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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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의론은 5세기부터 비잔틴 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기독론적 논쟁에서 비롯된 신학적 입장이다. 칼케돈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하나의 본성으로 보려는 단성론에 반대하여, 두 본성(신성, 인성)과 한 위격을 주장하는 칼케돈 신조가 정립되었다. 단의론은 그리스도에게 신성과 인성 외에 단일한 의지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7세기 비잔틴 제국에서 단일 에너지론과 단일 의지론으로 전개되었다. 이 주장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양의론이 정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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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론 | |
---|---|
개요 | |
명칭 | 단의론 (單意論) |
다른 명칭 | 단의설 (單意說) 단의주의 (單意主義) |
로마자 표기 | dan-ui-ron |
주요 내용 |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니지만, 하나의 의지만을 가진다는 주장 |
관련 인물 | 세르기오스 1세 키루스 호노리오 1세 피로스 바르다네스 필리피쿠스 소프로니오스 막시모스 고백자 마르티노 1세 콘스탄스 2세 아가토 |
역사적 배경 | |
발단 | 630년대 |
주요 논쟁 시기 | 7세기 |
종결 |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80-681)에서 이단으로 단죄 |
교리적 내용 | |
핵심 주장 |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니지만, 하나의 의지만을 가진다. |
반대 의견 |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니므로, 신적인 의지와 인적인 의지, 두 가지 의지를 가진다. |
영향 | |
결과 |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됨.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교리 확립에 기여. |
관련 교리 | |
관련 교리 | 단성론 양의론 |
2. 역사적 배경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고 선언하여 단성론 논쟁을 종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신성만 있다는 믿음을 고수했고, 이는 7세기 단의론 논쟁(633~680년)으로 이어졌다.[7]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오스는 이집트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에게는 두 가지 성질이 있지만, 이들은 단일한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8] 황제 이라클리오스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진술》(''Ἔκθεσις'')을 발표하여 그리스도에게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하나의 의지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는 네 곳의 총대주교의 승인을 받았으나, 641년 교황 요한 4세는 이에 반대했다.
648년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칙령을 통해 단의론을 지지하고 그리스도의 의지 개수에 대한 논의를 금지했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1세는 로마 종교 회의에서 단의론이 그리스도의 위상을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콘스탄스 2세는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 재판에 처했으며, 마르티노 1세는 사형 선고 후 감금 중 사망했다.[9]
콘스탄티노스 4세는 680년~681년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하여 안티오케이아(안티오크) 총대주교 마카리오스와 함께 기독론 문제를 다시 논의했다. 교황 아가토는 서한을 통해 황제에게 복종을 약속했고, 공의회는 단의론을 정죄하며 논쟁을 종결했다.
교황 레오 2세는 콘스탄티노스 4세의 요청에 따라 즉시 공의회 승인 서한을 보냈고, 라틴어 번역본을 서방 교회에 배포했다. 황제는 라벤나 대주교 임명권을 로마 교황에게 부여하고, 교황 선출 시 황제 승인을 면제하는 등 로마 교회에 특혜를 주었다. 교황 베네딕토 2세의 승인 면제 이후, 교황 요한 5세는 로마 주민 선거로 선출된 직후 즉시 교황으로 임명되었다.[10]
7세기 단성론자와 양성론자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제시된 단의론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필요와 맞물렸다. 624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면서도 유일한 행동 양식(ενέργειαel[3])을 인정하는 주장이 나왔으나, 예루살렘 총대주교소프로니오스가 반대했다.
로마 교황호노리우스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세르기우스 1세는 엑테시스를 통해 행동 양식 대신 그리스도의 단일 의지(θέλημαel[4])를 주장했다.
649년 라테란 공의회와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단의론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논쟁을 종결지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1세와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는 함께 단죄되었다. 단의론에 반대한 대표적 인물로는 소프로니오스, 증거자 막시모스, 마르티노 1세가 있으며, 성 막시모스와 성 마르티노는 황제 콘스탄스 2세에게 탄압받아 유배되었다.[5]
2. 1. 칼케돈 공의회 이전의 논쟁

5세기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교회의 일부 지역이 혼란에 빠졌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결정했지만, 그의 정확한 본성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었다. 교회는 4세기 니케아 공의회 당시 아리우스주의 논쟁에서 예수가 완전히 신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이단으로 선언했으며, 그가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1]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자 인간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인간적 본성과 신적 본성이 정확히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1]
2. 2. 칼케돈 공의회 (451년)
5세기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은 교회 일부 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가 완전히 신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이단으로 선언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인간적 본성과 신적 본성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칼케돈의 기독론적 정의는 동방 정교회, 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 개혁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두 개의 뚜렷한 본성(신성과 인성)을 유지하지만, 이 두 본성은 그의 한 위격 안에서 결합된다고 정의한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이신,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이다.
그러나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의 본성만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유티케스가 묘사한 것처럼, 단성론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바다 속 꿀 한 방울처럼 녹아" 없어졌으며, 따라서 그의 본성은 실제로 신적이라고 보았다.[1] 이는 두 본성이 분리 없이, 혼동 없이, 변형 없이, 그리고 각각 고유성을 가지면서 결합된다고 주장하는 양성론과 구별된다.
이러한 논쟁은 칼케돈 신조 지지자들이 비칼케돈파를, 비칼케돈파는 칼케돈 신조 지지자들을 비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비잔틴 제국에게 위험했는데, 제국에서 단성론을 지지하는 지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종교적 위계를 이단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2]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는 수많은 콥트인 단성론자들이 소수의 칼케돈 신조를 지지하는 그리스인들과 대립했다.[3]
2. 3. 칼케돈 공의회 이후의 분열
칼케돈의 기독론적 정의는 동방 정교회, 가톨릭 교회, 성공회, 루터교, 개혁교회에서 받아들여졌지만, 단성론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단성론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과 신적 본성이 하나의 새로운 단일(mono) 본성으로 융합되었다고 주장했다.[3] 유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이 "바다 속 꿀 한 방울처럼 녹아" 없어졌으며, 따라서 그의 본성은 실제로 신적이라고 묘사했다.[3]이 논쟁은 칼케돈 신조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칼케돈 신조 지지자들은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우리와 다른 종류의 것으로 가르친다고 비난했고, 반대자들은 칼케돈 신조 지지자들이 네스토리우스주의의 한 형태를 옹호한다고 비난했다.
이 내부 분열은 비잔틴 제국에 위험으로 다가왔다. 제국 내 단성론 지지 지역(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종교적 위계를 불신하며 반발했고, 이는 제국 분열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5]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는 약 3만 명의 칼케돈 신조 지지 그리스인들이 약 500만 명의 콥트인 단성론자들과 대립했다.[6]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는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야코브주의로 분열되었고, 아르메니아의 종교는 완전히 키릴식 비칼케돈 신조를 따랐으며, 팔레스타인은 칼케돈 신조를 완전히 지지했다.[6]
3. 단의론 논쟁의 전개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여 단성론 논쟁을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에게는 신성만 있다는 믿음을 계속 유지했다. 이러한 상황은 7세기에 단의론 논쟁(633~680년)으로 이어졌다.[7]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세르기오스는 이집트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두 가지 성질이 있지만, 이 두 성질은 하나의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는 독특한 이론을 제시했다.[8]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단성론 문제를 해결하고자 단의론에 기초한 《진술》(''Ἔκθεσις'')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그리스도에게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의지 하나만 존재하며, 이 의지의 작용으로 구원 사업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는 네 곳의 총대주교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641년 초, 새로운 교황 요한 4세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강하게 반발했다.
648년,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칙령을 통해 단의론 신학을 지지하며, 앞으로 그리스도의 의지 개수에 대해 논쟁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는 세르기오스의 이론에 따라 칙령을 발표하여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1세는 로마에서 종교 회의를 열어 단의론이 그리스도의 위상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황제 콘스탄스 2세는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여 재판에 넘겼다. 마르티노 1세는 사형을 선고받고 감금된 상태에서 사망했다.[9]
680년~681년,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서방 교회에서는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테오도포스는 안티오케이아(안티오크)의 총대주교 마카리오스와 연합하여 기독론 문제를 다시 논의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교황 아가토는 건강 문제로 직접 참석하지 못했지만,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로마에 대한 황제의 대권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기독교 황제의 보편적 권위를 인정하며, 교황이 황제에게 영원히 봉사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고백했다. 황제는 이 공의회를 통해 서방 교회가 원하는 대로 단의론 신학을 정죄하고 교리 논쟁을 마무리했다.
교황 레오 2세는 공의회가 끝난 후 콘스탄티노스 4세가 강령 승인을 요청하자 즉시 승인 서한을 작성해 황제에게 보냈다. 이후 교황은 라틴어로 강령을 번역해 서방 교회 전체가 이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 대가로 황제는 로마 교회에 새로운 특혜를 부여했다. 라벤나에서 새로 선출된 대주교는 로마에 가서 교황에게 임명을 받도록 함으로써 라벤나 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한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교황으로 선출되면 황제의 승인 없이 즉시 교황이 될 수 있도록 교황 베네딕토 2세에게 허락했다. 그 결과 교황 요한 5세는 로마 시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자마자 즉시 교황으로 임명되었다.[10]
페르시아 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헤라클리우스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회복된 단성론(특정 공의회를 거부하여 "비칼케돈"이라고도 불림) 지방의 행정 문제로 인해 자신의 타협안을 홍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629년, 황제와 야고보파 아타나시우스 사이에 히에라폴리스에서 회담이 열렸다. 야고보파가 단일 에너지 교리를 기반으로 제국 교회로 돌아가고, 아타나시우스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되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630년, 알렉산드리아의 키루스 주교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되었고, 곧 다른 비칼케돈파 집단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개의 총대주교청(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중 3곳에서 그리스도의 "하나의 신인 에너지"를 가르치게 되었다.[7]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의 소프로니우스는 이 교리에 불안정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두 의지에 대한 교리인 양의론의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교리적 표현이 타협되고 있다고 우려했다.[7] 처음 몇 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는 그를 침묵시킬 수 있었지만, 소프로니우스가 634년에 예루살렘 정교회 총대주교로 임명되자 그는 새롭게 얻은 권위를 이용하여 단일 에너지론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세르기우스는 자신의 그리스도론적 타협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막기 위해 교황 호노리우스 1세(625–638)에게 서신을 보내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에너지가 있는지 두 개의 에너지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나 논쟁으로 교회의 일치가 위협받지 않도록 하는 입장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르기우스는 또한 두 개의 에너지 교리가 예수에게 상충되는 두 개의 의지가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4] 635년 호노리우스의 답변은 모든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예수님은 아담의 타락으로 오염된 인간 본성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 이전에 존재했던 인간 본성을 취했기 때문에 상충되는 두 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4] 한편, 키프로스 공의회의 결과인 소프로니우스의 ''시노드 서신''이 나타났다. 그것은 새로운 교리가 정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소프로니우스는 그것이 칼케돈에서 어렵게 얻은 성과에 반하는, 단성론의 변질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갑자기 그 교리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곧 이전 지지자들은 그 제안의 결함과 불일치를 찾는 데 바빴다.[4] 곧, 세르기우스와 헤라클리우스는 그것을 교리로서 포기했다.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론은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이 논쟁은 종결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1세와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는 함께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단의론에 반박한 대표적인 성인으로는 소프로니오스 외에 증거자 막시모스, 마르티노 1세가 있다. 두 사람 모두 황제 콘스탄스 2세에게 탄압을 받아 성 막시모스는 혀와 오른손이 절단되어 유배되었고, 성 마르티노도 유배되었다.[5]
3. 1. 단일 에너지론 (620년대)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1세는 제국 내 종교적 통합을 위해 단일 에너지론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유일한 행동 양식(ενέργεια|에네르기아el)[3]을 주장했다.622년, 테오도시오폴리스에서 가린 공의회가 개최되어 단일 에너지론이 논의되었다.[7] 헤라클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의 비 칼케돈 교회와의 화해를 위해 이 교리를 사용하려 했다. 626년에는 키프로스 주교 아르카디우스에게 "하나의 주권적 에너지" 교리를 가르치도록 칙령을 내렸다.[7]

그러나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오스는 이 교리에 반대하며, 그리스도의 두 의지에 대한 교리인 양의론을 옹호했다. 그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교리적 표현이 타협되고 있다고 우려했다.[7]
3. 2. 단일 의지론 (630년대)
638년 세르기우스 1세가 초안을 작성하고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발표한 엑테시스("신앙 선언")에서 단일 의지론이 주장되었다. 엑테시스는 그리스도에게 단일 의지(θέλημα|텔레마el[4])가 존재한다고 선언하고, 행동 양식(ενέργεια|에네르게이아el[3])에 대한 언급은 금지했다.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의 답변 역시 단일 의지를 지지하는 내용이었다.[4] 그러나 64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단의론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4. 로마와의 갈등
641년 초, 교황 요한 4세는 단의론에 동의하지 않고 크게 반발했다.[9] 648년 콘스탄스 2세 황제는 칙령을 통해 단의론 신학을 지지하면서 앞으로 그리스도의 의지 개수를 놓고 논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세르기오스의 이론에 입각해 교회의 분열을 매듭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르티노 1세는 로마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단의론이 그리스도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결함이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9]
그러자 콘스탄스 2세는 이탈리아에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압송해 재판에 처했다. 마르티노 1세는 사형을 선고받고 감금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9]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수도승 막시무스 참회자가 단의론에 맞서 격렬한 운동을 벌였다. 646년에는 아프리카 공의회를 설득하여 이 교리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작성하도록 하여 새로운 교황 테오도르 1세에게 보냈다. 테오도르 1세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파트리아르크 바울 2세에게 단의론의 이단적 성격을 설명하는 서한을 보냈다.
콘스탄스 2세는 황제 칙령인 콘스탄스의 유형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가 하나의 의지 또는 두 개의 의지, 하나의 작용 또는 두 개의 작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논의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다.
로마와 서방에서는 단의론에 대한 반대가 최고조에 달했고, 콘스탄스의 유형은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649년 라테란 공의회는 《엑테시스》뿐만 아니라 《유형》도 규탄했다. 시노드 이후 교황 마르티노는 콘스탄스에게 그 결론을 알리고 단의론 교리와 그의 《유형》 모두를 규탄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라테란 시노드가 열리는 동안, 올림피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후임자 테오도로 1세 칼리오파스는 교황 마르티노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여 그곳에서 감옥에 가두고 고문했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죄를 받고 황제에 의해 처형되기 전에 추방되었다.
황제는 막시무스 참회자를 포함하여 단의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계속 박해했고, 그의 제자들도 박해했다. 막시무스는 그가 철회하도록 하기 위해 혀와 오른손을 잃었다.
5. 단의론의 종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선언하여 단성론 논쟁을 종결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신성만 있다는 믿음을 고수했고, 논쟁은 7세기 단의론 논쟁(633~680년)으로 이어졌다.[7]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오스는 이집트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성질이 있지만, 이 두 성질은 단일한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는 독특한 이론을 제창했다.[8]
황제 이라클리오스는 단성론 문제를 해결하고자 단의론에 바탕을 둔 《진술》(''Ἔκθεσις'')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그리스도에게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의지 하나만 존재하며, 이 의지의 작용으로 구원 사업을 성취했다고 주장했다. 총대주교 네 곳은 이 문서를 승인했지만, 641년 초 교황 요한 4세는 이에 반대했다.
648년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칙령을 통해 단의론 신학을 지지하며 그리스도의 의지 개수에 대한 논의를 금지했다. 세르기오스의 이론에 입각한 칙령으로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교황 마르티노 1세는 로마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단의론이 그리스도의 위상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했다. 황제 콘스탄스 2세는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재판에 처했으며, 마르티노 1세는 사형을 선고받고 감금된 상태에서 사망했다.[9]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론이 이단으로 규정되면서 논쟁은 종결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1세와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1세는 함께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단의론에 반박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소프로니오스, 증거자 막시모스, 마르티노 1세가 있다. 성 막시모스는 황제 콘스탄스 2세에게 탄압받아 혀와 오른손이 절단되어 유배되었고, 성 마르티노도 유배되었다.[5]
교황 레오 2세는 공의회가 끝난 후 콘스탄티노스 4세의 강령 승인 요청에 즉시 승인 서한을 보냈다. 이후 교황은 라틴어로 강령을 번역해 서방 교회 전체가 수용하도록 했다. 황제는 로마 교회에 새로운 특혜를 부여했는데, 라벤나에서 새로 당선된 대주교는 로마에서 교황에게 임명을 받도록 하여 라벤나 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했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교황으로 당선되면 황제 승인 없이 즉시 교황이 될 수 있도록 교황 베네딕토 2세에게 허락했다. 그 결과 교황 요한 5세는 로마 시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자마자 즉시 교황으로 임명되었다.[10]
5. 1.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681년)
콘스탄티노스 4세 황제는 680년~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서방 교회에서는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라고 한다.)를 개최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테오도로스는 안티오키아(안티오크) 총대주교 마카리오스와 연합하여 기독론 문제를 다시 논의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9] 교황 아가토는 건강 악화로 직접 참석하지 못했으나,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로마에 대한 황제의 대권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기독교 황제의 보편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교황이 황제에게 영원히 봉사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고백했다.[9] 황제는 이 공의회를 통해 서방 교회에서 원하는 대로 단의론 신학을 정죄하고 교리 논쟁을 매듭지었다.
공의회는 680년부터 681년까지 열렸다. 로마 대표 외에도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대표가 참석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도 직접 참석했다. 이 공의회는 단의론 교리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가 "분열, 변화, 분리 또는 혼동 없이 두 개의 자연적 의지와 두 개의 자연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양의론을 참된 교리로 선언했다. 또한 호노리우스 1세를 포함하여 단의론의 주요 대표들을 파문했다.[9]
6. 호노리우스 1세 논쟁
교황 무류성 논쟁과 관련하여 호노리우스 1세의 발언과 단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존 바그넬 버리와 같은 역사학자들은 호노리우스 1세가 변증법에 대한 전통적인 라틴적 거부감 때문에 신학적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가 제시한 단일 에너지설의 문제는 호노리우스 1세에게 신학보다는 문법의 문제로 보였다. 그는 "하나의 의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단의론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에너지"와 "두 개의 에너지"를 정확히 같은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르기우스에게 보낸 그의 두 번째 서신은 대체로 정통적이었다. 막시무스는 그의 저서 《피루스와의 논쟁》에서 "하나의 의지"라는 표현을 타락한 인간의 의지가 다양하고 모순된 선을 추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의 완전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사후에 호노리우스를 이단으로 저주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과 함께, 옛 로마의 교황이었던 호노리우스를 성 하나님의 교회에서 추방하고 저주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그가 세르기우스에게 쓴 내용에서, 모든 면에서 그의 견해를 따랐고 그의 사악한 교리를 확증했기 때문이다" (제13차 회의) 그리고 "이단자 호노리우스에게 저주를!" (제16차 회의).
그러나 교황 레오 2세가 공의회를 확증하는 서신은 공의회가 호노리우스를 믿음의 오류가 아닌 "신중하지 못한 침묵의 경제성"에 대해 비판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한다. 레오의 서신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우리는 새로운 오류의 발명가들, 즉 테오도르, 세르기우스, ... 그리고 또한 이 사도적 교회를 사도적 전통의 가르침으로 성화시키려 시도하지 않고, 불경한 배신으로 그 순수성을 더럽히도록 허락한 호노리우스를 저주한다."
7. 현대의 단의론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는 그의 저서 《Reasonable Faith|리즈너블 페이스영어》에서 단의론을 주장하고 있다.[11]
참조
[1]
문헌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웹사이트
St Maximus the Confessor
http://ocafs.oca.org[...]
[6]
웹인용
단성론과 단의론
https://blog.daum.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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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인용
종교개혁시대 이단판별과 아디아포라, 그리고 똘레랑스
https://www.chris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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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저널
8세기 중엽 교황의 리더십
호남사학회
200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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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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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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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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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theletism Reasonable Faith
https://www.reason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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