리가 아내와 이혼했을 때, 아내는 이미 임신하고 있었고, 아카조메 토키요리와 재혼한 후 딸을 출산했다. 가네모리는 딸의 친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다퉜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그 딸은 아카조메 에몬으로서 오오에노 마사히라에게 시집갔고, 그 혈맥은 오오에노 히로모토나 오오에 성모리 씨에게도 흐르고 있다.
5. 관력
연도 | 직책 |
---|---|
덴교 9년(946년) 5월 5일 | 종5위하 |
덴랴쿠 4년(950년) (날짜 불명) | 에치젠 곤노카미, 신적강하(헤이노 아손 씨) |
덴토쿠 5년(961년) 정월 | 야마시로노 스케 |
오와 3년(964년) 4월 | 다이겐모쓰 |
고호 3년(966년) 정월 7일 | 종5위상 |
덴겐 2년(977년) 8월 | 스루가노카미 |
참조
[1]
서적
赤坂
2019
[2]
서적
赤坂
2019
[3]
서적
兼盛集
宮内庁書陵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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