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개선사지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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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담양 개선사지 석등은 높이 3.5m의 팔각형 고복형 석등으로, 1992년 하대석이 새로운 석재로 교체되었다. 화사석에는 13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라 진성여왕 5년(891년)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신라 시대 석등 중 유일한 명문이다. 이 명문은 석등 건립 주체와 유지비 마련을 위한 토지 구입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개선사지는 조선 후기 읍지 기록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되며, 현재는 광주호로 인해 접근이 제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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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개선사지 석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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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 | |
기본 정보 | |
이름 | 담양 개선사지 석등 |
로마자 표기 | Damyang Gaeseonsaji Seokdeung |
영문 이름 | Stone Lantern at Gaeseonsa Temple Site, Damyang |
유형 | 보물 |
지정 번호 | 111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주소 |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학선리 593-2번지 |
시대 | 남북국시대 신라 진성여왕 5년(891년) |
소유 | 국유 |
수량 | 1기 |
참고 정보 | |
문화재청 | 12,01110000,36 |
2. 특징
담양 개선사지 석등은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세웠다. 높이 3.5m의 이 석등은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 사잇기둥은 장고 모양,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 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8면에 창이 뚫려있다. 지붕돌 아랫면에는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 끝부분에는 꽃 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 신라 시대 석등 가운데 유일하게 글씨가 새겨진 예이다. 따라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 데 기준이 된다. 전체적으로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고복형(鼓複形) 양식을 띄고 있다.
규모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석등이 있던 자리에는 상당히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2. 1. 세부 양식
넓은 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하대석을 올렸는데, 1992년에 새로운 석재로 교체되었다. 상대석의 복련은 복판팔엽의 양련으로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상대갑석 위에는 둥그런 괴임을 마련하였고, 화사석 각 면에는 장방형의 호창을 내고 간주 양쪽을 이용하여 조등기(造燈記)를 음각하였다. 팔각지붕 마루 끝에는 귀꽃을 장식하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깨졌고 하나만 남아 있다.[1]화사석 기둥면에 새겨진 등을 만든 기록은 한 기둥에 각기 두 줄씩 기록되어 있고, 9행과 10행에 쓰여진 세주(細注)는 각기 두 줄로 되어 있다. 총 10행 136자이며, 글자 너비는 4cm이고, 서체는 해서이다. 진성여왕 5년인 891년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라 시대 석등 가운데 유일한 명문으로,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 데 기준이 된다.[1]
2. 2. 명문
화사석 기둥면에 새겨진 조등기(造燈記)는 한 기둥에 각기 두 줄씩 기록되어 있다. 총 10행 136자이며, 글자 너비는 4cm이고, 서체는 해서(楷書)이다.[1] 진성여왕 5년(891년)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라 시대 석등 가운데 유일한 명문이다. 따라서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 데 기준이 된다.[1]명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1행부터 6행까지는 신라 경문왕과 그 왕비, 공주(후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절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를 구입하였고,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1] 명문에 쓰인 용기(龍紀) 3년은 891년(통일신라 진성여왕 3년)에 해당되므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1]
3. 담양 개선사지
개선사지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읍지에서 확인된다. 1791년 《해남읍지》, 1899년 《창평군읍지》, 1909년 황성신문의 명소고적 소개 기사, 1872년 〈창평현지도〉, 《寺塔古跡巧》 등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1]
3. 1. 연혁
개선사지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읍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1791년에 작성된 《해남읍지》, 1899년에 작성된 《창평군읍지》 등에는 '석등이 현 남쪽 오리(군 남쪽 15리) 개선동에 있고 전하기를 삼국시대 개선사의 것이라 한다. 높이는 1장이 넘고 둘레는 2圍이고 층이 10級인데 8개의 문을 뚫고 조각이 극히 기괴하다. 그 면에 각자하여 이르기를 '당 함통9년 戊子년 2월에 승려 靈判이 건립했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 이 내용은 1909년 황성신문의 명소고적 소개 기사에도 동일하게 인용되었다.[1] 1872년 〈창평현지도〉에는 현 남쪽 '開仙洞'에 '開仙寺古地'라 기록하고 탑 모양 그림이 그려져 있다.[1] 《寺塔古跡巧》에는 '남면 학선리 사지: 개선사지라고 칭한다. 개선동 부락의 남쪽 약 200m에 있다. 석등: 화강암제 팔각당형으로서 탑신부에 연꽃을 조각하였는데 정치하다.…'고 조사 기록하고 있다.[1]3. 2. 조사구역 현황
개선사지는 덕봉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형성된 낮은 구릉지대에 있다. 1976년에 준공된 광주호로 인해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길이 수몰되어, 현재는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수리마을 쪽에서 개선동길을 따라 덕봉산 동쪽 능선을 넘어 진입해야 한다. 수몰되기 이전에는 현재의 광주호 제방 쪽에서 개선마을을 지나 골짜기 쪽으로 올라갔다. 절터는 서쪽, 남쪽, 동쪽이 낮은 등선으로 둘러싸여 북향을 하고 있으며, 골짜기 상단부에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1호)이 있다. 석등 앞쪽으로 완만한 계단형 평탄지가 100m 이상 조성되어 있으나 모두 과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유구는 확인되지 않으며, 유물 역시 소수의 기와편과 자기편만 확인되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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