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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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 노부나가는 1534년 오와리국에서 태어난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이다. 그는 오와리국을 통일하고 미노국을 점령한 후 "천하포무"를 내걸고 일본 통일을 목표로 했다. 혁신적인 정책과 뛰어난 군사 전략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했다. 그의 통치와 정책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며, 일본 역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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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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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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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기포시 |
출생일 | 1534년 6월 23일 |
사망일 | 1582년 6월 21일 |
출생지 | 나고야, 오와리, 일본 |
사망지 | 혼노지, 교토, 일본 |
국적 | 일본 |
별명 | 오와리의 바보 악마 다이묘 제육천의 마왕 다이로쿠텐 노 마오 노부나가 |
가명 | 사부로, 가즈사노카미 |
통칭 | 가즈사노스케 |
시호 | 건훈 |
계명 | 총견원전증대상국일품태암대거사 천덕원전용엄운공대거사 천덕원전일품전우상부태암정안대선정문 |
묘소 | 혼노지 (교토시 나카교구) 다이토쿠지 총견원 (교토시 기타구) 묘신지 옥봉원 (교토시 우쿄구) 아미다지 (교토시 가미교구) 기타 |
씨족 | 오다 단조추 가문 (가치바타 오다 씨) |
가문 | 오다 과 |
신앙 | 무종교 |
꽃잎 | 오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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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
오다 가문 당주 | 1551년 ~ 1582년 |
선임 당주 | 오다 노부히데 |
후임 당주 | 오다 히데노부 |
관위 | 종3위 권대납언, 우근위대장 정3위, 내대신 종2위, 우대신 추증 종1위 태정대신, 추증 정1위 |
관직 | 우대신 (1577년 ~ 1578년) 사후 추증 태정대신 (1582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오다 노부히데 |
어머니 | 쓰치다 고젠 |
형제자매 | 오다 노부히로 오다 노부유키 오다 노부카네 오다 나가마스 오다 노부하루 오다 노부토키 오다 히데타카 오이치 기타 |
배우자 | 노히메 |
첩 | 기쓰노, 오나베노카타 등 |
자녀 | 오다 노부타다 오다 노부카쓰 오다 노부타카 하시바 히데카쓰 오다 가쓰나가 도쿠히메 |
친척 | |
친척 | 레이디 오쓰야 (고모) 사이토 도산 (장인) 오이치 (여동생) 아자이 나가마사 (매제) 시바타 가쓰이에 (매제) 오다 노부히로 (형) 오다 노부유키 (동생) 오다 노부카네 (동생) 오다 나가마스 (동생) 오다 노부하루 (동생) 오다 노부토키 (동생) 오다 히데타카 (동생) 차차 (조카) 오하쓰 (조카) 오에요 (조카) 아시카가 요시아키 (양자) |
군사 정보 | |
소속 | 오다 씨 조정 |
지휘 거점 | 아즈치 성 |
참전 전투 | 아카쓰카 전투 무라키 성 전투 기요스 성 전투 이노 전투 우키노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 미노 캠페인 오미 캠페인 가네가사키 포위전 아네가와 전투 이시야마 혼간지 전쟁 나가시마 포위전 히에이 산 포위전 히키다 성 포위전 이치조다니 포위전 오다니 포위전 나가시노 전투 데도리가와 전투 덴쇼 이가 전쟁 혼노지의 변 아래 참조 |
기타 정보 | |
슬로건 | 천하인 |
2. 생애
1534년 6월 23일 오와리국(尾張国) 나고야에서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와 그의 정실 부인 도타 고젠(土田御前)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기포시(吉法師)였으며, 어린 시절과 10대 초반에는 기이한 행동으로 유명했다.[6]
8세 때 아버지로부터 나고야 성(名古屋城)을 받았고, 21세에 기요스 성(清須城)을 차지할 때까지 13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서출 형이 있었지만, 장남이었던 노부나가는 오다 씨의 지도자로서 노부히데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떨어져 특별 교육을 받았다.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 등이 그의 훈련과 교육을 담당했다.[7]
1546년 오다 사부로 노부나가(織田三郎信長)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1547년 첫 원정에서 미카와(三河)의 라이벌 기라(吉良)와 오하마(大浜)에 맞서 오다 씨의 군대를 이끌었다. 1548년 또는 1549년,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의 딸인 노히메(濃姫)와 정략 결혼을 통해 미노국(美濃国)의 영주 사이토 도산과 화해했다. 이후 정무에 참여하며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1551년 아버지 노부히데가 갑작스럽게 죽자 가문을 이어받았으나, 장례식장에서의 행동으로 문중의 반감을 샀다.[234] 1553년에는 스승이었던 히라테 마사히데가 자결하자, 세이슈 사(政秀寺)를 지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다.
1554년 오다 씨 본가의 당주인 노부토모가 노부나가를 폐하고 동생 노부유키를 옹립하려 하자, 숙부 노부미쓰와 함께 노부토모를 토벌하고 역적으로 몰아 처형했다. 이후 무라키토리데(村木砦) 전투에서 이마가와의 침공을 저지했다.
1556년 장인 사이토 도산이 맏아들 요시타쓰에게 살해되고(나가라가와 전투), 1557년에는 동생 노부유키가 다시 모반을 꾀하자 그를 기요스 성으로 불러 살해했다.
1559년 오와리 국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100명의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해 무로마치 막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했다.
2. 1. 집안 배경
노부나가는 자신의 뿌리를 헤이시(平氏)라고 주장했지만,[228] 역사 연구가들에 따르면 에치젠 후지와라씨의 후손이라고도 하고 인베씨(忌部氏)의 후예라고도 한다.[229] 그의 혈통은 오와리 집정관이었던 시바 가문의 가신이었다. 무로마치 막부가 파견한 지방관을 슈고 다이묘라 했는데, 원래 막부가 임명한 오와리 다이묘는 시바 씨(斯波氏)였으나 동쪽 이웃 세력인 이마가와 씨의 거듭된 침공으로 힘을 잃고 시바씨의 신하이자 슈고 대리였던 오다 씨들이 실권을 잡았다. 이들이 본가인 오다 야마토노카미(織田大和守家) 집안이다.노부나가는 본가도 아닌 방계 후손인데, 방계인 기요스 삼봉행(清洲三奉行-관아의 아전) 중에서도 끝자리 단조노추(弾正忠) 집안이었다.[230] 한 단계 격이 높았던 가문들, 즉 기요스 오다가(清洲織田家)와 이와쿠라 오다가(岩倉織田家)들이 오다 내에서 대대로 강성했다. 그러나 오다 노부히데가 본가 둘과 주군인 시바씨 모두를 제압(하극상)하고 센고쿠 다이묘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처음에는 오다 씨가 후지와라 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했으며, 나중에는 다이라 씨의 다이라노 스케모리]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오다 씨의 공식적인 족보에 따르면,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노 스케모리가 죽은 후, 스케모리의 아들이자 첩의 아들인 다이라노 치카자네는 에치젠 국 오타노쇼의 신사의 신토 사제에게 맡겨졌다. 이 치카자네가 오다 씨의 시조가 되었다.[127][128][129]
하지만 오다 씨가 다이라 씨의 후손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실제로 다이라 씨의 후손이었는지 의심스럽다는 견해도 있다. 오타노쇼의 신토 사제였던 인베 씨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노부나가가 다이라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源平交替思想|겐페이 코타이 시소일본어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가 번갈아 권력을 잡는다는 믿음)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인 미나모토 씨, 다이라 씨의 후손인 호조 씨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미나모토 씨의 후손인 아시카가 씨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 그리고 다이라 씨의 후손인 오다 씨가 그 순서대로 권력을 장악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생각이었다.[127][128][129]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이러한 생각을 믿었는지,[129] 그리고 호조 씨가 실제로 다이라 씨의 후손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설도 있다.[130][131][132]
2. 2. 소년 시절
1534년(덴분 3년) 음력 5월 12일 오다 노부히데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배다른 형이 한둘 있었다고 하나 서자들이었고, 노부나가의 어머니인 도타 고젠(土田御前)이 본처[231]였으므로 집안 대대로 적장자에게 주어지는 아명인 깃포시(吉法師)와 나고야 성(名古屋城)을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거지로 주위에서 '오와리의 멍청이(尾張の大うつけ)'라고 불렸는데, 한번은 오다의 본가, 야마토노카미 가문의 성인 기요스 성 밑 거리에 불을 놓아 집안 전체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본가는 일단 노부히데의 힘에 밀려 납작 엎드려는 있지만 원래 노부나가 집안보다 높은 신분이라 잠재적인 긴장관계였다. 반면 청소년의 노부나가는 당시 일본에 처음 전해진 조총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신분에 상관없이 논을 매는 농민들과 곧잘 어울리며 재야 세력과도 친분을 쌓는 등 통치자로서 싹을 보이기도 했다.1546년(덴분 15년)에는 아버지의 거처인 후루와타리(古渡) 성에서 성인식을 하고 아버지에게 가즈사노스케 노부나가란 정식 이름을 받았다. 2년 후에는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의 교섭으로 적대관계였던 미노의 다이묘 사이토 도산의 딸 키쵸(帰蝶, 훗날의 노히메)와 정략결혼한다.[232] 전국 시대 일본의 귀족 관례로는 장인 장모가 혼례에 따라가지 않았으므로 사이토 도산은 노부나가의 진짜 얼굴을 보러 갈 수는 없었다.
1548년(덴분 17년) 당시 오다 집안은 숙적이었던 동해도의 패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전쟁 상태에 있었다. 오와리 국과 이마가와의 스루가 국 사이에는 미카와 국이 끼여 있었는데,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집안은 이마가와 집안에 대해 종속상태에 있었다. 미카와 국은 혼란의 와중에서 다이묘가 가신의 손에 죽는 비극을 겪은 끝에 본성인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이마가와 집안이 보낸 성주 대리에게 넘기고, 더욱이 유복자가 된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를 이마가와 집안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호송 도중 오다 가문이 납치에 성공한다. 미카와 국을 자기 편으로 삼기 위한 노부히데의 책략이었는데, 노부나가는 납치돼 온 8살 아래의 마쓰다이라 다케치요(후일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곧 친해졌고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오와리 국과 미카와 국이 견고한 동맹관계를 맺는 밑거름이 된다. 이 견고한 동맹은 노부나가가 교토 상경을 달성하고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혼노지에서 죽을 때까지 지속됐다. 다만, 납치된 다케치요는 오다와 이마가와 양가의 협상 끝에 일단 이마가와로 보내졌다.
1549년(덴분 18년)[233] 노부나가와 사이토 도산은 현재 기후 현과 북부 아이치 현의 경계인 세이토쿠지(正徳寺)에서 회담을 가졌고 이때가 돼서야 도산은 '멍청이'라 불리던 노부나가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쇼토쿠 사 경내로 갈 때까지 짐승털로 된 조끼에 화승총을 메고 반라 상태에서 말을 타고 갔는데 사이토 도산이 몰래 숨어서 이를 지켜봤다고 한다. 회담 장소에서 노부나가는 정식 관복으로 단정하게 회담을 가졌고 살모사란 별명의 장인과 기량을 겨뤘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집안과의 결전에서 조총을 사용하려 했는데, 대량의 조총을 반입하려면 사이토 도산의 영지를 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장인과의 회담에서 조총의 안전한 반입을 확약받고 조총의 산지였던 오미 국(近江-현재 시가 현)의 구니토모무라(国友村)에 5백 정을 주문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2. 3. 오와리 통일
1551년 아버지 노부히데가 갑자기 죽자 가문을 이어받았다. 노부히데는 애첩의 품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는데, 후계자를 확실히 정하지 않고 죽은 아버지의 맏상주 노릇을 해야 할 노부나가는 웬일인지 한참 동안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식이 끝날 무렵에야 겨우 얼굴을 보인 노부나가는 아버지 영정에 향을 던지듯 뿌렸다. 평생을 모든 권위에 맞서 싸우듯 살았던 노부나가는 원래도 오와리 지배층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장례식장에서의 행동으로 다시 한번 문중의 반감을 샀다.[234]1553년 노부나가의 대부이자 스승이었던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가 노부나가에게 유언장을 남기고 자결하자, 노부나가는 세이슈 사(政秀寺)를 지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다. 마사히데의 장남 고로우에몬이 노부나가에게 불경죄[235]를 저질렀고, 이에 대한 사죄와 앞으로 주군의 진로에 대해 목숨을 걸고 간언한다는 의미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히라테 마사히데는 다도와 와카(일본 시조)에도 조예가 깊어 교토 황궁에서 보낸 야마시나 토키츠구 경(山科言継)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적도 있었고, 외교면에서 크게 활약해 각종 전투 후 국경 설정 문제나, 사이가 나빴던 사이토 도산의 미노 국과 정략 결혼 동맹으로 이마가와 가문에 대항하게 하는 등 활약했었다.
1554년 오다 씨 본가의 당주인 노부토모는 노부히데가 죽은 후 다시 야심을 드러내, 노부나가를 폐하고 그의 동생 노부유키를 옹립해 실권을 다시 쥐려 했다. 과거 오와리는 이마가와의 침공으로 인해 원래 다이묘인 시바 씨(무로마치 막부가 오와리에 임명한 지방관)의 힘이 약해지고, 2인자였던 오다 야마토노카미의 필두인 오다 노부토모가 실권을 쥐었었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방계로서 관아의 아전에 지나지 않는 단조노츄 직이었으나, 뛰어난 지모와 전투력으로 노부토모에게서 실권을 빼앗았었다. 노부나가 암살 계획까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일찍이 2인자 가문 노부토모에게 쫓겨났던 시바 요시미쓰가 이 사실을 노부나가에게 밀고했다. 노부토모는 황급히 요시미쓰를 살해했으나 이미 늦었다.
노부나가는 숙부 노부미쓰와 함께 노부토모 토벌을 단행하고 역적으로 몰아 처형했다. 오다 씨의 본가인 야마토노카미 집안을 멸문시킨 노부나가는 나고야 성(那古野城)에서 야마토노카미의 거점인 기요스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무로마치 막부에 청원해 오와리 슈고직에 오른 노부나가의 단조노츄 집안은, 서출 집안에서 명실공히 오다 씨의 종가로 격을 높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숙부인 노부미쓰도 이때 죽는데, 사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집안 단속을 마친 그는 무라키토리데(村木砦) 전투에서 이마가와의 침공을 다시 한번 저지했다.
1556년 음력 4월 장인 사이토 도산이 맏아들 요시타쓰에게 살해된다.(나가라가와 전투) 노부나가는 도산에게 급히 구원병을 보내 기소 강(木曽川) 너머 오오우라까지 진격했으나, 도산을 죽이고 기세가 오른 요시타쓰 군에 고전하면서 본 영지로 퇴각했다.
노부나가의 뒷배가 되어줄 사이토 도산이 죽자, 오와리는 북쪽과 동쪽 양면에서 적을 맞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다이묘로서의 기량을 의심하게 된 중신들이 생겼다. 하야시 도슌, 시바타 가쓰이에 등이 그들인데, 3년 전 노부토모 때처럼 노부나가를 폐하고 동생 노부유키를 옹립하려 했다. 노부나가 편에는 모리 요시나리, 사쿠마 모리시게, 사쿠마 노부모리 등이 있어 양 파가 대립했다.
도산의 죽음을 좋은 기회로 생각한 노부유키 파는 음력 8월 24일 거병했는데, 이나오 전투에서 바로 패배하고 스에모리 성에 농성 중인 노부유키마저 포위되나, 노부나가와 노부유키 형제의 생모 도다 고젠의 중재로 노부유키 파들은 목숨을 건졌다. 거기에 배다른 형인 노부히로도 사이토 요시타쓰와 결탁해 기요스 성을 빼앗으려 획책했으나,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미수에 그쳤다. 노부히로 역시 사면되었다.
1557년 해를 넘겨 노부유키는 다시 모반을 꾀했다. 2차 시도 때는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가 직접 노부나가에게 모반 기도를 알려왔고, 하나 남은 오다의 또 다른 본가 이와쿠라 오다 집안(岩倉織田家)이 연루되어 있는 등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노부나가는, 병이 났다고 속여 동생을 기요스 성으로 부른 후 가와지리 히데타카의 손을 빌려 살해했다. 노부나가는 동족인 이누야마 성주 오다 노부키요와 협력하여 원래 종가 중 하나인 이와쿠라 오다 집안을 정벌하고 곧 추방했다.(우키노 전투) 또한 옛 오와리 슈고 다이묘였던 시바 씨들이 노부나가의 추방을 획책하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와 시바 씨들도 추방했다.
1559년 오와리 국의 지배권을 확립한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었다. 노부나가는 100명의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해 무로마치 막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했다. 그는 교토에 있던 옛 시바 집안의 저택을 개수해 오다 집안의 교토 거처로 삼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곳에서 귀족들을 만나고 천황을 알현하는 등 교토 조정 업무를 보았다.
2. 4. 오케하자마 전투와 기요스 동맹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노부나가의 아버지와 오랜 기간 동안 오다 영토인 오와리로 세력을 넓히려 한 숙적이었다.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12] 약해진 아시카가 쇼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12] 교토로 진군했다. 마쓰다이라 씨족도 요시모토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마가와군은 와시즈의 국경 요새를 빠르게 점령했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가 이끄는 마쓰다이라군은 오다 씨족으로부터 마루네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맞서 오다 씨족은 2천에서 3천 명의 군대밖에 모을 수 없었다.[13][14] 측근들은 기요스 성으로 피신하여 이마가와의 포위 공격을 기다리라고 건의했지만, 노부나가는 "적의 우세한 수를 만회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공격적인 정책뿐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하고 요시모토에 대한 역공을 명령했다.[15]1560년 6월, 노부나가의 정찰병들은 요시모토가 기습 공격에 이상적인 협곡인 덴가쿠가자마에 주둔하고 있으며, 이미가와군이 와시즈와 마루네 요새를 함락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요시모토가 승리를 확신하는 동안, 노부나가의 군대는 이미가와 진영을 내려다보는 요새화된 사찰인 아쓰타 신사로 진군했다. 그 후 노부나가는 善照寺砦|젠쇼지 요새일본어로 이동하여 유인 부대를 배치하고, 요시모토 진영 뒤편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격렬한 뇌우 후 공격을 개시했다. 요시모토는 오다 측 두 명의 무사에게 살해당했다.[16][17] 이 오케하자마 전투에서의 승리로 오다 노부나가는 명성을 크게 얻었고, 많은 무사와 다이묘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된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이 전투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 5. 미노 공략과 천하포무
사이토 도산 사후, 노부나가는 미노 공략을 본격화했다. 1561년 모리베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다케나카 한베에 등의 활약으로 고전했다.1564년, 오미 국의 아자이 나가마사와 동맹을 맺고, 여동생 오이치를 시집보내 미노를 견제했다. 1565년에는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지원하며 이세 국을 공략했다.
1567년, 다케나카 한베에 등이 이나바 산성을 점거하자, 이들을 회유하여 미노를 차지하고 오와리 국과 미노 국 2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거점을 이노구치 성으로 옮기고 타쿠겐 소온의 조언으로 기후로 개명했다. "천하포무(天下布武)" 인장을 사용하며 천하 통일 의지를 밝혔고, 오기마치 천황에게 궁궐 개수 비용을 요청받았으나 확답을 피했다.[237]
2. 6. 아시카가 요시아키 옹립과 상경
1561년, 오다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었다. 노부나가는 또한 자신의 딸을 다케다 신겐의 아들과 결혼시켜 다케다 가문과도 동맹을 맺었다.[18]
노부나가는 미노 공략 후 이노구치(井ノ口)를 기후(岐阜)로 개명한 무렵부터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하에 무를 펼치다"라는 뜻으로, "무력으로 천하를 얻는다", "무가(武家) 정권으로 천하를 지배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군사력이 아니라 중국의 옛 문헌에서 인용한 "칠덕의 무(七徳の武)"라는, 군주의 덕을 강조하는 내용의 "무(武)"였다고 해석된다.
이전에는 "천하포무"가 천하 통일, 전국 제패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 노부나가는 "천하포무"를 달성하기 위해 영토 확장 전쟁을 벌였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학에서는 센고쿠 시대의 "천하(天下)"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및 막부 정치를 가리키며, 지역을 의미할 때는 교토를 중심으로 한 기나이( 야마시로, 야마토, 가와치, 이즈미, 셋쓰의 5개 국. 현재의 교토부 남부, 나라현, 오사카부, 효고현 남동부)를 가리킨다고 본다.
따라서 "천하포무"는 기나이에 아시카가 요시아키 쇼군가의 통치를 확립하는 것이었고, 이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상경한 후, 기나이를 평정하고 요시아키가 쇼군에 취임한 1568년 9월부터 10월 단계에서 달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쇼군으로부터 "천하"를 위임받았다는 입장을 표방했다. 역사학자 신다 센리는 이를 통해 노부나가가 센고쿠 시대 막부 쇼군의 권한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히에이잔 소각도 무로마치 막부 제6대 쇼군 ·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행했던 것으로, 사찰 본소령(寺社本所領)에 대한 쇼군 권력의 개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여러 다이묘에 대한 화목 명령이나 교토 지배도 이전 쇼군들이 해왔던 것으로, 노부나가는 "천하"를 위임받음으로써 이러한 행위를 할 권한을 얻은 것이다.
막부에서 노부나가는 슈인조를 발급하여 정책을 실행했지만, 이 슈인죠는 노부나가 이전 센고쿠 시대 무로마치 막부의 슈고 준코조·후쿠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별한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노부나가는 어디까지나 무로마치 막부의 존재를 전제로 한 권력을 쌓고 있었고, 초기 오다 정권은 막부와의 "연합 정권(연정)(二重政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573년 2월에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노부나가를 배반했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쇼군 부재 상태에서 중앙 정권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도 요시아키 추방 후에도 요시아키가 포기한 "천하"를 노부나가가 대신 처리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천하"를 위임받았다는 노부나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쇼군을 대신하여 "천하"를 총괄하는 "천하인"이 되었다.
2. 7. 제1차 노부나가 포위망
겐키 원년(1570년) 4월, 노부나가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토벌하기 위해 에치젠 국으로 진군했다.[152] 오다 군은 아사쿠라 씨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략했지만, 갑자기 아자이 나가마사가 배신했다는 보고를 받았다.[153] 포위될 위기에 처한 오다 군은 즉시 철수를 시작했고, 아케치 미쓰히데, 기노시타 히데요시 등의 활약으로 교토로 도망쳤다(가네가사키 전투).6월, 노부나가는 아자이 씨를 치기 위해 오미국 아네가와 강가에서 도쿠가와 군과 함께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대치했다. 요코야마 성을 함락시키면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승리했다(''아네가와 전투'').
8월, 노부나가는 셋쓰 국에서 거병한 미요시 삼인방을 치기 위해 출진했지만, 이시야마 혼간지가 노부나가에 대항하여 거병했다(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 더욱이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 3만이 오미국 사카모토에 침공했다.
9월, 노부나가는 본대를 이끌고 셋쓰 국에서 오미 국으로 귀환했다. 아사쿠라 군은 히에이 산에 틀어박혀 저항했다. 노부나가는 우사 산성에서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대치했다(시가의 진). 그러나 그 사이에 이세 국에서 나가시마 일향일揆가 일어나고, 노부나가의 친동생인 오다 노부오키가 자살했다.
11월 21일, 노부나가는 롯카쿠 요시카타, 롯카쿠 요시하루 부자와 화목하고, 아와 국에서 온 시노하라 나가후사와 강화했다. 그리고 오기마치 천황의 칙명을 받들어 12월 13일, 아자이 씨·아사쿠라 씨와 화목하여 궁지에서 벗어났다.
2. 8. 포위망 붕괴와 세력 확장
겐키 원년(1570년) 음력 4월, 노부나가는 거듭된 상경 명령을 무시하는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토벌하기 위해 아자이 가문과의 맹약을 파기하고, 동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에치젠 원정길에 올랐다. 아자이 가문이 오미에 세력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아사쿠라 가문의 군사적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어서 아자이 가문은 결혼동맹의 조건으로 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는데, 노부나가는 이를 깨고 아사쿠라를 정벌한 것이다.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아사쿠라 가문의 여러 성을 차례차례 함락해 가지만, 가네가사키로 진군중, 아자이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반해 노부나가 군은 적진 한가운데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후위를 맡은 이케다 가쓰마사, 아케치 미쓰히데, 기노시타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분전으로 무사히 교토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유명한 "가네가사키 퇴각(金ヶ崎撤退戦)"으로, 노부나가가 교토로 귀환할 때 따르는 자는 겨우 10명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노부나가에게는 큰 위기의 하나였다.이것을 계기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대립은 더욱 격해졌고, 요시아키는 타도 노부나가를 호소하는 서찰을 여러 영주에게 돌리고, 이에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나가마사, 다케다 신겐, 모리 데루모토, 미요시 3인방에 더하여 엔랴쿠지, 이시야마 혼간지 등 사원세력도 호응해 노부나가 포위망을 결성하였다.
겐키 원년(1570년) 음력 6월 오미 국 아네가와 강변에서 이에야스와 함께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격돌한다(아네가와 강 전투). 이 전투에서 아자이측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磯野員昌)의 분전으로 고전하지만, 도쿠가와측의 도움으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겐키 원년(1570년) 음력 8월 노부나가는 셋쓰에서 거병한 미요시 3인방을 토벌하려 출진하지만, 이시야마 혼간지의 원군 등도 있어 고전한다. 게다가 노부나가 본대가 셋쓰에 머물고 있는 동안, 아자이, 아사쿠라, 엔랴쿠지 등의 연합군 3만이 오미 사카모토로 처들어 온다. 오다 군도 대항했지만, 중신 모리 요시나리와 동생 오다 노부하루가 전사했다. 음력 9월 23일 급히 본대를 셋쓰에서 오미로 귀환했다. 황급히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은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자리를 옮겨 대항하였다. 이렇게 되자 노부나가는 오미 국 시가에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대치하였다(시가의 진(志賀の陣)). 그러나, 그 간 혼간지의 수장 겐뇨(顕如)의 명을 받은 이세 나가시마의 일향종이 반기를 들어 오다 령의 오와리, 이세를 공격하였고,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오키와 중신 사카이 마사히사는 전사하였다. 사방을 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빠진 노부나가는 조정에 압력을 넣어 칙명을 받아내어 음력 12월 13일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화친하였다. 이때, 오쿠보 다다타카(大久保忠教)가 저술한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게 “천하는 아사쿠라님이 가지시고, 저는 두 번 다시 천하를 바라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겐키 2년(1571년) 음력 9월 노부나가는 몇 번이고 퇴거와 중립 엄수를 권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을 비호해 주거나 저항을 계속한 히에이 산의 엔랴쿠지를 불태웠다. 이를 에이 산(엔랴쿠지) 소각 사건이라고 하며, 법도 미치지 않는 성지인 에이 산과 엔랴쿠지를 불태워 버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안의 사람을 학살한 이 사건은 당시의 사회에 다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세력은 종교적인 계율을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정치에 공공연히 간여하는 큰 세속적 세력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아라이 하쿠세키 등의 유학자는 후일 타락한 불교세력을 정치에서 배제하였다 하여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겐키 3년(1572년) 음력 7월 노부나가는 적장자 기묘마루(奇妙丸; 후일 오다 노부타다)를 첫 출진시킨다. 이 무렵, 오다 군은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소소한 전투를 반복하지만, 전황은 노부나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곧이어 음력 8월에는 아사쿠라 군의 무장 마에바 요시쓰구(前波吉継), 도미타 나가시게(富田長繁) 등이 노부나가에 항복하는 등 오미의 전세는 노부나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음력 10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출병요청에 호응해 가이의 다케다 신겐이 총공격을 개시했다. 다케다 군의 총병력은 3만에 이르렀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미노 동부를 비롯하여 도쿠가와 령의 도토미, 미카와로 쳐들어왔다.
미노 동부에서는 다케다 군의 무장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가 이와무라 성(岩村城)을 공격했다. 노부나가의 숙모인 이와무라 성주 오쓰야노카타(おつやの方)는 적장 노부토모의 결혼 전술에 말려 노부토모와 결혼해 항복하고, 양자로 있던 노부나가의 5남 보마루(坊丸; 후일 오다 가쓰나가(織田勝長))는 인질로 가이로 보내지며 미노 동부 대부분이 다케다 가문의 손에 떨어졌다.
도쿠가와 령에서도 도쿠가와 군은 히토코토자카 전투(一言坂の戦い)에서 패하였으며,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히라테 히로히데가 이끄는 3천의 원군을 급파했지만 음력 12월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맛보고, 원군의 지휘관이던 히라테 히로히데(平手汎秀)는 전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는 다시금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겐키 4년(1573년) 다케다 군은 미카와로 쳐들어갔고, 음력 2월 노다 성(野田城)을 공략한다. 게다가 신겐의 상경전에 호응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협력해 거병한다. 동서로 적에 둘러싸인 노부나가는 궁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음력 4월 5일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으로부터 칙령을 받아 요시아키와 화친하였다. 음력 4월 12일 다케다 신겐이 급사하여 다케다 군은 가이로 귀환하고 노부나가 포위망은 풀리게 된다.
신겐 사후, 노부나가는 전력을 가다듬어 음력 7월 반기를 든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니조성(二条城)과 마키시마 성(槇島城)을 포위 공격하여 요시아키를 교토로부터 추방하였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음력 7월 28일 연호를 겐키에서 덴쇼로 할 것을 조정에 아뢰었다.
덴쇼 원년(1573년) 음력 8월 노부나가는 호소카와 후지타카에 명하여 요도 성(淀城)에 농성하고 있는 미요시 3인방 중 한사람인 이와나리 도모미치를 토벌했다. 같은 달에 노부나가는 3만의 군을 이끌고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에치젠 원정길에 올랐다. 도네자카 전투(刀根坂の戦い)에서 아사쿠라 군을 격파해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있는 이치노다니 성으로 진격한다.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도주를 시도하지만 가신들, 심지어는 아사쿠라 가게아키라(朝倉景健)같은 친족까지 배반해 이들에게 일제히 공격을 받아 자결하였다. 뒤이어 음력 9월에는 아자이 가문의 거성인 오다니 성(小谷城)을 공략하여 함락한다. 아자이 히사마사(浅井久政), 나가마사 부자는 자결하였고, 나가마사의 어머니 오노도노(小野殿)는 사로잡아 그녀의 열 손가락을 하루에 하나씩 잘라낸 후 살해하였다. 나가마사에 시집가 있던 동생 오이치노카타는 성이 함락되기 전 노부나가에게 인도되었다.
음력 9월 24일 노부나가는 오와리, 미노, 이세의 군을 중심으로 3만 대군을 이끌고 이세 나가시마로 진군하였다. 오다 군은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활약으로 보름정도 동안 나가시마 주변의 적성을 차례차례 함락하였지만, 저항도 격렬하여 음력 10월 25일 장기전을 우려한 노부나가는 퇴각하였다. 퇴각중 적군의 추격전 등으로 오다 군은 고전하였고, 부장 하야시 미치마사(林通政)는 전사하였다.
음력 11월 가와치의 미요시 요시쓰구가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동조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를 총대장으로 삼아 군을 가와치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의 실력을 두려워한 요시쓰구의 가신들은 배신하였고, 요시쓰구는 음력 11월 16일 자결하였다. 음력 12월 26일 배반과 항복을 거듭하던 야마토의 마쓰나가 히사히데도 거성이던 다몬 산성(多聞山城)을 양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2. 9.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
덴쇼 2년(1574년) 음력 1월, 오다 령이었던 에치젠에서 지역 무사들과 혼간지 문도(門徒)의 반란이 일어나 슈고다이인 마에바 요시쓰구가 죽고 에치젠이 장악되었다.[238] 이에 호응한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 동부에서 공격해왔다.[238] 노부나가는 아들 노부타다와 함께 출진하여 맞섰지만,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반란군은 미노 동부의 아케치 성(明知城)을 비롯한 주변 지성 18성을 함락시켰다.[238] 노부나가는 다케다 군과의 충돌을 피해 기후로 퇴각하였다.[238]음력 3월, 노부나가는 상경하여 종3위 산기(参議)에 서임되었다.[238]
음력 7월,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세 나가시마를 수륙 양면으로 포위하여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장기전을 시도하였다.[238] 나가시마 일향종 문도의 공격도 집요했기 때문에 이복형 오다 노부히로를 비롯한 다수의 무장이 전사하였고, 노부나가 군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238] 하지만 음력 8월, 병량이 고갈되었고 오다 군의 맹공으로 오토리이 성(大鳥居城)이 함락되어 일향종 문도 천여 명이 죽자, 음력 9월 29일 병량 부족을 느낀 나가시마 성의 문도는 항복하고 배로 오사카 방면으로 퇴거하겠다는 요청을 했고, 노부나가는 이를 승낙하였다.[238] 그러나 노부나가는 문도들의 퇴거가 늦어지자 문도들의 배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238] 이에 문도 측은 격분하였고, 일부는 오다 군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히데나리를 죽였다.[238]
이후 노부나가는 나가에 성(中江城), 야나가시마 성(屋長島城)에서 농성하고 있는 나가시마 문도에 대해서는 항복을 수용하지 않고 성을 포위 공격하여 문도 2만여 명을 학살하였다.[238] 이 전투로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일향종 신도의 반란을 잠재우는 데 성공하였다.[238]
2. 10. 다케다 정벌
덴쇼 10년(1582년) 2월,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의 사위였던 기소 요시마사가 배신하자, 다케다 가쓰요리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동원령을 내렸다.[166] 도쿠가와 이에야스, 호조 우지나오, 가네모리 나가치카 등과 함께 다케다 영토를 공격했다.다케다 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니나카 모리노부가 농성한 시나노 다카토 성만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오다 노부타다가 이끄는 오다 군에 함락되었다.[167]
다케다 가쓰요리는 스와에서 가이 국 신푸 성으로 돌아왔으나, 결국 신푸 성을 버리고 가쓰누마 성으로 들어갔다. 오다 군은 고후를 점령하고, 3월 11일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다케다 가쓰요리와 그의 아들 가쓰마사를 자결시켜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167]
3월 13일, 노부나가는 이와무라 성에서 미와네로 이동하여 3월 14일에 가쓰요리 등의 목을 확인했다.[167] 이후,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고즈케 국과 시나노 2군을 주고 관동 관령에 임명했다.[167] 가와지리 히데타카에게는 가이 국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스루가 국을 주었다.
4월 10일, 노부나가는 후지 산을 구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접대를 받았다.[167]
2. 11. 혼노지의 변


1582년, 오다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모리 데루모토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혼노지에서 다도회를 열었다.[6] 그러나 아케치 미쓰히데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 혼노지를 습격했다. 이를 혼노지의 변이라 한다.
덴쇼 10년(1582년) 5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의 빗츄 다카마쓰 성(高松城)을 공격했다. 그러나 다카마쓰 성은 견고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모리 가문의 원군이 도착하자 하시바 군은 고전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이를 받아들여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선봉을 맡기고 자신도 출진 준비를 했다.[17]
5월 29일, 노부나가는 서쪽으로 출진하기 위해 아즈치성을 떠나 교토의 혼노지에 머물렀다. 이때 노부나가는 소수의 인원만 동행했다.[172] 6월 1일,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다과회를 열고 여러 사람들을 초대했다.
6월 2일 새벽, 아케치 미쓰히데는 군사를 이끌고 혼노지를 포위했다. 미쓰히데는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고 외치며 공격을 시작했다.[32] 노부나가는 처음에는 활과 창을 들고 싸웠으나,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불타는 건물 안에서 할복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49세였다.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도 아케치 군의 공격을 받고 니조성에서 자결했다.[6]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불에 타 찾을 수 없었다.[34]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노부나가의 복수를 했다.
혼노지의 변 4개월 후인 10월 9일, 조정에서는 노부나가에게 종일위·태정대신을 추증했다. 10월 15일에는 히데요시에 의해 대덕사에서 노부나가의 장례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다이쇼 6년(1917년) 11월 17일, 노부나가는 정일위를 추증받았다.
3. 정책
오다 노부나가는 天下布武|텐카후부일본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전국 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천하에 무를 펼친다"는 의미의 이 표어는 전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부나가의 통치 이념을 담고 있다.[41][46][47]
노부나가는 조총을 비롯한 군사 기술 및 신무기 개발, 탄약 원료 수입을 위한 국제적 공급망 구축, 국내 유통망 발전, 영토 통치 방식 개선 등 혁신을 통해 통일의 길을 열었다.[48] 이러한 혁신은 라쿠이치라쿠자 등의 경제 정책을 통해 얻은 재정적 자원으로 뒷받침되었다.[48]
1579년, 노부나가가 우대신(右大臣)과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 직을 사임하면서 궁중에 큰 의문을 남겼다.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궁중의 권위를 흔들 만한 공식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36] 1582년 5월, 궁중에서는 노부나가에게 정이대장군, 관백, 태정대신 중 원하는 관직을 제안했지만, 노부나가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은 채 혼노지의 변을 맞이했다.[40][41] 사후 태정대신 칭호와 종일위 관위를 받았고, 1917년에는 정일위로 추증되었다.[3][42]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노부나가가 중국 정복을 계획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본 측 자료에는 없어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43]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에 즉견사를 건립하고 본산이라는 돌을 신격화하려 했다고 기록했다. 프로이스는 이를 노부나가의 오만함으로 해석했지만, 일본 자료에는 관련 내용이 없어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본산의 존재는 『신장공기』에 언급되어 있다. 노부나가의 자기 신격화는 전국 통일 이후 오다 가문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사후 신격화되었는데, 이들은 죽기 전에 스스로 신이 되려 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43][44][45]
3. 1. 종교 정책
오다 노부나가는 정토진종 불교 종파의 저항 운동인 일향일기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일향일기는 자위를 위한 종교 결사였지만, 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사무라이에 대한 반감으로 세력이 커졌다.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홍간사 전투를 시작으로 나가시마 공방전을 벌였으나 초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히에이산 공격을 통해 히에이산을 불태우고 승려, 속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노부나가는 특정 신이나 부처를 적극적으로 믿지 않았지만, 종교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한 사찰과 신사에 기부하고 시설 수리 비용을 지원하는 등 종교를 존중했다.[84][85]
일향종(조도 신슈 홍완지)은 당시 강력한 무장 집단이었고, 이시야마 홍간지 전투는 노부나가가 오사카에서 이시야마 홍간지를 몰아내기 위해 시작되었다. 겐뇨는 노부나가 타도를 외쳤고, 일향 일기는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노부나가는 이들을 학살했지만, 이는 이시야마 홍간지가 철저한 저항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85][86]
노부나가는 남만 무역에 필요한 예수회의 중재와 외교 때문에 기독교 전파를 허용하고 보호했다. 예수회는 불교 세력 파괴를 위해 노부나가를 지원했다.[58][50][87]
덴쇼 9년(1581년) 고야 산의 불교도들이 노부나가의 사자들을 살해하자, 노부나가는 수백 명을 체포하고 고야 산을 포위했다.[243]
노부나가는 모든 불교 세력과 적대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따르는 종파는 보호했다. 안토 종론에서는 정토종과 일련종 간의 종론을 억제하여 종교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견의상론에서는 천태종에만 비단옷 착용을 허용하고, 이를 어긴 진언종 승려를 처형했다. 이시즈미 하치만궁 수리와 이세 신궁 식년 천궁을 계획하는 등 신사와의 관계도 중시했다.
3. 2. 상업 정책
오다 노부나가는 상업 활성화와 경제 발전을 위해 혁신적인 정책들을 시행했다. 대표적인 정책이 楽市楽座|라쿠이치 라쿠자일본어와 장벽 제도 폐지이다.[49]楽市楽座|라쿠이치 라쿠자일본어는 누구나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정책이다.[92] '라쿠이치'(楽市)는 성읍 내 어디에서든 장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라쿠자'(楽座)는 '좌'(座)라 불리는 독점적 상업 조합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유로운 영업을 보장했다.[56][49] 이전에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상업 활동이 가능했다. 당시 사무라이 가문은 농지를, 사찰, 신사, 궁정 귀족들은 시장(市)과 좌(座)를 장악하여 상업과 유통을 지배했다. 노부나가는 이 정책을 통해 사찰, 신사, 궁정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무사 계급이 영토를 완전히 지배하게 하려 했다.[50]
라쿠이치・라쿠자령은 노부나가가 처음 시행한 정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미 남부의 센고쿠 다이묘인 육각씨가 처음 시행했다. 이 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토요다 타케루는 특권적인 상공업자 단체인 좌를 해체하고 유통을 촉진하는 혁신적인 정책으로 평가했지만, 노부나가는 실제로 많은 좌의 특권을 보장했으며, 와키타 오사무 등은 노부나가가 좌의 부정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노부나가는 불필요한 관소를 폐지하여 물자 유통을 원활하게 했다. 또한 기나이 지역의 도로와 다리 건설 및 정비를 명령했다.[56][48][49][51] 만입과 강에 다리를 놓고, 험한 길을 깎아 완만하게 만들었으며, 도로 폭을 3.5미터로 넓히고 양쪽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육상 운송뿐만 아니라 비와 호의 수운과 이세 만, 세토 내해의 해상 운송도 발전시켰다.[56][48][49][51] 이러한 조치들은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하여 유통을 활성화했고, 병사와 군수품을 신속하게 전장에 수송할 수 있게 했다.[56][48][49][51]
덴쇼 2년(1574년) 말부터 노부나가는 사카이 토시사다 등 4명의 봉행에게 도로 정비를 명령했다. 이 공사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어 오다 가문의 영토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고, 사람들과 소, 말의 통행이 용이해졌다.
노부나가는 사카이(이즈미 국), 쿠사쓰(시가 현) , 오쓰(오미 국)와 같은 주요 유통 거점을 직접 통치하여 상업 발전을 꾀했다.[40] 특히 자치 도시였던 사카이는 동아시아와 서양으로부터 상품, 최신 과학 기술, 정보가 넘쳐나는 국제 무역항이었다.[54] 노부나가는 사카이 상인들에게서 막대한 부뿐만 아니라 남만 무역의 전문 지식과 총, 화약 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무역로를 얻고자 했다.[54] 이마이 소큐와 같은 사카이 출신 상인을 등용하여 군수 산업을 발전시키고, 초석 수입을 위한 독점 무역로를 확보하여 일본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54][55]
당시 전국적으로 제각각이었던 되의 통일 규격으로 오다 영토에서는 경되를 통일적으로 채택했다고도 한다. 이 되는 도요토미 정권 - 에도 막부까지 계승되었다. 이로 인해 연공과 물류 관리가 정확하고 용이해졌다.
그리고 질이 나쁜 화폐와 좋은 화폐의 가치 비율을 정한 선전령을 발령했다. 다른 다이묘나 무로마치 막부가 발표한 선전령과 비교하여 노부나가의 선전령의 특징은 "모든 돈에 가치 비율을 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금은의 화폐 가치를 정하는 규정은 혁신적인 것이며, 에도 시대의 삼화 제도에 이어지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 선전령은 오히려 화폐 거래를 감소시키고 쌀을 이용한 거래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기대했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노부나가는 새로운 화폐 제도를 도입하는 재정 개혁도 실시했다. 1569년에 제정된 "오다 노부나가 에이로쿠 12년 법"은 "일본 근대 통화 정책의 시작"으로 여겨진다.[53] 고정 환율제를 도입하고, 표준 화폐와 악화된 화폐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오다 씨의 보증은 다른 지역에서는 악화된 화폐로 여겨졌던 화폐에 가치를 부여하고, 유통에서 제외되었던 많은 화폐를 부활시켜 상업 거래를 안정시켰다.[53]
3. 3. 인사 정책
오다 노부나가는 인재의 능력을 중요하게 여겨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다. 농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 출신이 불분명한 다키가와 가즈마스, 낭인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 등을 등용했다. 반면, 기존 가신이었던 사쿠마 노부모리와 하야시 히데사다 등은 추방했다. 사쿠마 노부모리에게는 19개 조의 절함장(折檻状)을 내려 기회를 주었지만, 결국 성과를 내지 못해 처벌했다.[257]덴쇼기(天正期)에 노부나가는 다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주요 가신들에게 다이묘급 영지를 주고 주변을 공략하게 했다. 이들을 '군단' 또는 '방면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방면 |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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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리쿠 방면 | 시바타 가쓰이에 군단 |
나카센 방면 | 오다 노부타다 군단 (다키가와 가즈마스 군단) |
기나이 방면 | 아케치 미쓰히데 군단 |
주고쿠 방면 | 하시바 히데요시 군단 |
시코쿠 방면 | 니와 나가히데, 오다 노부타카 군단 (1582년 결성) |
혼간지 방면 | 사쿠마 노부모리 군단 |
도카이도 방어 | 도쿠가와 이에야스 (단, 도쿠가와 가문과는 동맹관계) |
우에스기 겐신 사후, 시바타 가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삿사 나리마사 등으로 호쿠리쿠를, 다케다 가쓰요리에 대해서는 오다 노부타다, 다키가와 가즈마스, 모리 나가요시 등으로 시나노, 가이를 공략하게 했다. 아케치 미쓰히데,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에게는 단바의 하타노 히데하루를, 하시바 히데요시 등에게는 주고쿠의 모리 데루모토를, 사쿠마 노부모리에게는 셋쓰의 이시야마 혼간지를 담당하게 했다.
1580년,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와 그의 아들 사쿠마 노부히데를 혼간지 세력과의 전투에서 보인 무능을 이유로 추방했다. 하야시 히데사다, 안도 모리나리는 과거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하고 추방했다.
당시 유행하던 다도(茶道)를 가신단 장악 수단으로 활용, 다기(茶器)를 영지나 금전 대신 상으로 내렸다.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차 항아리 대신 간토칸레이(関東管領)라는 칭호와 고즈케 국을 내린 일화가 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네네를 냉대하자, 히데요시를 질책하고 네네를 격려하는 등 인정미 넘치는 행동도 했다.[258]
3. 4. 전략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인물상을 묘사하며 전략에 대한 언급을 했다. 그는 노부나가를 결단력이 뛰어나고 전술에 치밀하지만 규율을 지키지 않고 부하의 진언을 대부분 따르지 않는 인물로 평가했다.[247][248]노부나가의 전략은 철저한 준비를 통해 상대의 힘을 무력화하고,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전투에 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오케하자마 전투와 같이 적은 병력으로 적의 의표를 찌르는 책략은 잘 쓰지 않았으며,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과 같은 경계 대상에게는 신중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노부나가는 대량 살상을 명하기도 했지만, 광신적인 사원 세력과의 전투를 제외하면 항복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사원 세력과의 전투에서도 먼저 화친을 시도했지만, 상대가 거절하거나 파기했기 때문에 강경 수단을 취했다. 혼간지 겐뇨의 혼간지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화의를 맺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무용이 뛰어나 여러 전투에서 최전선에서 활약했으며, 군의 기동력이 우수하여 로쿠조 전투에서는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적의 교토 접근을 막았다.
군사적으로 노부나가는 일본의 전쟁 방식을 바꾸었다. 그는 화승총(일명 타네가시마|타네가시마일본어)을 대량으로 활용하여 센고쿠 시대의 분권화를 종식시키고 일본을 중앙 집권적인 근세로 이끌었다.[48][56] 그는 화승총의 잠재력을 일찍이 인식하고 대량 생산 체제를 확립했으며, 국제적인 공급망을 구축하여 안정적인 탄약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48][96]
또한, 창의 길이를 통일하고,[96][93] 토목 공사를 군사 분야에 도입하여 전투를 대규모 토목 공사로 전환했다.[48][96] 병농 분리 정책을 실시하여 상비군을 만들려고 했으며,[64] 정보전을 중시하고 지역 군대 제도를 채택하여 대규모 작전을 수행했다.[62]
노부나가의 군대는 엄격한 군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기즈가와구치 전투에서는 철갑선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71]



3. 5. 내정
楽市楽座|라쿠이치라쿠자일본어[259]는 오미 남부의 센고쿠 다이묘 롯카쿠 사다요리가 먼저 시행한 정책이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대규모로 시행하여 비와호 등을 중심으로 한 유통과 상업 발전에 주목했다. 당시 전란으로 전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자유 무역항 사카이를 점령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등, 한발 앞선 내정을 펼쳤다. 유통에 따른 상업 정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와서 중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전까지는 연공(쌀)이 중시되었다.[259]공공사업에도 힘을 뻗쳐, 길을 정비하고 1리[260]마다 나무를 심어 표석으로 삼았다. 이는 자군의 행군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주변의 관문도 폐지하여 주변과의 왕래를 쉽게 하고 상업을 활성화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적군의 진군 속도를 고려해 이런 일은 하지 않았다.[260]
노부나가는 도량형 통일에도 힘써, 되에 각각 소인과 도장을 찍어 단위를 통일했다. 또, 질 나쁜 화폐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질 좋은 화폐를 사용하도록 선전령(選銭令)을 반포했다.[259]
Rakuichi Rakuza|라쿠이치라쿠자일본어와 장벽 제도 폐지 등 일련의 혁신적인 정책 시행으로 유명하다.[49] 노부나가는 조부와 부친이 쓰시마항과 아쓰타항을 장악하여 이세만의 수운을 통해 부를 축적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상품과 화폐 유통을 증가시켜 영토 상업화를 추진했다.[40][50] 국가 통일에 필요한 병사, 총기 및 기타 무기 조달과 운용에 필요한 자금 또한 이를 통해 확보했다.[62][69]
라쿠이치라쿠자(楽市楽座)는 누구든 어디서든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상업을 활성화하려는 경제 정책이다.[92] 라쿠이치(楽市)는 사람들이 성읍 내 어디서든 장사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며, 이전에는 지정된 지역에서만 가능했다. 라쿠자(楽座)는 '좌'(座, 독점적 상업 조합)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유로운 영업을 보장한다.[56][49] 당시 사무라이 가문들은 농지를 지배하고 농민들을 통제했으며, 사찰, 신사, 궁정 귀족들은 시장(市, 이치)과 좌(座)를 장악하여 상업과 유통업을 지배했다. 노부나가가 라쿠이치라쿠자를 추진한 것은 이들의 특권을 박탈하고 무사 계급이 모든 영역에서 영토를 지배하게 하려는 의도였다.[50]
노부나가는 영토 내 장벽소를 폐지하고 물자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했다. 기나이 지역의 도로와 다리 건설 및 개량을 명령했다. 만입과 강에 다리를 놓고, 험한 길을 깎아 완만하게 만들고, 도로 폭을 3.5m로 넓히고, 양쪽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육상 운송뿐만 아니라 비와호의 수운과 이세만, 세토 내해의 해상 운송도 발전시켰다.[56][48][49][51] 이러한 조치들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통행뿐만 아니라 물자의 자유로운 운송도 가능하게 하여 유통을 원활하게 했다. 물류 발전은 경제적, 군사적으로도 이익을 가져다주어 병사와 군수품을 신속하고 안정적으로 전장에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56][48][49][51]
새로운 화폐 제도를 도입하는 재정 개혁을 실시했다. 1569년에 제정된 "오다 노부나가 에이로쿠 12년 법"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일본 근대 통화 정책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는 "화폐 유통량 증가"와 "악화된 화폐 유입 방지"를 동시에 목표로 한 획기적인 시도였다. 고정 환율제가 도입되었고, 이전까지 무질서하게 혼재되어 있던 화폐들이 표준 화폐와 악화된 화폐로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오다 씨의 보증은 다른 지역에서는 악화된 화폐로 간주되었던 화폐에 가치를 부여하고, 유통에서 제외되었던 많은 화폐를 부활시켜 상업 거래를 안정시켰다. 동시에 화폐 가치를 환율에 따라 차등화함으로써 정부는 악화된 화폐의 과도한 유입을 방지했다. 또한 고가의 상품 거래에 금과 은을 통화로 사용했다. 노부나가는 名物狩り|메이부쓰가리일본어에서 금은을 구매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금은 유통 확대에 기여했다.[53]
국가 통일을 목표로 한 노부나가 정권의 업적 중 하나는 1580년 기나이 지역을 시작으로 본격화된 織田検地|오다 겐치일본어이다. 이는 휘하 다이묘들에게 수확량을 곡고량으로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행정 조치였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太閤検地|다이코 겐치일본어로 이어졌다.[48]
4. 인물
오다 노부나가는 신분에 관계없이 서민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서민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노동요를 부를 때에는 모습을 서민들 앞에 드러냈으며, 오봉 때에는 마을 주민을 즐겁게 해주었고, 마쓰리를 즐겼다.[247]
상경 이후에는 조정 등의 귀족계급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구게와도 친교가 깊었다. 특히 고노에 마에히사와는 처음에는 적대 관계였지만, 취미 등이 같아 잘 어울렸다고 한다.
당시 다른 센고쿠 무장과 같이 남색(슈도衆道)을 즐겼다. 고쇼인 마에다 도시이에, 호리 히데마사, 모리 란마루 등과 관계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또,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측실을 조금밖에 두지 않고 대신 많은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초상화는 현재 초상화 23점, 초상 조각 5점이 확인되고 있다.[184] 대표적인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가노 에이토쿠의 동생인 소슈가 노부나가 1주기(一周忌)에 그렸다고 전해지는 아이치현 토요타시의 죠코지 소장품(重要文化財)[185]
- 1주기에 그려진 고케이 소친 찬(讚)이 있는 의관속대 차림의 고베시립박물관 소장품(重要文化財)[186]
- 가노 에이토쿠 필일 가능성이 높고 노부나가 3주기에 그려진 다이토쿠지의 초상[187]
- 코노에 사에히사가 노부나가 7주기에 그리게 했고, 추선(追善)을 위해 육자명호를 서두 한 글자에 더한 와카(和歌) 찬이 있는 교토시 조쿄구 호온지 소장품[189]
- 효고현 히카미초가 소장하는 좌상(坐像)
이 중에서 노부나가의 초상화로 가장 유명한 죠코지 소장의 초상화는, 태평양 전쟁 중인 1944년부터 1945년에 오사카시립미술관에서 수리가 이루어진 후, 2016년부터 2019년에 걸쳐서도 문화청 주도 하에 다시 수리 작업이 이루어졌다.[190] 수리를 담당한 문화청의 조사 결과, 이 초상화는 중국 전래의 대나무 종이에 그려진 것이 밝혀졌다.[190] 수묵화에 자주 사용되는 대나무 종이를 채색화에 사용한 의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190][191]
다이토쿠지 소장의 초상화는, 완성 당시의 그림에서 다시 그려진 것이 2011년에 밝혀졌다. 2008년 9월부터 2009년 10월에 걸쳐 이루어진 수리 작업에 따른 교토국립박물관의 조사에서, 그림 뒷면에서 「뒷면 채색(うらざいしき)」이 발견되었다.[187] 표면의 색에 깊이를 내기 위한 기법으로, 표면과 같은 계통의 색으로 채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초상화에서는 표면과 뒷면에서 색 사용이 달랐다. 표면의 초상은, 코소데(小袖)가 옅은 남색, 어깨옷과 하카마는 옅은 갈색이라는 수수한 색조이고, 칼은 와키사시(脇差)뿐이라는 차분한 차림인데 반해, 뒷면 채색은, 코소데의 좌우에서 색이 다른 「카타미가와리(片身替り)」라고 불리는 당시 유행하는 디자인으로, 오른팔은 모에기색, 왼팔은 옅은 갈색이라는 화려한 색 사용이고, 칼도 다이토(太刀)와 단도(短刀)의 2개를 차고 있었다. 또한 코소데의 桐紋도 뒷면이 더 크게 그려져 있고, 오른손에 든 부채도 길고 폭이 넓었다. 더욱이 얼굴 부분의 투과 적외선 촬영에 의해, 뒷면은 수염의 양쪽 끝이 위로 솟은 당당한 얼굴로 그려져 있던 흔적도 확인되었다.[187][192] 당초에는 뒷면 채색에 가까운 초상이 표면에도 그려져 있었던 것이, 원래의 그림에 새롭게 채색하고, 덧그린 것으로 보인다.[187] 화려함을 좋아하는 노부나가다운 초상화가 수수하게 다시 그려진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해 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기법 | 작품명 | 형태·수량 | 작가 | 소유자 | 연대 | 낙관·인장 | 의상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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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본채색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1폭 70.0×31.2cm | 가노 모토히데(소슈) 필 | 아이치현·죠코지 | 덴쇼 11년(1583년) 6월 | 가미시모 | 중요문화재。기진명(寄進銘)에 「노부나가 1주기인 덴쇼 11년(1583년) 6월 2일에, 노부나가 가신 요고 큐사부로 마사카츠가 보은(報恩)을 위해 가노 모토히데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화재로 불탄 후 재건에 협력한 죠코지에 기증했다」라고 적혀 있다. | |
견본채색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1폭 73.3×36.8cm | 효고현·고베시립박물관 | 덴쇼 11년(1583년) | 없음 | 속대 | 중요문화재。노부나가가 아즈치성 내에 세운 惣見寺의 전래품。다이토쿠지 惣見院 초대 주지 고케이 소친의 찬에서, 노부나가의 1주기 법요를 위해 제작된 것이 밝혀지고 있다. | |
견본채색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1폭 70.0×31.2cm | 가노 에이토쿠 필 | 교토시·다이토쿠지 본방 | 덴쇼 12년(1584년) 5월 | 가미시모 | 월대는 깎이지 않았다. 묵서(墨書)의 날짜로부터, 노부나가의 3주기 법요에 맞춰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는 같은 에이토쿠 필에 의한 속대 차림의 노부나가 초상과 함께 다이토쿠지 惣見院에 전래된 것이다. | |
견본채색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1폭 | 가노 에이토쿠 필 | 교토시·다이토쿠지 惣見院 | 속대 | 상부에 여백이 있지만 찬은 쓰여 있지 않다.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1폭 | 교토시·호온지 | 덴쇼 16년(1588년) | 가미시모 | 노부나가의 7주기에 공가(公家) 코노에 사에히사가 기증.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전 오다 노부카쓰 필 | 아이치현 나고야시·총견사 소장 | 속대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교토시·다이토쿠지 본방 | 속대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전 하세가와 토하쿠 필 | 교토시·다이토쿠지 류겐인 | 속대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효고현·탄바시 카시와하라초 역사민속자료관 | 속대 | 수염 없음. 원래는 카시와하라번 오다가에 전래.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시가현 오미하치만시(구 아즈치)·총견사 | 갑옷 | 시바타 카츠이에에 의한 찬 있음.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교토시·혼노지 | 직의 | 수염 없음.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모본 | 교토 다이운인 | 에도시대 전기(17세기) | 속대 | 에이토쿠 필화를 모작.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모본 | 니나가와 시키타네(신타네) 모 | 도쿄국립박물관 | 게이오 2년(1866년) | 속대 | 에이토쿠 필화를 모작.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모본 | 효고현립박물관 | 속대 | 에이토쿠 필화를 모작.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모본 | 가노 조우신 모 | 아이치현 나고야시·총견사 | 겐로쿠 7년(1694년) | 가미시모 | 에이토쿠 필화를 모작.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 사다이치가, 가노 에이토쿠의 손자 조우신에게 발주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 |||
평노부나가공상 | 가노 세이카·세이세쓰 모 | 도쿄대학 시료편찬소 | 분세이 13년(1830년) | 가미시모 | 전년의 분세이 대화재로 소실된 가노 에이토쿠 필화를 모사에 의해 복원한 것. | |||
평노부나가공지영 | 쿠니토모 스케타유 가문 자료 | 가미시모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와세다대학 도서관 | 에도시대 후기 | 가미시모 | 1800년대의 『게이카이 요하』에 수록.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와세다대학 도서관 | 에도시대 후기 | 가미시모 | 쿄와 3년(1803년) 발행의 『케이린 만록』에 수록.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오다기리 하루에 필 | 아이치현 세이슈시·다이토쿠지 惣見院 | 에도시대(19세기) | 속대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시가현 오미하치만시(구 아즈치)·총견사 | 속대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아이치현 기요스시·총견원 | 속대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이시카와현·스가와라 신사 | 속대 | 원래는 규쿠센지에 전래.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시가현 오미하치만시(구 아즈치)·죠고인 | 속대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시가현 오미하치만시(구 아즈치)·사이코지 | 속대 | 교토국립박물관에 위탁.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모본 | 오다 쿄사이 모 | 기후현·수복사 | 메이지 10년(1877년) | 속대 | 「소실된 어떤 곳 惣見寺 소장의 원화를 복사」라고 적혀 있다.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아이치현·자코인 | 속대 | 이누야마시 문화자료관에 위탁. | |||||
오다 노부나가 초상 | 아이치현·진모쿠지 쿄메이인 | 속대 | ||||||
오다 노부나가 초진도 | 개인 | 갑옷 | 린 로잔에 의한 찬 있음. | |||||
초상 조각 | 오다 노부나가 목상 | 궁내경 법인 코세이 | 교토시·다이토쿠지 惣見院 | 덴쇼 11년(1583년) 5월 | 속대 | 노부나가의 묘당(菩提)을 위로하고, 그 위패소(位牌所)로서 다이토쿠지 산내에 건립된 惣見院의 본당에 안치된다. | ||
초상 조각 | 오다 노부나가 목상 | 교토시·아미다지 | 속대 |
그 외,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의 직계 번(藩)인 텐도 번의 오다가(織田家)의 보디사(菩提寺)였던 삼보사 앙토쿠덴(仰徳殿)에는, 16세기 말경에 일본에 온 선교사가 서양의 기법으로 그렸다는 사실적인 초상화를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굵고 강한 눈썹, 크고 날카로운 눈, 콧날이 오똑한 코, 굳게 다문 입, 긴 얼굴에 날카로운 윤곽, 기른 수염(ひげ) 등이 특징이다. 1992년에 작가 엔도 슈사쿠가 『대론 타카가 노부나가 사레도 노부나가』라는 대론집에서 소개한 것을 계기로 여러 가지 간행물의 표지나 그라비아에 채택되거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서 다뤄지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93] 이 책에서는, 노부나가의 사후, 선교사에 의해 그려진 정밀한 그림을 메이지 시대가 되어서 복사하고, 궁내청, 오다 종가와 함께 나눠 가졌다는 이야기나, 오다가에서는 이 그림이 노부나가와 가장 닮았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삼보사에 현존하는 것은 「다이부 사진관」의 인이 찍혀 있는 것으로부터 사진사 다이부 마사오에 의해 메이지 중기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단, 사진만으로 원화는 현존하지 않고, 그 사진도 삼보사에만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원화는 목탄으로 그린 데생이라고도 하고, 음영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당시의 묘법(描法)의 검토 등 미술사적 해명이 기다려진다고 하고 있다.
4. 1. 성격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인물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247]세간의 평판을 중시하고, 항상 올바른 싸움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힘썼다. 이는 교토 귀족들의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라는 시구가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전해질 만큼 과격하고 급한 성격이었다.[245]
노부나가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옛 권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당시 시행했던 정책에 대한 비난이 많다. 이 때문에 광기의 혁명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노부나가 사후 오다 가문을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에야스)의 정보 조작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경계하고 냉대했지만, 그들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오다 가문의 피가 섞여 있었다. (히데요리의 어머니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의 장녀로 히데요시에게 시집갔고, 이에미쓰의 어머니는 오이치의 삼녀로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히데타다)에게 시집갔다.)
당시부터 엔랴쿠지(히에이 산)를 불태우는 등 불교 세력과 대립하고 잔인하게 탄압했기 때문에 노부나가를 악인으로 보는 견해가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 불교 세력은 반란을 선동하는 등 하나의 정치/무장 세력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부패와 불교 계율 위반 등으로 비판받는 타락한 세속적 세력이었다. 종교 세력이 속세의 권력과 하나가 되어 종교 본연의 의미를 망각하고 승려들이 부패한 점 등을 고려하면, 노부나가의 불교 탄압을 정교분리의 시초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에도 시대 중기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그 수법이 잔인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승려의 폐단을 없앴으니, 이 또한 천하에 큰 공을 세운 일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라고 평가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보즈(茶坊主)[249]의 일처리에 문제가 있어 노부나가가 격노했고, 자보즈는 자신에게 닥칠 화를 두려워하여 선반에 숨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선반째로 칼을 내려쳐 자보즈를 베어 죽였다고 한다. 자보즈를 벨 때 베는 맛이 좋아 사용된 칼에는 헤시키리(圧し切り)[250] 하세베(長谷部)[251]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적대 세력에 대한 행동은 대부분 당시 시대 상황에서 학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통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센고쿠 시대를 조기에 끝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노부나가가 행한 처형 방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여러 다이묘들도 행했었다.
아이치현 도요타시의 조코지(長興寺)에 노부나가를 그린 그림이 있으며, 그 외에도 유럽의 화가가 직접 그린 초상화라고 전해지는 그림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습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사진만 전해진다. 현존하는 사진을 보면 진한 눈썹, 날카로운 큰 눈, 높은 코, 다물어진 입, 긴 얼굴 윤곽과 수염 등이 특징이다. 다만 이 초상화는 사료적 뒷받침이 부족하여 메이지 시대에 이루어진 현창 사업 때 작성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노부나가는 청년 시절 여자로 오해받을 정도로 미소년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젊은 시절 오다 노부나가는 기이한 복장과 행동으로 유명했고, 사람들은 그를 大うつけ|오우쓰케|큰 바보일본어라고 불렀다. 당시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린 유카타비라(yukatabira)를 입고, 반만 걸친 하카마(袴)에 부싯돌 주머니와 기타 물건들을 매달고, 머리는 차센마게(chasen-mage)로 붉은색이나 연두색 실로 묶었으며, 주홍색 칼집에 칼을 차고 다녔다. 모든 시종들은 주홍색 무기를 들고 있었다. 또한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서서 과일과 떡을 먹거나, 다른 사람에게 기대거나 어깨에 매달린 채 흐트러진 모습으로 걸어 다녔다고 한다.[7][93]
4. 2.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
예수회에서 받은 지구의, 시계, 지도 등을 잘 이해했다고 하며, 예수회 선교사에게 지동설과 둥근 지구의 모양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과연 그 이론이 타당하다"라고 흥미를 나타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30] 호기심이 강해 조총이 일반적이지 않을 무렵부터 화승총(火縄銃)을 주 전력으로 사용하였다. 기발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상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본 것 같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아즈치성을 그린 병풍도를 선물했고 노부나가가 죽은 후인 1585년에 도착했다고 한다. 현재 이 병풍도는 분실되었다.[30]알레산드로 발리그니아누(Alessandro Valignano)의 노예였던 흑인에 흥미를 나타냈고, 그를 양도 받아 야스케(彌介)라고 부르며 측근으로 삼았다.
프로이스가 알람시계를 헌상했을 때는 흥미를 가졌으나, 취급과 수리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노부나가가 서양 과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그의 친필 서간에서도 알 수 있으며, 병든 마쓰이 유칸(松井友閑)의 치료를 위해 예수회 의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노부나가는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안토쓰 성을 그린 병풍 그림 (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徳) 작 「안토쓰 성도(安土城図)」)을 선물했고, 이 병풍 그림은 노부나가 사후인 1585년에 그레고리오 13세에게 헌상되었다. 하지만 이 병풍 증정은 노부나가의 개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중국 황제에게 행해졌던 것과 같은 외국에 대한 병풍 그림 증정의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4. 3. 문화에 대한 관심
바둑, 고와카마이를 좋아하고, 사루가쿠는 싫어했다. 특히 고와카마이의 '아쓰모리' 중 다음 대목을 좋아해 자주 춤을 추었다고 한다."인간세상 오십년 하천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 번 태어나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여기서 하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계의 가장 아래로, 이곳의 하루는 인간계의 50년이라고 한다. 노부나가는 16세기의 인물이므로 "인간"을 "인간 세상"의 의미로 사용했으므로, 인간세상의 50년은 하천에서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덧없음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스모를 매우 좋아해서, 아즈치성 등에서 대규모 스모 대회를 자주 열었다. 신분과 관계없이 노부나가의 측근과 서민들이 섞여 스모를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수영, 매사냥, 말타기, 활쏘기 등 신체와 무예를 닦았다. 바둑에도 취미가 있어, 바둑에서 사용되는 명인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을 제압한 뒤, 쓰보우치라는 요리사를 포로로 잡았다. 노부나가는 “요리를 잘하면 죄를 사하고 요리사로 고용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쓰보우치가 만든 요리를 먹었지만, “음식이 싱겁다.”라며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쓰보우치는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였다. 두 번째 요리를 맛본 노부나가는 “매우 맛있다.”라며 고용하였다. 쓰보우치는 “처음 요리는 교토의 고급 요리였고, 나중 것은 맛이 강한 시골 요리였다. 결국 노부나가님도 시골 사람이란 말이겠지요.”라고 말했다.[253] 노부나가는 “나의 요리사로 고용된 이상은 나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먼저 노력하는 것이 가신 된 자의 본분이다. 그것을 게을리했다는 것은 단순히 무능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스모를 매우 좋아하여, 1570년부터 사망 1년 전인 1581년까지 아즈치의 조라쿠지에서 자주 스모 대회를 열었다.[78][79] 처음에는 오미국 허풍쟁이들이 참가했지만, 점차 교토 등 다른 지역에서도 참가했다. 1578년 아즈치산에서 열린 가장 큰 대회에는 1,500명이 참가했다.[79][80] 주된 이유는 노부나가가 스모를 좋아했기 때문이지만, 체격 좋고 무술 실력이 뛰어난 젊은이들을 선발하는 실용적인 이점도 있었다. 또한 큰 행사를 통해 권위를 과시하고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민중의 불만을 해소하는 목적도 있었다.[79][80] 유미토리시키(활 휘두르기 의식)와 스모 선수가 동서로 나뉘어 행사(스모 심판)에 의해 판정되는 형식은 노부나가가 주최한 스모 대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78][80]
노부나가는 다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언제부터 다도를 즐기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상락 이후 1569년부터 명물 차도구를 수집하는 ‘명물 사냥’을 시작했다. 이렇게 얻은 차도구는 가신들에게 상으로 주거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다도를 즐겼던 면도 있는 것 같다.
스모 관람도 즐겼다. 당시 스모 풍습이 있었던 곳은 사이고쿠(서국)뿐이었고, 오와리 시대에는 스모에 관심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상락 이후에는 스모 관람을 매우 좋아하게 되어, 안토 성 등에서 대규모 스모 대회를 자주 개최했던 것이 『신장공기』에 보인다. 스모 대회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는 상이 주어졌고, 아오지 요에몬과 같이 오다 가문의 가신으로 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1578년 8월에 열린 스모 대회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둔 14명을 각각 100석으로 등용하여 집까지 주었다고 한다.
고와카마이와 코우타를 좋아했지만, 무용과 비교하면 노가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1575년 3월 교토 쇼코쿠지에서 이마가와 우지마사와 회견하여 축국 시연을 받았고, 같은 해 7월 세이닌 친왕 주최의 축국 모임도 참관하는 등 축국에도 관심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노부나가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고, 각종 행사에는 기발한 기획을 짜냈다. 정월에 안토(安土) 마을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많은 말을 달리게 하는 "좌의장(左義長)"을 열거나, 오봉(盂蘭盆節)에 안토성에 불을 밝히며 즐기는 등의 일을 했다. 안토성의 천수각만을 등롱으로 조명하고, 비와 호수에 많은 배에 횃불을 켜서 매우 화려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안토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매우 좋아하여, 다른 다이묘의 사자 등 많은 사람들에게 황금을 저장한 안토성을 견학시켰다. 1582년 정월에는 안토성 내부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마음껏 즐겁게 한 후, 노부나가 자신이 손수 손님 한 사람당 100문씩 답례금을 거두었다고 한다.
5. 막부 및 천황과의 관계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여 무로마치 막부를 재건하고 기나이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초기에는 요시아키를 꼭두각시로 삼아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설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부나가와 요시아키가 좋은 관계였으며, 요시아키의 배신으로 관계가 틀어졌다는 설과 노부나가가 처음부터 막부를 무너뜨릴 의도가 없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254][255]
노부나가가 천황을 압박하고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노부나가가 천황과 황실을 존중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사무라이에게 영토를 빼앗겨 궁핍했던 천황과 귀족들에게 노부나가는 막대한 기부를 하는 든든한 후원자였고, 노부나가는 황실과의 관계를 통해 오다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256][254]
덴쇼 3년(1575년) 11월, 노부나가는 권대납언과 우콘에다이쇼에 임명되었다. 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선례를 따른 것으로, 공가와 사찰에 대한 지행지를 지정하고 천황과 조정의 권위를 유지하려 했다. 이후 노부나가는 "상상(上様)"으로 불리며, 조정으로부터 "천하인(天下人)"으로 인정받았다. 일설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 추방 후에도 요시타다를 옹립하여 무로마치 막부 체제를 유지하려던 노선을 포기하고, 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는 견해도 있다.
덴쇼 10년(1582년) 1월, 노부나가는 안토 성에서 신하들에게 "어행의 방"을 보여주고, 간슈지 하루토요는 정친천황에게 어행을 위한 안장을 선보였다. 이는 정친천황의 안토 어행이 예정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같은 해 4월, 무라이 사다카쓰와 간슈지 하루토요는 노부나가를 태정대신, 관백, 정이대장군 중 하나로 임명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삼직추임문제) 조정 측의 제안인지, 무라이 사다카쓰의 제안인지는 불분명하다. 5월, 조정은 노부나가의 거성인 안토 성에 칙사를 보냈으나, 노부나가의 답변은 명확하지 않다.
노부나가는 어료소(御料所) 회복 등 조정의 재정 재건을 지원했지만, 이는 천황을 존숭해서가 아니라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노부나가와 조정의 관계는 대립 관계였다는 설과 협력 관계였다는 설이 대립하며, 1970년대부터 활발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1990년대 이마타니 아키라(今谷明)는 정친천황을 노부나가의 최대 대항자로 묘사했지만, 이후 연구에서 부정되었다. 2017년 현재는 노부나가가 천황, 조정과 협력 관계였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노부나가와 천황, 조정의 관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대립·극복설 | 융화·협조설 |
---|---|
오쿠노 타카히로(奥野高廣) | 와키다 오사무(脇田修) |
아사오 나오히로(朝尾直弘) | 하시모토 마사노부(橋本政宣) |
후지키 히사시(藤木久志) | 미키 세이이치로(三鬼清一郎) |
아키타 유키(秋田裕毅) | 이케 스스무(池享) |
이마타니 아키라(今谷明) | 호리 신 |
타치바나 케이코(立花京子) |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克広) |
후지이 죠지(藤井譲治) | 이케가미 유코(池上裕子) |
후지타 타츠오(藤田達生) | 칸다 센리(神田千里) |
고자 유이치(呉座勇一) | 키리노 사쿠토(桐野作人) |
야마모토 히로후미(山本博文) | |
카네코 타쿠(金子拓) | |
노부나가가 천황을 초월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선교사에 대한 발언이 주목받는다. 루이스 프로이스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내가 국왕이며, 내궁(内裏)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노부나가가 천황을 초월하려 했다는 증거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히라이시 조소(平井上総)는 의문을 제기하고, 호리 신은 정친천황과 노부나가의 일체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노부나가와 조정의 관계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로는 삼직추임(三職推任) 문제, 정친천황의 양위 문제, 란샤다이(蘭奢待) 절취, 교토 우마조로에(京都馬揃え), 칙명 강화 등이 있으며, 연구자 간 해석이 엇갈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추방 후, 노부나가는 정친천황에게 양위를 요청했고 천황도 승낙했지만, 결국 양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립설에서는 노부나가가 자신의 말을 따르는 세이닌 친왕을 즉위시키려 했고, 정친천황이 저항했다고 본다. 융화설에서는 천황이 양위를 원했지만 노부나가의 의향으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본다.
노부나가는 란샤다이를 절취했는데, 이에 대한 히가시야마 온분고(東山御文庫) 소장 문서가 논란이 되었다. 오랫동안 정친천황이 노부나가를 비난한 문서로 해석되었지만, 카네코 타쿠(金子拓)는 산죠니시 사네에다(三条西実枝)가 정친천황에게 보낸 문서로 재해석했다.
교토 고마조로에에 대해 대립설은 조정에 대한 군사적 압력으로, 융화설은 조정의 희망에 따라 행해진 것으로 해석한다. 현재는 오락 행사였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혼노지의 변 이후, 요시다 켄미(吉田兼見) 등 공가는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해 냉담하게 기록했고, 아케치 미쓰히데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을 보였다.
6. 가계
오다 노부히데의 적장자로, 어머니는 츠치다 고젠이다. 정실은 사이토 도산의 딸인 노히메이다. 그러나 노히메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고, 이코마 키츠노, 사카씨, 쿄운인 등 측실들에게서 자녀를 얻었다.[127][128][129]
노부나가의 가계는 오다씨(織田氏)로, 에치젠국(越前国) 오다쇼(織田荘) 출신이라고 한다. 오다씨는 켄진자(劔神社)에 남아 있는 문서에 처음 등장하며, 오와리로 세력을 옮긴 후에는 이와쿠라(岩倉)와 기요스(清洲)를 근거지로 하는 두 가문으로 분열했다. 노부나가는 기요스(清洲)를 근거지로 하는 야마토노카미가(大和守家)의 분가(分家)인 단조추가(弾正忠家) 출신이다.[127][128][129]
노부나가는 후지와라 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했으며, 나중에는 다이라 씨의 다이라노 스케모리(平資盛)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미나모토(源) 씨와 다이라(平) 씨가 번갈아 권력을 잡는다는 믿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127][128][129]
;주요 가계도
;형제
;자매
이름 | 비고 |
---|---|
오이치노카타 |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 시바타 카츠이에의 아내 |
오이누노카타 | 사지 노부카타의 아내, 호소카와 아키모토의 아내 |
쿠라노카타 | 오하시 시게나가의 아내 |
이누야마도노 | 오다 노부키요의 아내 |
진보ㆍ이나바 부인 | 진보 우지하루의 아내, 이나바 사다미치의 아내 |
사이토 히데타츠의 측실 | 사이토 도산의 아내 |
나에키 칸타로의 아내 | 토오야마 나오카도의 아내 |
오바타도노 | 오다 노부나리의 아내 |
에이린인 | 오다 노부나오의 아내 |
츠다 이즈모노카미의 아내 | |
이이노오 히사키요 | |
노부도노 | 츠다 모토요시의 아내 |
신토쿠인 | 마키 나가키요의 아내 |
니와 우지카츠의 계처 | |
노키 큐로의 아내 |
;자녀
구 분 | 이름 | 생모 | 비고 |
---|---|---|---|
아들 | 오다 노부타다 | 이코마 키츠노 | 장남 |
오다 노부카츠 | 이코마 키츠노 | 차남 | |
오다 노부타카 | 사카씨 | 삼남 | |
하시바 히데카츠 | 사남, 하시바 히데요시의 양자 | ||
오다 카츠나가 | 오남 | ||
오다 노부히데 | 육남 | ||
오다 노부타카 | 칠남 | ||
오다 노부요시 | 팔남 | ||
오다 노부사다 | 구남 | ||
오다 노부요시 | 십남 | ||
오다 나가츠구 | 십일남 | ||
서자 | 오다 노부마사 | ||
딸 | 도쿠히메 |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아내 | |
후유히메 | 가모 우지사토의 아내 | ||
오다 히데코 | 츠츠이 사다츠구의 아내 | ||
에이히메 | 마에다 도시나가의 아내 | ||
호온인 | 니와 나가시게의 아내 | ||
산노마루도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니조 아키자네의 아내 | ||
츠루히메 | 나카가와 히데마사의 아내 | ||
오후리 | 미즈노 타다타네의 아내, 사지 카즈나리의 아내 | ||
겐코인 | 마데노코지 아츠후사의 아내 | ||
게츠묘인 | 토쿠다이지 사네히사의 아내 | ||
아카마츠씨의 딸 | 니죠 아키자네의 측실 | ||
아시카가 부인 |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측실 | ||
케이호인 | 니와 나가히데의 아내 | ||
양녀 | 사이토 부인 | 하타케야마 아키타카의 아내 | |
류쇼인 | 타케다 카츠요리의 아내 | ||
도야마 부인 | 타케다 카츠요리의 아내 | ||
양자 | 고노미야 쿠니요시 친왕 | 사네히토 친왕의 아들 |
7. 관련 작품
- NHK 대하드라마
- * 《태합기》 (1965년, 배우: 타카하시 코지)
- * 《하늘과 땅과》 (1969년, 배우: 스기 료타로)
- * 《나라 훔친 이야기》 (1973년, 배우: 타카하시 히데키)
- * 《황금의 나날》 (1978년, 배우: 타카하시 코지)
- * 《여자 태합기》 (1981년, 배우: 후지오카 히로시)
-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배우: 야쿠쇼 코지)
- * 《다케다 신겐》 (1988년, 배우: 이시바시 료)
- * 《노부나가 KING OF ZIPANGU》 (1992년, 배우: 오가타 나오토)
- * 《히데요시》 (1996년, 배우: 와타리 테츠야)
- * 《도시이에와 마쓰~가가 백만석 이야기~》 (2002년, 배우: 소리마치 타카시)
- * 《공명의 갈림길》 (2006년, 배우: 타치 히로시)
- * 《천지인》 (2009년, 배우: 킷카와 코지)
- * 《고우~공주들의 전국~》 (2011년, 배우: 토요카와 에츠시)
- * 《군사 간베에》 (2014년, 배우: 에구치 요스케)
- * 《사나다마루》 (2016년, 배우: 요시다 코타로)
- * 《어떡할래 이에야스》 (2023년, 배우: 오카다 준이치)
- 《불멸의 이순신》 (KBS1, 2004년~2005년, 배우:박영록)
- 《임진왜란 1592》 (KBS1, 2016년, 배우:손종학)
- 《레전드 & 버터플라이》 (2023년, 배우: 키무라 타쿠야)
- 기후 노부나가 축제(기후현 기후시)
- 오다 노부나가 서밋(오다 노부나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일본의 시정촌 및 관련 시정촌의 모임에 의해 개최됨)
- 노부나가 공 거성 연락협의회(노부나가의 꿈 가도 연합) - 2024년 4월 30일 해산[210]
- 『오다 노부나가〈전6권〉』와시오 아메코, 춘추사송백관, 1941년. 낭속서방, 1965년. 후에 후지미 서점〈시대소설문고〉, 1991년 외.
- 『노부나가』사카구치 안고, 지쿠마 서점, 1953년. 보섬사〈보섬사 문고〉, 2008년.
- 「오케하자마」(『이역의 사람』수록) 이노우에 야스시, 강담사, 1954년.
- 『오다 노부나가』야마오카 소하치, 강담사〈야마오카 소하치 역사문고〉, 1961년.
- 『불꽃의 기둥 오다 노부나가〈상・하〉』오사라기 지로, 덕간서점〈덕간문고〉, 1962년. 학양서방, 2006년.
- 『나라 훔친 이야기』시바 료타로, 신조사, 1967년.
- 『오다 노부나가』난조 노리오, 학습연구사, 1969년. 지쿠마 서점〈도쿠마 문고〉, 1991년.
- 『촌법무사 야기리 이가이시 5』야기리 도모오, 강담사, 1967년. 작품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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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명의 노부나가』(2019년, HIGH BROW CINEMA 감독: 와타나베 케이 주연: TAKAHIRO, 이치하라 하야토, 오카다 요시노리)
- 『레전드&버터플라이』(2023년, 도에이 감독: 오토모 케이시 주연: 키무라 타쿠야)
- 『구비』(2023년, KADOKAWA, 감독: 키타노 타케시, 주연: 카세 료)
- 『젊은 시절의 노부나가』(1961년, NET 연기: 9대 이치카와 에비조)
- 『오다 노부나가』(1962년, 아사히 방송 연기: 하야시 신이치로)
- 『젊은 시절의 노부나가』(1964년, 후지 텔레비전 연기: 이치카와 사루노스케)
- 『국토쟁탈전』
- *NHK 대하드라마(1973년, 연기: 다카하시 히데키)
- *신춘 와이드 시대극(2005년, 텔레비 도쿄 연기: 이토 히로아키)
- 『오다 노부나가』(1989년, TBS 연기: 와타나베 켄)
- 『노부나가 KING OF ZIPANGU』(1992년, NHK 연기: 오가타 나오토)
- 『오다 노부나가』(1994년, 텔레비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 연기: 다카하시 히데키)
- 『오다 노부나가 천하를 잡은 바보』(1998년, TBS 연기: 키무라 타쿠야)
- 『여자 노부나가』(2013년, 후지 텔레비전 연기: 아마미 유키)
- 『노부나가의 요리사』(2013년, 텔레비 아사히 연기: 오이카와 미츠히로(소년기: 나카우치 아마모))
- 『노부나가 콘체르토』(2014년, 후지 텔레비전 연기: 오구리 슌)
- 『노부나가 타오르다』(2016년, 텔레비 도쿄 연기: 히가시야마 노리유키)
- 『소하 드라마 오다 노부나가』(2017년, 시대극 전문 채널 연기: 미야케 히로키, 아키야마 류지[212])
- 『오케하자마 OKEHAZAMA〜오다 노부나가 패왕의 탄생〜』(2021년, 후지 텔레비전 연기: 11대 이치카와 에비조)
- 『신·노부나가 공기〜클래스메이트는 전국 무장〜』(2022년, 닛폰 텔레비전 연기: 나가세 렌)
- 스즈키 미쓰아키 『오다 노부나가』(1955년, 아키타 서점)[213]
- 사사키 게이코 『노부나가 군』 시리즈 (『다가라사마의 노부나가 군』, 『노부나가 군 일기』, 『노부나가 군 번영기』, 『노부나가 군 풍운기』)(1977년 - 1982년, 백천사)
- 나카지마 도시유키 『오다 노부나가―난세의 싸움』(학습만화 진물 일본사 7)(1979년, 학연)[214]
- 요코야마 미쓰테루 『오다 노부나가』(1985년, 강담사, 원작 야마오카 소하치)
- 이케가미 료이치 『노부나가』(1986년 - 1990년, 소학관, 원작 구도 가즈야)
- 기무라 시게미쓰 『오다 노부나가 난세의 세상의 풍운아』(학습만화 일본의 전기 2)(1988년, 집영사)[215]
- 혼구 히로시 『몽환의 같이』(1991년 - 1995년, 슈에이샤)
- 시노 야스시 『내각총리대신 오다 노부나가』(1994년 - 1997년, 백천사)
- 나가테 유카 『TENKA FUBU 노부나가』(1996년[216] - 1998년[217], 강담사)[218]
- 하야카와 다이스케 『오다 노부나가: 전국 인물전』(코믹판 일본의 역사)(2007년, 포플러사, 원작: 스기타 도루)[219]
- 이시이 아유미 『노부나가 협주곡』(2009년 -, 소학관)
- 하라 데쓰오 『싸움의 아이 오다 사부로 노부나가 전』(2010년[220] - 2022년[221], 덕간서점, 원작: 기타하라 호시보)
- 가지카와 다쿠로 『노부나가의 셰프』(2011년 - 2024년, 방문사, 원작 니시무라 미쓰루)
- 도미이 오쓰카 『오다 노부나가: 「천하포무」로-전국 난세를 달려온 남자』(소학관판 학습만화 인물관)(2012년, 소학관)[222]
- 소니시 겐지 『고양이고양이 일본사』(2014년 -, 실업지일본사)
- 고사카 마리코 『전국 댄스 STEP ON THE WARRIOR』(2014년 -, 보쿠라노 양 점프)
- 야마다 게이코 『오다 노부나가: 천하통일을 목표했던 무장』(학습만화 NEW 일본의 전기)(2014년, 학연)
- 호리노부 유키 『노부나가의 리망~은 창조』(2017년, 리드사, 코믹 난)[223]
- 스즈키 고 『만화로 읽는 신연구 오다 노부나가』(2018년, 에비스 코쇼 출판, 감수 시바 히로유키)
- 오와다 히데키 『노부나가 선생』(2018년 - 2020년, 일본문예사)
- 가이타니 시노부 『신·노부나가 공기~노부나가 군과 나~』(2019년 - 2021년, 주간 영 매거진, 코믹 DAYS)
- 후지모토 겐시 『몇 번이고, 시간을 되풀이해도 호노노지가 타는 건가!?』(2020년 -, 주간 영 매거진, 원작: 이데 게이스케)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1980년 - , 코에이(コーエー))
- 미나미 하루오(三波春夫) 「오다 노부나가」(1970년, 작사: 키타무라 세이지(北村精児), 작곡: 하루카와 카즈오(春川一夫). 후에 이치카와 유키노(市川由紀乃)가 커버)
- 미나미 하루오(三波春夫) 「장편 가요낭곡 「노부나가」」(작사·작곡: 미나미 하루오(三波春夫))
- 미우라 코이치(三浦洸一) 「기습~오다 노부나가」(1973년, 작사: 사에키 타카오(佐伯孝夫), 작곡: 와타나베 가쿠오(渡辺岳夫). 컴필레이션 앨범 「전국의 무장(戦国の武将)」(제품번호: SJX-155) 수록)
- 성전사2(聖飢魔II) 「오다 노부나가」(1990년, 작사: 데몬 고구레, 작곡: 제논 이시카와)
- 사쿠라유키(さくらゆき) 「몽환의 가락」(2014년, 작사: 오구리 사쿠라(小栗さくら), 작곡: 마나베 타카유키(真鍋貴之))
- 렉시(レキシ) feat. 냥 북조시대(카네코 아야노(カネコアヤノ)) 「내짚신(マイ草履)」(2022년, 작사·작곡: 이케다 다카시)[224]
- TEAM NACS 일본 공연 「WARRIOR〜唄い続ける侍ロマン」(2012년, 연기: 戸次重幸)
8. 관련 사료
- 신장공기(信長公記) - 오타 규이치(太田牛一) 저
- 《프로이스 일본사(フロイス日本史)》 - 루이스 프로이스(포르투갈 선교사) 저
- 《가네미 경기》(兼見卿記) - 요시다 가네미(吉田兼見) 저
- 《도키쓰네 경기》(言経卿記) - 야마시나 도키쓰네(山科言経) 저
- 《하루토요 공기》(晴豊公記) - 곤슈지 하루토요(勧修寺晴豊) 저
-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 - 오쿠보 다다타카(大久保忠教) 저
- 《아소공 야화》(亜相公御夜話) -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어록
- 《아키라 법전》(明良洪範) - 사네다 마스타카(真田増誉) 저
- 《텐노지야 모임기록》(天王寺屋会記) - 쓰다 소큐(津田宗及) 등
- 《다테리 사쿄노스케 뉴도 다카스케 기록》(立入左京亮入道隆佐記) - 다테리 무네쓰구(立入宗継) 저
- 《혼간지 문서》(本願寺文書)
- 《오유 전하 일기》(御湯殿上日記)
- 《호소카와 가기》(細川家記)
- 《호소카와 양가기》(細川両家記)
- 《아자이 삼대기》(浅井三代記)
- 《세이슈지 고기》(政秀寺古記)
- 《신초키》(信長記), 《태합기(太閤記)》 - 오제 호안(小瀬甫庵) 저
- 《가도카와 태합기》(川角太閤記) - 가도카와 조로에몬(川角三郎右衛門) 저
- 《아케치 군기》(明智軍記)
- 《고요군칸(甲陽軍鑑)》 - 고사카 마사노부(小坂昌信) 저,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집안의 군략, 통치 지침 등을 적은 책
- 《세슈 군기》(勢州軍記)
- 《사쿠마 군기》(佐久間軍記)
- 《도도 군기》(堂洞軍記)
- 《남북 야마시로 군기》(南北山城軍記)
- 《에이로쿠 미노 군기》(永禄美濃軍記)
- 《구니토모 철포기》(国友鉄砲記)
오다 노부나가 관련 사료는 비교적 풍부하다고 보기 어렵고, 대표적인 사료조차도 그 신뢰성에 대한 평가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1]
일반적으로 노부나가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사료로 여겨지는 것은 오쿠노 다카히로(奥野高廣)가 집성한 노부나가 발급 문서(《오다 노부나가 문서 연구》)와 오쿠노 다카히로 등이 교주한 가도카와 문고판 《신장공기》이다.[1][2]
호리 신(堀新)에 따르면, 《신장공기》는 자필본을 번각한 것이 아니고, 《신장공기》 사본 간 이동 및 계통 연구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과제가 있다.[1] 문서에 대해서도 노부나가 발급 문서뿐만 아니라 가신단 발급 문서 수집 및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1]
9. 평가
오다 노부나가는 정토진종 불교 종파를 중심으로 한 저항 운동인 일향일기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전국 시대의 끊임없는 폭력으로 인한 사무라이에 대한 대중의 반감으로 일향일기의 수가 급증했고, 노부나가가 권력을 잡았을 무렵에는 일본에서 사무라이 지배에 반대하는 주요 조직화된 무장 세력이었다.[205]
에도 시대에는 에도 막부의 창시자로서 "신군(神君)"으로 추앙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에혼 타이코키』 등을 통해 서민들에게 친숙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노부나가에 대한 평가는 낮았다. 오세 호안, 아라이 하쿠세키, 오타 킨조 등 유학자들은 모두 노부나가의 잔혹성을 강조하며 매우 낮게 평가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노부나가를 친족을 도구처럼 다루고, 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배신했으며, 큰 공을 세운 노신(老臣) 사쿠마 노부모리 등을 추방하고, 핑계를 대서 다른 다이묘들을 멸망시킨 "흉역(凶逆)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사람(노부나가)의 타고난 잔혹성과 속임수로 뜻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그 최후가 좋지 못했던 것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불행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노부나가의 죽음을 잔혹성 때문의 자업자득으로 여겼다.
하지만 에도 막부의 입장에서 보면,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자였고, 또한 도쿠가와 노부야스를 자결로 몰아넣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노부나가가 "신군" 이에야스조차 복종시킨 절대적인 권력자였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에도 막부의 정사인 『도쿠가와 짓키』(「동조궁어실기(東照宮御実紀)」권 2)에서는 이에야스와 함께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한 존재로서의 평가도 내려졌다.[205] 민중들 사이에서도 노부나가는 인기가 없었고, 가부키나 정가 등에서도 노부나가는 악역이나 조역에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부나가를 재평가한 사람이 라이 산요이다. 에도 시대 후기 존왕 운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206] 라이 산요의 『일본가이시』는 노부나가를 "초세(超世)의 재능"으로 높이 평가했다. 『일본가이시』는 노부나가의 근왕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리고 중국 후주의 명군인 세종의 업적이 조광윤의 북송 건립으로 이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노부나가의 업적이야말로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의 평화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국학자들 사이에서도 일본 통일자로서,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했던 아시카가 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맞물려 높이 평가받았다. 예를 들어,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옥봉백수(玉鉾百首)』에서 "시즈하타를 오다의 공은 덴노를 받들어 시끄러운 대신"이라는 노래를 짓고, "이 대신(=오다 노부나가)은, 정친천황(正親町天皇)의 에이로쿠 무렵, 오와리국(尾張國)에서 나와 경중(京中)의 소란을 가라앉히고, 기내근국(畿内近国)을 정벌하여 평화의 기반을 열고, 내리(內裏)를 수리하는 등 공훈이 큰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잘 아는 바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207]
막말의 지사들도 어료소(御料所) 회복 등을 수행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노부나가를 근왕가로 존경했다. 메이지 2년(1869년) 메이지 정부가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는 신사 건립을 지시했다. 메이지 3년(1870년),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오의 후손인 텐도 번(현 야마가타현 텐도시) 지사인 오다 노부토시가 도쿄의 자택 내와 번내에 있는 마이즈루야마에 노부나가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했다. 노부나가에게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건훈(建勲)'''이라는 신호가, 사당에는 신기관으로부터 건오다사(建織田社), 후에는 건훈사(建勳社)라는 사호가 하사되었다. 그 후, 메이지 시대에는 도쿄의 건훈신사가 교토 후나오카야마 꼭대기로 옮겨졌다.
이러한 경향은 역사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당시에는 노부나가의 근왕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2000년에 아사히 신문사가 실시한 전문가 5인(아라마타 히로시, 키시다 슈, 도널드 킨, 사카이야 타이치, 스기모토 소네코)이 선정한 서기 1000년부터 1999년까지의 「일본의 얼굴 10인」에서 노부나가는 득표수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20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노부나가의 정치적 업적이 재평가되면서 개혁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역사 소설에서는 이미 전쟁 중이던 1944년에 사카구치 안고가 단편 소설 「철포」를 발표하여 근대적인 합리주의자로서의 노부나가상을 명확히 제시했다.[209]
학술적으로는 1963년 간행의 『이와나미 강좌 일본 역사』에서 이마이 하야타로가 노부나가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노부나가는 중세의 복잡한 토지 소유 구조를 청산하고 「순수 봉건제 확립의 길을 열었다」 인물이다. 그리고 이마이는 「노부나가 이전에는 중세 이래의 종교적 권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노부나가의 본질을 중세적 권위의 부정에 있다고 규정했다. 이 무렵에는 노부나가가 천황제를 타도하려 했다는 설도 등장하여 혁신가로서의 노부나가상이 자리 잡게 된다. 노부나가는 그 「혁신적인」 여러 정책으로 일본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전무후무한 영웅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아 왔다.
새로운 시대의 길을 개척한 인물로서의 노부나가상은 널리 받아들여진 반면, 노부나가 시대는 아직 중세적 요소가 강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시한 태합검지야말로 근세로의 전환점이라는 학설도 유력했다. 아사오 나오히로와 와키다 오사무는 각각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중근세 이행기 연구자이지만, 두 사람의 노부나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정반대이다. 아사오가 노부나가를 근세의 창시자로 이해한 데 반해, 와키다는 노부나가를 중세의 마지막 패자로 여겼다.
그 후 21세기 역사학계에서는 보다 실태에 부합하는 노부나가 연구가 진행되어 그 평가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무로마치 막부와 오다 정권의 연속성이 강조되고, 노부나가는 천황과도 협조 관계에 있었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낙시·낙좌령」을 노부나가 독자적인 혁신적 정책으로 보는 견해도 부정적인 연구가 많아졌다. 또한, 노부나가의 종교관도 다른 전국 다이묘와 비교해서 특이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측면에서 특별한 존재로서의 노부나가상에 의문이 제기되고, 노부나가에게 획기성을 인정하는 데 신중한 의견의 연구자가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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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5章 郷土の三英傑に学ぶ経営戦略 - 信長、「天下布武」のビジョンを示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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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位最高位「正一位」最後に贈られたのは1917年の織田信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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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能寺の変、キリシタンの史料から探る 新書「キリシタン教会と本能寺の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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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信長、秀吉、家康の3人は神になろうとしたのか...「天下人」になった男たちが必ず直面する意外な困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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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を天下統一に導いた「連鎖するイノベーショ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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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策は今も昔も大きな課題。織田信長の革新的な政策の謎に迫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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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康の旗 朝鮮出兵で疲弊した経済を再建、平和な時代を開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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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見聞録 天下人の実像 – 第十五章 山中の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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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土城は何が画期的だったのか 研究者の間で続く「争論」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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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統一への戦いを支えた新金融改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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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利休が切腹させられたのはなぜ? 政治利用された「茶の湯」と謎の処刑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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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と鉄砲 天下統一の背景に南蛮貿易と鉄砲伝来、父信秀の財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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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めて鉄砲連射を行った村木砦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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番組情報: NHKスペシャル 戦国 激動の世界と日本 (1)「秘められた征服計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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番組情報: NHKスペシャル 戦国 激動の世界と日本 (2)「ジャパン・シルバーを獲得せ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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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150年続いた戦国時代は終わったのか...尾張の小さな戦国大名・織田信長が「天下人」になれた本当の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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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でも秀吉でも家康でもない…東大教授が「戦国時代で最も優秀な戦術家」と断言する武将の名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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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土桃山時代の重要用語 兵農分離 - 刀剣ワール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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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単身赴任"の部下に激怒した信長が焼き払った120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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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康支えた「徳川四天王」とは? 戦国大名は「家臣」を統率し、「女性」は自分の意思で動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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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下)唯我独尊が招いた相次いだ謀反... 久秀、村重、そして光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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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田利家 武勇と仁愛を兼備、秀吉を支えた「槍の又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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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上) 旧弊に縛られない天才、独創的な施策や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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パワハラどころじゃない!織田信長が怒り狂って人を殺した話2選+番外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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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が大坂本願寺との戦いで用いた鉄甲船は、本当に鉄の装甲で覆われていた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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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考案の鉄甲船! 毛利・村上水軍を破ったのは鉄に覆われた巨大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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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が大坂本願寺攻めで用いた九鬼水軍の鉄甲船とはどんな船な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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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で村上水軍にフルボッコ! 焙烙火矢の恐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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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道を人心掌握に活用した織田信長と荒稼ぎの千利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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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戦国時代のエリートらは茶道に熱狂したのか 政治に利用、武士としての評価にもつなが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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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天下統治の秘密は茶道具の価値変革...ナイキやゴディバ等の経営戦略の先駆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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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撲LOVEの織田信長がつくった? 安土に残る古文書でわかった、大相撲の「東西」の起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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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史上No. 1の相撲好きは信長! 趣味が高じたイベントに参加者1500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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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石四鳥だった!? 織田信長の相撲好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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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容室と美容室の違いを調べていたら、なんと織田信長に行き着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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髭こそダンディズム? 織田信長も明治天皇も蓄えていた「髭」のイメージ、その歴史に迫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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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見聞録 天下人の実像 - 第二十一章 伊勢神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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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はなぜ比叡山を焼き討ちにしたのか?その当然すぎる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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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に戦いを仕掛けたのは大坂本願寺だった! 誤解が多い織田信長の10年戦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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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と鉄砲 天下統一の背景に南蛮貿易と鉄砲伝来、父信秀の財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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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濱先生の読み解く歴史の世界「信長という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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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番身長が高かった戦国武将は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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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を生んだ父・信秀の独創的な教育方針歴史に学ぶ乱世を生き抜く発想力の身に付け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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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楽市楽座は信長が発案した?」解いておきたい信長への「5つの誤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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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王?暴君?「戦国のカリスマ」織田信長が人々を魅了した納得の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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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あるか」、19歳の信長、斎藤道三を唸らせ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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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見聞録 天下人の実像 – 第二章 斎藤道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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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見聞録 天下人の実像 – 第四章 長槍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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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は全国統一を考えていなかった? 最新研究が覆す「織田信長の実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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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の評価、江戸時代は低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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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織田信長はわずか4千の兵で、3万の今川義元を破ったのか?桶狭間の合戦の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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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雨が変えた戦国の歴史 「信長戦記」に新たな視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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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実は保守的」カリスマ像が揺らぐ事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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暴君・パッシング・革命児 信長再評価の45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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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織田信長が、江戸時代に「意外なほど不人気」だった理由 儒教的な考え方では「ダメな君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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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戸時代の学者には意外と不評だった織田信長。その低評価の理由と現代との違いを探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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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浸透した、風雲児信長のイメ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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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の武将とも格が違うとわかる信長役の隆大介『影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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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は黒のマントを身にまとい、ワインを堪能していた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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設楽原の戦いでは「ブラウスにベスト姿」の家康 ヨーロッパかぶれには意外な狙い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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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国無双5』織田信長役・島崎信長さんにインタビュー。ひとりの人間として織田信長の成長が描かれるストーリーが描か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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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冷酷」で「能力主義」な信長はいかにして生まれた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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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藝春秋
2015-07-22
[210]
웹사이트
【解散】信長公居城連携協議会(信長の夢街道連合)とは
http://www.city.koma[...]
小牧市
2024-05-09
[211]
웹사이트
番組エピソード 大河ドラマの“信長”-NHKアーカイブス
https://www2.nhk.or.[...]
[212]
문서
秋山は劇中劇「連続時代劇 織田信長」の信長を演じる本人役としての出演だが、クレジットではあくまで「織田信長役」となっている。
[213]
웹사이트
まんだらけ通信販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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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7
[214]
서적
織田信長―乱世の戦い
https://www.amazon.c[...]
学研プラス
1979-10-01
[215]
웹사이트
学習漫画 日本の伝記 集英社版 〔2〕 織田信長 戦乱の世の風雲児
https://item.rakuten[...]
2023-07-09
[216]
웹사이트
週刊少年マガジン1996年23 - メディア芸術データベース
https://mediaarts-db[...]
2023-07-09
[217]
웹사이트
週刊少年マガジン1998年6 - メディア芸術データベース
https://mediaarts-db[...]
2023-07-09
[218]
웹사이트
TENKA FUBU 信長(1) | ながてゆか | 無料漫画(マンガ)ならコミックシーモア
https://www.cmoa.jp/[...]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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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織田信長 : 戦国人物伝
https://iss.ndl.go.j[...]
ポプラ社
2007
[220]
뉴스
コミックゼノン創刊号、御パンツ付録でかぶいて候
https://natalie.mu/c[...]
ナターシャ
2010-10-25
[221]
뉴스
北原星望×原哲夫「いくさの子」が12年の連載に幕、完結記念のインタビューも
https://natalie.mu/c[...]
ナターシャ
2022-09-24
[222]
서적
織田信長 : 「天下布武」へ-戦国乱世をかけぬけた男
https://iss.ndl.go.j[...]
小学館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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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株式会社リイド社 » 信長の理望~ん 創造
https://www.leed.co.[...]
2024-05-08
[224]
뉴스
カネコアヤノ参加の新曲「マイ草履 feat. にゃん北朝時代」配信スタート!安達祐実出演のMVも公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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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クターエンタテインメント
2022-03-02
[225]
문서
織田瓜. 瓜는 일본어로 木瓜라 하는 산당화를 가리킨다.
[226]
문서
오타 규이치(太田 牛一)가 쓴 노부나가의 일대기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에서 말하길,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의 장례식에 등장한 노부나가의 모습을 보고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멍청이(大うつけ)라고 비하하였으며, 또한 표현은 다르지만 노부나가의 장인 사이토 도산(斎藤 道三)이 노부나가를 멍청이(たわけ)라고 비하하는 장면이 있다.
[227]
뉴스
「天下人」三好長慶と堺商人の特別な関係 初公開の書状で見えたのは
https://www.asahi.co[...]
2022-11-17
[228]
문서
「織田は越前に在り。平氏の子孫、織田明神の神主となる」(오다는 에치젠 출신. 헤이시의 자손. 오다 묘진의 신주를 모신다) -세슈 군기(勢州 軍記), 에도시대 초기 기록
[229]
문서
일본 후쿠이현 니우군 에치젠정 오리다(織田)에 쓰루기(劒) 신사의 대관으로 인베 씨 연관 기록이 존재
[230]
문서
기요스 산부교: 슈고직인 시바가문을 보좌하는 세 가문. 오다 이나바노카미가(因幡守家), 도자에몬가(藤左衛門家), 단조노추가(弾正忠家)이 있다.
[231]
문서
도타 고젠은 명백히 말하면 계실이다. 원래 노부히데의 정실이 있었으나 이혼하고 노부나가의 생모인 도타 고젠과 재혼했다. 후처지만 측실이 아닌 정실이다.
[232]
문서
당시 살모사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잔혹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했던 사이토 도산은 딸에게 단도를 건네면서 노부나가가 소문대로 멍청이란 판단이 들면 주저말고 이 칼로 죽이라 명했다. 그를 닮은 노히메는 칼을 받고 "만약 멍청이가 아니면 이 칼은 아버님을 향해 겨누게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한다.
[233]
문서
1553년이라는 설도 있다
[234]
문서
노부히데의 장례 중에 그의 제단에 향을 집어 던졌다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후세의 창작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1급 사료인 《신초코키(신장공기)》에도 기록된 것으로 완전한 창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이유에 대해서 일부러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또는 아버지의 장례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노부카쓰에 대한 항의를 위해,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추측에 그치고 있다.
[235]
문서
노부나가공 기(信長記)에 따르면 히라떼 고로우에몬이 가진 말을 노부나가가 탐을 냈었는데 이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노부나가의 진노를 샀다고 한다.
[236]
문서
일본 전통 춤곡 중 하나인 고와카마이(幸若舞)의 한 종류. 인간사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237]
문서
일어 본문: まずもって心得存じ候
[238]
문서
이때,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에게 도다이지의 쇼소인에 보관된 향목〈란사대(蘭奢待)〉를 잘라 가게해달라고 주청하였고, 천황은 이를 허락했다. 이는 노부나가가 천황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었고, 이를 계기로 여러 다이묘, 특히 오슈(奥州)의 다이묘들은 노부나가에 연을 잇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였다.
[239]
문서
에치젠, 가가, 노토, 엣추
[240]
문서
중간에 천장이나 마루를 두지 않고 2층이상으로 짓는 건축양식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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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도 가쓰이에를 돕기 위해 파견되어 있었으나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중간에 시바타 군을 버리고 무단이탈해버렸다.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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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료에 나타나는 일본 최초의 폭사로 기록되어 있다.
[243]
문서
노부나가는 고야히지리(高野聖)로 불리는 고야 산 계통의 불교 유랑 수도자들을 첩자의 혐의가 있다고 마구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이런 정치적인 사정도 개입해 있다.
[244]
문서
이때, 미쓰히데의 접대 내용에 불만을 품은 노부나가가 고쇼(小姓)인 모리 란마루(森蘭丸)에게 미쓰히데의 머리를 치도록 시켰다고 전해지나, 이와 같은 속설은 에도 시대 이후 유포된 것이다.
[245]
문서
그러나 이 시구는 노부나가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히라도번주 마쓰라 기요시의 수필 《갑자야화》에 수록된 것으로 작가 미상의 시구이다. 또, 이 시구에 계속해 《울지 않으면 새장으로 보내겠다. 두견새》란 부분도 있어, 센고쿠 시대의 무장들에 비해 에도 시대 쇼군은 그다지 기골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시구는 노부나가의 성격보다도 그의 결단력과 기계를 평가하는 시구이고, 후일에 노부나가의 과격하고 급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말로 일반에 유포되었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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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옻으로 고정해 금물 등으로 엷게 채색한 것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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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70cm 정도로 알려져 있다.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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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m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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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에도 시대 무가의 직책, 내빈의 식사 시중과 접대를 하던 사람.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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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힘주어 벰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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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씨중 하나. 일본도의 이름에는 장인 등의 인명이 붙는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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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는 모반자에 대한 센고쿠 시대의 일반적인 처형법으로, 노부나가가 특별히 잔인한 방법을 택한 것은 아니다. 이에야스 역시 오가 야시로라는 자가 모반을 시도하자 똑같은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253]
문서
노부나가는 교토의 감각에서는 지방인 오와리 출신이며, 땀을 많이 흘리고 운동량이 많은 전장에서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 짠 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무사 계급 출신이었다. 반면 교토의 쿠게(公家)식 요리는 현재도 심심한 간에 은은한 귀족적 풍미가 특징이다.
[254]
웹사이트
実は全国統一を考えていなかった? 最新研究が覆す「織田信長の実像」
https://shuchi.php.c[...]
PHP Institute, Inc.
2023-04-18
[255]
웹사이트
天下統一を夢見た織田信長
https://www.nippon.c[...]
Public Interest Incorporated Foundation, Nippon.com
2020-01-03
[256]
웹사이트
"知られざる、偉人とお金のはなし" 第一回 織田信長
https://www.aozoraba[...]
Nikkei, Inc.
2019-08-23
[257]
문서
고쇼 시절, 평소 사이가 나빴던 고쇼를 살해하여 죄인이 되어 도주했었다고 한다.
[258]
문서
덧붙여 센고쿠 시대에 오늘날의 개념으로 순수하게 군사/참모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은 없고,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重治)가 군사였다는 설은 후세의 창작이며 야마모토 간스케는 실존 여부가 의심되는 인물이다.
[259]
문서
낙시낙좌(樂市樂座). 일정액의 자릿세만 내면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는 시장
[260]
문서
일본의 1리는 4km, 조선의 1리는 400m, 현 대한민국의 1리는 4km
[261]
문서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의 치안 유지를 위해 두었던 기관
[262]
문서
교토의 치안, 행정 전반을 담당
[263]
문서
비서의 역할을 하는 어린 가신의 자재나 소년, 남색의 상대로 묘사되기도 한다.
[264]
문서
다이묘의 정예병으로 본진과 전선부대 간을 왕래했던 전령, 감찰 및 적군에 파견되는 사자에 허용된 명예군장으로 우산 같은 뼈대가 들어간 풍선 모양의 천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경호를 맡은 측근들 중에 선택되어 흑색(구로)과 적색(아카)의 호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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