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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소총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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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트비아 소총병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 제국군에서 싸운 라트비아인 부대이다. 19세기 말 리가가 산업화되면서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조직되었고, 1905년 혁명 이후 무장 저항 단체가 결성되면서 숙련된 전투원들이 소총병에 모집되었다. 1915년 독일군의 진격에 맞서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대대 창설이 승인되었고, 8개의 전투 연대와 1개의 예비 연대가 창설되었다. 1916년 크리스마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러시아 혁명과 내전 시기에는 볼셰비키 편에 서서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활동하며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라트비아 독립 전쟁 이후에는 라트비아로 귀환하거나 소련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라트비아 예술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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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소총병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군사 정보
활동 기간1915년 – 1920년
국가러시아 제국 (1915년–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1918년–1920년)
백군 (1918년–1920년)
소속러시아 제국 육군
붉은 군대
백군
병과보병
규모약 40,000명
지휘 체계러시아 제12군
별칭라트비아 소총병
전투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나베스 살라 방어전
크리스마스 전투
유글라 전투
러시아 내전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라트비아 독립 전쟁
다우가프필스 전투
지휘관
주요 지휘관아우구스트스 에른스트스 미신슈
안드레이스 아우잔스
야니스 프란시스
프리드리흐스 브리에디스
유쿰스 바치에티스
마르틴슈 페니키스
로베르츠 담비티스

2.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배경

19세기 말, 미래의 라트비아 수도가 될 리가러시아 제국의 주요 산업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산업화 배경 속에서 1905년 혁명 이후 차르 체제에 대한 무장 저항 경험이 쌓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라트비아 경찰청장이었던 인드리키스 레디니쉬가 별도의 라트비아 기병 부대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2. 1.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과 1905년 혁명

19세기 말, 미래의 라트비아 수도가 될 리가러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LSDRP)은 체계적으로 조직되었으며, 당 지도부는 1905년 혁명 무렵 볼셰비키에 점차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였다. 1905년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가 보복적인 탄압을 가하자, LSDRP와 연계된 무장 저항 조직들이 차르 체제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이기 위해 결성되었다. 이처럼 게릴라전을 통해 숙련된 전투 경험을 쌓은 인원 중 다수가 훗날 라트비아 소총병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2. 2. 라트비아 민족주의와 반독일 감정

1915년 4월, 독일 제국군이 라트비아 영토로 진격해 들어오자, 야니스 골드마니스(Jānis Goldmanislv) 국회의원을 비롯한 일부 라트비아 명사들은 국가 두마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모든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대대를 창설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독일군이 라트비아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그러한 부대가 특히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트비아인들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고, 러시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했으며 반독일적이었기 때문에 사기가 높았다.[1] 옐가바에서는 라트비아 국토 방위군의 두 개 대대가 이미 독일 제국군을 저지한 경험도 있었다.

제3 쿠르제메 사격병 대대의 라트비아인 지원병 (1915년)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자, 러시아 스타프카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1915년 7월 19일 차르는 라트비아 소총병 부대 창설을 최종 승인했다. 같은 날, 국가 두마의 라트비아 국회의원 야니스 골드마니스와 야니스 잘리티스(Jānis Zālītislv)는 리가에서 "라트비아 깃발 아래 모여라!" (Pulcējaties zem latviešu karogiem!lv)라는 애국적인 호소를 발표했다.

첫 번째 지원자들은 8월 12일 리가에서 모집되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두 개의 대대를 편성하는 것이었으나,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가 몰려 세 개의 대대가 편성되었다.

첫 라트비아 지원병들이 리가에서 기초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나는 모습은 라트비아인 지휘관이 이끄는 최초의 라트비아 군부대 창설이라는 점에서 라트비아 전역에서 큰 관심을 받으며 대규모 환송 행사로 이어졌다.

초기 대대는 주로 자원병으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쿠를란트에서 온 피난민들과 리가에서 러시아 내륙으로 대피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후에는 다른 러시아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라트비아 소총병 부대에 합류하거나 전출되었다.[2]

3. 제1차 세계 대전과 라트비아 소총병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군의 라트비아 영토 진격에 대응하여, 1915년 러시아 제국 내 라트비아인들의 요구로 민족 부대인 라트비아 소총병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라트비아 지역 지리에 밝고 반독일 감정이 강해 높은 사기를 보였다.[1] 처음에는 주로 자원병으로 구성되었으나, 1916년부터 징집을 통해 8개 전투 연대와 1개 예비 연대로 규모가 확장되었다.[2]

라트비아 소총병은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동부 전선의 다우가바 강 유역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특히 1916년 말부터 1917년 초까지 벌어진 크리스마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의 막대한 희생은 러시아 제국 정부와 군 지휘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전쟁 종식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는 배경이 되었다. 전사자들은 리가의 형제 묘지에 안장되었다.

3. 1. 부대 창설 (1915)



1915년 4월, 독일 제국군이 라트비아 영토로 진격해 들어오자, Jānis Goldmanis|야니스 골드마니스lav 국회의원을 비롯한 일부 라트비아 명사들은 국가 두마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모든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대대를 창설할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독일군의 진격 상황에서 라트비아인 부대가 특히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트비아인들은 해당 지역 지리에 밝았고, 러시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 민족주의 정서가 강해 반독일 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사기가 높았다.[1] 이미 옐가바에서는 라트비아 국토 방위군 소속 두 개 대대가 독일 제국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경험이 있었다.

독일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러시아 스타프카는 이 조치를 승인했고, 1915년 7월 19일 차르는 라트비아 소총병 부대 창설을 승인했다. 같은 날, 국가 두마의 라트비아 국회의원인 야니스 골드마니스와 Jānis Zālītis|야니스 잘리티스lav리가에서 "Pulcējaties zem latviešu karogiem!|라트비아 깃발 아래 모여라!lav"라는 애국적인 호소문을 발표했다.

첫 지원자 모집은 8월 12일 리가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계획은 두 개 대대를 편성하는 것이었지만, 많은 지원자들로 인해 세 개 대대가 편성되었다.

첫 라트비아 지원병들이 리가에서 기초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나는 것은 라트비아인 지휘관이 이끄는 최초의 라트비아 군부대였기 때문에 대규모의 전국적인 시위로 바뀌었다.

초기 대대는 주로 자원병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쿠를란트에서 온 피난민과 리가에서 러시아 내륙으로 대피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많았다. 나중에는 다른 러시아 부대에서 온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라트비아 소총병 부대에 합류하거나 전출되었다.[2]

3. 2. 동부 전선 참전 (1915-1917)

크리스마스 전투 중 참호에 있는 라트비아 소총병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라트비아 소총병은 다우가바 강을 따라 위치한 진지에서 독일 제국군에 맞서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 싸웠다. 1916년 라트비아 대대는 징집이 시작되면서 연대로 개편되었고, 많은 새로운 소총병 부대가 창설되어 총 8개의 전투 연대와 1개의 예비 연대가 만들어졌다.

1916년 12월과 1917년 1월, 라트비아 소총병은 한 달 동안 이어진 크리스마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크리스마스에 독일군 진지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막대한 사상자를 냈음에도 라트비아 소총병은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후속 공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러시아 제국군은 이 실패한 공격으로 26,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으며, 여기에는 당시 총 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9,000명의 라트비아 소총병이 포함되었다. 이 막대한 희생은 소총병들 사이에서 러시아 장군들과 차르에 대한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전쟁 종식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전사한 라트비아 소총병들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형제 묘지에 안장되었다.

'''1917년에 창설된 연합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의 구조:'''

1. 라트비아 소총병 여단2. 라트비아 소총병 여단


3. 3. 크리스마스 전투 (1916-1917)



1916년 12월과 1917년 1월, 라트비아 소총병은 한 달 동안 이어진 크리스마스 전투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1] 이 전투는 크리스마스독일군 진지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라트비아 소총병은 막대한 사상자를 감수하며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러시아 제국군의 후속 공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1]

이 실패한 공격으로 러시아 제국군은 26,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특히 라트비아 소총병은 당시 총 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9,000명의 사상자를 냈다.[1] 이러한 막대한 희생은 살아남은 소총병들 사이에서 러시아 제국군 지휘부와 차르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쟁 종식을 주장하며 세력을 넓히던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는 배경이 되었다.[1] 전투에서 전사한 라트비아 소총병들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리가에 조성된 형제 묘지(Brāļu Kapi|브랄루 카피lv)에 안장되었다.[1]

4. 러시아 혁명과 분열 (1917)



1916년 12월과 1917년 1월, 라트비아 소총병은 한 달간 이어진 크리스마스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크리스마스에 독일군 진지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된 이 전투에서 라트비아 소총병은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으나, 후속 공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군은 26,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으며, 여기에는 당시 라트비아 소총병 전체 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9,000명의 라트비아 소총병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막대한 사상자는 살아남은 소총병들 사이에서 러시아 제국 장군들과 차르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쟁 종식을 주장하던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크리스마스 전투에서 전사한 라트비아 소총병들은 형제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라트비아 소총병 부대는 연합 사단으로 재편되었다. 1917년에 창설된 연합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라트비아 소총병 여단2. 라트비아 소총병 여단



그러나 크리스마스 전투의 여파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라트비아 소총병 내부의 분열은 피할 수 없었다. 1917년 5월을 기점으로 상당수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볼셰비키에 충성을 맹세하며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Latviešu sarkanie strēlniekilav, красные латышские стрелки|크라스니예 라티시스키예 스트렐키rus)을 형성하게 된다. 반면, 주로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소총병들은 볼셰비키에 반대하며 '''백색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활동하거나 백군에 합류하는 등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이후 러시아 내전라트비아 독립 전쟁에서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서로 다른 편에 서서 싸우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4. 1.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

1917년 5월, 라트비아 연대의 상당 부분이 볼셰비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들은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Latviešu sarkanie strēlniekilav, красные латышские стрелки|크라스니예 라티시스키예 스트렐키rus)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러시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소총병들은 1918년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좌익 사회주의 혁명당 반란과 야로슬라블의 야로슬라블 봉기 등 반 레닌주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백군 장군인 안톤 데니킨, 니콜라이 유데니치, 표트르 브랑겔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 특히 1919년 10월 데니킨 군대에 맞선 오룔-크로미 작전에서 승리한 후,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은 당시 최고의 군사적 영예인 VTsIK 명예 적기를 수여받았다. 라트비아 소총병 출신의 전직 대령 유쿰스 바시에티스는 적군의 초대 총사령관이 되기도 했다.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은 1919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시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전투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고,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 볼셰비키 사상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면서 대부분 러시아 내전의 다른 전선으로 재배치되었다. 라트비아에 남아 있던 붉은 군대는 발트 독일인 자원병 부대를 이끈 뤼디거 폰 데어 골츠 장군과 라트비아 공화국에 충성한 오스카르스 칼팍스(이후 야니스 발로디스 대령) 휘하의 신생 라트비아 부대에게 서부 라트비아에서 패배했다. 또한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 참여한 에스토니아 육군(여기에는 북 라트비아 여단(Ziemeļlatvijas brigādelav)도 포함됨)과, 라트비아 남동부 라트갈레 지역에서 벌어진 다우가프필스 전투에서 폴란드군과 신생 라트비아 육군의 연합 작전에 의해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1920년 라트비아와 볼셰비키 러시아 사이에 라트비아-소비에트 리가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11,395명의 전직 붉은 소총병들이 라트비아로 돌아왔다.

다른 전직 소총병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남아 공산당 간부나 체카 요원, 적군 지도자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소련이 라트비아를 점령했을 때, 생존해 있던 많은 붉은 소총병들이 라트비아로 돌아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라트비아 출신으로 가장 유명했던 소련 공산주의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붉은 소총병 출신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마르틴 라치스, 제캅스 페테르스, 아르비드 펠셰, 얀 카를로비치 베르진, 얀 루드주타크, 페테리스 스투카, 로베르트 에이케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스투카(1932년 사망)와 펠셰를 제외한 대부분은 이후 대숙청 기간 동안 소위 NKVD의 라트비아 작전으로 인해 처형되었다.

4. 2. 백색 라트비아 소총병

1917년, 소수의 라트비아 소총병, 특히 장교들은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Kārlis Goppers와 Frīdrihs Briedis와 같은 장교들은 볼셰비키 사상이 라트비아 군인들 사이에 퍼지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전투와 1월의 격렬한 전투는 이러한 노력을 어렵게 만들었다.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이들은 군 복무를 떠나거나 강제로 떠나야 했으며, 일부는 백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러시아의 우랄과 극동 지역에 두 개의 라트비아 부대, 즉 Troickas bataljons|트로이츠카스 바탈룐스lv(트로이츠크 대대)와 Imantas pulks|이만타스 풀크스lv(이만타 연대)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이 부대들은 중요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이후 이미 독립 국가가 된 라트비아로 보내졌다.

5. 대숙청과 라트비아 소총병 출신 인사들

러시아 내전 이후 소련에 남은 일부 라트비아 소총병들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이나 체카, 적군 등에서 활동하며 지도적인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 1940년 라트비아의 소련 점령 이후에는 살아남은 붉은 소총병 중 일부가 라트비아로 돌아오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활동했던 라트비아 출신의 유명한 소련 공산주의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붉은 소총병 출신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 마르틴 라치스
  • 제캅스 페테르스
  • 아르비드 펠셰
  • 얀 카를로비치 베르진
  • 얀 루드주타크
  • 페테리스 스투카
  • 로베르트 에이케


그러나 이들 중 페테리스 스투카(1932년 사망)와 아르비드 펠셰를 제외한 대부분은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의 대숙청 기간 동안 NKVD가 주도한 소위 'NKVD의 라트비아 작전'으로 인해 처형되는 비극을 겪었다.

6. 문화적 영향

Jāzeps Grosvalds의 "White Crosses"(1916)


라트비아 소총병은 라트비아 예술 분야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많은 작가, 시인, 화가들이 라트비아 소총병과 그들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문학
  • * 시인 알렉산드르 차크스는 라트비아 소총병과 그들이 라트비아 및 러시아에서 치른 전투를 다룬 서사시 모음집 ''Mūžības skartie''(영원에 감동받은 자들)를 남겼다.
  • * 작가 알렉산드르 그린스는 자신이 직접 소총병으로 복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 소설 ''영혼의 눈보라''(''Dvēseļu putenis'')를 썼다. 이 소설은 라트비아 소총대에 입대하는 어린 라트비아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며, 2019년에는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 회화
  • * 라트비아 화가 Jāzeps Grosvalds는 라트비아 소총병 부대에서 복무한 경험을 살려 ''Latvian Riflemen''(1916–1917) 및 ''Refugees''(1915–1917)와 같은 일련의 그림을 남겼다.

  • 음악
  • * 라트비아의 이교도 메탈 밴드 ''스카이포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라트비아 소총병과 그들의 전투에 헌정하는 앨범 ''Latviešu strēlnieki''를 발표했다.

  • 영화
  • * 2007년에 개봉한 영화 ''리가의 수호자''는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와 이후의 라트비아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하며, 전직 라트비아 소총병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unomaha.e[...] 2009-03-29
[2] 웹사이트 100th anniversary of Latvian riflemen celebrated https://eng.lsm.lv/a[...] 201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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