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다테 하루무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테 하루무네는 1519년 다테 타네무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33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편휘를 받아 이름을 하사받았고, 오슈의 텐다이로서 권한을 부여받았다. 1542년 아버지의 세력 확장에 반대하여 중신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덴분의 난이 발발했다. 난 이후 가독을 이어받아 15대 당주가 되었으며, 1555년 막부로부터 오슈 탄다이 직에 임명되었다. 1565년 차남 다테 테루무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578년 사망했다. 그는 덴분의 난, 오슈 탄다이 임명, 아들 테루무네와의 갈등 등 복잡한 생애를 보냈으며, 센다이 번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2. 생애

영정 16년(1519년) 14대 당주 다테 타네무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덴문 2년(1533년),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편휘를 받아 하루무네라 칭했다.[2] 아시카가 막부(Ashikaga shogunate)는 하루무네에게 무쓰(Mutsu)의 텐다이(tendai)로서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다.[3] 특별한 영예로, 아시카가 요시하루(Ashikaga Yoshiharu)는 하루무네가 자신의 이름의 한자(ideograph) 하나('haru-')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3]

덴문 11년(1542년) 6월, 아버지 타네무네가 세력 확장을 위해 에치고 국 수호 우에스기 사다사네의 양자로 동생 토키무네마루를 보내려 했던 것(양자 결연 준비로 토키무네마루는 사다사네로부터 한 글자를 받아 사네모토라 칭했다)과, 이복형부 소마 아키타네에게 다테 영지를 할양하려 했던 것에 반대하여, 중신 나카노 무네토키, 쿠와와리 카게나가 등과 공모하여 아버지를 니시야마조에 유폐하고, 사네모토의 양자 결연을 저지했다.

그러나 아버지 타네무네는 코야나가와 무네토모에 의해 니시야마조에서 구출되었고, 더 나아가 타네무네가 오슈 제후를 규합하여 하루무네와 싸울 태세를 보였기 때문에 덴문의 난이 발발했다. 이 내란은 처음에는 타네무네 측이 우세하여 하루무네 측은 계속 패배했지만, 덴문 16년(1547년) 그때까지 타네무네를 지지했던 아시나 모리우지가 다무라씨와 니카이도씨와의 대립으로 하루무네 측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형세가 역전되어, 덴문 17년(1548년) 3월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후지의 휴전 명령을 받고, 같은 해 9월에는 하루무네 측이 유리한 가운데 화목이 성립되었다. 하루무네가 가독을 계승하여 15대 당주가 되고, 타네무네는 마루모리조에 은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후에도 부자의 불화는 수그러들지 않았다고 한다.[4]

당주가 된 하루무네는 요네자와조로 본거지를 옮기고, 덴문의 난으로 동요한 다테씨 가신단의 통제에 착수한다. 덴문 22년(1553년) 1월 17일에는 『하루무네공 채지하사록』을 작성하여, 덴문의 난 중에 양진영에 의해 남발된 안도조를 정리하고, 새롭게 가신단의 소령과 가격을 확정하고, 같은 해에는 화목을 불복하고 항전을 계속했던 카케타 토시무네, 요시무네 부자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나카노 무네토키를 비롯하여 덴문의 난에서 하루무네 측의 주력을 담당했던 가신들에게는 수호불입권 등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루무네 정권은 무네토키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간다. 그러나 하루무네는 6남 5녀(모두 정실 쿠보히메의 자식)와 자녀에게 복이 있었지만, 이와키씨, 니카이도씨와의 혼인을 제외하고는 다테 사네모토, 코야나가와 모리무네 등 일족·중신에게 딸을 시집보냈다(하루무네의 자녀의 오슈 제세력과의 혼인의 대부분은 하루무네의 은거 후에 테루무네에 의해 실행된 것이었다)[5]

덴문 24년(1555년), 막부로부터 오슈 탄다이 직에 보임되었다. 아버지 타네무네가 무쓰 수호에 보임되었을 때는 오사키씨의 오슈 탄다이 직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하루무네의 보임은 다테씨의 가격 상승을 보여주는[6] 동시에 종래의 막부 지방 통치 방침을 변경하는 것이었다[7] 다만, 덴문 24년 하루무네의 좌경대부 보임과 수호대인 쿠와와리 카게나가에 대한 털가죽 안장덮개와 흰 우산 가방의 사용 인가에 의해 사실상 오슈 탄다이에는 임명되었지만, 정식 오슈 탄다이 직의 창설과 하루무네의 임명은 에이로쿠 2년(1559년) 봄(5월 이전)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은 다테씨의 탄다이 취임에 대해 막부도 승낙은 하고 있었지만, 막부가 탄다이격이라는 기정사실을 만든 뒤에 실제로 탄다이 직에 임명한다는 신중한 절차를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8]

에이로쿠 6년(1563년) 막부에 의해 인가된 전국 다이묘중 50명 이상 중에서, 오슈(무쓰 국)에서는 아시나 모리우지와 하루무네만이 다이묘로 인정받는 영예를 얻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차남 테루무네에게 가독을 양위하고 시부 군 스기메조에 은거했다.[9]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여전히 하루무네와 나카노 무네토키 등이 가중을 통제하고 있었다.

같은 해, 아시나 모리우지가 니카이도 모리요시(하루무네 장녀 아난히메의 사위)와 대립하여 이와세 군에 침공하자, 니카이도씨 구원을 위해 히와라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에이로쿠 9년(1566년) 모리요시가 항복하자, 모리우지의 적남 모리오키에게 사녀 히코히메(테루무네의 양녀가 된다)를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다테·아시나 사이에서도 평화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은거한 하루무네는 이 혼인에 반대하여 테루무네와 대립하고, 테루무네는 히코히메를 자신의 양녀로 하여 혼인을 맺은 위에, 만약 하루무네와 테루무네가 다툰다면 모리우지가 테루무네를 지원하는 밀약까지 맺었다고 한다.[10]

에이로쿠 8년 6월 19일(1565년 7월 16일), 이구 군 마루모리조에 은거하고 있던 아버지 타네무네가 사망하자 소마 모리타네가 마루모리조를 접수하고, 더 나아가 이구 군 각지를 손에 넣어 간다. 이 때문에 덴문의 난 이래의 다테·소마 사이의 항쟁이 재연되어, 이후 약 20년에 걸쳐 마루모리조를 둘러싼 공방이 전개된다.

은거했지만 실권을 결코 놓지 않는 하루무네에 대해, 당주가 된 테루무네는 불만을 감추지 않고, 양자 사이에는 자주 다툼이 있었지만, 에이로쿠 13년(1570년) 4월, 테루무네에 의해 나카노 무네토키, 마키노 히사나카 부자가 반역의 혐의가 있다 하여 추방되자(겐키의 변), 실권은 완전히 테루무네의 손에 넘어가고, 하루무네는 스기메조에 한거한다. 이후 부자 관계도 개선되어, 말년에는 스기메조에 일문과 가래중을 초대하여 자주 연회를 베풀었고, 그 자리에서는 손자 봇텐마루(후의 다테 마사무네)가 와카를 낭송했다고 한다.

덴쇼 5년 12월 5일(서력으로는 다음 1578년 1월), 스기메조에서 사망. 향년 59세.

2. 1. 가독 상속과 덴분의 난

1519년 다테 다네무네의 아들로 태어났다. 1533년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루에게 편휘를 받아 하루무네라 칭했다.[2] 아시카가 요시하루는 하루무네가 자신의 이름의 한자('haru-')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다.[3]

1542년 아버지 다네무네가 에치고 국 수호 우에스기 사다사네의 양자로 동생 도키무네마루를 보내려 하고, 이복형부 소마 아키타네에게 다테 영지를 할양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덴분의 난을 일으켰다. 중신 나카노 무네토키 등과 공모하여 아버지를 니시야마조에 유폐하고, 사네모토의 양자 결연을 저지했다.[4]

그러나 아버지 다네무네는 코야나가와 무네토모에 의해 구출되었고, 오슈 제후를 규합하여 하루무네와 싸울 태세를 갖추면서 덴 분의 난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다네무네 측이 우세했지만, 1547년 아시나 모리우지가 하루무네 측에 가담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1548년 아시카가 요시후지의 휴전 명령을 받고 화목이 성립되면서, 하루무네가 가독을 계승하여 15대 당주가 되었다. 다네무네는 마루모리조에 은거했다.[4]

당주가 된 하루무네는 요네자와조로 본거지를 옮기고, 덴 분의 난으로 동요한 가신단을 통제했다. 1553년 『하루무네공 채지하사록』을 작성하여 가신단의 소령과 가격을 확정하고, 항전을 계속했던 가케타 도시무네, 요시무네 부자를 멸망시켰다.[5]

1555년 막부로부터 오슈 탄다이 직에 임명되었다.[6] 이는 다테 씨의 가격 상승을 보여주는 동시에, 종래 막부의 지방 통치 방침을 변경하는 것이었다.[7]

1563년, 막부에 의해 인가된 전국 다이묘 50여 명 중 오슈에서는 아시나 모리우지와 하루무네만이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2. 2. 통치와 세력 확장

덴분 2년(1533년),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편휘를 받아 하루무네라 칭했다.[2] 아시카가 요시하루는 하루무네가 자신의 이름의 한자('haru-')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었다.[3]

덴분 11년(1542년) 6월, 아버지 다테 다네무네가 세력 확장을 위해 동생 토키무네마루를 에치고 국 수호 우에스기 사다사네의 양자로 보내려 하고, 이복형부 소마 아키타네에게 다테 영지를 할양하려 하자, 이에 반대한 하루무네는 중신 나카노 무네토키, 쿠와와리 카게나가 등과 공모하여 아버지를 니시야마조에 유폐하고, 사네모토의 양자 결연을 저지했다. 그러나 아버지 다네무네는 코야나가와 무네토모에 의해 구출되었고, 오슈 제후를 규합하여 하루무네와 싸울 태세를 갖추면서 덴문의 난이 발발했다.[4]

처음에는 다네무네 측이 우세했지만, 덴분 16년(1547년) 아시나 모리우지가 하루무네 측에 가담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덴분 17년(1548년) 3월,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후지의 휴전 명령을 받고, 같은 해 9월 하루무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화해가 성립되었다. 하루무네는 가독을 이어받아 15대 당주가 되었고, 다네무네는 마루모리조에 은거했다.[4]

당주가 된 하루무네는 요네자와조로 본거지를 옮기고, 덴문의 난으로 혼란스러워진 가신단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덴문 22년(1553년) 1월 17일에는 『하루무네공 채지하사록』을 작성하여 덴문의 난 중에 남발된 안도조를 정리하고, 가신단의 소령과 가격을 새롭게 확정했다. 같은 해, 화해를 거부하고 저항하던 카케타 토시무네, 요시무네 부자를 멸망시켰다.[5]

덴문 24년(1555년), 막부로부터 오슈 탄다이 직에 임명되었다.[6] 이는 다테씨의 가문 지위 상승을 보여주는 동시에, 막부의 지방 통치 방침 변화를 의미한다.[7] 다만, 정식 오슈 탄다이 직의 창설과 하루무네의 임명은 에이로쿠 2년(1559년) 봄이었다는 설도 있다.[8]

에이로쿠 6년(1563년), 막부에서 인정한 전국 다이묘 50여 명 중 오슈(무쓰 국)에서는 아시나 모리우지와 하루무네만이 다이묘로 인정받는 영예를 얻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차남 테루무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스기메조에 은거했다.[9]

같은 해, 아시나 모리우지가 니카이도 모리요시와 대립하여 이와세 군을 침공하자, 니카이도씨를 구원하기 위해 히와라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모리요시가 항복하자, 모리우지의 아들 모리오키에게 딸 히코히메를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다테·아시나 사이에 평화가 성립되었다. 은거한 하루무네는 이 혼인에 반대하여 테루무네와 대립했고, 테루무네는 히코히메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혼인을 강행하고, 모리우지에게 하루무네와의 분쟁 시 자신을 지원하겠다는 밀약까지 맺었다고 한다.[10]

에이로쿠 8년 6월 19일(1565년 7월 16일), 아버지 다네무네가 사망하자 소마 모리타네가 마루모리조를 점령하고 이구 군 각지를 장악하면서 덴문의 난 이후의 다테·소마 간 항쟁이 재개되었다.

에이로쿠 13년(1570년) 4월, 테루무네에 의해 나카노 무네토키, 마키노 히사나카 부자가 반역 혐의로 추방되면서(겐키의 변) 실권은 완전히 테루무네에게 넘어갔다. 이후 부자 관계는 개선되었고, 말년에는 손자 봇텐마루(후의 다테 마사무네)가 와카를 읊는 연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덴쇼 5년 12월 5일(서력으로는 다음 1578년 1월), 스기메조에서 사망했다. 향년 59세.

2. 3. 은거와 말년

다테 하루무네는 1519년 다테 타네무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지로(次郎)였다.[2] 1533년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편휘를 받아 '하루무네'라 칭했다.[3] 아시카가 요시하루는 하루무네에게 자신의 이름 한 자('haru-')를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특별한 영예를 베풀었다.[3]

1542년 아버지 다네무네가 에치고 국 수호 우에스기 사다사네에게 동생 토키무네마루(다테 사네모토)를 양자로 보내려 하자, 이에 반대한 하루무네는 중신들과 공모하여 아버지를 유폐하고 덴문의 난을 일으켰다.[4] 처음에는 다네무네가 우세했지만, 1547년 아시나 모리우지가 하루무네 측에 가담하면서 전세가 역전, 1548년 아시카가 요시후지의 휴전 명령으로 화목이 성립되어 하루무네가 가독을 계승했다.[4]

1555년 막부로부터 오슈 탄다이 직에 임명되었다.[6] 이는 다테 씨의 세력 상승을 보여주는 동시에 막부의 지방 통치 방침 변화를 의미했다.[7] 1563년에는 막부가 인정한 전국 다이묘 50여 명 중 오슈에서 아시나 모리우지와 함께 다이묘로 인정받는 영예를 얻었다.

1565년 차남 다테 테루무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스기메조에 은거했다.[9] 같은 해 아버지 다네무네가 사망하자 소마 모리타네가 마루모리조를 점령, 다테 씨와 소마 씨 간의 분쟁이 재발했다.

은거 후에도 실권을 쥐고 있던 하루무네는 당주인 테루무네와 갈등을 빚었으나, 1570년 겐키의 변으로 실권이 테루무네에게 완전히 넘어가면서 스기메조에 한거했다. 이후 부자 관계는 개선되었고, 말년에는 스기메조에서 연회를 자주 열었으며, 손자 봇텐마루(후의 다테 마사무네)가 와카를 낭송하기도 했다. 1578년 스기메조에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다테 타네무네를 아버지로, 테이신인을 어머니로 둔 다테 하루무네는 쿠보히메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쿠보히메는 이와키 시게타카의 장녀로, 사이쇼인, 스기메 고젠, 와라쿠보 고젠으로도 불렸다. 하루무네와 쿠보히메 사이에는 6남 5녀, 총 11명의 자녀가 있었다.

자녀 중에는 이와키 치카타카, 오나미히메, 다테 테루무네, 루스 마사카게, 이시카와 아키미츠, 히코히메, 코쿠부 모리시게, 스기메 나오무네 등이 쿠보히메 소생이다. 이외에도 하루무네의 딸들은 각각 다테 사네모토, 코야나가와 모리무네, 사타케 요시시게와 결혼하였다.

하루무네의 형제자매로는 소마 아키타네의 처가 된 야카타 고젠, 아시나 모리우지의 정실, 오사키 요시아키, 다테 사네모토, 니카이도 테루유키의 처, 다무라 타카아키의 처, 다테 무네스미, 카케다 토시무네의 처, 쿠와가타 무네사다, 카사이 하루키요, 야나가와 무네키요, 무라타 무네타네, 고쿠라쿠인 무네에이, 와타리 쓰네무네, 와타리 모토무네, 다이유 야스후, 다테 시치로, 코시가와 고젠 등이 있다.

4. 평가 및 일화

다테 하루무네는 쿠보히메를 정실로 맞이했는데, 원래 쿠보히메는 유키 하루쓰나에게 시집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루무네는 쿠보히메의 미모에 반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마 행렬을 습격하여 쿠보히메를 납치, 강제로 정실로 삼았다.[11] 하루무네와 쿠보히메의 부부 사이는 좋았으며, 장남 친타카를 이와키 시게타카에게 양자로 보낸 덕분에 장인과의 관계도 개선되어 덴 분의 난 때 지원을 받았다. 쿠보히메는 하루무네 사후 호우샤쿠지를 건립하여 남편을 추모했고, 이후 손자인 마사무네를 의지하여 미야기군 네가에이시로 이주하여 1594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쿠로시마 빈은 다테 다네무네가 6명의 측실을 두고 대외 진출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하루무네는 측실이 확인되지 않고 가문 내 통제에 유의한 점을 들어 덴분의 난의 배경에는 부자의 성격 차이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5] 또한 다네무네와 데루무네의 정책에 공통점이 있고, 외교 정책에서 사고방식의 유사성과 하루무네와의 차이점을 지적한다.[5]

에도 시대 센다이 번에서는 번의 역사 편찬이 성행하여, 덴분의 난에서 아버지와 다투고 아들과 다투어 겐키의 변의 원인을 만든 하루무네는 "암군"으로 취급받았다.[12] 이는 마사무네의 아버지인 데루무네가 칭송받은 것과 대조되며, 2차례에 걸친 가문 소동의 발단을 만든 점이 다테 소동을 일으킨 다테 쓰나무네와 비슷하게 부정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이다.[13] 하루무네를 지지한 나카노 무네토키, 쿠와가타케 카게나가는 "간신"으로 여겨졌는데, 그들의 자손은 겐로쿠 시대의 센다이 번에 없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13] 나카노 무네토키와 쿠와가타케 카게나가가 "간신"으로 자리매김되면서, 덴분의 난은 하루무네가 그들에게 선동당한 것이라는 역사관이 센다이 번에 확립되었다.[14]

5. 더 읽어보기

참조

[1] 서적 Date Terumune https://books.google[...] The Japan Biographical Encyclopedia & Who's Who 1964
[2]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web.archive.[...] 2020-03-27
[3] 서적 A History of the Japanese Peopl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nd of the Meiji Era https://books.google[...] 1915
[4] 문서 흑섬, 2019년, P69·89 2019
[5] 문서 흑섬, 2019년, P59-60·77-78 2019
[6] 문서 흑섬, 2019년, P65-66 2019
[7] 서적 중세 출우의 영주와 성관 오우사 연구총서2
[8] 문서 흑섬, 2019년, P65-73 2019
[9] 문서 天文3년(1534년)에 중륭과의 사이에 입사의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1534
[10] 문서 흑섬, 2019년, P74-77 2019
[11] 문서 寛文7년(1667년)에 相馬藩士・中津幸政이 편찬한 『奥相茶話記』에는, 쿠보히메는 相馬顯胤(다네무네의 사위)이 중인이 되어 하루무네의 아내로 맞이하는 약속이 있었으나, 중륭이 이것을 파탄냈기 때문에, 면목을 잃은 顯胤이 이와키 영토에 공격하여 군사적 충돌로 발전했다고 한다. 또한 『塔寺八幡宮長帳裏書』天文3년(1534년) 조에는, 蘆名盛舜이 다테 다네무네에 동심하고, 二階堂氏와 함께 유키 영토의 시라카와군 신성에 출마했다는 기록이 있다. 1667
[12] 문서 元禄기의 번주인 伊達綱村과 사서 편찬에 관여한 田辺希賢의 사이에 「(세간에 알려진) 천문의 난은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부자 불화에 대해서는 공개하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취지의 서장의 주고받음이 현존하고 있다(흑세, 2019년, P84-85). 2019
[13] 문서 하지만, 실제로는 소우지의 아들 久仲이 양자로 된 마키노가 등에 그 혈통이 이어지고, 다테가 중에는 에도 시대에도 나카노 일족과 인척 관계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쿠와오리가와 나카노가 자체, 센고쿠 시대부터 인척 관계에 있었다.
[14] 문서 흑섬, 2019년, P79-90 20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