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맬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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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널드 맬러키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군인으로, 101 공수 사단 506 낙하산 보병 연대 E 중대 소속으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마켓 가든 작전, 벌지 전투 등에 참여했다. 그는 브레꾸르 마뇨르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청동 무공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전후에는 오리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역 사회에서 활동했다. 맬러키는 스티븐 앰브로스의 저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구술 자료 제공자로 참여했으며, 2017년에 사망하여 윌라멧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도널드 맬러키는 1921년 7월 31일 오리건주 애스토리아에서 레오 맬러키와 헬렌 맬러키(결혼 전 성은 트래스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1][3] 그는 아일랜드계였으며, 1939년 애스토리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3] 젊은 시절에는 컬럼비아강에서 건착망(purse seiner) 어선 선원으로 일했으며,[3] 수천 에이커의 오리건 산림을 태운 틸라무크 산불 당시 자원 소방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3]
진주만 공격 이후, 맬러키는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치아 문제로 거절당했다. 이후 미국 육군 항공대에도 지원했지만, 필요한 수학적 배경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42년 7월 징집되었을 때, 그는 ''라이프'' 잡지에서 공수부대를 최고의 부대로 소개한 기사를 읽고 미국 육군의 공수부대에 자원했다.[3] 그는 조지아주 캠프 토코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당시 토코아에서 훈련받은 사병 6명 중 1명만이 신설된 공수부대원으로 선발될 정도로 훈련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맬러키는 1942년에 강하 자격을 성공적으로 취득했다.[3]
2. 초기 생애
1941년 가을, 오리건 대학교에서 첫 학기를 보내던 중 진주만 공격이 발생했다.[3]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해병대에 지원했으나, 치과 문제로 인해 입대가 거절되었다. 1942년 7월, 미국 육군의 공수부대에 자원하여 제101공수사단 506 낙하산 보병 연대 E 중대에 배치되었다.
3. 군 복무
이후 맬러키는 101 공수사단 제506 공수 보병 연대 E 중대에 배치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3] 그의 구체적인 참전 기록과 수훈 내역은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주요 참전 전투
맬러키는 101 공수사단 제506 공수 보병 연대 E 중대 소속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1944년 오버로드 작전의 일부인 작전명 넵튠의 공수 작전, 미션 올버니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으로 파견되었다.[3] 맬러키는 프랑스에 강하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 첫날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독일군 105mm 포대 4문을 파괴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브레코트 영지 공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공로로 청동 무공 훈장을 받았다.
그는 마켓 가든 작전 참전 전에 하사로 진급했다.[3]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은 맬러키는 E 중대의 다른 어떤 대원보다 더 오랫동안 최전선에서 복무했다.[3] 그가 참전한 주요 전투 지역과 기간은 다음과 같다.
전쟁 기간 동안 맬러키는 청동 무공 훈장, 퍼플 하트 훈장, 모범 훈장, 미국 전역 훈장 등을 수여받았다.[3]
3. 2. 훈장
훈장 | 비고 |
---|---|
청동성장 | 1개 참나무 잎 뭉치 부착 |
퍼플 하트 훈장 | |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 | 1개 참나무 잎 뭉치 부착 |
모범 훈장 | |
미국 종군 기념장 | |
유럽-아프리카-중동 종군 기념장 | 4개 서비스 스타 및 화살촉 장식(Arrowhead device) 부착 |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장 | |
점령군 훈장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기사(Chevalier) 등급, Légion d'Honneurfra |
무공 십자 훈장 | Croix de Guerrefra |
프랑스 해방 훈장 | Médaille de la France libéréefra |
전쟁 십자 훈장 | Oorlogskruisnld (벨기에) |
1940-1945년 전쟁 기념 훈장 | 벨기에 |
전투 보병 배지 | |
강하 훈장 | 2개 강하 별 부착 |
4. 전후 활동
1946년 맬러키는 학위를 마치기 위해 오리건 대학교로 돌아왔다. 그는 시그마 누 프래터니티(감마 제타)의 멤버였다.[3] 대학 재학 중 포틀랜드 출신의 아이린 무어(1926–2006)를 만나 약혼했고,[3] 1948년 6월 19일에 결혼했다.[3] 맬러키는 1949년 경영학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3]
부부는 오리건주 애스토리아에서 살았고, 맬러키는 러벨 자동차 회사의 영업 관리자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클래츠옵 카운티의 카운티 커미셔너 선거에 출마하여 1954년에 당선되었다.[3] 이후 가족은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사했고, 맬러키는 보험 및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다.[3]
맬러키와 아내 아이린 사이에는 아들 마이클과 세 딸 마사, 샤론, 매리앤 등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3] 아이린은 2006년 4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3]
1987년, 맬러키는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이지 중대 재회 행사에서 뉴올리언스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작가인 스티븐 앰브로스를 만났다. 1989년에는 앰브로스, 리처드 윈터스, 카우드 립턴 등 다른 이지 중대원들과 함께 유럽의 옛 격전지들을 방문했다.[3] 맬러키를 비롯한 중대원들의 구술 역사와 회고는 앰브로스의 책 『밴드 오브 브라더스』 집필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책은 1992년에 출판되었다. 앰브로스가 책의 일화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맬러키는 닐랜드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들 형제 중 두 명은 D-Day에 전사했고, 다른 한 명은 실종 상태였다.[3] 닐랜드 형제 중 한 명인 프리츠는 맬러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같은 이지 중대원이었던 워렌 H. "스킵" 먹 상병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먹 상병 역시 닐랜드 형제와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 이 이야기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시나리오에 영감을 주었다.[3]
맬러키는 오리건주 세일럼에 거주하며, 이지 중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 및 여러 단체를 대상으로 강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는 USO와 함께 미국과 유럽의 육군 기지와 병원을 방문하여 이라크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상속세 폐지를 촉구하는 광고에 출연했다. 2012년, 맬러키는 대중 연설 활동에서 은퇴했다.
2015년 3월 16일 폴 로저스 상병이 사망한 후, 맬러키는 이지 중대 생존자 중 최고령자가 되었다. 그는 2017년 9월 30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며,[2] 윌라멧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
참조
[1]
뉴스
Obituary: Donald George Malarkey
http://www.dailyasto[...]
2017-10-07
[2]
뉴스
Donald Malarkey, portrayed in 'Band of Brothers,' has died
https://abcnews.go.c[...]
2017-10-01
[3]
서적
Easy Company Soldier: The Legendary Battles of a Sergeant from World War II's "Band of Brothers"
https://archive.org/[...]
St. Martin's Press
[4]
웹사이트
Traces of War - Malarkey, Donald G.
https://www.tracesof[...]
STIWOT
2024-04-07
[5]
뉴스
France Gives Highest Award To WWII Vets
http://www.oregon.go[...]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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