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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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온 5세는 9세기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파트리키오스 바르다스의 아들로, 미카엘 1세에게 양위받아 813년 황위에 올랐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을 때 성벽을 강화하여 방어했으며, 815년 성상 파괴 운동을 부활시켰다. 82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측근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시신은 훼손되어 버려졌다. 레온 5세는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나, 성상 파괴 정책으로 인해 반대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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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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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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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레온 5세 아르메니오스 |
로마자 표기 | Leōn O Arrmenios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
통치 | |
즉위 | 813년 7월 12일 |
퇴위 | 820년 12월 25일 |
공동 황제 | 콘스탄티누스 |
이전 통치자 | 미하일 1세 |
다음 통치자 | 미하일 2세 |
개인 정보 | |
출생 | 기원후 775년경 |
사망 | 820년 12월 25일 (약 45세) |
배우자 | 테오도시아 |
자녀 | 콘스탄티누스 바실 그레고리 테오도시우스 안나 |
아버지 | 바르다스 |
2. 생애
레온 5세는 아르메니아계 귀족 바르다네스의 아들로, 미카엘 2세 등과 함께 바르다네스 투르코스의 막료였다. 803년 바르다네스가 니케포로스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를 배신하고 니케포로스 1세 편에 섰으나, 이후 해임되었다.[2]
미카엘 1세 랑가베에 의해 다시 등용되어 아나톨리아 테마의 장관이 되었고, 813년 미카엘 1세가 불가리아의 크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후 크룸이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해 왔으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넘지 못했고, 814년 크룸이 급사하자 오무르타그와 30년간의 평화 조약을 맺었다.(815년 조약)[2]
815년 성상 파괴 운동을 부활시키고, 이에 반대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키포루스를 해임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뿌리 깊은 반대에 직면했다.[14]
친구였던 미하일을 중용했지만 점차 대립, 820년 미하일을 체포해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이유로 황후 테오도시아가 반대하여 처형이 연기되었고, 다음 날 아침 미사 중에 미하일의 지지자들에게 암살당했다. 시신은 프로테 섬으로 옮겨져 매장되었고, 아들들은 수도사가 되었다.[2]
2. 1. 초기 생애와 배경
레온 5세는 우마이야 왕조의 아르미니야에서 태어났으며,[2] 아버지는 귀족인 바르다네스로 아르메니아 계통의 혈통이었다.[3][4][5] 테오파네스 콘티누아투스에 따르면, 레온은 아시리아/시리아 출신이라고도 한다.[3][4][5]젊은 시절, 레온의 가족은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주하여 아나톨리아 테마 군대에 들어갔다. 802년, 장군 바르다네스 투르코스가 테마를 장악하고 자신의 딸 중 한 명을 레온과 결혼시켰다. 803년 바르다네스가 니키포로스 1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레온은 니키포로스 1세에게 투항했고, 황제는 그를 스트라테고스로 승진시켰다.[2]
812년 불가르족의 칸 크룸이 쳐들어와 메셈브리아 시를 점령했다. 이듬해 황제 미하일은 대군을 이끌고 불가르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레온의 아나톨리아 군대가 전선을 버리고 도망쳐 비잔티움 군은 패배했다. 레온은 군사들이 도망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이는 반란으로 여겨지며 크룸과 사전 협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2. 제위 등극
레온 5세는 아르메니아계 귀족 바르다네스의 아들이다. 803년 바르다네스 투르쿠스가 니키포로스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에 가담했다가 니키포로스 1세 편으로 돌아섰다.[10] 이후 니키포로스 1세와 미하일 1세 랑가베 치하에서 장군으로 명성을 쌓았고, 아나톨리아 지역 총독(스트라테고스)이 되었다.812년 불가르족의 칸 크룸이 침공하여 메셈브리아 시를 점령했다. 813년 미하일 1세는 대군을 이끌고 불가르족을 공격했으나, 6월 21일 전투에서 레온 5세의 아나톨리아 군대가 전선을 이탈하면서 패배했다. 레온 5세는 병사들이 도망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이는 크룸과의 사전 협약에 따른 반란으로 추정된다. 이후 레온 5세는 수도로 돌아와 미하일 1세를 퇴위시키고 황제가 되었다.

811년 미하일 1세에 의해 아나톨리아 테마 총독으로 임명된 레온 5세는 812년 아랍과의 전쟁에서 킬리키아의 ''thughur'' 군대를 격파하는 등 활약했다.[10] 813년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이를 이용해 미하일 1세를 퇴위시키고 황제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묘에 모여 "일어나서 멸망해 가는 국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외쳤다고 한다.[10]
레온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케포루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정통성을 உறுதி시켰다.[11] 또한 미카엘 1세의 아들들을 거세하여 ভবিষ্যতে의 찬탈을 막았다.[12] 즉위 한 달 후에는 아테네의 이레네 황후가 세운 칼케 문의 그리스도 성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13][14]
레온 5세는 즉위 직후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육로로 봉쇄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크룸과 직접 협상하려 했으나 암살 시도는 실패했고, 분노한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외와 남부 트라키아를 약탈했다. 그러나 크룸은 수도 포위를 포기하고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했다.[2][10]
2. 3. 불가르족과의 전쟁
812년 불가르족의 칸 크룸이 쳐들어와 11월 메셈브리아 시를 점령했다. 이듬해 황제 미하일 1세는 대군을 규합해 불가르족과 전투를 위해 진격했고 6월 21일 양측은 대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갑자기 레온의 아나톨리아 군대가 전선을 버리고 도망쳤다.[10] 이 때문에 비잔티움 군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레온은 군사들이 도망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이는 명백한 반란으로 아마도 불가르족의 크룸과 사전 협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13년 레온은 수도로 돌아와 자진 퇴위한 미하일 1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한편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단숨에 진출해 성벽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레온은 크룸에게 단독 면담을 제의했고 비무장으로 함께 만나기로 했다. 크룸이 회담 장소에 도착하자 갑자기 비잔티움 군사가 매복했다가 크룸을 공격했다. 크룸은 화살 하나를 맞고 간신히 달아났지만, 비잔티움의 배신 행위에 분노하여 퇴각하면서 제국의 전 지역을 초토화했다. 이때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2][10]
814년 봄, 크룸은 다시 한번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준비했고, 레온은 크룸의 공성전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한편 서방 황제이자 샤를마뉴의 아들인 경건왕 루드비히에게 사절을 보내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정을 막 떠나려던 크룸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죽자 불가르족은 침공을 포기했다.[2][10]
성상 파괴주의가 재건된 직후, 불가리아의 새로운 칸인 오무르타그는 기독교를 포기하기를 거부한 비잔틴 포로들을 처형하고, 트라키아를 습격하며 황실 사절단을 무시하여 레오 5세를 전투에 나서도록 강요했다. 816년 봄에 있었던 메셈브리아 전투에서 레오 5세는 메셈브리아(네세바르) 근처로 진군하여 불가르족 근처에 진을 치고, 도망치는 척하다가 그들이 추격해 오자 매복 공격을 가했다. 그는 불가르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불가르 영토를 습격한 후, 오무르타그와 30년 평화 조약을 맺어 780년의 국경을 회복했다.[2] 일부 자료에 따르면 크룸이 전투에 참여하여 심한 부상을 입고 전장을 이탈했다.[16][17]
2. 4. 성상파괴운동의 재개
814년 6월, 레온 5세는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여 6개월간 연구 끝에 성상 공경의 근거가 없음을 밝혀냈다. 레온은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키포로스를 해임하고 성상파괴령을 발동하였다. 이는 레온 3세의 제1차 성상파괴령과는 달리, 제국의 평화 유지에 불만을 품은 전직 군인과 군대의 불온한 움직임을 진정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주로 소아시아 출신의 성상파괴주의자들이었다.[14]
레온 5세는 성상 숭배가 황제들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의견을 고문들에게 알리고, 요한 문법가가 이끄는 신학 위원회를 임명했다. 니키포루스 1세는 성상 숭배를 비난하는 성서 구절이 "거룩한 이미지"가 아닌 우상을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원회는 군대 패배의 책임을 성상 숭배에 돌리고, 숭배 가능한 이미지 제거를 제안하는 타협점을 찾았다. 니키포로스는 성상 숭배에 대한 성서적 증거 제시를 요청받았으나, 오랜 전통에 호소하며 거부했다. 레온 5세는 위원회와의 토론을 제안했지만, 니키포로스는 참여를 거부했다. 황실 근위대 병사들이 칼케 문 위 그리스도의 성상에 돌을 던지자, 레온 5세는 이를 십자가로 대체했다.[14]
사순절이 시작되자 니키포로스는 재차 논의를 거부하고 폐위되었다. 레온 5세는 평신도 성상 파괴주의자 테오도토스 1세를 임명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열어 히에리아 공의회 (754)를 일곱 번째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재확인했다. 공의회는 성상 숭배자들을 "어리석음"과 "무모함"으로 기소하며, 성상이 하느님께만 합당한 숭배를 받는 장소에 배치되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레네 여제는 성상 숭배 도입으로 비판받았는데, 이는 무한한 것을 제한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신성과 분리한다고 한다.[14]
레온 5세의 타협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테오도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황제의 입장을 받아들였다고 보고한다. 성상 파괴주의 반대자들은 태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레온 5세는 스투디오스 수도원과 같은 성상 숭배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테오도르 스투디테를 추방했다. 그는 또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주교들도 추방했다.[14]
2. 5. 통치 후반과 암살
레온 5세는 오랜 친구인 미하일을 황궁 경비대장에 임명하는 등 신임했다. 그러나 820년 12월, 미하일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그를 반역 혐의로 체포하고 처형하려 했다. 하지만 레온의 황후 테오도시아의 반대로 처형은 미뤄지고 투옥하는 데 그쳤다.[2]레온은 친한 친구의 배신에 충격을 받았고, 불길한 예언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 크리스마스 이브에 성당에서 성가를 부르던 중 미하일의 친구들에게 암살당했다.[20]
미하일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황제로 추대되었다. 레온의 시신은 훼손되었고, 네 아들은 거세당했으며, 황후 테오도시아와 함께 프린스 제도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레온 5세의 아들 중 한 명은 거세 수술 도중 사망했다.[21]


3. 유산 및 평가
레온 5세는 미카엘 2세를 선호했던 비잔틴 관료들과는 달리, 성상파괴 논쟁을 다시 시작하여 군대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아나톨리아 테마는 레온과 미카엘 아래에서 바르다네스 투르코스와 함께 복무했던 토마스 슬라브를 정당한 황제이자 레온의 복수자로 선포했다. 821년에는 부켈라리안 테마, 파플라고니아 및 키비레오트 테마가 아나톨리아 테마의 편에 서면서 내전이 발발했다.[2]
두 번째 비잔틴 성상파괴운동은 첫 번째보다 온건했다. 적극적으로 숭배되지 않는 이미지는 허용되었고, 성상 옹호자들은 우상 숭배 혐의를 받지 않았다. 레온이 일부 기록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상 옹호자들을 맹렬하게 박해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또한 두 번째 성상파괴운동은 군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의 불안감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군대는 성상파괴자 콘스탄티누스 5세의 영웅적인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았다. 레온은 성직자, 특히 그의 임명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7세와 같은 학식 있는 인물에게서 더 많은 동맹을 찾았다. 테오필로스 치세가 되자, 테오도르 스투디테와 대부분의 성상 옹호 주교들은 사망했다. 그러나 성상파괴운동은 교회에서 강력한 기반을 갖지 못했고, 테오필로스 사후 황후 섭정 테오도라에 의해 쉽게 폐지되었다. 요한 7세는 성상 옹호자인 메토디오스 1세로 교체되었다. 843년 3월 11일에 전례 정교 축일이 제정된 후, 현재 동방 정교 신앙의 상징인 성상파괴운동은 비잔틴 성직자들로부터 거의 옹호되지 않았다. 황제의 권위에 맞서 교회의 자율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은 비잔틴 황제가 교리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영구적으로 배제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교회의 유일한 수장으로 확립했다.[10][2][14]
레온은 성상파괴운동 외에도 이사우리아 왕조 황제들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후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대중주의자로 묘사했으며, 정의를 추구하고 비잔틴 관료들의 불의를 바로잡는 데 열심이었다고 한다.[10] 그는 특히 적극적인 군사 지도자였으며, 거의 매년 원정을 나섰다.[10]
4. 가족 관계
니콜라스 아돈츠는 저서 ''황제 바실 1세의 시대와 기원''(1933)에서 레온 5세와 테오도시아가 바실 1세의 조상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콘스탄티누스 7세가 제시한 그의 조상에 대한 설명과 테오파네스 콩티누아투스가 제공한 설명을 부분적으로 기반으로 했다.[22]
학자 크리스 베넷은 이 이론이 사실이 되려면 레오의 딸이 780년부터 797년 사이에 결혼할 나이여야 하는데, 그녀의 형제들의 나이(모두 800년 이후 출생)를 고려할 때 이는 가능성이 낮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반론으로 베넷은 콘스탄티누스 7세가 마이악테스와 바실 사이의 연도를 결정하는 데 실수를 했을 수 있으며, 바실은 811년으로 알려진 출생일보다 적어도 20년 후에 태어났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22]
아돈츠의 이론은 기원으로부터의 계보를 연구하는 크리스티앙 세티파니를 포함한 여러 계보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레온 5세와 테오도시아의 딸에게는 "안나"라는 이름이 제안되었는데, 이는 바실 1세, 레온 6세, 콘스탄티누스 7세 및 로마노스 2세의 딸들에게 주어진 이름이었다.[22]
레온 5세의 알려진 모든 자녀는 전통적으로 그의 아내 테오도시아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테오도시아는 귀족 아르사베르의 딸이었다.[22] 게네시우스는 네 아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름 | 설명 |
---|---|
심바티오스 (콘스탄티누스) | 814년부터 820년까지 공동 황제. 아버지 암살 후 거세당하고 추방되었다. |
바실리오스 | 아버지 암살 후 거세당하고 추방되었다. 847년에도 생존해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의 선출을 지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그레고리오스 | 아버지 암살 후 거세당하고 추방되었다. 847년에도 생존해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의 선출을 지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테오도시오스 | 820년 사망. 거세 직후 사망했다. |
딸의 존재는 역사가들과 계보학자들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잠정적인 이름 "안나"가 제안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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