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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 샤르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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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나르 빅토르 조제프 샤르네르는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정치인이다. 1797년 생브리외에서 태어난 그는 1812년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30년 알제 침공, 1840년 나폴레옹 1세 유해 귀환 등에 참여했다. 1849년 코트-뒤-노르 대표로 입법 의회 의원이 되었고, 1851년 쿠데타 이후 해군부 장관 참모총장, 태평양 함대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제2차 아편 전쟁, 코친차이나 원정에 참전하여 베트남 사이공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으며, 1862년 상원의원이 되었다. 1869년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프랑스 해군 함선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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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 샤르네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레오나르 빅토르 조제프 샤르네르
레오나르 빅토르 조제프 샤르네르
개인 정보
이름레오나르 빅토르 조제프 샤르네르
출생일1797년 2월 13일
출생지생브리외, 코트다르모르, 프랑스
사망일1869년 2월 7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국적프랑스
직업군인
정치인
정치 경력
직위코트뒤노르 대표
임기 시작1849년 5월 13일
임기 종료1851년 12월 2일
직위코친차이나 총독
임기 시작1861년 2월 6일
임기 종료1861년 11월 30일
이전조제프 이아신트 루이 쥘 다리에
이후루이 아돌프 보나르
직위상원 의원
임기 시작1862년 2월 22일
임기 종료1869년 2월 6일
군사 경력
소속프랑스 해군
계급해군 제독
참전 전투제2차 아편 전쟁
사이공 포위전
코친차이나 전역

2. 초기 경력 (1797년 ~ 1848년)

샤르네르는 1840년 나폴레옹 1세의 유해 귀환(Retour des Cendres) 때 프랑수아 도를레앙과 함께 그의 유해를 프랑스로 가져왔던 라 벨르 풀(''La Belle Poule'')의 부함장이었다.

1843년,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이 프랑수아 기조 프랑스 외무장관과 테오도르 드 라그레네 외교관과 함께 태평양에 파견될 때 샤르네르 선장은 그 함대의 일부였다.[1] 이 조치는 1842년 중국에서 영국이 성공을 거두자 그 대응 조치로 취한 것이었으며, 프랑스는 남쪽에서 중국에 접근하여 영국이 거둔 성공을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1853년,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종군하여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주로 활약했다.

1860년 샤르네르는 극동의 프랑스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2] 그는 1861년 말까지 중국에서 제2차 아편 전쟁에 관여했다.

2. 1. 출생과 해군 입대 (1797년 ~ 1815년)

레오나르 빅토르 조제프 샤르네르는 1797년 2월 13일 브르타뉴 생브리외에서 태어났다.[1] 1812년 2월 툴롱 해군 사관학교 생도가 되었고, 1815년 사관 후보생으로 임명되어 여러 척의 배에서 복무했다.[2]

2. 2. 해군 장교 임관 및 초기 활동 (1815년 ~ 1837년)

레오나르 빅토르 조제프 샤르네르는 1797년 2월 13일 브르타뉴 생브리외에서 태어났다.[1] 1812년 2월 툴롱의 해군 사관학교 생도가 되었고, 1815년 사관 후보생으로 임명되어 여러 척의 배에서 복무했다. 1820년 기함 소위로, 1828년 전열함 소위로 진급했다.[2] 1830년 알제 침공에 참여했으며,[1] 해군 훈련의 지속 시간에 대한 자신의 관찰을 회고록에 기록했다.[2] 1832년 앙코나 점령에 대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2]

2. 3. 함장 승진과 나폴레옹 유해 귀환 (1837년 ~ 1848년)

샤르네르는 1837년 소형 함장(해군 소령)이 되었다. 그는 ''벨 풀''의 부함장으로서 프랑수아 도를레앙, 조앵빌 공작과 함께 세인트헬레나로 가서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를 프랑스로 가져왔다. (유해 귀환)[1] 1841년 4월 군함 함장(해군 대령)으로 임명되었고, 7월 왕정의 나머지 기간 동안 다양한 해군 지휘를 맡았다. 1843년 샤르네르는 외무부 장관 프랑수아 기조 휘하의 장-밥티스트 세실 제독과 외교관 마리 멜키오르 조제프 테오도르 드 라그레네와 함께 태평양으로 파견된 함대의 일원이었다. 이 움직임은 1842년 영국의 중국에서의 성공에 대응한 것이었으며, 프랑스는 남쪽에서 중국에 접근하여 이러한 성공에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1]

3. 프랑스 제2공화국 (1848년 ~ 1851년)

샤르네르는 1849년 5월 13일 프랑스 제2공화국 입법 의회에서 코트뒤노르 대표로 선출되었다.[1] 그는 우익에 속했으며 루이 나폴레옹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했다.[1] 그는 해군 조사 위원회 위원과 코트뒤노르 일반 의회 의원을 역임했으며,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에 자주 참여했다.[1]

4. 프랑스 제2제국 (1852년 ~ 1869년)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이후 샤르네르는 해군부 장관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코친차이나 육해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861년 11월 루이-아돌프 보나르 제독으로 교체되었고, 보나르는 1862년 6월 사이공 조약을 통해 뜨득 황제로부터 프랑스의 정복을 인정받았다.

4. 1. 해군 고위 장교 (1852년 ~ 1860년)

1852년 2월 3일, 그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1853년 8월 태평양 함대 부사령관이 되었다.[1] 1853년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하여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주로 활약했다.[1] 1854년 10월 17일, 그의 전함 나폴레옹은 콘스탄틴 포대와 5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는데, 3,000발의 포탄을 발사했고 100개의 포탄을 맞았다.[1] 1855년 6월 7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해군 공사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1]

1860년 극동의 프랑스 해군 사령관이 된 샤르네르는[2] 1861년 말까지 중국에서 제2차 아편 전쟁에 참전했다.[2] 1860년 5월, 제2차 아편 전쟁 동안 중국 해역의 해군을 지휘하여 원정군을 지원했고, 페이오에서 병력 하선을 지휘한 후, 강 입구를 방어하는 요새를 공격하도록 자신의 포격함을 지휘했다.

4. 2. 제2차 아편 전쟁 참전 (1860년)

1860년 샤르네르는 극동의 프랑스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2] 그는 1861년 말까지 중국에서 제2차 아편 전쟁에 참전했다. 같은 해 5월, 샤르네르는 중국 해역의 해군을 지휘하여 원정군을 지원했고, 페이오에서 병력 하선을 지휘한 후 자신의 포격함을 지휘하여 강 입구를 방어하는 요새를 공격했다.

4. 3. 코친차이나 원정과 사이공 점령 (1861년)

1861년, 아편전쟁이 끝나자 샤르네르는 해군 전단과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에 포위된 프랑스 군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다.[3] 1861년 2월 11일[4], 사이공 포위를 풀고, 리고 드 주누이와 함께 베트남에서 최초의 프랑스령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5]

같은 해 1월, 샤르네르는 사이공에서 포위된 조제프 야생트 루이 쥘 다리에스 선장 휘하의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해군 함대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트남으로 향했다. 2월 11일, 사이공 포위전을 해제하며 샤를 리고 드 주노이 제독의 뒤를 이어 베트남에 최초의 프랑스 영토를 건설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프랑스 해군 장관 샤슬루-로보는 샤르네르에게 "우리는 사이공에 상업을 유치하고자 한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 무역이 가능한 일종의 종주권 또는 주권이다."라고 서신을 보냈다. 기호아 전투로 이어진 3주간의 전투 후, 샤르네르는 사이공 주둔군을 구출했고, 프랑스는 코친차이나의 세 개 지방을 점령했다.

4. 4. 프랑스 귀환과 정치 활동 (1861년 ~ 1869년)

샤르네르는 1861년 9월 프랑스로 돌아와 1862년 1월 22일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제정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다.[1] 1864년 11월 15일 칙령에 의해 제독으로 진급했으며,[1] 1861년 2월 10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를 받았다.[1] 샤르네르는 1869년 2월 7일 파리에서 사망했다.[1] 여러 척의 프랑스 해군 함선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 순양함 아미랄 샤르네르 또는 1941년 프랑스-태국 전쟁에서 코 창 해전에 참전한 ''부겐빌''급 식민지 슬루프 ("''아비소 콜로니얼''") ''아미랄 샤르네르''(1933) 등이 있다.[1]

5. 사망

샤르네르는 1862년 1월 22일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제정을 지지하였다. 1864년 11월 15일 칙령에 의해 제독으로 진급했고, 1861년 2월 10일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를 받았다.[1] 1869년 2월 7일 파리에서 사망했다.[1]

프랑스 해군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여러 척의 함선에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어 프랑스 순양함 아미랄 샤르네르(Amiral Charner)나 1941년 프랑스-태국 전쟁의 코 창 해전에 참전한 부겐빌급 식민지 슬루프 아미랄 샤르네르(1933)가 있다.

6. 샤르네르의 이름을 딴 함선

프랑스 해군은 여러 척의 함선에 그의 이름을 붙여 기렸다. 그 예로는 프랑스 순양함 아미랄 샤르네르(1892)와 프랑스-태국 전쟁의 코 창 해전에 참전한 ''부겐빌''급 식민지 슬루프 ("아비소 콜로니얼") 아미랄 샤르네르(1933)가 있다.[1]

참조

[1] 서적 The Last Emperors of Vietnam https://books.google[...]
[2] 서적 Superpowers Defeated https://books.google[...]
[3] 서적 A history of South-east Asia
[4] 서적 Appletons' annual cyclopaedia and register of important events of the year: 1862 https://archive.org/[...] D. Appleton & Company
[5] 서적 Vietnam; a Politica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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