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킹스 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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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 킹스 초이스는 1940년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시 호콘 7세 국왕과 노르웨이 왕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이다. 영화는 독일의 항복 요구에 대한 호콘 7세의 저항, 비드쿤 크비슬링의 쿠데타 시도, 그리고 노르웨이 왕실의 망명 과정을 그린다.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호콘 7세의 결단과 노르웨이 국민의 저항 정신을 조명한다. 로튼 토마토에서 83%, 메타크리틱에서 64점을 기록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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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킹스 초이스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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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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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Kongens nei (콩ens 네이) |
영어 제목 | The King’s Choice (더 킹스 초이스) |
감독 | 에릭 포페 |
제작자 | 핀 예르드룸, 스타인 B. 크바에 |
각본가 | 하랄 뢰센뢰브 에그, 얀 트뤼그베 뢰위넬란 |
주연 | 예스페르 크리스텐센, 안데르스 바스모 크리스티안센, 투바 노보트니, 카타리나 슈틀러, 칼 마르코비치, 율리아네 쾰러, 롤프 크리스티안 라르센, 에리크 히브주 |
음악 | 요한 쇠데르크비스트 |
촬영 감독 | 욘 크리스티안 로센룬 |
편집 | 아이나르 에겔란 |
배급사 | 노르디스크 필름 |
개봉일 | 2016년 9월 23일 |
상영 시간 | 133분 |
제작 국가 |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일랜드 |
언어 |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독일어, 스웨덴어 |
제작비 | 750만 달러 |
흥행 수익 | 910만 달러 |
영화제 출품 정보 | |
노르웨이의 오스카상 출품작 | 선정됨 |
2. 출연
- 예스페르 크리스텐센 - 호콘 7세 국왕 역: 본 작품의 주인공으로, 덴마크 출신의 글뤽스부르크 왕조 초대 국왕이다. 1940년 노르웨이 침공 당시 항복하지 않고 국내 도시를 전전하며 나치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저항했지만, 6월 9일 노르웨이군에 전투 중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1945년 독일 항복과 함께 노르웨이로 귀국, 1957년 사망할 때까지 국왕을 역임했다.
- 안데르스 바스모 크리스티안센 - 올라프 왕세자 역: 호콘 7세의 아들로, 국왕과 함께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6월 7일 국왕, 정부 각료들과 함께 망명했다. 호콘 7세가 1957년 사망한 후 1991년까지 올라프 5세로 국왕을 역임했다.
- 투바 노보트니 - 마르타 왕세자빈 역: 스웨덴 왕족 출신이다.
- 카타리나 쉴틀러 - 안넬리제 브로이어 역: 독일 공사 부인이다.
- 카를 마르코비츠 - 쿠르트 브로이어 역: 주 노르웨이 독일 공사로, 노르웨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노르웨이 침공 당시 전쟁을 회피하려 노력했지만, 호콘 7세의 철저 항전 신념에 의해 실패했다. 이후 독일 국방군 육군 중령으로 동부 전선에 종군, 8년간 붉은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가 1969년 사망했다.
- 율리아네 쾰러 - 디아나 뮐러 역: 독일 공사관 비서이다.
- 에릭 히비유 - 비르거 에릭센 대령 역: 노르웨이군 장교이다.
- 에스펜 산드비크 - 마그누스 P. 쇠뎀 대위 역
- 아서 하칼라티 - 근위병 프레드릭 세베르그 역: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소년병이다.
- 롤프 크리스티안 라르센 - 브리냐르 함메르 하사 역: 세베르의 상관이다.
- 스베인 틴드베르그 - 페데르 안케르 베델 야를스베르그 역: 궁내 대신이다.
- 제랄드 페터센 - 요한 뉘고르스보르 총리 역
- 케틸 호에 - 할브단 코트 외무부 장관 역
- 안드레아스 루스트 - 오버스트로이테난트 하르트비히 폴만 역: 독일 국방군 XXI군단 참모장이다.
- 얀 프로스타드 - 스토르팅 의장 C. J. 함브로 역
- 마그누스 케틸 도베 - 하랄 왕자 역 (3세 때): 왕태자의 장남이다.
- 소피에 팔크고르 - 라그닐 공주 역: 왕태자의 장녀이다.
- 잉리드 로스 라프테모 - 아스트리드 공주 역: 왕태자의 차녀이다.
- 우도 쉥크 - 아돌프 히틀러 (목소리) 역
- 토르핀 나그 - 크리스티안 벨하벤 경찰청장 역
- 얀 페터 디크만 - 이바르 뤼케 역
2. 1. 주연
- 예스페르 크리스텐센 - 호콘 7세 국왕 역: 본 작품의 주인공으로, 덴마크 출신의 글뤽스부르크 왕조 초대 국왕이다. 1940년 노르웨이 침공 당시 항복하지 않고 국내 도시를 전전하며 나치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저항했지만, 6월 9일 노르웨이군에 전투 중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1945년 독일 항복과 함께 노르웨이로 귀국, 1957년 사망할 때까지 국왕을 역임했다.
- 안데르스 바스모 크리스티안센 - 올라프 왕세자 역: 호콘 7세의 아들로, 국왕과 함께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6월 7일 국왕, 정부 각료들과 함께 망명했다. 호콘 7세가 1957년 사망한 후 1991년까지 올라프 5세로 국왕을 역임했다.
- 튜바 노보트니 - 마르타 왕세자빈 역: 스웨덴 왕족 출신이다.
- 카타리나 슈틀러 - 안넬리제 브로이어 역: 독일 공사 부인이다.
- 카를 마르코비츠 - 쿠르트 브로이어 역: 주 노르웨이 독일 공사로, 노르웨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노르웨이 침공 당시 전쟁을 회피하려 노력했지만, 호콘 7세의 철저 항전 신념에 의해 실패했다. 이후 독일 국방군 육군 중령으로 동부 전선에 종군, 8년간 붉은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가 1969년 사망했다.
- 율리아네 쾰러 - 디아나 뮐러 역: 독일 공사관 비서이다.
- 에릭 히비유 - 비르거 에릭센 대령 역: 노르웨이군 장교이다.
- 에스펜 산드비크 - 마그누스 P. 쇠뎀 대위 역
- 아서 하칼라티 - 근위병 프레드릭 세베르그 역: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소년병이다.
- 롤프 크리스티안 라르센 - 브리냐르 함메르 하사 역: 세베르의 상관이다.
- 스베인 틴드베르그 - 페데르 안케르 베델 야를스베르그 역: 궁내 대신이다.
- 제랄드 페터센 - 요한 뉘고르스보르 총리 역
- 케틸 호에 - 할브단 코트 외무부 장관 역
- 안드레아스 루스트 - 오버스트로이테난트 하르트비히 폴만 역: 독일 국방군 XXI군단 참모장이다.
- 얀 프로스타드 - 스토르팅 의장 C. J. 함브로 역
- 마그누스 케틸 도베 - 하랄 왕자 역 (3세 때): 왕태자의 장남이다.
- 소피에 팔크고르 - 라그닐 공주 역: 왕태자의 장녀이다.
- 잉리드 로스 라프테모 - 아스트리드 공주 역: 왕태자의 차녀이다.
- 우도 쉥크 - 아돌프 히틀러 (목소리) 역
- 토르핀 나그 - 크리스티안 벨하벤 경찰청장 역
- 얀 페터 디크만 - 이바르 뤼케 역
2. 2. 조연
제스퍼 크리스텐슨, 안데르스 바스모 크리스티안센, 튜바 노보트니, 카타리나 슈틀러 등 여러 배우들이 영화에 출연했다.- 예스퍼 크리스텐센 - 호콘 7세 국왕 역: 본 작품의 주인공으로, 글뤽스부르크 왕조 초대 국왕이다. 1940년 노르웨이 침공 당시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으며, 1945년 독일 항복과 함께 노르웨이로 귀국하여 1957년 사망할 때까지 국왕을 역임했다.
- 안데르스 바스모 크리스티안센 - 올라프 왕세자 역: 호콘 7세의 아들이자 왕세자로, 국왕과 함께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1991년까지 올라프 5세로 국왕을 역임했다.
- 투바 노보트니 - 마르타 왕세자빈 역: 스웨덴 왕족 출신이다.
- 카타리나 쉴틀러 - 안넬리제 브로이어 역: 독일 공사 부인이다.
- 카를 마르코비츠 - 쿠르트 브로이어 역: 주 노르웨이 독일 공사로, 노르웨이 침공 당시 전쟁을 회피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독일 국방군 육군 중령으로 동부 전선에 종군했다. 1969년 사망했다.
- 율리아네 쾰러 - 디아나 뮐러 역: 독일 공사관 비서이다.
- 에릭 히비유 - 비르거 에릭센 대령 역: 노르웨이군 장교이다.
- 에스펜 산드비크 - 마그누스 P. 쇠뎀 대위 역
- 아서 하칼라티 - 근위병 프레드릭 세베르그 역: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소년병이다.
- 롤프 크리스티안 라르센 - 브리냐르 함메르 하사 역: 세베르의 상관이다.
- 스베인 틴드베르그 - 페데르 안케르 베델 야를스베르그 역: 궁내 대신이다.
- 제랄드 페터센 - 요한 뉘고르스보르 총리 역
- 케틸 호에 - 할브단 코트 외무부 장관 역
- 안드레아스 루스트 - 오버스트로이테난트 하르트비히 폴만 역: 독일 국방군 XXI군단 참모장이다.
- 얀 프로스타드 - 스토르팅 의장 C. J. 함브로 역
- 마그누스 케틸 도베 - 하랄 왕자 역 (3세 때): 왕태자의 장남이다.
- 소피에 팔크고르 - 라그닐 공주 역: 왕태자의 장녀이다.
- 잉리드 로스 라프테모 - 아스트리드 공주 역: 왕태자의 차녀이다.
- 우도 쉥크 - 아돌프 히틀러 (목소리) 역
- 토르핀 나그 - 크리스티안 벨하벤 경찰청장 역
- 얀 페터 디크만 - 이바르 뤼케 역
3. 제작진
의상 담당은 카렌 파브리티어스 그램이다.
4. 줄거리
영화는 1940년 4월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전후 며칠 동안의 호콘 7세와 노르웨이 왕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4월 8일, 올라프 왕세자는 릴레산 근해에서 침몰한 수송선에 나치 독일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요한 니가르스볼 총리가 독일의 침략에 직면하여 노르웨이의 중립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오슬로 주재 독일 사절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정부를 설득하여 독일군이 노르웨이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지시받았다. 다음 날 새벽, 브로이어는 독일의 제안을 외무부 장관 할브단 코트에게 전달했으나, 코트는 노르웨이는 주권 국가라며 거부했다.
드뢰박 근처 오스카스보르 요새의 비르거 에릭센 대령은 독일 순양함 '블뤼허'가 드뢰박 해협으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발포 명령을 내려 '블뤼허'를 침몰시켰다. 드뢰박 해협 해전 이후, 왕가는 하마르로 피난했고, 브로이어는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국왕을 만나 비드쿤 크비슬링의 정부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일군이 하마르로 진격하면서 왕족과 내각은 엘베룸으로 이동했고, 미드스코겐에서 검문소를 공격한 독일 강하엽병은 노르웨이 자원병에게 격퇴당했다. 호콘 7세는 엘베룸에서 브로이어와 만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처럼 항복할 것을 촉구받았으나, 내각에 결정을 맡기고 크비슬링을 총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명하며, 내각이 반대하면 퇴위할 의사를 밝혔다. 내각은 국왕의 결정에 따라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고, 독일 항공기는 엘베룸과 뉘베르순을 폭격했다.
국왕, 왕세자, 그리고 내각은 영국으로 탈출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이후, 호콘 7세는 하랄 왕자와 재회한 후 왕족은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을 시작했다. 호콘 7세는 오슬로에서 독일 국방군의 침공 소식을 접했다. 독일 공사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외무 장관 코트에게 항복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요청했다. 브로이어는 노르웨이와의 전쟁에 반대하며,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노르웨이를 방어하는 대가로 독일에 협력해 줄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코트는 노르웨이는 독립 국가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른 아침, 호콘 7세는 아들 올라프 왕세자와 함께 왕궁을 탈출, 열차를 타고 하마르로 향했다. 하마르에 도착한 호콘 7세는 정부 각료들과 합류, 덴마크가 단 하루 만에 항복했다는 소식(덴마크 전투)과 함께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임시 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의회 초반에 총리는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으나, 호콘 7세는 의장과 함께 이를 승인하지 않고 무력 대신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파시즘 정당인 국민 연합 당수 크비슬링이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 장악을 선언하고 자신이 신정권의 총리로 취임하여 독일에 협력하겠다고 발표하자, 국왕 일가는 다시 피난, 노르웨이군은 국왕을 구속하려 쫓아온 독일 국방군과 응전하며 국왕 일가의 피난에 힘썼다. 히틀러는 브로이어 공사에게 호콘 7세와 회견하여 논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브로이어는 호콘 7세에게 노르웨이의 항복, 크비슬링의 총리 취임을 요구했다. 브로이어는 자신이 독단적으로 만든 제안서 등으로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국왕은 국민의 의견 없이 결정할 수는 없다고 거부했다. 호콘 7세는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왕으로서 항복을 거부하고, 크비슬링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것이며, 나치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항복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 공군은 호콘 7세 등의 피난처에 공습을 가했고, 1940년 4월 11일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6월 7일, 호콘 7세와 올라프 왕세자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고, 3일 후 노르웨이는 항복했다. 국왕은 망명 후에도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과 신문을 통해 노르웨이 국민을 계속 고무하며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후, 국왕과 왕세자는 노르웨이로 귀국했다.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을 시작했다.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는 수도 오슬로에 있는 궁궐에서 독일 국방군의 침공 소식을 접했다. 독일 공사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외무 장관 코트에게 가서 항복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요청했다. 브로이어는 노르웨이와의 전쟁에 반대하며,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노르웨이를 방어하는 대가로 독일에 협력해 줄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코트는 노르웨이는 독립 국가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 호콘 7세는 아들 올라프 왕세자와 그의 아내, 왕세자 부부의 자녀들과 함께 왕궁을 탈출했다. 열차를 타고 하마르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아 국왕 일가는 노르웨이가 침략당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하마르에 도착한 호콘 7세는 정부 각료들과 합류했다. 노르웨이 주요 도시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호콘 7세의 형 크리스티안 10세가 다스리는 덴마크는 단 하루 만에 항복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덴마크의 전투)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임시 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의회 초반에 총리는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호콘 7세는 의장과 함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력 대신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군사 공격 중단을 조건으로 협상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독일 공사관에 전달했다. 노르웨이와의 화해를 강력히 원했던 브로이어 공사는 그 의사에 응할 생각이었지만, 히틀러는 무력 행위를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파시즘정당인 국민 연합 당수 크비슬링이 전쟁의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 장악을 선언하고 라디오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왕국 정부를 비판하고 자신이 신정권의 총리로 취임하여 독일에 협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받아 국왕 일가는 다시 피난하게 되었고, 노르웨이군은 국왕을 구속하려 쫓아온 독일 국방군과 응전하며, 국왕 일가의 피난에 힘썼다. 히틀러는 브로이어 공사에게 호콘 7세와 회견하여 논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방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노르웨이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국왕 일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르웨이 정부 각료들은 독일 국방군이 지정한 장소인 엘베름으로 브로이어 공사와의 협상에 나가 줄 것을 호콘 7세에게 간청했다. 적이 지정한 장소에 국왕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왕세자가 반대했지만, 희생을 내고 싶지 않았던 호콘 7세는 출두를 결심했다.
그리고 국왕을 만난 브로이어 공사는 노르웨이의 항복, 신정권의 총리에는 크비슬링을 취임시킨다는 요구를 전달했다. 브로이어는 자신이 독단적으로 만든 제안서 등으로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국민의 의견 없이 결정할 수는 없다고 국왕은 거부했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집요하게 항복을 요구하는 브로이어 공사를 비난하고, 각료들을 불러들였다. 각료들이 협상을 이어가려 했지만, 국왕 외에는 협상할 생각이 없는 브로이어 공사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호콘 7세는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왕으로서 항복을 거부할 것,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크비슬링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것을, 많은 생명이 희생될 것을 각오한 채, 절대로 나치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항복을 거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 공군은 호콘 7세 등의 피난처에 공습을 가했고, 1940년 4월 11일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을 시작했다.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는 수도 오슬로에 있는 궁궐에서 독일 국방군의 침공 소식을 접했다. 독일 공사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외무 장관 코트에게 가서 항복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요청했다. 브로이어는 노르웨이와의 전쟁에 반대하며,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노르웨이를 방어하는 대가로 독일에 협력해 줄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코트는 노르웨이는 독립 국가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 호콘 7세는 아들 올라프 왕세자와 그의 아내, 왕세자 부부의 자녀들과 함께 왕궁을 탈출했다. 열차를 타고 하마르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아 국왕 일가는 노르웨이가 침략당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하마르에 도착한 호콘 7세는 정부 각료들과 합류했다. 노르웨이 주요 도시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호콘 7세의 형 크리스티안 10세가 다스리는 덴마크는 단 하루 만에 항복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덴마크의 전투)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임시 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의회 초반에 총리는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호콘 7세는 의장과 함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력 대신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군사 공격 중단을 조건으로 협상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독일 공사관에 전달했다. 노르웨이와의 화해를 강력히 원했던 브로이어 공사는 그 의사에 응할 생각이었지만, 히틀러는 무력 행위를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파시즘정당인 국민 연합 당수 크비슬링이 전쟁의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 장악을 선언하고 라디오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왕국 정부를 비판하고 자신이 신정권의 총리로 취임하여 독일에 협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받아 국왕 일가는 다시 피난하게 되었고, 노르웨이군은 국왕을 구속하려 쫓아온 독일 국방군과 응전하며, 국왕 일가의 피난에 힘썼다. 히틀러는 브로이어 공사에게 호콘 7세와 회견하여 논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방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노르웨이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국왕 일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르웨이 정부 각료들은 독일 국방군이 지정한 장소인 엘베름으로 브로이어 공사와의 협상에 나가 줄 것을 호콘 7세에게 간청했다. 적이 지정한 장소에 국왕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왕세자가 반대했지만, 희생을 내고 싶지 않았던 호콘 7세는 출두를 결심했다.
그리고 국왕을 만난 브로이어 공사는 노르웨이의 항복, 신정권의 총리에는 크비슬링을 취임시킨다는 요구를 전달했다. 브로이어는 자신이 독단적으로 만든 제안서 등으로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국민의 의견 없이 결정할 수는 없다고 국왕은 거부했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집요하게 항복을 요구하는 브로이어 공사를 비난하고, 각료들을 불러들였다. 각료들이 협상을 이어가려 했지만, 국왕 외에는 협상할 생각이 없는 브로이어 공사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호콘 7세는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왕으로서 항복을 거부할 것,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크비슬링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것을, 많은 생명이 희생될 것을 각오한 채, 절대로 나치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항복을 거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 공군은 호콘 7세 등의 피난처에 공습을 가했고, 1940년 4월 11일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6월 7일, 호콘 7세와 올라프 왕세자는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망명했고, 3일 후 노르웨이는 항복했다. 국왕은 망명한 후에도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과 신문을 통해 노르웨이 국민을 계속 고무하며,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그리고 1945년4월 30일에 히틀러가 자결하고, 5월 8일에는 독일이 항복했다. 이를 받아 국왕과 왕세자는 노르웨이로 귀국하기 위해, 미국에 피난해 있던 왕세자비와 자녀들도 런던에 모였다. 5월 13일에 먼저 올라프 왕세자가 오슬로에 들어가고, 망명한 지 정확히 5주년이 되는 6월 7일에 호콘 7세가 오슬로에 귀환하여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4. 1. 독일의 침공과 노르웨이 왕실의 피난 (1940년 4월)
1940년 4월,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전후 며칠 동안 호콘 7세와 노르웨이 왕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4월 8일, 올라프 왕세자는 릴레산 근해에서 침몰한 수송선에 나치 독일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요한 니가르스볼 총리가 독일의 침략에 직면하여 노르웨이의 중립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오슬로 주재 독일 사절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정부를 설득하여 독일군이 노르웨이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지시받았다. 다음 날 새벽, 브로이어는 독일의 제안을 외무부 장관 할브단 코트에게 전달했으나, 코트는 노르웨이는 주권 국가라며 거부했다.
드뢰박 근처 오스카스보르 요새의 비르거 에릭센 대령은 독일 순양함 '블뤼허'가 드뢰박 해협으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발포 명령을 내려 '블뤼허'를 침몰시켰다. 드뢰박 해협 해전 이후, 왕가는 하마르로 피난했고, 브로이어는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국왕을 만나 비드쿤 크비슬링의 정부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일군이 하마르로 진격하면서 왕족과 내각은 엘베룸으로 이동했고, 미드스코겐에서 검문소를 공격한 독일 강하엽병은 노르웨이 자원병에게 격퇴당했다. 호콘 7세는 엘베룸에서 브로이어와 만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처럼 항복할 것을 촉구받았으나, 내각에 결정을 맡기고 크비슬링을 총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명하며, 내각이 반대하면 퇴위할 의사를 밝혔다. 내각은 국왕의 결정에 따라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고, 독일 항공기는 엘베룸과 뉘베르순을 폭격했다.
국왕, 왕세자, 그리고 내각은 영국으로 탈출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이후, 호콘 7세는 하랄 왕자와 재회한 후 왕족은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4. 2. 독일의 협상 시도와 노르웨이의 저항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을 시작했다. 호콘 7세는 오슬로에서 독일 국방군의 침공 소식을 접했다. 독일 공사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외무 장관 코트에게 항복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요청했다. 브로이어는 노르웨이와의 전쟁에 반대하며,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노르웨이를 방어하는 대가로 독일에 협력해 줄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코트는 노르웨이는 독립 국가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이른 아침, 호콘 7세는 아들 올라프 왕세자와 함께 왕궁을 탈출, 열차를 타고 하마르로 향했다. 하마르에 도착한 호콘 7세는 정부 각료들과 합류, 덴마크가 단 하루 만에 항복했다는 소식(덴마크 전투)과 함께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임시 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의회 초반에 총리는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으나, 호콘 7세는 의장과 함께 이를 승인하지 않고 무력 대신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파시즘 정당인 국민 연합 당수 크비슬링이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 장악을 선언하고 자신이 신정권의 총리로 취임하여 독일에 협력하겠다고 발표하자, 국왕 일가는 다시 피난, 노르웨이군은 국왕을 구속하려 쫓아온 독일 국방군과 응전하며 국왕 일가의 피난에 힘썼다. 히틀러는 브로이어 공사에게 호콘 7세와 회견하여 논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브로이어는 호콘 7세에게 노르웨이의 항복, 크비슬링의 총리 취임을 요구했다. 브로이어는 자신이 독단적으로 만든 제안서 등으로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국왕은 국민의 의견 없이 결정할 수는 없다고 거부했다. 호콘 7세는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왕으로서 항복을 거부하고, 크비슬링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것이며, 나치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항복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 공군은 호콘 7세 등의 피난처에 공습을 가했고, 1940년 4월 11일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6월 7일, 호콘 7세와 올라프 왕세자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고, 3일 후 노르웨이는 항복했다. 국왕은 망명 후에도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과 신문을 통해 노르웨이 국민을 계속 고무하며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후, 국왕과 왕세자는 노르웨이로 귀국했다.
4. 3. 크비슬링의 쿠데타와 호콘 7세의 결단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을 시작했다.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는 수도 오슬로에 있는 궁궐에서 독일 국방군의 침공 소식을 접했다. 독일 공사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외무 장관 코트에게 가서 항복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요청했다. 브로이어는 노르웨이와의 전쟁에 반대하며,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노르웨이를 방어하는 대가로 독일에 협력해 줄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코트는 노르웨이는 독립 국가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 호콘 7세는 아들 올라프 왕세자와 그의 아내, 왕세자 부부의 자녀들과 함께 왕궁을 탈출했다. 열차를 타고 하마르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아 국왕 일가는 노르웨이가 침략당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하마르에 도착한 호콘 7세는 정부 각료들과 합류했다. 노르웨이 주요 도시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호콘 7세의 형 크리스티안 10세가 다스리는 덴마크는 단 하루 만에 항복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덴마크의 전투)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임시 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의회 초반에 총리는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호콘 7세는 의장과 함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력 대신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군사 공격 중단을 조건으로 협상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독일 공사관에 전달했다. 노르웨이와의 화해를 강력히 원했던 브로이어 공사는 그 의사에 응할 생각이었지만, 히틀러는 무력 행위를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파시즘정당인 국민 연합 당수 크비슬링이 전쟁의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 장악을 선언하고 라디오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왕국 정부를 비판하고 자신이 신정권의 총리로 취임하여 독일에 협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받아 국왕 일가는 다시 피난하게 되었고, 노르웨이군은 국왕을 구속하려 쫓아온 독일 국방군과 응전하며, 국왕 일가의 피난에 힘썼다. 히틀러는 브로이어 공사에게 호콘 7세와 회견하여 논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방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노르웨이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국왕 일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르웨이 정부 각료들은 독일 국방군이 지정한 장소인 엘베름으로 브로이어 공사와의 협상에 나가 줄 것을 호콘 7세에게 간청했다. 적이 지정한 장소에 국왕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왕세자가 반대했지만, 희생을 내고 싶지 않았던 호콘 7세는 출두를 결심했다.
그리고 국왕을 만난 브로이어 공사는 노르웨이의 항복, 신정권의 총리에는 크비슬링을 취임시킨다는 요구를 전달했다. 브로이어는 자신이 독단적으로 만든 제안서 등으로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국민의 의견 없이 결정할 수는 없다고 국왕은 거부했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집요하게 항복을 요구하는 브로이어 공사를 비난하고, 각료들을 불러들였다. 각료들이 협상을 이어가려 했지만, 국왕 외에는 협상할 생각이 없는 브로이어 공사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호콘 7세는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왕으로서 항복을 거부할 것,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크비슬링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것을, 많은 생명이 희생될 것을 각오한 채, 절대로 나치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항복을 거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 공군은 호콘 7세 등의 피난처에 공습을 가했고, 1940년 4월 11일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4. 4. 독일의 공습과 노르웨이 왕실의 망명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을 시작했다.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는 수도 오슬로에 있는 궁궐에서 독일 국방군의 침공 소식을 접했다. 독일 공사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외무 장관 코트에게 가서 항복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요청했다. 브로이어는 노르웨이와의 전쟁에 반대하며,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노르웨이를 방어하는 대가로 독일에 협력해 줄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코트는 노르웨이는 독립 국가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 호콘 7세는 아들 올라프 왕세자와 그의 아내, 왕세자 부부의 자녀들과 함께 왕궁을 탈출했다. 열차를 타고 하마르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아 국왕 일가는 노르웨이가 침략당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하마르에 도착한 호콘 7세는 정부 각료들과 합류했다. 노르웨이 주요 도시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호콘 7세의 형 크리스티안 10세가 다스리는 덴마크는 단 하루 만에 항복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덴마크의 전투)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임시 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의회 초반에 총리는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호콘 7세는 의장과 함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력 대신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군사 공격 중단을 조건으로 협상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독일 공사관에 전달했다. 노르웨이와의 화해를 강력히 원했던 브로이어 공사는 그 의사에 응할 생각이었지만, 히틀러는 무력 행위를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파시즘정당인 국민 연합 당수 크비슬링이 전쟁의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 장악을 선언하고 라디오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왕국 정부를 비판하고 자신이 신정권의 총리로 취임하여 독일에 협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받아 국왕 일가는 다시 피난하게 되었고, 노르웨이군은 국왕을 구속하려 쫓아온 독일 국방군과 응전하며, 국왕 일가의 피난에 힘썼다. 히틀러는 브로이어 공사에게 호콘 7세와 회견하여 논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방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노르웨이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국왕 일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르웨이 정부 각료들은 독일 국방군이 지정한 장소인 엘베름으로 브로이어 공사와의 협상에 나가 줄 것을 호콘 7세에게 간청했다. 적이 지정한 장소에 국왕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왕세자가 반대했지만, 희생을 내고 싶지 않았던 호콘 7세는 출두를 결심했다.
그리고 국왕을 만난 브로이어 공사는 노르웨이의 항복, 신정권의 총리에는 크비슬링을 취임시킨다는 요구를 전달했다. 브로이어는 자신이 독단적으로 만든 제안서 등으로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국민의 의견 없이 결정할 수는 없다고 국왕은 거부했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집요하게 항복을 요구하는 브로이어 공사를 비난하고, 각료들을 불러들였다. 각료들이 협상을 이어가려 했지만, 국왕 외에는 협상할 생각이 없는 브로이어 공사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호콘 7세는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왕으로서 항복을 거부할 것,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크비슬링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것을, 많은 생명이 희생될 것을 각오한 채, 절대로 나치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항복을 거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 공군은 호콘 7세 등의 피난처에 공습을 가했고, 1940년 4월 11일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6월 7일, 호콘 7세와 올라프 왕세자는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망명했고, 3일 후 노르웨이는 항복했다. 국왕은 망명한 후에도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과 신문을 통해 노르웨이 국민을 계속 고무하며,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그리고 1945년4월 30일에 히틀러가 자결하고, 5월 8일에는 독일이 항복했다. 이를 받아 국왕과 왕세자는 노르웨이로 귀국하기 위해, 미국에 피난해 있던 왕세자비와 자녀들도 런던에 모였다. 5월 13일에 먼저 올라프 왕세자가 오슬로에 들어가고, 망명한 지 정확히 5주년이 되는 6월 7일에 호콘 7세가 오슬로에 귀환하여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4. 5. 노르웨이의 해방과 왕실의 귀환 (1945년 5월)
5. 역사적 배경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을 시작했다.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는 수도 오슬로의 궁궐에서 독일 국방군의 침공 소식을 접했다. 독일 공사 쿠르트 브로이어는 노르웨이 외무 장관 코트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코트는 노르웨이가 독립 국가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른 아침, 호콘 7세는 아들 올라프 왕세자와 가족들을 데리고 왕궁을 탈출, 열차를 타고 하마르로 향했으나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았다.
하마르에 도착한 호콘 7세는 정부 각료들과 합류, 덴마크가 하루 만에 항복했다는 소식(덴마크의 전투)과 함께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임시 의회를 열었다. 의회 초반, 총리는 사임하고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으나 호콘 7세는 이를 승인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협상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국민 연합 당수 크비슬링이 쿠데타를 일으켜 신정권의 총리로 취임, 독일에 협력하겠다고 발표했다. 국왕 일가는 다시 피난했고, 노르웨이군은 국왕을 구속하려는 독일군과 싸우며 국왕 일가의 피난을 도왔다. 히틀러는 브로이어에게 호콘 7세와 회담하도록 명령했다.
독일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노르웨이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노르웨이 정부 각료들은 엘베름에서 브로이어와의 협상에 나설 것을 호콘 7세에게 간청했다. 호콘 7세는 브로이어로부터 항복과 크비슬링의 총리 취임 요구를 받았으나, 국민의 의견 없이 결정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호콘 7세는 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왕으로서 항복을 거부하고, 나치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독일 공군은 호콘 7세 등의 피난처에 공습을 가했고, 1940년 4월 11일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6월 7일, 호콘 7세와 올라프 왕세자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고, 3일 후 노르웨이는 항복했다. 국왕은 망명 후에도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과 신문을 통해 노르웨이 국민을 고무하며 저항했다.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후, 호콘 7세는 오슬로에 귀환하여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6. 평가
로튼 토마토에서는 24명의 평론가 리뷰를 바탕으로 83%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평균 평점은 6.6/10이다.[10][17] 메타크리틱에서는 8명의 평론가 리뷰를 바탕으로 100점 만점에 64점을 기록하여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1]
참조
[1]
웹사이트
Kongens Nei (Annual Archives 2017 Film File)
https://www.berlinal[...]
Berlinale
2020-07-12
[2]
웹사이트
Innspillingen har tatt fire år – her er traileren til "Kongens nei"
https://www.nrk.no/h[...]
2016-07-24
[3]
웹사이트
Kongens Nei (The King's Choice)
http://www.boxoffice[...]
[4]
웹사이트
Question about Norwegian (bokmal)
https://hinative.com[...]
2018-03-24
[5]
웹사이트
Norway picks Irish co-production The King's Choice for Oscar consideration
http://scannain.com/[...]
2016-09-15
[6]
웹사이트
"Kongens nei" er Norges Oscar-kandidat
http://www.vg.no/ram[...]
2016-09-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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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cars: Norway picks 'The King's Choice'
http://www.screendai[...]
2016-09-08
[8]
웹사이트
Oscars: Nine Films Advance in Foreign-Language Race
https://variety.com/[...]
2016-12-15
[9]
웹사이트
En magisk kveld i Slottsparken
https://www.kongehus[...]
The Royal House of Norway, official website
[10]
웹사이트
The King's Choice (2017)
https://www.rottento[...]
[11]
웹사이트
The King's Choice
https://www.metacrit[...]
[12]
뉴스
ヒトラーに抵抗したノルウェー国王の実話描く映画、12月に劇場公開決定
https://eiga.com/new[...]
映画.com
2017-07-08
[13]
웹사이트
Innspillingen har tatt fire år – her er traileren til «Kongens nei»
https://www.nrk.no/h[...]
2017-04-08
[14]
웹사이트
The King's Choice (2017) - International Box Office Results
https://www.boxoffic[...]
Box Office Mojo
2019-01-22
[15]
웹사이트
"Kongens nei" er Norges Oscar-kandidat
http://www.vg.no/ram[...]
2016-09-08
[16]
웹사이트
Oscars: Norway picks 'The King's Choice'
http://www.screendai[...]
2016-09-08
[17]
Rotten Tomatoes
The King's Choice
20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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