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인민혁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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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오인민혁명당은 1930년 호찌민이 창설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모체로 하며, 1972년 당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5년 라오스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한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1986년 이후에는 경제 개혁인 '친타나칸 마이'를 통해 시장 경제를 일부 도입했으나,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당의 최고 의결 기구는 전국대회이며, 중앙위원회가 그 사이의 의사결정을 담당한다. 친족 등용과 후원 정치가 특징이며, 라오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집권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공산당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특히 베트남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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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인민혁명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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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당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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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명 | 라오인민혁명당 |
창당일 | 1955년 3월 22일 |
분리 | 인도차이나 공산당 |
본부 | 비엔티안 |
기관지 | 파사손 |
청년 조직 | 라오인민혁명청년동맹 |
군사 조직 | 라오인민군 |
당원수 | 348,686명 |
당원수 기준년도 | 2021년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카이손 폼비한 사상 |
정치 성향 | 극좌 |
국제 조직 | 공산당 및 노동자당 국제회의 |
국내 조직 | 라오스건국전선 |
웹사이트 | 라오인민혁명당 공식 웹사이트 |
지도부 | |
총비서 | 통룬 시술릿 |
상임비서 | 분통 찟마니 |
의회 정보 | |
의회 | 국민의회 (라오스) |
의석수 | 158석 / 164석 |
기타 정보 | |
2. 역사적 배경
라오인민혁명당은 1930년 호찌민이 창당한 인도차이나 공산당(후에 베트남 공산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베트남인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1936년 '''라오파'''를 결성했다. 1940년대 중반에는 라오인 당원을 모집하기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51년 2월,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제2차 대회에서 해산되고 인도차이나 3국을 대표하는 3개의 당으로 분리되었다. 1955년 3월 22일 카이손 폼비한 등에 의해 라오스 인민당이 결성되었고, 제1차 당 대회를 열어 공식적으로 창당했지만, 수파누봉 왕자가 이끄는 파테트 라오를 통해 비밀리에 활동했다. 1956년에는 라오 애국 전선을 조직하여 좌파 세력을 결집하고 라오스 내전을 수행했다.
1972년 2월, 제2차 당 대회에서 현재의 명칭인 '''라오인민혁명당'''으로 개칭했다.
2. 1. 창당과 초기 활동 (1930-1975)
1930년 호찌민이 세운 인도차이나 공산당(후에 베트남 공산당)은 라오인민혁명당의 모태가 되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베트남인들로 구성되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장하면서 1936년 '''라오파'''가 형성되었다. 1940년대 중반에는 라오인 당원을 모집하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1951년 2월,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제2차 대회에서 해산되고, 인도차이나 3국을 대표하는 3개의 당으로 분리되었다. 1955년 3월 22일, 수파누봉 왕자가 이끄는 파테트 라오와 월남독립동맹회가 연계하여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라오인민당은 제1차 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창당되었으나 비밀 조직으로 활동했다. 제1차 대회에는 300~400명의 당원을 대표하는 25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라오인민당 당원들은 1975년까지 파테트 라오를 통해 활동했다.
1956년에는 파테트 라오의 분파인 라오 애국 전선이 창설되어 여러 차례 연립 내각에 참여했다. 1960년대에 파테트 라오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라오스 정부에 맞서 내전을 일으켜 북동부 지역을 점령했다.
1972년 2월, 제2차 당 대회에서 '''라오인민당'''은 '''라오인민혁명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1]
1975년 봄, 파테트 라오 군대는 전국을 장악했고, 1975년 5월에는 미국 지원을 받던 기존 정부를 무너뜨리고 라오인민혁명당이 정권을 잡았다. 1975년 12월에는 왕을 폐위시키고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다.
2. 2. 정권 장악과 사회주의 정책 (1975-1986)
1975년 봄, 파테트 라오 군대가 전국을 장악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기존 정부를 무너뜨리면서 라오인민혁명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2] 1975년 12월에는 왕을 폐위시키고 인민 공화국을 선언했다.[2] (사실 라오스의 군주는 권력이 약했다고 한다).[2]왕정 정부가 무너지고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고, 1980년까지 인구의 10%가 나라를 떠났다.[2] 집권 초기, 라오인민혁명당(LPRP)은 비밀스러운 방식을 유지했다.[2] 예를 들어, LPRP 사무총장 카이손 폼비한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2] 1975년 이전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대변자였던 라오 애국전선 의장 수파누봉은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장악 후 밀려났다.[2]
새 정부는 독립적인 뉴스 기관들을 신속하게 폐쇄했다.[2] 해산되지 않은 기관들은 LPRP가 통제하는 대중 조직인 라오 국가건설전선(LFNC)의 회원이 되도록 강요받았다.[2] 새 정부의 메시지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LPRP와 LFNC는 전국적으로 회의를 조직하여 당의 노선에 대해 사람들에게 교육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전파했다.[2] 이 과정의 최종 목표는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었다.[2]
1978년, LPRP는 농업 집단화를 통해 사회주의 혁신을 계속했다.[2]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마틴 스튜어트-폭스에 따르면, LPRP는 "농업 생산성은 규모의 경제(산업 모델과의 유추)를 통해서만 향상될 수 있으며, 이는 생산 수단의 집단 소유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협동조합은 농업에 대한 현대적 투입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 집단화 과정의 이중 목표는 (1) 시골 지역의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2) 이전에 라오 왕국 정부가 통제했던 지역에서의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2] 집단화는 시행하기 어려웠고, 여러 지역에서 이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2]
결과적으로 LPRP 중앙위원회는 1981년 집단화를 포기했다.[2] 중앙위원회는 "현재 생산 시즌 동안 농민들이 농업 협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새로운 협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노력은 생산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 생산에 종사하는 동안 즉시 그리고 엄격하게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 LPRP는 집단화를 강조하는 대신 경제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현대 농업 장비를 사용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2] 1988년, 카이손 폼비한은 집단화가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우리의 이전 협동 정책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실천했던 구식이었다. 라오스의 실제 상황에 대한 조사를 거친 후, 우리는 방향을 바꾸고 가족으로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2] 2년 후인 1990년에는 사실상 모든 농업 협동조합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2]
1986년 제8차 전당대회에서 LPRP는 소련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경제 계획 시스템을 해체하기 시작했다.[2] 중앙위원회 제3기의 정치 보고서에서 카이손 폼비한은 "우리의 주요 결점은 주관주의와 성급함, 비사회주의 경제 부문을 즉시 폐지하려는 경향에 있다… 우리는 평등주의에 매달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높은 노동 생산성을 가진 우수한 근로자들을 장려하지 않았다. 책임, 권리, 의무, 이익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지적했다.[2] 사회주의 경제 회계라는 용어 아래 LPRP는 국영 기업을 국가 예산에서 분리하여 자유 시장에서 생존하도록 강요했다.[2]
1988년, 동구권과 소련에서 발생하는 위기에 비추어 추가적인 개혁이 도입되었다.[2] 외국인 직접 투자에 우호적인 법률이 채택되었고, 합작 투자가 장려되었다.[2] 이러한 변화의 가장 중요하고 숨겨진 이유는 라오스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외국 원조의 급격한 감소였는데, 그중 70%가 소련과 동구권에서 온 것이었다.[2] 1988년 동구권의 총 외국 원조는 5200만달러였지만, 1989년에는 100만달러로 줄었고, 1990년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2]
2. 3. '친타나칸 마이'와 경제 개혁 (1986-현재)
1986년 제8차 전당대회에서 라오인민혁명당(LPRP)은 소련 모델(Soviet model)에서 영감을 받은 경제 계획 시스템을 해체하기 시작했다.[2] 중앙위원회 제3기의 정치 보고서에서 카이손 폼비한은 "우리의 주요 결점은 주관주의와 성급함, 비사회주의 경제 부문을 즉시 폐지하려는 경향에 있다… 우리는 평등주의(egalitarianism)에 매달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높은 노동 생산성(labour productivity)을 가진 우수한 근로자들을 장려하지 않았다. 책임, 권리, 의무, 이익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지적했다.[2]사회주의 경제 회계(socialist economic accounting)라는 용어 아래, LPRP는 국영 기업을 국가 예산(state budget)에서 분리하여 자유 시장(free market)에서 생존하도록 강요했다.[2] 1988년 동구권(Eastern Bloc)과 소련(Soviet Union)에서 발생하는 위기에 비추어 추가적인 개혁이 도입되었다.[2] 외국인 투자에 우호적인 법률이 채택되었고, 합작 투자(joint venture)가 장려되었다.[2]
이러한 변화의 가장 중요하고 숨겨진 이유는 라오스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외국 원조(foreign assistance)의 급격한 감소였는데, 그중 70%가 소련과 동구권에서 온 것이었다.[2] 1988년 동구권의 총 외국 원조는 5200만달러였지만, 1989년에는 100만달러로 줄었고, 1990년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2]
1989년 동유럽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라오스 인민혁명당도 민주화의 기로에 섰지만, 현재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하며, 일당 독재제·민주집중제를 시행하고 있다.
3. 이데올로기
라오 인민혁명당은 베트남 공산당을 모델로 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이며, 구 소비에트 연방과 구 소련공산당의 큰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모델로 한 농지 집단화 포기, 시장경제 도입, 국영기업 통제 감소 등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이 경제개혁은 199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라오 인민혁명당은 소비에트의 글라스노스트는 도입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되, 1당 독재는 유지하여 라오 인민혁명당의 독재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1978년, 라오 인민혁명당은 농업 집단화를 통해 사회주의 혁신을 계속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서 이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결국 1981년 집단화를 포기했다. 1988년, 카이손 폼비한은 집단화가 실패했음을 인정하며, "라오스의 실제 상황에 대한 조사를 거친 후, 우리는 방향을 바꾸고 가족으로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10] 2년 후인 1990년에는 사실상 모든 농업 협동조합이 사라졌다.
1986년 제8차 전당대회에서 라오 인민혁명당은 소련 모델(Soviet model)에서 영감을 받은 경제 계획 시스템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경제 회계(socialist economic accounting)라는 용어 아래, 국영 기업을 국가 예산(state budget)에서 분리하여 자유 시장(free market)에서 생존하도록 했다. 1988년, 동구권(Eastern Bloc)과 소련(Soviet Union)에서 발생하는 위기에 따라 외국인 투자에 우호적인 법률이 채택되고, 합작 투자(joint venture)가 장려되는 등 추가적인 개혁이 도입되었다.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되자 일부 학생들은 라오 인민혁명당의 국가 권력 독점을 비판하고 다당제(multi-party system)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오 인민혁명당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고, 캄타이 시판돈(Khamtai Siphandon)은 "당은 또한 국민이 신뢰하는 유일한 당이다. 당의 지도적 역할을 훼손하려는 모든 중상모략과 시도는 역사적 현실과 국가 이익에 모순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했다.[10]
3. 1. 카이손 폼비한 사상
1989년 라오 인민혁명당 제4기 당중앙위원회 제8총회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6가지 원칙"을 제시했다.[10]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카이손 폼비한 사상"이 당의 주요 지도 이념으로 추가되었다.
4. 당의 구조
라오 인민혁명당의 조직 구조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고안한 민주적 중앙집중제를 기반으로 한다. 하급 당 기관은 중앙위원회와 같은 상급 당 기관의 결정에 복종해야 하며, 당내 파벌 활동은 금지된다.[1] 모든 의사결정 기관은 집단지도 원칙에 따라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한다.[2] 1991년 제5차 전당대회에서 카이손 폼비한 당 서기장은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하고, 하급 지도 조직은 상급 지도 조직의 명령을 이행해야 하며, 당 전체는 중앙위원회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3]
라오 인민혁명당의 주요 기관은 다음과 같다.
- 중앙위원회
- 총비서: 통룬 시술릿
- 중앙정치국
- 중앙비서처(국) - 1991년에 폐지
- 중앙국방안전위원회
단원제인 국민의회 선거는 5년마다 실시된다.[4] 헌법은 국민의회를 "다민족 국민의 권리, 권력 및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규정하며,[5] 국민의회는 보통선거와 비밀투표를 통해 선출된다.[6] 후보자는 라오스 국가건설전선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이 기관은 법률에 명시된 기준에 따라 후보자의 자격을 심사한다.[7] 이러한 기준에는 "애국심",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헌신", "새로운 경제 메커니즘에 대한 충실" 등이 포함되어 있어, 라오 인민혁명당 당원들이 후보자로 승인받기 유리하다.[8]
대부분의 후보는 라오 인민혁명당 당원이며,[9] 일반적으로 의석 수보다 후보 수가 더 많다. 2016년 선거에서는 제7대 국민의회 149석을 놓고 210명의 후보가 경쟁했다.[10]
선거 | 임기 | 라오 인민혁명당 의석 수 | +/– |
---|---|---|---|
1989년 | 제2대 | 65 / 79 | 65 |
1992년 | 제3대 | 85 / 85 | 20 |
1997년 | 제4대 | 98 / 99 | 13 |
2002년 | 제5대 | 109 / 109 | 11 |
2006년 | 제6대 | 113 / 115 | 4 |
2011년 | 제7대 | 128 / 132 | 15 |
2016년 | 제8대 | 144 / 149 | 16 |
2021년 | 제9대 | 158 / 164 | 14 |
5. 통치 방식과 특징
라오인민혁명당(LPRP)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으로, 베트남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지도력을 자처하며 일당 독재제를 유지하고 있다.[3] 당은 스스로를 라오스 국민 전체의 유일한 대표자로 여기며, 다른 정당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다.[3]
초기 혁명 영웅들의 실패 원인을 당의 부재로 규정하고, 당 간부들이 라오스 사회의 모순을 이해하고 무장 투쟁으로 자유를 쟁취했기 때문에 "혁명의 전위"라고 주장한다.[3] 훌륭한 간부의 자질로는 국가 충성, 인민 봉사, 명령 복종, 규율 준수, 제도 존중, 학습을 통한 자기 계발, 어려움에 대한 용기와 단호함을 강조한다.[3]
1955년 3월 22일 '''라오스 인민당'''으로 결성되었고, 1972년 2월 당명을 '''라오스 인민혁명당'''으로 변경했다. 1975년 라오스 왕국을 타도하고 라오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건국하여 유일 정당으로 라오스를 지배했다. 1986년 제4차 당대회에서 경제 자유화 정책인 "친타나칸 마이(신사고)"를 채택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에도 일당 독재제와 민주집중제를 유지하고 있다.
1989년 제4기 당중앙위원회 제8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6가지 원칙"이 정해졌다.[10]
-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수 및 혁명 특징 파악
-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인민의 모든 의무 지시
- 당의 지도를 혁명 임무 승리의 결정적 조건으로 간주
- 민주집중원칙에 따른 민주주의 향상 및 확대, 인민을 근간으로 함
-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세력과 권위 확대
- 애국주의, 국제 노동주의, 국제 사회주의 연대, 국력과 시세 연계 수행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카이손 폼비한 사상"이 제시되었다.
친족 등용과 후원 정치는 라오 인민혁명당 정치의 주요 특징이다.[1][2] 이는 혁명 이후 고위 당원들이 가족 구성원과 추종자들에게 특혜와 직책을 제공하여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2]
5. 1. 일당 독재와 권위주의
왕정 붕괴와 공산주의 정권 수립으로 1980년까지 인구의 10%가 해외로 이주했다.[1] 집권 초기 라오 인민혁명당(LPRP)은 비밀스러운 통치 방식을 유지했으며, 카이손 폼비한 사무총장과 같은 핵심 인물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1] 1975년 이전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대변자였던 수판누봉 등은 권력 장악 후 밀려났다.[1]새 정부는 독립적인 뉴스 기관을 폐쇄하고, 언론을 라오 국가건설전선(LFNC)에 강제로 가입시켜 통제했다.[1] LPRP와 LFNC는 전국적인 회의를 통해 사람들에게 당의 노선을 교육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파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을 만들고자 했다.[1]
1978년, LPRP는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지만, 이는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1981년에 중단되었다.[1] 1988년, 카이손 폼비한은 집단화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가족 농업 중심으로 전환했다.[1] 1990년에는 사실상 모든 농업 협동조합이 사라졌다.[1]
1986년 제8차 전당대회에서 LPRP는 소련 모델(Soviet model) 경제 계획 시스템을 해체하기 시작했다.[1] 사회주의 경제 회계(socialist economic accounting)라는 개념 아래 국영 기업을 국가 예산(state budget)에서 분리하고 자유 시장(free market) 경쟁을 도입했다.[1] 1988년에는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는 법률이 채택되었다.[1] 이러한 변화는 외국 원조(foreign assistance)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1]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되자 일부 학생과 지식인들은 LPRP의 권력 독점에 비판하며 다당제(multi-party system)를 요구했다.[1] 통수크 사이상키 등은 LPRP를 "공산주의 군주제"라고 비난하며 정치 개혁을 요구했지만, 1990년 투옥되었다.[1]
1990년 채택된 새 헌법은 라오스를 LPRP의 지도 아래 인민 민주 독재(people's democratic dictatorship) 국가로 명시했다.[1] 캄타이 시판돈은 당의 지도적 역할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며, 당의 유일한 지배를 강조했다.[1]
1980년대 이후 당과 국가 통치는 안정되었다.[1] 경영 컨설턴트 클레이 웨스콧은 LPRP가 회복력을 보였고, 권력 이양이 원활하게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지도자들이 개혁에 개방적이라고 평가했다.[1] 춤말리 사야손과 분항 보라치트를 거쳐 현재 LPRP 사무총장은 통룬 시술릿이다.[2]
LPRP는 민주적 중앙집중제를 기반으로 중앙집권적이고 계층적인 조직 구조를 유지한다.[1] 하급 당 기관은 상급 기관의 결정에 복종해야 하며, 당내 파벌 활동은 금지된다.[1] 모든 의사결정은 집단지도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1] 카이손 폼비한은 1991년 제5차 전당대회 연설에서 이러한 원칙을 강조했다.[1]
LPRP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며, 스스로를 라오스 국민 전체의 유일한 대표자로 여긴다.[3] 베트남 공산당처럼, LPRP는 혁명적인 당만이 사회주의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3] 당은 자신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지도력으로 간주하고, 전위 정당으로서 다른 정당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다.[3] 카이손 폼비한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정당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3]
LPRP는 초기 혁명 영웅들의 실패가 당의 부재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당 간부들이 라오스 사회의 모순을 이해하고 무장 투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기 때문에 "혁명의 전위"라고 말한다.[3] LPRP는 훌륭한 간부의 자질로 국가에 대한 충성, 인민에 대한 봉사, 지도자의 명령에 대한 복종, 규율 준수, 제도 존중, 학습을 통한 자기 계발, 어려움에 대한 용기와 단호함을 강조한다.[3]
5. 2. 친족 등용과 후원 정치
친족 등용(Nepotism), 즉 친족에게 특혜를 주는 편애와 권력 있는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지원인 후원(patronage)은 라오 인민혁명당(LPRP) 정치의 주요 특징이다.[1][2] 라오 인민혁명당 제10차 중앙위원회 위원 중 25%가 혁명 창시 가족 중 한 명과 혈연 또는 인척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추산된다.[6]카이손 폼비한의 장남인 싸이솜폰 폼비한이 제10차 및 제11차 정치국에 선출된 것은 친족 등용의 가장 두드러진 예시이다.[7] 카이손 폼비한의 아내인 통빈 폼비한은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라오 인민혁명청년동맹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8]
전 라오 인민혁명당 총서기 캄타이 시판돈 가문의 주요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 | 관계 | 주요 직책 |
---|---|---|
캄펭 사이솜펭 | 사위 | 노동사회복지부 장관(제9차, 제10차 중앙위원회 선출) |
비엥통 시판돈 | 딸 | 국가 감사기구 위원장 (제10차 중앙위원회 선출) |
소넥사이 시판돈 | 아들 | 참파삭주 주지사, 정부사무처 장관 (제10차, 제11차 정치국 선출) |
이러한 경향은 라오 인민혁명당 총서기 춤말리 사야손의 지휘 아래서도 계속되었다.[7] 그의 처남 캄멩 퐁타디는 제9차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고, 비엔티안주 주지사직에서 대통령실 각료로 재배치되었다.[9] 캄멩의 재배치는 춤말리 사야손이 그의 장남인 비동 사야손을 비엔티안 라오 인민혁명당 지방위원회 서기로 임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10] 비동 사야손은 서기직 외에도 나중에 제9차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10] 춤말리 사야손의 다른 두 아들인 폭사이 사야손과 포캄 사야손도 주요 당직에 임명되었으며, 폭사이 사야손은 제10차 중앙위원회의 후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
현 라오 인민혁명당 총서기인 통룬 시술릿은 전 권한대행 대통령 푸미 봉비칫의 양녀와 결혼했다.[11]
스튜어트-폭스는 "라오스의 정치와 개혁"에서 "혁명 이후 고위 당원들은 전통적인 라오 방식으로 후원을 베풀기 시작하여, 확대된 가족 구성원과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에게 특혜와 직책을 주어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정치 경제 엘리트 형성 과정은 1980년대 경제 개혁의 도입으로 강력하게 지원되었다"고 언급한다.[2] 이러한 의미에서 라오스의 정치 문화는 공산주의 집권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2]
6. 대외 관계
왕정 붕괴와 공산주의 정권 수립 이후, 1980년까지 전체 인구의 10%가 이민을 통해 라오스를 떠났다.[1] 집권 초기 라오인민혁명당은 비밀스러운 통치 방식을 유지했으며, 카이손 폼비한 당 총서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1] 1975년 이전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대변자였던 수판누봉과 같은 인물들은 권력 장악 이후 소외되었다.[1]
새 정부는 독립적인 뉴스 기관들을 신속하게 폐쇄했고, 해산되지 않은 기관들은 당이 통제하는 라오 국가건설전선의 회원이 되도록 강요받았다.[1] 라오인민혁명당과 라오 국가건설전선은 전국적인 회의를 조직하여 사람들에게 당의 노선을 교육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전파했으며, 이는 새로운 소비에트 인간 창조를 목표로 했다.[1]
7. 역대 선거 결과
년도 | 의석 수 | 득표율 |
---|---|---|
1989 | 65석 | 98.4% |
1992 | 85석 | 99.3% |
1997 | 98석 | 99.4% |
2002 | 109석 | 99.9% |
2006 | 113석 | 99.76% |
2011 | 128석 | 99.69% |
2016 | 144석 | 97.94% |
2021 | 158석 | 96.34% |
참조
[1]
웹사이트
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 – LPRP
http://countrystudie[...]
Library of Congress
2021-01-15
[2]
웹사이트
Laos Communist Party names PM Thongloun as new leader
https://www.reuters.[...]
Reuters
2021-01-15
[3]
뉴스
Communist Laos Mixes Strict Political Dogma With Capitalist Economic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90-01-27
[4]
웹사이트
10th Central Committee of the 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
http://kpl.gov.la/En[...]
Lao News Agency
2021-01-15
[5]
웹사이트
Laos Country Report 2020
https://web.archive.[...]
Bertelsmann Transformation Index
202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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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7]
뉴스
ຄຸນລັກສະນະຜູ້ແທນກອງປະຊຸມໃຫຍ່ ຜູ້ແທນທົ່ວປະເທດ ຄັ້ງທີ X ຂອງພັກສະເໜີໂດຍ ສະຫາຍ ຈັນສີ ໂພສີຄຳ ຄະນະເລຂາທິການສູນກາງພັກ ຫົວໜ້າຄະນະຈັດຕັ້ງສູນກາງພັກ
http://www.pasaxon.o[...]
ຫນັງສືພິມປະຊາຊົນ
2016-01-19
[8]
웹사이트
ラオス人民革命党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12-21
[9]
간행물
ラオス人民民主共和国憲法(日本語訳)
https://www.moj.go.j[...]
法務省
[10]
웹사이트
ラオス人民革命党第10回大会と『ビジョン2030』
http://www.ide.go.jp[...]
JETRO
[11]
서적
(페이지 정보만 추출)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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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pl.gov.la/de[...]
[13]
웹사이트
http://kpl.gov.la/En[...]
[14]
웹사이트
https://overseas.m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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