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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도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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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도번은 1830년, 다카하타번의 번주 오다 노부카즈가 덴도로 번청을 옮기면서 세워진 일본 에도 시대의 번이다. 2만 석의 작은 영지로 재정난을 겪었으며, 덴포 개혁과 홍화 전매제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항복한 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덴도현이 되었다가 야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덴도번은 쇼기 산업의 기반을 다졌으며, 우타가와 히로시게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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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도번
개요
이름덴도 번(天童藩)
위치야마가타현 덴도시
통치 가문오다 가문
역사
입번1830년
폐번치현1871년
통치
번주오다 노부치카
번의 규모
고쿠다카2만 5천 석
위치 정보

2. 역사

분세이 11년(1828년), 다카하타번오다 노부카즈막부로부터 거점을 다카하타에서 덴도로 옮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덴포 원년(1830년)에 덴도로 번청을 옮기고 덴도 번을 세웠다. 당시 덴도 번은 2만 석 영지의 작은 번으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이에 가신들의 봉록을 동결하고, 엄격한 검약령을 내렸으며, 안세이 2년(1855년)에는 홍화 전매제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결국 번정 개혁은 실패하였다.

메이지 원년(1868년), 번주 오다 노부미치는 신정부로부터 상경 명령을 받았으나, 병으로 쓰러져 가지 못하였다. 적자인 오다 노부토시가 대리로 상경하여, 오우 진무사 선도에 임명되었고, 오다 가문의 중신인 요시다 모리타카가 신정부군의 오슈 진출 길안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해 4월, 요시다는 오우 진무 부총독 사와 다메카즈를 인도하여 쇼나이번과 싸웠으나, 쇼나이 번의 맹공으로 대패하고 덴도 진야조카마치가 불에 탔다. 그리고 다음 달, 오우에쓰 열번동맹이 결성되면서 덴도 번도 어쩔 수 없이 막부군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요시다는 할복을 명령받았다. 결국 신정부군의 반격으로 인해 덴도 번은 9월에 항복하였고, 노부토시는 신정부의 처분에 따라 동생 스에마루에게 번주직을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며, 영지 2천 석도 삭감되었다. 하지만 스에마루는 아직 어려서 노부토시가 다시 번지사로 재임하였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덴도 번은 폐지되어 덴도현이 되었고, 그해 8월에 야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187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덴도 번에는 2,551가구에 13,393명의 인구가 있었다.[1]

2. 1. 초기 역사와 성립

분세이 11년(1828년), 다카하타번오다 노부카즈는 막부로부터 거점을 다카하타에서 덴도로 옮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덴포 원년(1830년), 그는 덴도로 번청을 옮기고 덴도 번을 세웠다.[5]

덴도 지역에는 1375년 모가미 요리나오가 덴도성을 건설하여 덴도 씨족에게 맡겼으나, 덴도는 모가미 요시미쓰에게 대항했고 2대에 걸쳐 패배했으며, 1584년에 덴도성은 폐허가 되었다. 에도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 지역은 도쿠가와 막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천령'' 영토였다.

1617년, 오다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인 오다 노부카쓰의 넷째 아들 오다 노부요시는 고즈케 국의 2만 오바타 번을 하사받았고, 씨족은 1767년까지 7대 동안 그곳에 거주했다. 메이와 사건으로 인해 씨족은 데와국의 다카바타케 번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782년-1783년덴메이 대기근이 이 지역에 큰 타격을 주어 번은 파산했고, 오다 씨족은 1830년에 더 작은 덴도 번으로 옮겨졌다.

덴도 번은 명목상 2만 의 수입을 올렸지만, 데와국의 산악 지역인 무라야마 군에 위치한 20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실제 수입은 더 적었다. 덴도 사무라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로 음식과 화장품의 안료로 사용된 홍화를 재배하고 가공해야 했다.

2. 2. 번정 개혁과 재정난

분세이 11년(1828년), 오다 노부카즈막부로부터 다카하타에서 덴도로 거점을 옮기라는 허가를 받았다. 덴포 원년(1830년)에 덴도로 번청을 옮기면서 덴도 번이 세워졌다. 덴도 번은 2만 석 영지의 작은 번으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신들의 봉록을 동결하고, 엄격한 검약령을 내렸다. 안세이 2년(1855년)에는 홍화 전매제를 시행하려 했으나, 번정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5]

전매제의 가혹함은 "'''알몸으로 맨발로 홍화를 심어도 오다(織田)에게 빼앗겨 인과응보'''"라는 민요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한편, 당시 유행하던 쇼기 말을 무사들에게 만들게 하여 쇼기 도시 덴도시의 기초를 만들었다.[5]

2. 3. [[보신 전쟁]]과 덴도 번

1868년, 메이지 원년에 번주 오다 노부미치는 신정부로부터 상경 명령을 받았으나, 병으로 쓰러져 가지 못했다. 적자인 오다 노부토시가 대리로 상경하여, 오우 진무사 선도에 임명되었고, 오다 가문의 중신인 요시다 모리타카가 신정부군의 오슈 진출 길안내 역할을 맡게 되었다.[1][2] 그해 4월, 요시다는 오우 진무 부총독 사와 다메카즈를 인도하여 쇼나이번과 싸웠으나, 쇼나이 번의 맹공으로 대패하고 덴도 진야의 조카마치가 불에 탔다. 그 후, 오우에쓰 열번동맹이 결성되면서 덴도 번도 어쩔 수 없이 막부군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요시다는 할복했다.[3] 결국 신정부군의 반격으로 덴도 번은 9월에 항복했고, 노부토시는 신정부의 처분에 따라 동생 스에마루에게 번주직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영지 2천 석도 삭감되었다.[4] 하지만 스에마루는 아직 어려서 노부토시가 다시 번지사로 재임하였다.

2. 4. [[폐번치현]] 이후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덴도 번은 폐지되어 덴도현이 되었고, 그해 8월에 야마가타현에 편입되었다.[4] 번주였던 오다 노부토시는 번지사로 재직하였으며, 이후 화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4]

덴도 번의 에도 저택(上屋敷)은 마루노우치(현재의 도쿄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2초메)에 있었고, 쓰키지(현재의 도쿄도 주오구 쓰키지 3초메)에는 시모야시키(下屋敷)가 있었다.[6] 겐로쿠 아코 사건 당시, 오다 가문의 저택은 아코 낭사들이 피해서 철수하는 루트였다.[7]

덴도 번은 우키요에 예술가 히로시게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1] 히로시게는 가끔 자신의 작품에 "덴도 히로시게"라고 서명했다. 덴도 번 에도 루스이역이었던 요시다 센자에몬은 우타가와 히로시게와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히로시게의 육필화가 "덴도 히로시게"라고 불리며, 현재의 야마가타현 무라야마군 내에도 현존하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신정부의 배려로 신호를 하사받아, 1870년 4월, 마이즈루산 위에 건훈 신사가 건립되었다.

야마가타 신칸센의 선로는 덴도 진야 부지 중앙을 통과하며, 현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기타로 이나리 신사는 신사로, 한때 정문이 있던 곳에 위치해 있다.

3. 역대 번주

덴도번은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인 오다 가문이 1830년부터 1871년까지 통치했다.

덴도 번 역대 번주
이름재임 기간
1오다 노부카즈|織田 信美일본어1830년 ~ 1836년
2오다 노부미치|織田 信学일본어1836년 ~ 1868년
3오다 노부토시|織田 信敏일본어1868년
4오다 스에마루|織田 寿重丸일본어1868년 ~ 1869년
5오다 노부토시|織田 信敏일본어1869년 ~ 1871년


3. 1. 오다 가문

織田氏일본어 1830년 ~ 1871년 (도자마 다이묘)

덴도 번 오다 가문 역대 번주
이름재임 기간칭호조정 관위석고
1오다 노부카즈|織田 信美일본어1830년 ~ 1836년미마사카노카미 (美濃守)종5위하20,000 석
2오다 노부미치|織田 信学일본어1836년 ~ 1868년사콘노쇼겐 (左近将監)종5위하20,000 석
3오다 노부토시|織田 信敏일본어1868년에치젠노카미 (越前守)종5위하20,000 석
4오다 스에마루|織田 寿重丸일본어1868년 ~ 1869년--20,000 석
5오다 노부토시|織田 信敏일본어1869년 ~ 1871년효부다이유 (兵部大輔)종5위하20,000 석 → 18,000 석[4]


4. 덴도 번의 영지

데와국 무라야마군 20개 촌을 다스렸다.

5. 문화와 유산

덴도 번은 분세이 11년(1828년) 막부로부터 다카하타에서 덴도로 거점을 옮기는 것을 허락받았고, 오다 노부요시가 덴포 원년(1830년)에 덴도로 옮겨 건립했다. 2만 석의 소규모 번으로 재정난에 시달려 가신의 봉록 차용, 혹독한 검약령을 시행했고, 안세이 2년(1855년)에는 홍화 전매제를 실시하려 했지만, 번정 개혁은 실패했다. 전매제의 가혹함에 대해서는 "'''알몸으로 맨발로 홍화를 심어도 오다(織田)에게 빼앗겨 인과응보'''"라는 민요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다.[5]

게이오 4년(1868년) 1월, 번주 오다 노부마나부는 신정부로부터 상락 명령을 받았다. 노부마나부가 병석에 있었기 때문에 적자 노부토시가 대리로 참내했다. 이때 신정부로부터 오슈 진무사 선도에 임명되어 오다가 가신 중신 요시다 다이하치가 신정부군의 오슈 길 안내역을 맡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요시다는 오슈 진무 부총독 사와 타메카즈를 선도하여 쇼나이 번과 싸웠지만, 쇼나이 번의 맹공 앞에 대패하여 덴도 성하는 불태워졌다. 다음 5월, 오우에쓰 열번 동맹이 결성되자 덴도 번도 동맹군으로 참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요시다는 할복당했다. 이윽고 신정부군의 반격에 9월에 항복했다. 신정부의 처단에 의해 번주 오다 노부토시는 동생 히사시게마루에게 가독을 양보하고 은거하여 소령 2000석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히사시게마루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신정부의 배려로 노부토시가 재임명되어 번주(번지사)가 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에 의해 덴도 번은 폐번이 되어 덴도 현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야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덴도 번 에도 루스이역이었던 요시다 센자에몬은 우타가와 히로시게와 친분이 있었다.

5. 1. 쇼기(장기)

분세이 11년(1828년) 에도 막부로부터 다카하타에서 덴도로 거점을 옮기는 것을 허락받은 오다 노부요시는 덴포 원년(1830년) 덴도로 옮겨 덴도번을 건립했다. 2만 석의 소규모 번으로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여러 정책을 펼쳤으나 실패하였다. 그 와중에 당시 유행하던 쇼기 말을 무사들에게 만들 것을 권장하여 장기(쇼기) 도시 덴도시의 기초를 만들었다.[5]

5. 2. [[우타가와 히로시게]]

우타가와 히로시게우키요에 예술가로 덴도 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덴도 히로시게"라고 서명하기도 했다.[1] 덴도 번 에도 루스이역이었던 요시다 센자에몬은 우타가와 히로시게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히로시게의 육필화는 "덴도 히로시게"라고 불리며, 현재 야마가타현 무라야마군 내에도 남아 있다.

5. 3. [[건훈 신사 (덴도시)|건훈 신사]]

메이지 유신 이후, 오다 노부나가를 기리기 위해 마이즈루산 위에 건훈 신사가 건립되었다.[5]

참조

[1] 웹사이트 江戸大名公卿net http://www1.parkcity[...] 2015-02-28
[2] 서적 Boshin sensō
[3] 서적
[4] 서적
[5] 서적 常識なのに!大人でも答えられない都道府県のギモン 宝島社 2019-12-05
[6] 간행물 嘉永慶応 江戸切絵図 尾張屋清七板
[7] 문서 織田家の勤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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