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에밀 베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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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에밀 베르탕은 프랑스의 해군 기술자이자 함정 설계 엔지니어였다. 1840년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나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해군 공병대에서 일했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일본 제국 해군의 외국인 고문으로 활동하며 7척의 주력함과 22척의 어뢰정을 설계, 건조하여 일본 해군의 발전에 기여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해군기관학교 교장, 해군 함정 본부장을 역임했으며, 1903년 프랑스 학사원에 입회했다. 그의 사후, 프랑스 해군의 경순양함 '에밀 베르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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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에밀 베르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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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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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이 에밀 베르탱 |
출생 | 1840년 3월 23일 |
출생지 | 프랑스 낭시 |
사망 | 1924년 10월 22일 (84세) |
사망지 | 프랑스 망슈주 라 글라세리 |
국적 | 프랑스 |
직업 | 해군 기술자 |
학력 | |
학력 | 프랑스 파리 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
경력 | |
활동 기간 | 1871년 ~ 1924년 |
소속 | 프랑스 파리 대학교 전임교수 |
2. 생애
(내용 없음)
2. 1. 초기 생애
베르탕은 1840년 3월 23일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났다.[1][2][3] 1858년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해군 공학 분야(해군 공병대, Génie Maritime|제니 마리팀fra - '바다의 천재'라는 의미)를 선택했다.[1][2][3] 그의 역할 모델은 프랑스 최초의 철갑선을 설계한 앙리 뒤퓌 드 롬이었다.[1][2][3] 베르탕은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설계로 유명해졌으며, 뛰어난 해군 건축가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1][2][3] 또한 1871년에는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1][2][3]2. 2. 일본에서의 활동 (1886년 ~ 1890년)
1885년 일본 정부는 프랑스 해군 기술자를 설득하여, 베르탕을 1886년부터 1890년까지 4년간 일본 제국 해군의 외국인 초빙사로 초빙했다. 베르탕은 일본인 기술자와 선박 설계 기술자를 양성하고, 현대적인 군함을 설계 및 건조하며 해군 시설을 건축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45세였던 베르탕에게 이는 해군의 전반적인 설계를 담당하고, 프랑스 해군의 주네 에콜 사상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 또한 프랑스 정부에게는 당시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영국이나 독일과 경쟁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였다.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베르탕은 7척의 주력함과 22척의 어뢰정을 설계하고 건조를 감독했는데, 이 함선들은 초기 일본 제국 해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강력한 32cm 카네포 1문을 탑재한 마쓰시마형 방호순양함 3척이 있으며, 이 함선들은 이후 청일 전쟁(1894년-1895년)에서 일본 함대의 주력이 되었다. 또한 베르탕은 구레와 사세보의 해군 공창 및 조선소 건설을 지휘했다.
그러나 베르탕의 일본 체류 시기는 정치적 음모로 얼룩지기도 했다. 일본 정부 내에는 프랑스보다 영국이나 독일을 선호하는 파벌이 있었고, 과거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했던 프랑스에 대한 불신도 여전했다. 이로 인해 베르탕의 입지가 여러 차례 위협받았으며, 그의 설계 기반이 된 주네 에콜 사상이 아직 실전에서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도 우려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탕이 일본 해군 건설에 기여한 노력은 1894년 9월 17일 황해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기함 마쓰시마에 승선했던 일본 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 제독은 베르탕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함선들은 우리의 모든 기대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들은 우리 함대의 강력한 요소였습니다. 강력한 무장과 지능적인 설계 덕분에 우리는 중국 장갑함에 맞서 훌륭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1][4][6]
1890년 말, 에밀 베르탕은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욱일장 2등 훈장을 받았다. 수여식에서 해군 대신 사이고 주도는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평가했다.
: 베르탕은 해방함과 1등 순양함 건조 계획을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함대 조직, 해안 방어, 대구경포 제작, 철강 및 석탄 등 자재 사용에 대한 여러 제안을 했습니다. 그는 일본에 머무는 4년 동안 해군 기술 혁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그 결과는 매우 두드러집니다.[2][5][7]
2. 2. 1. 일본에서 설계 및 건조한 군함

베르탕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총 7척의 주요 군함과 22척의 어뢰정을 설계 및 건조 감독했으며, 이는 초기 일본 제국 해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그가 설계하거나 건조에 관여한 주요 함선은 다음과 같다.
- '''방호순양함 3척''': 4278ton급 마쓰시마형 방호순양함. 이 함선들은 강력한 32cm(카네포) 주포 1문을 탑재하여 청일 전쟁 당시 일본 함대의 주력을 이루었다.
- 마쓰시마: 프랑스의 지중해 철공 조선소(Forges et Chantiers de la Méditerranée)에서 건조.
- 이쓰쿠시마: 프랑스의 지중해 철공 조선소에서 건조.
- 하시다테: 일본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건조.
- '''소형 순양함 2척'''
- 치요다: 2439ton급. 영국 글래스고의 톰슨사(존 브라운 앤 컴퍼니) 조선소에서 건조.
- 야에야마: 1609ton급. 일본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건조.
- '''경순양함 1척'''
- 지시마: 프랑스 생나제르의 루아르 조선소(Ateliers et Chantiers de la Loire)에서 건조.
- '''프리깃 1척'''
- 다카오: 1774ton급. 일본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건조.
- '''어뢰정 16척'''
- 제5호형 어뢰정: 각 54ton급. 총 14척 중 5척이 프랑스 크뢰조의 슈나이더사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일본에서 조립되었고, 나머지 9척은 일본 국내에서 건조되었다.
- 제15호형 어뢰정: 각 54ton급. 총 2척 중 1척이 프랑스의 노르망사(Augustin Normand)에서 건조되었고, 나머지 1척은 일본 국내에서 건조되었다.
이 함선들은 1894년 황해 해전에서 일본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마쓰시마형 방호순양함은 일본 함대의 핵심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2. 3. 프랑스 귀국 이후
프랑스로 귀국한 베르탕은 해군기관학교(École du Génie Maritime)의 교장으로 승진했다. 1895년에는 조선 대장(ingénieur généralfra)의 지위를 얻었고, 해군 함정 본부장(Directeur des Construction Navalesfra)이 되었다. 그가 본부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프랑스 해군은 톤수 기준으로 세계 2위의 해군이 되었다.프랑스에 돌아온 후, 그는 테오필 오브 제독의 주네 에콜 지지자들과 불화를 겪었으며, 동료 설계자들의 설계를 여러 차례 비판했다. 1903년에는 프랑스 학사원에 입회했다. 그의 설계 비판은 이후 1915년 전함 부베가 침몰하면서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3. 유산
방호를 가볍게 하고 포력을 중시하는 순양함이라는 베르탕의 설계 개념은 전드레드노트급 군함의 등장과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러일 전쟁을 거치며 '주네 에콜' 사상과 함께 점차 신뢰를 잃었다. 일본 내에서도 마쓰시마형 방호순양함의 종합적인 성능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1886년 12월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순양함 우네비가 침몰한 이후, 베르탕이 떠난 후의 일본 해군 함선 설계는 프랑스보다 영국 조선소에 발주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베르탕의 진정한 유산은 그가 건설을 도운 일련의 근대적 조선소, 특히 구레 해군 공창과 사세보 해군 공창이었다. 이는 일본 해군력 증강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참고로 일본 최초의 근대식 공창인 요코스카 해군 공창은 베르탕보다 앞선 1865년에 다른 프랑스인 기술자 레온스 베르니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 일본의 공창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해군을 위해 아랍급 구축함 12척을 건조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 업적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 해군의 경순양함에 그의 이름인 '에밀 베르탱'이 붙여졌다. 이 순양함은 1940년, 나치 독일의 약탈을 막기 위해 프랑스 은행의 금 보유고를 마르티니크로 안전하게 이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베르탕은 선박의 롤링(좌우 흔들림)과 피칭(상하 흔들림)을 연구하기 위해 트윈 오실로그래프를 발명하기도 했다.
4. 저서
- Données Expérimentales sur les vagues et le roulisfra (파도와 롤링에 관한 실험적 데이터, 1874)
- La Marine à Vapeur de Guerre et de Commercefra (전쟁과 상업의 증기 해군, 1875)
- Les Grandes Guerres Civiles du Japonfra (일본의 대규모 내전, 1894)
- Chaudières Marines, Cours de Machine à Vapeurfra (해상 보일러, 증기 기관 강좌, 1896)
- État actuel de la marine de guerrefra (현재의 해군 상태)
- Évolution de la puissance défensive des navires de guerrefra (전함의 방어력 진화, 1906)
- La marine modernefra (현대 해군, 1910)
- La marine moderne. Ancienne histoire et questions neuvesfra (현대 해군. 고대 역사와 새로운 문제, 1920)
참조
[1]
서적
La Marine moderne d'Émile Bertin
[2]
간행물
France-Japon Eco
[3]
웹사이트
Marine boilers—their construction and working
https://archive.org/[...]
[4]
서적
La Marine moderne d'Émile Bertin
[5]
간행물
France-Japon Eco
[6]
서적
La Marine moderne d'Émile Bertin
[7]
간행물
France-Japon 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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