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성총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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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쌍성총관부는 1258년(고려 고종 45년) 몽골의 침략에 고려인 조휘 등이 투항하며 철령 이북 지역에 설치된 몽골의 통치 기구이다. 조휘가 초대 총관을 맡았으며, 그의 후손들이 세습했다. 1356년(공민왕 5년) 고려는 유인우를 동북병마사로 임명하여 쌍성총관부를 탈환했고, 이 과정에서 조휘의 후손 조소생은 여진으로 도주했다. 쌍성총관부 탈환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의 성과로 평가받으며,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 조휘의 후손 조돈 등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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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나라의 총관부 - 동녕부
동녕부는 1269년 고려 서경 지역에 설치된 원나라의 행정 기관으로, 친원 세력의 반란 이후 원나라가 자비령 이북 지역을 직속령으로 편입하면서 설치되었으나, 1290년 원나라가 고려에 반환하면서 요동으로 옮겨져 폐지되었다. - 원나라의 총관부 - 탐라총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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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 이자춘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로,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를 지내다 고려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동북면 영토 수복에 기여했으며, 사후 환왕, 환조 연무성환대왕으로 추존되었다. - 쌍성총관부 - 익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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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혜왕후 최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머니이며, 이자춘과의 혼인을 결정하고 삼한국대부인, 의비, 의혜왕후로 추존되었으며, 능은 화릉이고 이성계와 정화공주를 낳았다. - 조선 환조 - 정빈 김씨
정빈 김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서모이며, 환조의 여종 출신으로 의안대군 이화를 낳았고, 태조의 예우를 받았으며 정안옹주로 봉해졌다가 고종 때 정빈으로 추증되었다.
쌍성총관부 | |
---|---|
개요 | |
명칭 | 쌍성총관부 |
한자 표기 | 雙城摠管府 |
위치 | 자비령 이북의 땅 (현재의 함경남도 영흥군, 금야군, 요덕군, 정평군, 함주군, 함흥시, 홍원군, 이원군, 문천시, 안변군, 고원군 일대) |
역사 | |
설치 | 1258년 |
폐지 | 1356년 |
배경 | 몽골 제국의 고려 침공 후 |
영향 | 고려의 원나라에 대한 간접 지배 |
주요 사건 | 이자춘의 배신과 투항 공민왕의 북진 정책과 수복 |
관련 인물 | 조휘 탁청 이자춘 공민왕 |
정치 | |
성격 | 원나라의 직할 통치 기구 |
지배 방식 | 고려의 간접 지배 |
주요 임무 | 해당 지역의 통치와 원나라에 대한 공물 징수 |
군사 | |
주둔 군대 | 원나라 군대 |
군사적 중요성 |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군사적 요충지 |
기타 | |
관련 용어 | 동녕부 탐라총관부 |
2. 설치
1258년(고종 45년) 몽골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고려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살해당하고, 조휘와 탁청 등이 몽골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은 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고, 조휘는 초대 총관으로, 탁청은 천호로 임명되었다.[5] 이후 총관직은 한양 조씨 가문이, 천호직은 탁청의 후손이 세습하였다. 한편, 1269년에는 최탄이 서경을 포함한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성을 원나라에 바쳤고, 원나라는 서경을 동녕부로 개칭하여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2. 1. 몽골의 침입과 고려인의 투항
1258년(고종 45년) 몽골의 별장이 동여진을 거쳐 장성(長城) 이남을 침공했다. 이들이 화주에 이르자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은 주민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에 들어가 지켰으나, 뒤에 죽도로 이동했다. 그러나 조휘와 탁청 등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과 등주부사 박인기, 화주부사 김선보를 살해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몽골에 바쳤다.[5]몽골은 새로 점령한 이 지역을 다스릴 기구로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다. 이때 초대 총관으로 조휘가 임명되었고, 탁청은 천호에 임명되었다. 이후 쌍성총관은 한양 조씨 집안이 세습하여 조휘의 아들 조양기, 손자 조린, 증손 조소생이 이어받았고, 천호도 탁청의 후손이 세습하였다.[5] 이 사건은 중앙 정부와는 관계없이 진행되었다.
2. 2. 쌍성총관부의 설립과 세습
1258년(고종 45년) 몽골군이 동여진을 거쳐 장성 이남을 침공하자,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은 주민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와 죽도에서 방어했다. 그러나 조휘, 탁청 등은 신집평, 박인기, 김선보를 살해하고 철령 이북 땅을 바치며 몽골에 투항했다.[1][2]몽골은 이 지역 통치를 위해 쌍성총관부를 설치,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에 임명했다. 이후 총관은 한양 조씨 가문(조휘 아들 조양기, 손자 조림, 증손 조소생)이, 천호는 탁청 후손이 세습했다.[5]
1269년 최탄은 서경 등 54개 성과 서해 6개 성을 원에 바쳤고, 원은 동녕부(東寧府)로 편입했다.
3. 탈환
1356년(공민왕 5년), 고려는 공민왕의 명으로 쌍성총관부 탈환 작전을 전개했다. 유인우(柳仁雨)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공부보(貢夫甫), 김원봉(金元鳳), 이인임 등과 함께 출정했다.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반격했으나, 조돈(趙暾), 이자춘, 이성계 부자가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는 함락되었고, 조소생은 도망갔다.[6]
3. 1. 고려의 반격과 내부 협력
1356년 (공민왕 5년) 유인우(柳仁雨)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쌍성총관부 탈환 작전을 지휘했다. 이 작전에는 공부보(貢夫甫), 김원봉(金元鳳), 이인임 등이 참전했다.[6] 조소생 총관과 탁도경 천호는 저항했으나, 조돈(趙暾), 이자춘, 이성계 부자 등의 내부 협력으로 고려군이 승리했다.[3]3. 2. 결과 및 영향
1356년 (공민왕 5년) 유인우가 화주목을 설치하여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을 수복했다.[6]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워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 정계로 진출했고, 조휘의 후손인 조돈도 쌍성총관부 함락에 적극 협력하여 조상의 배신을 청산하고 고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조돈은 조선 건국에도 참여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성계가 훗날 태종을 싫어하여 함흥으로 떠난 것도 그의 출신지가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4. 역대 총관
참조
[1]
서적
Korea: the Mongol invasions
https://archive.org/[...]
Leiden : E.J. Brill
1963
[2]
학술지
Ssangsŏng Ch’onggwanbu as the Border between Koryŏ and Yuan Dynasty
https://ijkh.khistor[...]
2024-10-25
[3]
서적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for the Harvard-Yenching Institute
2009
[4]
문서
동문선 이곡 [창치금강도산사기]"쌍성총관(雙城摠官) 조후(趙侯)..이름은 조림(趙琳)으로 일찍이 본국으로 들어와 벼슬하였고..이제 가업을 계승하여 쌍성등처 군민총관(雙城等處軍民總官)이 되었다"
[5]
웹사이트
조소생
http://encykorea.aks[...]
[6]
문서
고려사 조돈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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