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와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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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와이즈는 1900년대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영화 편집자이자 감독으로, 《시민 케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사운드 오브 뮤직》 등 여러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으며, 영화 편집자로서 경력을 시작하여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며 뛰어난 연출력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와이즈는 또한 영화 산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장 등을 역임하며 후배 영화인들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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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와이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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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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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버트 얼 와이즈 |
출생일 | 1914년 9월 10일 |
출생지 | 미국 인디애나주윈체스터 |
사망일 | 2005년 9월 14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우드 |
국적 | 미국 |
직업 |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 영화 편집자 |
활동 기간 | 1934년 - 2000년 |
가족 | |
배우자 | 패트리샤 도일 (1942년 5월 25일 결혼, 1975년 9월 22일 사별) 밀리센트 프랭클린 (1977년 1월 29일 결혼) |
자녀 | 1명 |
수상 | |
아카데미상 | 작품상 1961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 감독상 1961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 어빙 G. 탤버그상 1966년 |
칸 국제 영화제 |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1949년 『함정』 |
미국 영화 협회 (AFI) | 평생 공로상 1998년 |
골든 글로브상 | 국제 영화상 1951년 『지구가 멈추는 날』 |
방송 영화 비평가 협회상 | 평생 공로상 1997년 |
기타 정보 |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 해당 |
주요 작품 | 『지구가 멈추는 날』 『나는 살고 싶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사운드 오브 뮤직』 『산 파블로』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로버트 와이즈는 인디애나주 윈체스터에서 육류 포장업자인 아버지 얼 W. 와이즈와 어머니 올리브 R.(née 롱거네커)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1][2] 형으로는 데이비드가 있었다.[3] 가족은 인디애나주 코너스빌, 페이에트 군으로 이사했고, 와이즈는 그곳의 공립학교에 다녔다. 그는 젊은 시절 영화 보기를 가장 좋아했다.[4] 코너스빌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신문에 유머 및 스포츠 칼럼을 기고했고, 연감 제작진과 시 클럽의 일원이었다.[5][6] 와이즈는 언론인을 꿈꾸며 고등학교 졸업 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남쪽의 프랭클린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7] 그러나 1933년, 대공황으로 인한 가계 재정 악화로 2학년으로 복학하지 못하고, 영화 업계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할리우드로 이주했다.[8] 몇 년 전 할리우드로 이주해 RKO 픽처스에서 일하던 형 데이비드가 RKO 배송 부서에 일자리를 주선해주었다.[9] 이후 와이즈는 편집 업무를 맡기 전까지 스튜디오에서 여러 잡다한 일을 했다.[8]
와이즈는 RKO 픽처스(RKO Pictures)에서 음향 및 음악 편집자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1930년대 RKO는 "강한 직업 윤리"와 "예술적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가진 예산 중심의 스튜디오였는데, 이는 와이즈와 같은 할리우드 신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10] RKO에서 와이즈는 스튜디오의 음향 효과 편집 책임자인 T.K. 우드의 조수가 되었다.[11] 와이즈의 첫 번째 스크린 크레딧은 버려진 장편 영화에서 RKO의 푸티지를 사용해 제작된 10분짜리 단편 영화 ''피지랜드 여행''(1935)이었다.[12]
와이즈는 경험을 쌓으면서 음향보다는 영화 편집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RKO의 영화 편집자 윌리엄 "빌리" 해밀턴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13] 해밀턴의 조수로서 와이즈가 참여한 첫 영화는 알프레드 산텔의 ''윈터셋''(1936)이었다. 와이즈는 ''스테이지 도어''(1937), ''멋진 시간''(1938), ''버논과 아이린 캐슬의 이야기''(1939) 등 다른 영화에서도 해밀턴과 함께 작업했다.[13] ''노트르담의 꼽추''(1939)와 ''5번가 소녀''(1939)에서 해밀턴과 와이즈는 보조 영화 편집자로 스크린 크레딧을 공유했으며, 이는 와이즈가 장편 영화에서 처음으로 크레딧을 받은 작품이었다.[14] 와이즈가 처음으로 단독으로 영화 편집 작업을 한 작품은 ''배칠러 마더''(1939)와 ''나의 사랑하는 아내''(1939)였다.[15]
RKO에서 와이즈는 오슨 웰스와 함께 ''시민 케인''(1941)을 작업했으며,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9] 와이즈는 이 영화의 마지막 생존 제작진이었다. 와이즈는 ''시민 케인''의 편집자로 일했지만, 이 영화를 작업하는 동안 실용적인 광학 인쇄기의 발명자인 린우드 던이 시민 케인의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한 기술, 예를 들어 케인이 죽을 때 손에서 떨어지는 깨진 스노우 글로브에 투영된 이미지와 같은 기술에 익숙해졌을 가능성이 높다.[16]
웰스는 ''시민 케인''에서 심도 초점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 기법은 프레임 내에서 전경과 배경 모두에 선명한 초점을 맞추기 위해 강한 조명을 사용하는 기술이다. 와이즈는 나중에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서 이 기법을 사용했다.[17] 웰스의 ''시민 케인''은 와이즈가 영화에서 소리를 사용하는 방식의 혁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와이즈는 ''더 세트 업''(1949)에서 음악을 영화 내 소스로 제한했고, ''이그제큐티브 수트''(1954)에서는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18] 또한, 찰스 포스터 케인과 같은 허구의 인물에 대한 전기 영화 또는 전기적 프로필은 와이즈의 후기 작품의 주제가 되었으며, 여기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1956), ''나는 살고 싶다!''(1958), ''사운드 오브 뮤직''(1965), ''너무 커''(1953), ''조용히, 깊이 잠수하라''(1958), ''샌드 페블스''(1966) 등이 있다.[19] 와이즈는 웰스가 RKO에서 제작한 다음 영화인 ''매그니피센트 앰버슨스''(1942)의 편집자로도 참여했다. 와이즈는 영화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이 영화의 추가 장면을 촬영하도록 요청받았다.[20] 웰스가 스튜디오에서 해고된 후, 와이즈는 첫 번째 연출 배정을 받기 전에 ''세븐 데이즈 리브''(1942), ''폭격기''(1943) 및 ''더 폴른 스패로우''(1943)와 같은 영화를 계속 편집했다.[21]
2. 1. 유년 시절 및 교육
로버트 와이즈는 인디애나주 윈체스터에서 육류 포장업자인 아버지 얼 W. 와이즈와 어머니 올리브 R.(née 롱거네커)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1][2] 형으로는 데이비드가 있었다.[3] 가족은 인디애나주 코너스빌, 페이에트 군으로 이사했고, 와이즈는 그곳의 공립학교에 다녔다. 그는 젊은 시절 영화 보기를 가장 좋아했다.[4] 코너스빌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신문에 유머 및 스포츠 칼럼을 기고했고, 연감 제작진과 시 클럽의 일원이었다.[5][6] 와이즈는 언론인을 꿈꾸며 고등학교 졸업 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남쪽의 프랭클린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7] 그러나 1933년, 대공황으로 인한 가계 재정 악화로 2학년으로 복학하지 못하고, 영화 업계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할리우드로 이주했다.[8] 몇 년 전 할리우드로 이주해 RKO 픽처스에서 일하던 형 데이비드가 RKO 배송 부서에 일자리를 주선해주었다.[9] 이후 와이즈는 편집 업무를 맡기 전까지 스튜디오에서 여러 잡다한 일을 했다.[8]2. 2. RKO 픽처스에서의 초기 경력
로버트 와이즈는 RKO 픽처스(RKO Pictures)에서 음향 및 음악 편집자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10] 1930년대 RKO는 "강한 직업 윤리"와 "예술적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가진 예산 중심의 스튜디오였는데, 이는 와이즈와 같은 할리우드 신인에게 다행이었다.[10] RKO에서 와이즈는 스튜디오의 음향 효과 편집 책임자인 T.K. 우드의 조수가 되었다.[11] 와이즈의 첫 번째 스크린 크레딧은 버려진 장편 영화에서 RKO의 푸티지를 사용해 제작된 10분짜리 단편 영화 ''피지랜드 여행''(1935)이었다.[12]와이즈는 경험을 쌓으면서 음향보다는 영화 편집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RKO의 영화 편집자 윌리엄 "빌리" 해밀턴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13] 해밀턴의 조수로서 와이즈가 참여한 첫 영화는 알프레드 산텔의 ''윈터셋''(1936)이었다. 와이즈는 ''스테이지 도어''(1937), ''멋진 시간''(1938), ''버논과 아이린 캐슬의 이야기''(1939) 등 다른 영화에서도 해밀턴과 함께 작업했다.[13] ''노트르담의 꼽추''(1939)와 ''5번가 소녀''(1939)에서 해밀턴과 와이즈는 보조 영화 편집자로 스크린 크레딧을 공유했으며, 이는 와이즈가 장편 영화에서 처음으로 크레딧을 받은 작품이었다.[14] 와이즈가 처음으로 단독으로 영화 편집 작업을 한 작품은 ''배칠러 마더''(1939)와 ''나의 사랑하는 아내''(1939)였다.[15]
RKO에서 와이즈는 오슨 웰스와 함께 ''시민 케인''(1941)을 작업했으며,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9] 와이즈는 이 영화의 마지막 생존 제작진이었다.
와이즈는 ''시민 케인''의 편집자로 일했지만, 이 영화를 작업하는 동안 실용적인 광학 인쇄기의 발명자인 린우드 던이 시민 케인의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한 기술, 예를 들어 케인이 죽을 때 손에서 떨어지는 깨진 스노우 글로브에 투영된 이미지와 같은 기술에 익숙해졌을 가능성이 높다.[16]
웰스는 ''시민 케인''에서 심도 초점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 기법은 프레임 내에서 전경과 배경 모두에 선명한 초점을 맞추기 위해 강한 조명을 사용하는 기술이다. 와이즈는 나중에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서 이 기법을 사용했다.[17] 웰스의 ''시민 케인''은 와이즈가 영화에서 소리를 사용하는 방식의 혁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와이즈는 ''더 세트 업''(1949)에서 음악을 영화 내 소스로 제한했고, ''이그제큐티브 수트''(1954)에서는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18] 또한, 찰스 포스터 케인과 같은 허구의 인물에 대한 전기 영화 또는 전기적 프로필은 와이즈의 후기 작품의 주제가 되었으며, 여기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1956), ''나는 살고 싶다!''(1958), ''사운드 오브 뮤직''(1965), ''너무 커''(1953), ''조용히, 깊이 잠수하라''(1958), ''샌드 페블스''(1966) 등이 있다.[19] 와이즈는 웰스가 RKO에서 제작한 다음 영화인 ''매그니피센트 앰버슨스''(1942)의 편집자로도 참여했다. 와이즈는 영화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이 영화의 추가 장면을 촬영하도록 요청받았다.[20]
2. 3. 오슨 웰스와의 협업
와이즈는 RKO 픽처스(RKO Pictures)에서 음향 및 음악 편집자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10] RKO에서 와이즈는 스튜디오의 음향 효과 편집 책임자인 T.K. 우드의 조수가 되었다.[11] 오슨 웰스와 함께 ''시민 케인''(1941)을 작업했으며,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9] 와이즈는 이 영화의 마지막 생존 제작진이었다.웰스는 ''시민 케인''에서 심도 초점 기법을 사용했는데, 와이즈는 나중에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서 이 기법을 사용했다.[17] 웰스의 ''시민 케인''은 와이즈가 영화에서 소리를 사용하는 방식의 혁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와이즈는 ''더 세트 업''(1949)에서 음악을 영화 내 소스로 제한했고, ''이그제큐티브 수트''(1954)에서는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18] 또한, 찰스 포스터 케인과 같은 허구의 인물에 대한 전기 영화 또는 전기적 프로필은 와이즈의 후기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19] 와이즈는 웰스가 RKO에서 제작한 다음 영화인 ''매그니피센트 앰버슨스''(1942)의 편집자로도 참여했다. 와이즈는 영화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이 영화의 추가 장면을 촬영하도록 요청받았다.[20]
3. 감독 및 제작자 경력
와이즈에게 시청자와의 연결은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22] 와이즈는 또한 뛰어난 직업 윤리와 예산 절약을 중시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23] 게다가 그는 세부 사항에 대한 꼼꼼함과 영화를 위한 철저한 사전 준비로 유명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중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들이 항해할 때까지》(1957)를 연출하기 전에 와이즈는 뉴질랜드로 가서 영화에 묘사된 삶과 유사한 삶을 사는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와이즈의 세부 사항에 대한 주의는 해외 로케이션에도 적용되었다. 영화 연구를 위해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와이즈는 영화의 제2팀을 위해 배경 샷을 스카우트하기도 했는데, 이는 주요 영화가 캘리포니아의 MGM 후면 촬영장에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24] 그는 또한 멕시코시티에서 촬영된 B급 스릴러 영화 《멕시코의 미스터리》(1948)와 같이 현장 촬영을 하기도 했다.[25]
와이즈의 영화는 종종 인종적 관용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원주민, 무슬림, 히스패닉계,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투 플래그스 웨스트》(1950), 《오늘 밤은 어쩌면》(1957), 《세트업》(1949), 《내일은 없다》(1959),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와 같은 영화에 등장했다. 《샌드 페블스》(1966)는 혼혈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유대인 캐릭터는 《어떤 사람들은 날 좋아해》(1956), 《지구 최후의 날》(1951), 《텔레그래프 언덕의 집》(1951)에 포함되었다.[26]
RKO에서 와이즈는 1944년 할리우드 공포 영화 제작자 발 루턴을 위해 일하면서 처음으로 크레딧이 있는 연출직을 얻었다. 와이즈는 촬영 일정이 지연되면서 공포 영화 《고양이 인간의 저주》(1944)의 원래 감독을 대체했다.[27][28] "고독한 아이와 그녀의 상상 속 친구에 대한 어두운 판타지"로 호평을 받은 이 영화는 당시의 공포 영화와는 달랐다.[29] 와이즈의 많은 영화에서, 특히 《고양이 인간의 저주》에서 멜로드라마는 어둡고 성인적인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취약한 아이나 아이 같은 캐릭터를 사용했다.[30] 루턴은 와이즈를 RKO의 상사에게 추천했고, 이는 보리스 카를로프와 벨라 루고시가 출연한 주목할 만한 공포 영화 《시체 도둑》(1945)을 제작한 협업의 시작이었다.[31] 와이즈는 이 영화를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으며, 이 영화의 호평은 그가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쌓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32]
《고양이 인간의 저주》와 《시체 도둑》 사이에서 와이즈는 정치적 하위 텍스트를 통해 인간의 어두운 면을 탐구한 기 드 모파상의 두 단편 소설을 각색한 《마드모아젤 피피》(1944)를 연출했다.[33] #REDIRECT
{{Redirect category shell|
}}의 페미니스트적 관점과 기억에 남는 추격 시퀀스는 이 영화를 "와이즈의 템플릿 영화"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34] 와이즈는 또한 로렌스 티어니가 출연한 누아르 고전 《본 투 킬》(1947)과 로버트 미첨이 카우보이 방랑자로 출연하여 기억에 남는 야간 시퀀스를 포함한 누아르 서부극 《피는 달에》(1948)를 포함한 필름 누아르를 연출했다.[35]
그가 RKO에서 연출한 마지막 영화 《세트업》(1949)은 와이즈가 이 스포츠를 잔혹하고 착취적으로 묘사한 현실적인 복싱 영화였다.[36] 이 영화는 또한 안무된 격투 장면을 포함했으며 다른 격투 영화의 "기준을 세웠다".[37]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다.[38] 이 영화에서 와이즈가 시간의 사용과 언급은 나중에 필름 누아르 영화인 스탠리 큐브릭의 《킬링》(1956)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과 같은 영화에서 반복될 것이다.[39][40]
1950년대에 그는 《지구 최후의 날》(1951)의 SF, 《너무 커서》(1953)의 멜로드라마,[41] 제임스 케그니가 출연한 《불한당에게 바치는 노래》(1956)의 서부극,[42] 《이그제큐티브 수트》(1954)의 픽션화된 전기, 그리고 호머의 《일리아스》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트로이의 헬렌》(1955) 등 여러 장르에서 능숙함을 증명했다. 《세 개의 비밀》(1950)은 비누 오페라/가족 멜로드라마로, 와이즈가 여배우 패트리샤 닐과 "젠더 이중 기준에 대한 획기적인 연기"를 함께 할 기회를 제공했다.[43] 닐은 와이즈의 두 편의 영화, 《지구 최후의 날》(1951)과 《새들을 위한 무언가》(1952)에 출연했다. 원자력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SF 스릴러 《지구 최후의 날》은 현실적인 설정을 포함하고 특수 효과가 아닌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다.[44] 이 영화는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리뷰를 받았으며[45] "가장 오래 지속되고 영향력 있는 SF 영화 중 하나가 되었고, 주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최초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46]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자 바바라 그레이엄의 전기 《나는 살고 싶다!》(1958)는 수전 헤이워드가 그레이엄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47] 이 영화는 1959년 흥행작 중 하나가 되었으며 다른 매체에서 각색한 최고의 각본과 (흑백) 촬영상 후보에도 올랐다.[48] 또한 《이그제큐티브 수트》는 와이즈에게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베니스 영화제, 미국 감독 협회에서 감독상 후보 지명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으며 영국 영화 텔레비전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영화로 후보에 올랐다.[49] 와이즈가 1950년대에 연출한 다른 영화로는 권투 선수 로키 그라지아노의 초상화를 그린 《어떤 사람은 날 좋아해》(1956)에 폴 뉴먼이 출연했고,[50][51] 와이즈의 첫 번째 코미디인 《새들을 위한 무언가》(1952),[52] 액션 코미디 《데스티네이션 고비》(1953),[53] 그리고 보다 전통적인 전쟁 영화인 《사막의 쥐들》(1953)이 있다.[54]
1960년대에 와이즈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각색한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두 개의 그네》(1962),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이다.[55] 1961년 제롬 로빈스와 팀을 이룬 와이즈는 자신이 제작하기도 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와이즈와 로빈스는 감독상을 공동 수상한 최초의 듀오였다.[56] 와이즈는 또한 이 영화의 프로듀서로서 작품상으로 두 번째 오스카를 수상했다.[57]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11개의 아카데미상 후보 중 10개를 수상했다.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조지 채키리스), 여우조연상(리타 모레노), 촬영상(컬러), 미술/세트 장식(컬러), 음향, 뮤지컬 영화 작곡, 편집, 의상 디자인(컬러). 그는 다른 매체에서 각색한 최고의 각본 부문에서 《뉘른베르크의 재판》(1961)에 패했다.[58]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흥행에 성공했고,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영화 걸작"이라고 선언했다.[59]
《사운드 오브 뮤직》 (1965)을 연출하기 전에, 와이즈는 셜리 잭슨의 소설 《힐 하우스의 유령》을 각색하여 줄리 해리스가 출연한 심리 공포 영화 《더 헌팅》(1963)을 연출했다.[60]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가족 지향적인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와이즈가 대규모 제작하여 줄리 앤드루스가 마리아로,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폰 트랩 대위로 출연하여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61] 와이즈는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62] 와이즈는 덜 알려진 노래를 잘라내고 새로운 대화를 추가하여 전환을 개선함으로써 《사운드 오브 뮤직》이 지나치게 달콤하고 감상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63] 이 영화는 와이즈에게 두 개의 오스카를 안겨준 것 외에도 편집, 음향, 각색 음악 작곡 부문에서 3개의 상을 더 수상했다.[64]
《사운드 오브 뮤직》은 스튜디오를 달래기 위해 제작된 와이즈의 중간 영화였으며, 그가 스티브 맥퀸, 리처드 애튼버러, 캔디스 버겐이 출연한 어려운 영화 《샌드 페블스》(1966)를 개발하는 동안 제작되었다. 와이즈의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서사시 《샌드 페블스》는 베트남 전쟁의 우화였으며 반전 감독과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65][66] 맥퀸은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로 유일하게 오스카 후보에 올랐다.[57] 1920년대 후반 중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캐치-22》와 《M*A*S*H》에 이어 일련의 베트남 전쟁 시대 영화의 초기 작품이었다. 《샌드 페블스》에 대한 훌륭한 리뷰는 와이즈의 긴 경력에서 마지막 "창의적인 정점"을 기록했다.[67] 줄리 앤드루스가 거트루드 로렌스로 주연을 맡은 《스타!》(1968)는 흥행에 실패했지만,[68] 강한 여성의 삶의 선택이 멜로드라마적 관계를 불러일으키는 와이즈의 다른 성공적인 영화와 일치했다.[69] 앤드루스는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배역을 맡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으로서 와이즈는 영화의 단점에 대한 책임을 졌다.[69]
1970년대에 와이즈는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71), 《힌덴부르크》(1975), 공포 영화 《오드리 로즈》(1977), 그리고 첫 번째 《스타 트렉》 장편 영화인 《스타 트렉: 더 모션 픽처》(1979)와 같은 영화를 연출했다.[70]
마이클 크라이튼의 SF 스릴러를 각색한 와이즈의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71)은 반생물학전 영화로 "비평적인 히트를 쳤다".[71] 그의 다음 영화인 피터 폰다와 린제이 와그너가 출연한 《두 사람》(1973)은 "나쁜 평가"를 받았고 "와이즈가 연출한 영화 중 가장 덜 알려진 영화 중 하나"이다.[72] 동명의 비행선의 1937년 추락을 다룬 《힌덴부르크》(1975)는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최고의 시각 효과와 최고의 음향 효과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73] 와이즈의 《오드리 로즈》(1977)는 환생 스릴러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고 "때때로 ''엑소시스트'' (1973) 아류작이라는 비판을 받았다".[74]
스타 트렉의 인기 있는 텔레비전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장편 영화 중 첫 번째 영화인 《스타 트렉: 더 모션 픽처》(1979)는 와이즈에게 어려운 촬영이었다. 인기 영화 평론가 레너드 몰틴은 이 영화를 "느리고, 수다스럽고, 파생적이며, 훌륭한 특수 효과로 다소 구원받았다"라고 말했다.[75] 이 영화는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비평에는 실패했다.
와이즈는 리처드 레스터가 프랜차이즈에서 하차한 후 일리아와 Alexander Salkind가 연출한 ''슈퍼맨'' 스핀오프 영화 《슈퍼걸》의 감독으로 처음 선택되었지만 거절했다.[76] 와이즈는 또한 1985년 휴일 영화 《산타클로스: 더 무비》와 슬래셔 악당 처키를 소개하는 1988년 공포 영화 《차일드스 플레이》의 감독으로 고려되었다.[77][78] 1989년 와이즈는 그의 마지막 극장 장편 영화인 《루프탑스》를 연출했다. 저예산 뮤지컬은 "떠들썩함 없이 개봉하고 종료되었다".[75] 86세의 와이즈는 케이블 텔레비전인 쇼타임을 위해 《A Storm in Summer》(2000)을 연출했다. 피터 폴크가 출연한 이 영화는 2001년에 방영된 그의 유일한 텔레비전 영화였으며[57] 아동 특별 프로그램 부문에서 데이타임 에미상을 수상했다.[79]
3. 1. 초기 감독 작품 (1940년대)
로버트 와이즈는 세부 사항에 대한 꼼꼼함과 철저한 사전 준비로 유명했다.[24] 일례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들이 항해할 때까지》(1957)를 연출하기 전, 뉴질랜드 현지에서 여성들을 인터뷰하며 영화 속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또한, 멕시코시티에서 촬영된 B급 스릴러 영화 《멕시코의 미스터리》(1948)와 같이 현장 촬영을 하기도 했다.[25]와이즈의 영화는 인종적 관용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투 플래그스 웨스트》(1950), 《세트업》(1949), 《내일은 없다》(1959),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등에서 다양한 인종의 인물들을 등장시켰다.[26]
RKO에서 와이즈는 1944년 공포 영화 제작자 발 루턴을 위해 일하면서 첫 연출 기회를 얻었다. 촬영 일정 지연으로 《고양이 인간의 저주》(1944)의 원래 감독을 대체하게 된 와이즈는[27][28] 이 영화를 통해 당시 공포 영화와는 다른, "고독한 아이와 상상 속 친구에 대한 어두운 판타지"라는 호평을 받았다.[29] 루턴은 와이즈를 RKO 상사에게 추천했고, 보리스 카를로프와 벨라 루고시가 출연한 《시체 도둑》(1945)을 제작하는 협업이 시작되었다.[31] 와이즈는 《시체 도둑》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으며, 호평은 감독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32]
《고양이 인간의 저주》와 《시체 도둑》 사이에는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소설을 각색한 《마드모아젤 피피》(1944)를 연출했다.[33] 이후 와이즈는 로렌스 티어니 주연의 누아르 《본 투 킬》(1947), 로버트 미첨 주연의 누아르 서부극 《피는 달에》(1948) 등을 연출했다.[35]
RKO에서 와이즈의 마지막 영화인 《세트업》(1949)은 복싱을 잔혹하고 착취적으로 묘사한 현실적인 영화였다.[36]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으며,[38] 와이즈가 사용한 시간과 언급은 스탠리 큐브릭의 《킬링》(1956),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 등에 영향을 주었다.[39][40]
3. 2. 다양한 장르 탐구 (1950년대)
와이즈는 세부 사항에 대한 꼼꼼함과 영화를 위한 철저한 사전 준비로 유명했다.[23][24]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중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들이 항해할 때까지》(1957)를 연출하기 전에 뉴질랜드 현지에서 여성들을 인터뷰했다.[24] 또한, 멕시코시티에서 촬영된 B급 스릴러 영화 《멕시코의 미스터리》(1948)와 같이 현장 촬영을 하기도 했다.[25]와이즈의 영화는 종종 인종적 관용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무슬림, 히스패닉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제작했고,[26] 《샌드 페블스》(1966)는 혼혈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유대인 캐릭터는 여러 영화에 포함되었다.[26]
1950년대에 그는 《지구 최후의 날》(1951)의 SF,[41] 제임스 케그니가 출연한 《불한당에게 바치는 노래》(1956)의 서부극,[42] 《이그제큐티브 수트》(1954)의 픽션화된 전기, 호머의 《일리아스》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트로이의 헬렌》(1955) 등 여러 장르에서 능숙함을 증명했다. 《세 개의 비밀》(1950)은 비누 오페라/가족 멜로드라마로, 여배우 패트리샤 닐과 함께 할 기회를 제공했다.[43] 닐은 와이즈의 두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다. 원자력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SF 스릴러 《지구 최후의 날》은 현실적인 설정을 포함하고 특수 효과가 아닌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으며,[44] "가장 오래 지속되고 영향력 있는 SF 영화 중 하나가 되었고, 주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최초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46]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자 바바라 그레이엄의 전기 《나는 살고 싶다!》(1958)는 수전 헤이워드가 그레이엄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47] 또한 《이그제큐티브 수트》는 와이즈에게 여러 감독상 후보 지명을 안겨주었다.[49] 와이즈가 1950년대에 연출한 다른 영화로는 권투 선수 로키 그라지아노의 초상화를 그린 《어떤 사람은 날 좋아해》(1956)에 폴 뉴먼이 출연했고,[50][51] 와이즈의 첫 번째 코미디인 《새들을 위한 무언가》(1952),[52] 액션 코미디 《데스티네이션 고비》(1953),[53] 그리고 보다 전통적인 전쟁 영화인 《사막의 쥐들》(1953)이 있다.[54]
3. 3. 뮤지컬 영화의 성공 (1960년대)
로버트 와이즈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관객과의 연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22] 그는 뛰어난 직업 윤리와 예산 절약에 힘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23] 세부 사항에 대한 꼼꼼함과 철저한 사전 준비로도 유명했다.[24] 와이즈의 영화는 인종적 관용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26]1960년대에 와이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각색한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두 개의 그네》(1962),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이다.[55] 1961년 제롬 로빈스와 함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제작하고 연출하여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감독상을 공동 수상한 최초의 사례였다.[56] 와이즈는 이 영화의 프로듀서로서 작품상으로 두 번째 오스카상도 받았다.[57]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10개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으며,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영화 걸작"이라고 칭송했다.[58][59]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연출하기 전, 와이즈는 셜리 잭슨의 소설 《힐 하우스의 유령》을 각색한 심리 공포 영화 《더 헌팅》(1963)을 연출했다.[60] 이후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가족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대규모로 제작, 줄리 앤드루스를 마리아 역에, 크리스토퍼 플러머를 폰 트랩 대위 역에 캐스팅하여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 중 하나로 만들었다.[61] 와이즈는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62] 그는 덜 알려진 노래를 삭제하고 새로운 대화를 추가하여 영화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63] 이 영화는 와이즈에게 두 개의 오스카상을 안겨준 것 외에도 편집, 음향, 각색 음악 작곡 부문에서 3개의 상을 더 받았다.[64]
《사운드 오브 뮤직》은 와이즈가 스티브 맥퀸, 리처드 애튼버러, 캔디스 버겐이 출연한 《샌드 페블스》(1966)를 개발하는 동안 스튜디오를 달래기 위해 제작한 중간 영화였다.[65] 와이즈의 서사시 《샌드 페블스》는 베트남 전쟁의 우화였으며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66] 맥퀸은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로 유일하게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57] 1920년대 후반 중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캐치-22》와 《M*A*S*H》에 이어 일련의 베트남 전쟁 시대 영화의 초기 작품이었다. 《샌드 페블스》에 대한 훌륭한 리뷰는 와이즈의 긴 경력에서 마지막 "창의적인 정점"을 기록했다.[67] 줄리 앤드루스가 거트루드 로렌스로 주연을 맡은 《스타!》(1968)는 흥행에 실패했지만,[68] 강한 여성의 삶의 선택이 멜로드라마적 관계를 불러일으키는 와이즈의 다른 성공적인 영화와 일치했다.[69]
3. 4. 후기 작품 (1970년대-2000년)
로버트 와이즈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관객과의 연결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뛰어난 직업 윤리와 예산 절약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22][23] 세부 사항에 대한 꼼꼼함과 철저한 사전 준비로도 유명했는데, 일례로 《그들이 항해할 때까지》(1957) 연출 전 뉴질랜드에서 현지 여성들을 인터뷰했다.[24]와이즈의 영화는 인종적 관용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투 플래그스 웨스트》(1950), 《세트업》(1949), 《내일은 없다》(1959),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샌드 페블스》(1966) 등에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인물들을 묘사했다.[26]
1970년대에 와이즈는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71), 《힌덴부르크》(1975), 《오드리 로즈》(1977), 《스타 트렉: 더 모션 픽처》(1979) 등을 연출했다.[70]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71)은 "비평적인 히트"를 기록한 반생물학전 영화였다.[71] 동명의 비행선의 추락을 다룬 《힌덴부르크》(1975)는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시각 효과와 음향 효과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73] 환생을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 《오드리 로즈》(1977)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74]
TV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첫 번째 장편 영화인 《스타 트렉: 더 모션 픽처》(1979)는 촬영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비평가들로부터 "느리고 파생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75] 하지만 흥행에는 성공했다.
1989년 와이즈는 마지막 극장 장편 영화인 《루프탑스》를 연출했다.[75] 2000년에는 텔레비전 영화 《A Storm in Summer》를 연출하여 데이타임 에미상을 수상했다.[57][79]
연출 경력이 둔화되면서 와이즈는 영화 산업 지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이사 및 회장(1985-1988),[82] 미국 감독 조합 회장(1971-1975) 등을 역임했다.[83] 또한 미국 영화 연구소 이사, 전국 학생 영화 연구소 자문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83][84][85]
와이즈는 젊은 영화 제작자들을 격려하고 팬들과 소통했으며, 만년에는 자신의 영화 DVD 제작에 참여했다.[79]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스타 트렉: 더 모션 픽처》 감독판 DVD 해설이었다.[86]
4. 사회 참여 및 후원 활동
로버트 와이즈는 평생 자유주의자였으며, 미국 시민 자유 연맹을 포함한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80]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여러 단체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로버트 E. 와이즈 재단을 설립했다.[80] 와이즈의 개인 서류는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81]
와이즈의 연출 경력이 둔화되면서 그는 영화 산업을 지원하는 데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1966년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이사가 되었고, 1985년부터[82] 1988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 감독 조합 회장을 역임했으며, 미국 영화 연구소의 이사 및 고급 영화 연구 센터의 의장을 맡았다. 1980년 미국 감독 조합 특별 프로젝트 위원회 회장으로 임명되어 1986년 뉴욕에서 열린 50주년 기념 행사를 조직했다.[83] 전국 예술 과학 위원회, 뉴욕 현대 미술관의 영화학과, 영화 컨트리 하우스 앤 호스피탈의 주요 구성원이었다.[83]
1980년대와 1990년대 동안 전국 학생 영화 연구소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했다.[84][85]
와이즈는 또한 젊은 영화 제작자들을 격려하고 팬과 영화 학생들의 질문에 답했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의 감독 데뷔작인 ''지혜''(1986)의 제작을 감독했으며, 총괄 프로듀서였다.[79] 존 랜디스의 ''바보들''(1996)에 카메오로 출연했다.[79]
만년의 와이즈는 그의 영화 DVD 버전 제작에 계속 참여했으며, 영화 홍보를 위한 공개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사운드 오브 뮤직'', ''더 헌팅'', ''셋업''의 DVD 해설에 참여했다. ''샌드 페블스''와 ''이그제큐티브 스위트''의 DVD 해설을 감독했다. 편집된 장면, 새로운 시각 효과, 새로운 사운드 믹스가 포함된 ''스타 트렉: 더 모션 픽처''의 감독판 DVD 해설을 감독하고 제공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사망 전 마지막 프로젝트였다.[86]
5. 개인 생활
로버트 와이즈는 1942년 5월 25일 배우 패트리샤 도일과 결혼했다.[87] 와이즈 부부는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사교 활동과 여행을 즐겼으나, 1975년 9월 22일 아내가 암으로 사망했다.[88] 슬하에 아들 로버트가 한 명 있었으며, 촬영 보조로 일했다.[89] 1977년 1월 29일, 와이즈는 밀리센트 프랭클린과 재혼했다.[90] 밀리센트는 2010년 8월 31일, 로스앤젤레스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서 사망했다.
와이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부지에 넓은 방갈로와 현대적인 캘리포니아 해변 주택을 소유했다. 그는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영화를 계속 상영했으며, 자신의 영화에 대한 "최종 편집" 권한을 가졌다.[91]
와이즈는 심장마비를 겪고 UCLA 메디컬 센터로 급히 이송되었으며, 91번째 생일 4일 후인 2005년 9월 14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8][92]
6. 작품 목록
로버트 와이즈는 1939년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 1941년 영화 《시민 케인》등의 편집을 맡았다. 1944년 《고양이 인간의 저주》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1950년대에는 《지구가 멈추는 날》(1951), 《사막의 쥐》(1953), 《상처 뿐인 영광》(1956), 《나는 살고 싶다》(1958) 등을 감독했다. 특히 《나는 살고 싶다》는 수전 헤이워드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1961년에는 제롬 로빈스와 공동으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연출하여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5년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감독 및 제작하여 또다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스타 트렉》(1979) 등을 감독하였다. 2000년에는 TV 영화 《여름의 폭풍》을 감독했다.
연도 | 제목 | 감독 | 제작 | 비고 |
---|---|---|---|---|
1944 | 고양이 인간의 저주 | O | 건터 폰 프리치 감독 교체 | |
마드모아젤 피피 | O | |||
1945 | 바디 스내처 | O | ||
죽음의 게임 | O | |||
1946 | 크리미널 코트 | O | ||
1947 | 본 투 킬 | O | ||
1948 | 멕시코의 미스터리 | O | ||
달의 혈흔 | O | |||
1949 | 세트업 | O | ||
1950 | 투 플래그 웨스트 | O | ||
쓰리 시크릿 | O | |||
1951 | 텔레그래프 언덕의 집 | O | ||
지구가 멈추는 날 | O | |||
1952 | 캡티브 시티 | O | ||
새들을 위한 무언가 | O | |||
1953 | 데스티네이션 고비 | O | ||
사막의 쥐 | O | |||
파라다이스로의 귀환 | O | |||
소 빅 | O | |||
1954 | 임원 회의 | O | ||
1956 | 헬렌 오브 트로이 | O | ||
트리뷰트 투 어 배드 맨 | O | |||
어떤 사람은 나를 좋아해 | O | |||
1957 | 디스 쿠드 비 더 나잇 | O | ||
언틸 데이 세일 | O | |||
1958 | 런 사일런트, 런 딥 | O | ||
아이 원트 투 리브! | O | |||
1959 | 내일의 반대 | O | O | |
1961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 O | O | 제롬 로빈스와 공동 연출 |
1962 | 투 포 더 시소 | O | O | |
1963 | 더 헌팅 | O | O | |
1965 | 사운드 오브 뮤직 | O | O | |
1966 | 샌드 페블스 | O | O | |
1968 | 스타! | O | ||
1971 | 안드로메다 스트레인 | O | O | |
해피 버스데이, 완다 준 | O | |||
1973 | 투 피플 | O | O | |
1975 | 힌덴버그 | O | O | |
1977 | 오드리 로즈 | O | ||
1979 | 스타 트렉: 더 모션 픽처 | O | ||
1989 | 루프탑스 | O | ||
2000 | 여름의 폭풍 | O | TV 영화 |
6. 1. 감독
로버트 와이즈는 1939년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 1941년 영화 《시민 케인》등의 편집을 맡았다. 1944년 《고양이 인간의 저주》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였다.1950년대에는 《지구가 멈추는 날》(1951), 《사막의 쥐》(1953), 《상처 뿐인 영광》(1956), 《나는 살고 싶다》(1958) 등을 감독했다. 특히 《나는 살고 싶다》는 수전 헤이워드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1961년에는 제롬 로빈스와 공동으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연출하여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5년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감독 및 제작하여 또다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스타 트렉》(1979) 등을 감독하였다. 2000년에는 TV 영화 《여름의 폭풍》을 감독했다.
연도 | 제목 | 감독 | 제작 | 비고 |
---|---|---|---|---|
1944 | 고양이 인간의 저주 | 건터 폰 프리치 감독 교체 | ||
마드모아젤 피피 | ||||
1945 | 바디 스내처 | |||
죽음의 게임 | ||||
1946 | 크리미널 코트 | |||
1947 | 본 투 킬 | |||
1948 | 멕시코의 미스터리 | |||
달의 혈흔 | ||||
1949 | 세트업 | |||
1950 | 투 플래그 웨스트 | |||
쓰리 시크릿 | ||||
1951 | 텔레그래프 언덕의 집 | |||
지구가 멈추는 날 | ||||
1952 | 캡티브 시티 | |||
새들을 위한 무언가 | ||||
1953 | 데스티네이션 고비 | |||
사막의 쥐 | ||||
파라다이스로의 귀환 | ||||
소 빅 | ||||
1954 | 임원 회의 | |||
1956 | 헬렌 오브 트로이 | |||
트리뷰트 투 어 배드 맨 | ||||
어떤 사람은 나를 좋아해 | ||||
1957 | 디스 쿠드 비 더 나잇 | |||
언틸 데이 세일 | ||||
1958 | 런 사일런트, 런 딥 | |||
아이 원트 투 리브! | ||||
1959 | 내일의 반대 | |||
1961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 제롬 로빈스와 공동 연출 | ||
1962 | 투 포 더 시소 | |||
1963 | 더 헌팅 | |||
1965 | 사운드 오브 뮤직 | |||
1966 | 샌드 페블스 | |||
1968 | 스타! | |||
1971 | 안드로메다 스트레인 | |||
해피 버스데이, 완다 준 | ||||
1973 | 투 피플 | |||
1975 | 힌덴버그 | |||
1977 | 오드리 로즈 | |||
1979 | 스타 트렉: 더 모션 픽처 | |||
1989 | 루프탑스 | |||
2000 | 여름의 폭풍 | TV 영화 |
6. 2. 편집
로버트 와이즈는 1939년 《노트르담의 꼽추》, 1941년 《시민 케인》, 1942년 《위대한 앰버슨 가 사람들》 등의 영화 편집을 담당했다. 와이즈는 《시민 케인》과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의 편집을 맡았다. 《위대한 앰버슨 가 사람들》의 추가 시퀀스를 연출하기도 했다.1951년에는 《지구 최후의 날》, 1953년에는 《사막의 대진격》, 1956년에는 《상처 뿐인 영광》, 1958년에는 《나는 살고 싶다》의 편집을 담당했다.
와이즈는 뮤지컬 영화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편집을 맡았으며, 1979년에는 《스타 트렉》의 편집을 담당했다.
연도 | 제목 | 비고 |
---|---|---|
1939 | 싱글 마더 | |
피프스 애비뉴 걸 | ||
노트르담의 꼽추 | ||
1940 | 나의 사랑하는 아내 | |
댄스, 걸, 댄스 | ||
1941 | 시민 케인 | |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 | ||
1942 | 매그니피센트 앰버슨스 | 추가 시퀀스 연출 (크레딧 없음) |
세븐 데이즈 리브 | ||
1943 | 폭격기 | |
더 폴른 스패로우 | ||
아이언 메이저 |
7. 수상 및 영예
로버트 와이즈는 4번의 아카데미상 수상자(1961년과 1965년 최우수 감독상 및 작품상)이며, 1966년 아카데미 어빙 G. 탈버그 상을 받았다.[93] 196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작품상과 감독상을[102], 1965년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103] 1958년에는 나는 죽고 싶지 않다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101] 1966년에는 샌드 페블스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104] 또한 1941년에는 시민 케인으로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100]
미국 감독 조합에서는 평생 공로를 인정하여 D.W. 그리피스상(1988년)을 수여했으며,[79] 국립 예술 훈장(1992년),[94] AFI 공로상(1998년)을 받았다.[95] 영화 및 텔레비전 미술 감독 협회에서 "영화적 이미지에 뛰어난 공헌"으로 경력상을 수상했다(1998년).[79] 와이즈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별(#6340)을 가지고 있다.[96]
2012년, 영화 편집자 길드는 회원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역대 최고의 편집 영화 75편 목록을 발표했는데, 와이즈가 초기에 편집했던 영화인 ''시민 케인''은 2위에 올랐다.[97]
인디애나주에서 로저 D. 브래니건 주지사는 1967년 3월 1일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샌드 페블스'' 1967년 초연을 기념하여 로버트 와이즈의 날로 선포했다. 와이즈는 와바시의 사가모어로 임명되었다.[57] 1968년 와이즈는 프랭클린 칼리지에서 명예 미술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에는 대학을 위한 1,000만 달러 기금 모금 캠페인을 공동으로 이끌었다.[57] 인디애나주 코너스빌은 1968년 6월 4일을 로버트 와이즈의 날로 선포했고, 그의 출생지인 인디애나주 윈체스터는 그 다음 날 비슷한 선언을 했다.[98]
1990년 11월 3일, 와이즈는 새로운 코너스빌 고등학교에서 로버트 E. 와이즈 공연 예술 센터의 헌정식에 참석했다.[98] 1992년, 와이즈는 인디애나폴리스에 본사를 둔 하트랜드 영화제의 첫 번째 크리스탈 하트 공로상을 수상했다.[98] 2002년, 인디애나 역사 협회는 와이즈를 살아있는 전설로 선정했다.[99] 와이즈는 카운티 법원에 있는 유명한 인디애나주 랜돌프 카운티 출신 인물들의 벽화에 묘사되어 있으며, 이 벽화는 지역 예술가 로이 L. 반스가 그렸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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