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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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디 전투는 179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 중 포 강을 건너 로디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맞붙었다. 프랑스군은 아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격렬한 전투 끝에 승리했고,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용감한 지휘가 병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그를 '꼬마 하사관'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비록 오스트리아군의 주력 부대가 탈출에 성공하여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지만, 이 전투는 나폴레옹 신화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으며, 그가 스스로의 리더십과 능력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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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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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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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명칭 (프랑스어) | Bataille du pont de Lodi (로디 다리 전투) |
관련 전쟁 | 프랑스 혁명 전쟁 |
전투 정보 | |
날짜 | 1796년 5월 10일 |
장소 | 현재의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로디 |
결과 | 프랑스 공화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제1공화국 |
교전국 2 | 합스부르크 군주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랑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 마르크 앙투안 드 보몽 장 란 앙드레 마세나 |
오스트리아 | 요한 보리외 카를 제보텐도르프 요제프 부카소비치 |
병력 규모 | |
프랑스 | 보병 15,500명 기병 2,000명 포 30문 |
오스트리아 | 9,500명 포 14문 |
피해 규모 | |
프랑스 | 350명 |
오스트리아 | 전사 또는 부상: 335명 포로: 1,700명 포: 16문 |
관련 전투 목록 |
2. 배경
1796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맞섰다. 포강을 사이에 두고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했으며, 이들 앞에는 로디 교(橋)라는 200m 길이의 목제 다리가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다리를 미처 파괴하지 못해, 다리를 건너려는 프랑스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17]
2. 1. 이탈리아 원정 초기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알프스산맥과 아펜니노산맥의 경계에서 피에몬테로 진출했다. 전격적인 공격으로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데냐군을 분리시켰다. 4월에 사르데냐군이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나폴레옹의 눈길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향했다.[17]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장 피에르 볼리외는 나폴레옹과의 전투를 피하고 있었다. 나폴레옹군은 롬바르디아의 수도 밀라노를 수비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쪽으로 우회했다.포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행군하던 중 나폴레옹은 피아첸차에서 포강을 건너 5월 10일 그 지류(支流)인 아다강 근처에 있던 도시 로디에서 오스트리아군 후위군 K.P 세보텐도르프가 이끄는 10,000명의 군대와 대치했다.[17]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전역 초기에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 군대를 격파한 후, 동맹국인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17] 전역 중 가장 훌륭한 기동 중 하나로, 포 강 남쪽 강변을 따라 신속하게 행군하여 오스트리아군이 밀라노로 퇴각하는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피아첸차 부근에서 강 반대편에 다리를 가설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위험을 감지하고 즉시 퇴각했지만, 대부분은 로디를 경유했다. 프랑스군이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의 후위를 마을 근처에서 포착했기 때문에 로디를 방어할 필요성이 생겼다.[17]
2. 2. 오스트리아군의 전략
장 피에르 볼리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사령부는 나폴레옹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려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롬바르디아의 수도 밀라노를 방어하기 위해 포강을 따라 이동했다.[17]3. 전투 경과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알프스산맥과 아펜니노산맥의 경계에서 피에몬테(Piedmont)로 진출하여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데냐군을 분리시켰다. 4월에 사르데냐군이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폴레옹군은 롬바르디아의 수도 밀라노를 수비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쪽으로 우회했다.
포강(Po River)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행군하던 중 나폴레옹은 피아첸차(Piacenza)에서 포강을 건너 5월 10일 그 지류인 아다강 근처의 도시 로디(Lodi)에서 오스트리아군 후위군 K.P 세보텐도르프가 이끄는 10,000명의 군대와 대치했다.
3. 1. 로디 교두보 전투
5월 10일, 프랑스군은 아다강 근처의 로디에서 오스트리아군 후위 부대와 조우했다.[7] 오스트리아군은 다리를 파괴하지 못하고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였다.[7]프랑스 선봉대는 오전 9시경 요제프 필리프 부카소비치의 오스트리아 후위대와 조우했고, 충돌 후 로디 방향으로 그들을 추격했다.[7] 부카소비치는 곧 도시 근처에서 게르하르트 로셀미니의 엄호 부대에 의해 구원받았다.[7] 도시 방어는 튼튼하지 않았고, 수비군은 소수였으며, 프랑스군은 도시 안으로 진입하여 다리 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7] 다리는 반대편 강둑에서 두 줄로 배치된 9개 보병 대대와 14문의 대포로 방어되었다.[7] 로디를 지휘하던 오스트리아 장군 K.P 세보텐도르프는 또한 네 개의 나폴리 기병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총 6,577명의 병력을 보유했는데, 이들은 서둘러 강행군을 한 후 대부분 완전히 지쳐 있었다.[7] 세보텐도르프는 낮에 퇴각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밤까지 교차로를 방어하기로 결정했다.[7]
프랑스 척탄병 프랑수아 비고-루시용에 따르면 오스트리아군은 다리를 파괴하려 했지만, 프랑스군은 대포를 가져와 다리 전체에 발사하여 그들의 노력을 막았다고 한다.[8] 프랑스군이 다리를 건너는 것을 막는 것은 비교적 쉬웠을 텐데, 다리가 나무로 만들어졌고 불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9] 다리는 길이가 약 약 182.88m였고, 강바닥에 몇 야드 간격으로 나무 말뚝을 박고 빔을 얹어 도로를 만드는 방식으로 간단하게 건설되었다.[10]
프랑스 선봉대는 다리를 건너기에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으므로, 추가 프랑스군이 도착하면서 몇 시간이 흘렀다. 그날 오후, 프랑스 포병대가 도착했고, 중포가 강을 가로질러 발사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중포가 배치되자, 격렬한 포격이 강 건너 오스트리아 진지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보나파르트가 직접 대포 몇 문을 지휘했고, 그의 부대가 그를 "르 프티 카포랄"(작은 카포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현대적인 증거는 없다.[11]
몇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 진지를 포격한 후, 오후 6시경 프랑스군은 공격을 준비했다. 마르크 앙투안 드 보몽의 기병대는 강 상류를 건너도록 보내졌고, 카라비니에 연대 제2대대(정예 경보병)는 다리 자체를 공격하기 위해 도시 성벽 안에서 준비되었다. 카라비니에 연대는 성문을 열고 다리로 돌진했다. 비고-루시용은 적 포병이 병력이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한 번의 일제 사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를 냈고, 이로 인해 대열이 흔들리고 멈췄다고 말한다. 그때 앙드레 마세나,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장 란, 장-밥티스트 세르보니, 클로드 달레마뉴를 포함한 많은 프랑스 고위 장교들이 대열 선두로 달려가 다시 이끌었다.[12] [13]
프랑스군이 다리 위로 전진하면서, 일부 프랑스 카라비니에 연대는 다리 말뚝을 타고 내려와 강을 건너면서 발포했다. 이미 몇 시간 동안의 행군과 음식 없이 싸운데다 프랑스 포격으로 사기가 저하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 기병대가 주요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그들을 고립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카라비니에 연대가 그들에게 돌진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는 무너졌고, 서둘러 후퇴가 시작되었다. 남은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어둠이 짙어지는 틈을 타 크레마 방향으로 탈출했지만, 일부 부대는 끈질긴 후위 부대 행동을 유지하여 프랑스군이 너무 가까이 추격하지 못하도록 했다. ''테르지'' 보병 연대 16번의 오버스트 아템스 백작은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성공적인 철수를 엄호하다가 사망했다.[14]
오스트리아군의 손실은 장교 21명, 병사 5,200명, 말 235명이 사망, 부상 또는 포로로 잡혔다. 또한, 12문의 대포, 2문의 곡사포, 탄약 마차 30대가 손실되었다. 프랑스군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3. 2. 프랑스군의 돌격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알프스산맥과 아펜니노산맥의 경계에서 피에몬테(Piedmont)로 진출,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데냐군을 분리시켰다. 5월 10일 아다강 근처 로디(Lodi)에서 오스트리아군 후위군과 대치했다.강을 사이에 두고 오스트리아군 앞에는 200m 가까이 되는 목제(木製)다리인 로디 교(橋)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아다강 건너편의 오스트리아군 대포와 방어물을 폭파하기 위해 30문의 대포로 포격을 가했다. 동시에 로디 교 위쪽과 아래쪽 여울로 아다강을 건너갈 부대를 보냈다. 그런 다음 마세나 장군 휘하의 보병종대를 다리를 건너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군 깃발을 휘날리며 선두에 앞장서서 공격했고, 이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다시 한번 뭉쳐 돌격을 감행했다. 상류와 여울을 건넌 아군 부대가 오스트리아군 측면과 포병대를 공격하자 오스트리아군은 혼란에 빠져 퇴각했다.[12] [13]
몇몇 상급 장교가 열의 선두에 뛰어들어 다시 병사를 이끌고 돌격을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프랑스군 일부는 교각에서 강으로 내려가 강에서 사격을 했다.


3. 3. 오스트리아군의 패퇴
나폴레옹은 아다강 건너편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30문의 대포를 동원하여 포격을 지시했고, 동시에 아다강 상류와 하류의 여울목으로 부대를 보내 강을 건너게 했다. 이후 마세나 장군 휘하 보병 부대에 다리를 건너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으로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이에 나폴레옹이 직접 깃발을 들고 선두에서 공격을 이끌자, 병사들은 용기를 얻어 다시 돌격했다. 때마침 상류와 여울을 건넌 프랑스군 부대가 오스트리아군의 측면과 포병대를 공격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혼란에 빠져 퇴각했다.[12] [13]
오스트리아군은 2,036명(장교 21명, 병사 2,015명)의 사상자와 대포 12문, 박격포 2문을 잃었다. 프랑스군의 정확한 사상자 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약 500명으로 추정된다.
4. 전투서열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군과 볼리외 휘하의 오스트리아-나폴리 군의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다.[19][20]
프랑스군 | 오스트리아-나폴리 군 |
---|---|
4. 1. 프랑스군
총사령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4]- 사단장: 앙드레 마세나
- 선봉: 여단장 클로드 달레마뉴 (정예 보병 3,000명)
- 기병: 여단장 마르크 앙투안 드 보몽, 대령 미셸 오르데네르[5]
Armée d'Italie (1792-1802)|이탈리아 방면군프랑스어은 보병 15,500명, 기병 2,000명으로 구성되었다.[4]
4. 2. 오스트리아-나폴리 군
총사령관은 장 피에르 볼리외였으나 전투에는 불참했다. 실질적인 지휘는 카를 필리프 세보텐도르프가 맡았으며, 니콜레티와 나폴리 파견대를 제외한 6,577명의 병력을 이끌었다.[6]오스트리아-나폴리 군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제1선: 국경 수비대, ''나다스디'' 보병 연대, 포 14문
- 제2선: ''테르치'', ''벨조이오소'', ''투른'' 보병 연대, ''대공 요제프'' 헝가리 기병 연대, ''메사로스'' 울란 연대
- 코르테 팔라시오 파견대: 프란츠 니콜레티, ''스트라솔도'' 보병 연대, ''토스카나'' 보병 연대, ''에르되디'' 헝가리 기병 연대 (1,958명)
- 폰타나 파견대: 나폴리 왕국 기병 연대 (1,092명)
5월 10일, 프랑스 선봉대는 오스트리아군 후위를 추격하여 로디에 도착했다. 로디의 방어는 견고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마을을 점령하고 다리로 향했다. 다리는 강 건너편의 보병 대대와 14문의 포로 방어되고 있었다. 세보텐도르프는 나폴리 왕국의 기병 4개 중대를 포함하여 6,577명의 병력을 보유했지만, 대부분 지쳐 있었다. 그는 해 질 녘까지 프랑스군의 도하를 막으려 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오스트리아군은 다리를 파괴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저지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는 약 180m 길이의 간단한 구조였다.
프랑스 선봉대는 병력이 부족하여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오후에 프랑스 포병이 도착하여 포격을 시작했고, 나폴레옹이 직접 포 조준을 지시했다는 설이 있다. 오후 6시경, 프랑스군은 기병을 상류로 도하시키고 기총병을 다리로 돌격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은 지치고 혼란에 빠져 패주했다.
4. 2. 1. 후위 부대
General-Major|제너럴-마요르de 요제프 필리프 부카소비치가 후위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6] 부카소비치 휘하에는 2개 대대의 ''카를슈테터'' 국경 수비대 연대가 있었다.5월 10일 오전 9시경, 프랑스군 선봉대는 오스트리아군 후위 부대와 교전 후 로디 방향으로 추격했다. 오스트리아군 게르하르트 로셀미니는 로디를 엄호하기 위해 ''나다스디'' 보병 연대 1개 대대(623명)와 ''메사로스'' 울란 연대 2개 기병대대(286명)를 배치했다.[6]
4. 2. 2. 로디 엄호 부대
게르하르트 로셀미니가 지휘한 로디 엄호 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6]부대 | 병력 |
---|---|
나다스디 보병 연대 # 39 1개 대대 | 623명 |
메사로스 울란 연대 # 1 2개 기병대대 | 286명 |
4. 2. 3. 제1선
부대 | 구성 |
---|---|
국경 수비대 | 카를슈테터 2개 대대 (후위 부대), 바라스디너 1개 대대 (1,262명) |
나다스디 보병 연대 # 39 | 1개 대대 (엄호 부대에서) |
포병 | 포 14문 |
4. 2. 4. 제2선
부대 | 병력 |
---|---|
3개 대대 테르치 보병 연대 # 16 | 1,212명 |
1개 대대 벨조이오소 보병 연대 # 44 | 311명 |
1개 대대 투른 보병 연대 # 43 | 622명 |
4개 기병대대 대공 요제프 헝가리 기병 연대 # 2 | |
2개 기병대대 메사로스 울란 연대 # 1 (엄호 부대에서) |
4. 2. 5. 코르테 팔라시오 파견대
GMde 프란츠 니콜레티가 지휘하는 코르테 팔라시오 파견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6]부대 | 병력 |
---|---|
스트라솔도 보병 연대 # 27 (2개 대대) | 1,958명 |
토스카나 보병 연대 # 23 (1개 대대) | |
에르되디 헝가리 기병 연대 # 9 (2개 기병대대) |
4. 2. 6. 폰타나 파견대
나폴리 왕국 기병 연대 ''레''와 ''레지나'' 8개 기병대대로 구성되었으며, 1,092명 규모였다.[6]5. 결과
로디 전투는 오스트리아군 주력이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나폴레옹 신화의 핵심 요소가 되었고, 나폴레옹 스스로도 자신이 다른 장군들보다 우월하며,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운명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15] 프랑스군이 이 전투 이후 나폴레옹을 "하사관"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검증이 필요하며, 그 자체가 신화일지도 모른다.
5. 1. 인명 피해
구분 | 오스트리아군 | 프랑스군 |
---|---|---|
사상자 | 장교 21명, 병사 2,015명 | 약 500명 ~ 2,000명 (정확한 기록 없음) |
기타 피해 | 말 235마리 | |
손실 | 캐논포 12문, 유탄포 2문, 탄약차 30량 |
5. 2. 전략적 영향
로디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보여준 용감한 행동은 병사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주어 '꼬마하사관(Le petit caporal|르 프티 카포랄프랑스어)'이라는 별명을 얻게 하였다. 이 전투 후 5일 뒤 프랑스군은 북이탈리아의 중심 도시 밀라노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열세에 직면했으나 8월에 독일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여유가 생긴 주력 부대를 북이탈리아로 보내 나폴레옹을 위협하게 된다.[15]로디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이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교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전은 나폴레옹 신화의 핵심 요소가 되었고, 나폴레옹 자신조차도 자신이 다른 장군들보다 우월하며,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운명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었다.[15]
6. 의의 및 영향
로디 전투는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지만, 나폴레옹 신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통해 자신의 군사적 역량과 운명을 확신했다.[15] 또한, 병사들은 그에게 '작은 하사(Le petit caporal|르 프티 카포랄프랑스어)'라는 애칭을 붙이며 존경과 신뢰를 보냈고, 이는 그의 리더십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15]
6. 1. 나폴레옹의 리더십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보여준 용감한 행동은 병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병사들은 나폴레옹에게 '작은 하사(Le petit caporal|르 프티 카포랄프랑스어)'라는 애칭을 붙여주며 존경과 신뢰를 보냈다.[15] 특히, 오후 6시경 프랑스군이 공격을 준비할 때, 나폴레옹은 직접 포의 조준을 지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록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 이야기는 병사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의 용맹함을 상징하는 일화로 널리 퍼졌다.로디 전투는 나폴레옹이 스스로의 운명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15]
6. 2. 나폴레옹 신화
로디 전투는 오스트리아군 주력이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교전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 신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통해 자신의 군사적 역량과 운명을 확신하게 되었다.[1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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