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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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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녕부는 1269년 고려 북서부 지역에 설치된 원나라의 행정 구역이다. 고려의 반란으로 원나라에 투항한 세력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자비령 이북 지역을 관할했다. 1270년 동녕부가 설치되었고, 이후 동녕로로 승격되기도 했다. 1290년 고려의 요구로 요동으로 이전되었다가 폐지되었다. 1369년부터 1370년까지 고려는 동녕부 정벌을 시도했지만, 요동 지역을 명나라에 넘겨주면서 실패했다. 동녕부의 재설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며, 《고려사》 기록과 중국 측 사료의 불일치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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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부
개요
유형
위치요동
존속 기간1269년 ~ 1290년
역사
설치1269년, 고려최탄 등이 원나라에 투항하면서 설치
폐지1290년, 원나라고려에 반환하면서 폐지
통치
관할 지역화주 (和州)
등주 (登州)
복주 (福州)
해주 (海州)
개주 (盖州)
요양로 (遼陽路)의 일부

2. 역사

1269년(원종 10년) 최탄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2]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 칸은 이 지역을 원나라 직속령으로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 최탄을 동녕부 총관에 임명하였다.[3] 고려 원종은 원나라에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1275년(충렬왕 1년)에는 동녕총관부로 승격되었다.

1276년 동녕부는 동녕로로 승격되었으나, 《고려사》에는 관련 기록이 없고, 이후 기록에 다시 동녕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곧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16][17]

1290년 원나라는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비령 이북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겼다.[6][18]

《고려사》에는 1364년 (공민왕 13년), 1369년 (공민왕 18년), 1370년 (공민왕 19년)에 원나라에서 동녕부를 다시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중국 측 기록에는 1290년 이후 동녕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이 있는데, 하나는 1290년에 동녕부가 폐지되지 않고 요양 지역으로 이전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290년에 폐지[10][11]되었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에 원나라에서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이다.[12]

2. 1. 설치 배경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이었던 최탄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성을 원나라에 바쳤다.[2]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 칸은 자비령 이북의 영토를 원나라 직속령으로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 최탄을 동녕부 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3] 고려 원종은 원나라 수도 대도에 가서 쿠빌라이 칸에게 자비령 이북 지역 반환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2. 동녕부 설치와 운영 (1269년 ~ 1290년)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2]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 칸은 자비령 이북의 영토를 직속령으로 원나라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 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 고려 원종은 원나라 수도 대도에 가서 쿠빌라이 칸에게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75년(충렬왕 1년)에는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3]

1276년 (지원 13년), 동녕부는 '''동녕로'''로 승격되었다.[16] 이 승격에 관해서는 《고려사》에 기록이 없고, 1276년 (충렬왕 2년) 8월 및 1278년 (충렬왕 4년) 2월 조에 "동녕부" 기록[17]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곧 동녕부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1290년 은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자비령 이북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겼다.[6][18] 이로써 20년 동안 설치되었던 동녕부는 폐지되었다.

2. 3. 동녕부 폐지와 고려 반환 (1290년)

1270년 쿠빌라이 칸고려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비령 이북의 영토를 원나라 직속령으로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했다.[3] 1275년에는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16]

그러나 이후 원나라와 고려의 정치적 관계가 강화되면서, 1290년 원나라는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자비령 이북 지역을 고려에 반환하고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겼다.[6][18] 이로써 20년 동안 존속했던 동녕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 동녕부 원정 (1369년 ~ 1370년)

1369년(공민왕 18년)부터 1370년까지 원명 교체기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고려는 전통적인 북진책을 실현하려고 동녕부 원정을 일으켰다.

원나라 평장사(平章事) 기새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25]는 그의 부친 기철이 고려에서 참형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서 침공해왔다. 1369년(공민왕 18년) 음력 12월 고려에서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이자 서북면도통사로 하고, 이성계를 동북면원수,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원수, 양백안을 서북면부원수, 임견미를 안주상만호로 삼아 군사 1만 5천 명을 주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1370년 음력 1월,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황초(黃草), 설한(雪寒) 두 고개를 넘어 압록강훈강(파저강, 婆猪江)을 건너 이원경 (고려)(李原景)이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결국 요하(遼河)과 압록강 사이의 땅은 명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3. 1. 원정의 배경과 목적

1369년(공민왕 18년)부터 1370년까지 원·명 교체기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 정책을 실현하려고 일으킨 원정이다.[25]

1368년 원 순제는 주원장의 군대에게 쫓기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기황후 소생의 소종이 즉위하였으나 정세를 돌리지 못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원나라의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관직명을 원나라 지배 이전으로 복구하였다. 공민왕은 대륙의 정치적 변동을 이용하여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 북진주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기새인테무르가 그의 부친 기철이 고려에서 참형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서 침공해왔다.[25]

3. 2. 원정의 전개 과정

1369년(공민왕 18년) 음력 12월, 고려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이자 서북면도통사로 삼고, 이성계를 동북면원수,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원수, 양백안을 서북면부원수, 임견미를 안주상만호로 임명하여 군사 1만 5천 명으로 원나라의 동녕부를 공격하게 했다.[25]

1370년 음력 1월,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황초(黃草)와 설한(雪寒) 두 고개를 넘어 압록강훈강(파저강, 婆猪江)을 건너 이원경 (고려)(李原景)이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고, 고려군은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3. 3. 원정의 결과와 영향

1369년(공민왕 18년)부터 1370년까지 이어진 동녕부 정벌은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고려가 전통적인 북진 정책을 펼치려 한 군사 작전이었다.

1368년 원 순제가 주원장의 군대에 밀려 사망하고, 기황후의 아들 소종이 즉위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려 공민왕은 원나라 연호 대신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관직명을 원나라 지배 이전으로 되돌렸다. 공민왕은 이러한 대륙의 정치적 변화를 기회 삼아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에 원나라 평장사(平章事) 기새인테무르[25]는 아버지 기철이 고려에서 처형당한 것에 대한 복수로,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서 고려를 공격해왔다. 1369년(공민왕 18년) 음력 12월, 고려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인 서북면도통사로 임명하고, 이성계를 동북면원수, 지용수를 서북면원수, 양백안을 서북면부원수, 임견미를 안주상만호로 삼아 1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공격하게 했다. 1370년 음력 1월,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과 설한령(雪寒嶺)을 넘어 압록강훈강(파저강, 婆猪江)을 건너 이원경이 지키던 우라산성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같은 해 11월에는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고려는 요양을 장기간 점령하지 못하고, 주변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유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결국 요하와 압록강 사이의 영토는 명나라에 편입되었다.

4. 동녕부 재설치 논란

고려사》에는 1364년, 1369년, 1370년원나라에서 동녕부를 다시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지만,[7][8][9] 1290년 이후 중국 측 기록에는 동녕부에 대한 언급이 없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1290년에 동녕부가 폐지되지 않고 요양 지역으로 이전했다는 설과, 1290년에 폐지되었지만[10][11] 원나라 말 혼란기에 재설치되었다는 설[12]이 대립하고 있다.

4. 1. 《고려사》의 기록

고려사》에는 1364년( 정 24년/고려 공민왕 13년) 정월 조항[19]1369년( 홍무 2년/고려 공민왕 18년) 11월 조항[20], 1370년( 홍무 3년/고려 공민왕 19년) 정월 조항[21]처럼 원나라 말에 다시 동녕부가 설치된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중국 측 사료에는 1290년 이후의 동녕부 사용례가 없고, 원나라 말에 이르러 《고려사》에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1290년에 동녕부가 폐지되지 않고 요양 지역으로 이전했다는 설[22][23]과, 1290년에 폐지[10][11]되었지만 원나라 말의 혼란기에 재설치되었다는 설[12][24]이 제시되어 있다.

4. 2. 중국 측 사료의 부재

《고려사》에는 1364년, 1369년, 1370년에 원나라에서 동녕부를 다시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7][8][9] 하지만 1290년 이후 중국 측 기록에는 동녕부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원나라 말에 갑자기 《고려사》에 등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1290년에 동녕부가 폐지되지 않고 요양 지역으로 이전되었다는 것이고,[22][23] 다른 하나는 1290년에 동녕부가 폐지되었지만,[10][11] 혼란스러운 시기에 원나라에서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이다.[12][24]

4. 3. 학계의 다양한 해석

《고려사》에는 1364년 정월 조항[7], 1369년 11월 조항[8], 1370년 정월 조항[9]원나라에서 동경부(東寧府)가 다시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1290년 이후 중국 측 기록에는 동경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원나라 말에 갑자기 《고려사》에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이 있는데, 하나는 1290년에 동경부가 폐지되지 않고 요양 지역으로 이전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290년에 동경부가 폐지[10][11]되었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에 원나라에서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이다.[12]

참조

[1] 백과사전 Yuan dynasty occupied Pyongan Province which was northern Jabi pass, area of Hwanghae Province and made it direct-governed administration. Encyclopedia Nipponica
[2] 서적 Goryeosa
[3] 서적 Goryeosa
[4] 서적 History of Yuan
[5] 서적 Goryeosa
[6] 서적 Goryeosa
[7] 문서 己丑東寧路万戸吐朴伯也大入寇延州、崔瑩撃却之
[8] 문서 高麗遣元統帥将撃東寧府、以絶北元
[9] 문서 高麗派大将李成桂入侵遼東、東寧府同知李吾魯帖木児童帰降(中略)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於海、南至鴨緑、為之一空
[10] 논문 論元末明初中国与高麗、朝鮮的辺界之争 2001
[11] 서적 東北歴代疆域史 吉林人民出版 1981
[12] 서적 中国行政区区画通史 元代巻 復旦大学出版社 2009
[13] 백과사전 慈悲嶺以北の平安道、黄海道一帯を占領して直轄植民地とした。翌年元は平壌に植民地統治機関として東寧府を設置 日本大百科全書
[14] 서적 高麗史
[15] 서적 高麗史
[16] 서적 元史
[17] 서적 高麗史
[18] 서적 高麗史
[19] 문서 己丑東寧路万戸吐朴伯也大入寇延州、崔瑩撃却之
[20] 문서 高麗遣元統帥将撃東寧府、以絶北元
[21] 문서 高麗派大将李成桂入侵遼東、東寧府同知李吾魯帖木児童帰降(中略)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於海、南至鴨緑、為之一空
[22] 논문 論元末明初中国与高麗、朝鮮的辺界之争 2001
[23] 서적 東北歴代疆域史 吉林人民出版 1981
[24] 서적 中国行政区区画通史 元代巻 復旦大学出版社 2009
[25] 문서 기철의 4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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