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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우스 퀴에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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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베르베르 출신의 로마 고위 귀족이자 로마 군인이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얻은 후 기병대 장교로 복무하며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기사 지위를 받았으나 불복종으로 인해 전역당했다.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에 다시 군에 복귀하여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원정에 참전했으며,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퀴에투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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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우스 퀴에투스
루시우스 퀴에투스
알려지지 않은 로마 초상화
알려지지 않은 로마 초상화
기본 정보
출생로마 제국,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사망118년
활동 시기2세기
직업군인
군대로마 군대
계급장군
경력
복무로마
참여 전쟁다키아 전쟁, 로마-파르티아 전쟁 (114-118)
주요 역할유대 속주 총독
로마 장군

2. 생애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베르베르인[5]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와 전사들은 서기 40년 아이데몬의 반란 때 로마가 마우레타니아 틴기타나(오늘날 모로코 북부)를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2] 퀴에투스의 아버지가 로마에 헌신한 공로로 퀴에투스와 그의 가족은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1] 퀴에투스는 로마 기병대에서 보조 장교(군대)로 복무했고,[1][4]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에게 기사 계급을 하사했지만, 이후 불복종을 이유로 해임했다.[1][4]

트라야누스 황제 즉위 후, 퀴에투스는 다시 군에 복귀하여 다키아 전쟁에서 보조군 기병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1] 다키아 정복 이후, 퀴에투스는 원로원 의원으로 신분이 상승했다.[1] 그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전하여 니시비스와 에데사 등을 약탈했고, 승산없는 전투를 지휘해 병력의 전략적 후퇴를 이끌어 전멸을 막았다.[1]

115-116년 트라야누스파르티아 원정 동안, 퀴에투스는 니시비스와 에데사를 약탈했다.[1] 바빌로니아 봉기가 일어나자, 퀴에투스는 이들을 진압하고 유다이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 키레네(키레나이카),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유대인 이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은 키토스 전쟁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 파괴와 로마 시민 등에 대한 학살을 야기했다. 이 명칭은 퀴에투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1] 퀴에투스는 리다를 점령하고 반란군을 조직적으로 격퇴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가문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본래 베르베르[5]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전사들은 서기 40년 아이데몬의 반란 당시에 로마가 마우레타니아 틴기타나(오늘날 모로코 북부)를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2]

2. 2. 로마 시민권 획득과 군 복무

퀴에투스의 아버지가 로마에 헌신한 공로, 특히 악명 높은 변경 지역에서의 활약은 퀴에투스와 그의 가족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영예로 이어졌다.[1] 퀴에투스는 후에 로마 군대에 입대하여 로마 기병대에서 보조 장교(군대)로 복무했다.[1][4] 뛰어난 공로로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그에게 기사 계급을 하사했지만, 이후 불복종을 이유로 해임했다.[1][4]

2. 3. 트라야누스 황제와의 관계와 군사적 업적

트라야누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퀴에투스는 다시 군에 복귀했다. 그는 다키아 전쟁에서 황제의 보조군 기병대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복무했으며, 그의 민머리를 한 베르베르 기병대는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 원주에서 볼 수 있다.[1] 다키아 정복 이후, 퀴에투스는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상승했다.[1] 그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전하여 니시비스와 에데사 등의 도시들을 약탈했고, 이때 승산없는 전투를 지휘해 병력의 전략적 후퇴를 이뤄내고 전멸로부터 구해냈다.[1] 이 행동은 퀴에투스가 찬사를 받게 했고 군대에서 인정을 보장받았다.[1]

2. 4. 키토스 전쟁과 유대 총독 임명

115-116년 트라야누스파르티아 원정 동안, 퀴에투스는 니시비스와 에데사를 약탈했다.[1] 바빌로니아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퀴에투스는 이들을 진압하고 유다이아 총독으로 임명되는 보상을 받았다.[1]

키레네(키레나이카),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유대인 이주민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은 키토스 전쟁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 파괴와 로마 시민 및 기타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야기했다. 이 명칭은 퀴에투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1] 퀴에투스는 리다를 점령하고 반란군을 조직적으로 격퇴했다.[1]

3. 죽음

하드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118년에 퀴에투스는 살해당했다.[6][3] 퀴에투스가 군대에서 얻은 인기와 트라야누스와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하드리아누스가 우려하여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6][3] 탈무드 기록에서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로마 장군이 갑작스럽게 처형당했다고 언급된다.[6][3]

참조

[1] 웹사이트 Trajan's War - Livius https://www.livius.o[...] 2021-03-01
[2] 서적 Dio's Rome Kessinger Publishing 2004
[3] 문서 Histoire des Juifs, Troisième période, I - Chapitre III - Soulèvement des Judéens sous Trajan et Adrien
[4]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20-06-25
[5] 서적 Dio's Rome Kessinger Publishing 2004
[6] 문서 Histoire des Juifs, Troisième période, I - Chapitre III - Soulèvement des Judéens sous Trajan et Adr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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