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피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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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 피가로는 1826년 창간된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로, 보마르셰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에서 이름과 표어를 따왔다. 1866년 일간 신문으로 전환했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발행 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상류 중산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세르주 다소가 소유한 피가로 그룹에 속해 있으며, 온라인 섹션 FigaroVox를 운영하고 있다. 르 피가로는 다양한 부록과 섹션을 발행하고 있으며, lefigaro.fr을 통해 온라인 뉴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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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피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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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신문 종류 | 일간 신문 (1866년 11월 16일부터) |
판형 | 베를리너 |
소유주 | 피가로 그룹 (다소 그룹) |
편집장 | 알렉시 브레제 |
창간일 | 1826년 1월 15일 |
정치 성향 | 중도우파 프랑스 민족주의 자유보수주의 |
사용 언어 | 프랑스어 |
본사 위치 | 파리 75009, 오스만 대로 14번지 |
발행 부수 | 354,853부 (총합, 2022년) |
디지털 발행 부수 | 84,000부 (2018년) |
ISSN | 0182-5852 |
eISSN | 1638-606X |
OCLC 번호 | 473539292 |
웹사이트 | Le Figaro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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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르 피가로는 1826년 풍자 주간지로 창간되었으며,[12][13] 1866년 일간지로 전환되었다.[15] 초기에는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에서 이름과 표어를 따왔으며, "비판할 자유가 없다면 아첨하는 칭찬도 없다"라는 표어를 사용했다.
1909년에는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미래주의 확립에 기여했고,[17] 1914년에는 편집장 가스통 칼메트가 앙리에트 칼유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8] 1922년에는 프랑수아 코티에게 매각되었고,[19] 아벨 파이브르가 신문에 만화를 그렸다.[20]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프랑스 최고의 신문 중 하나였으며, 이후 상류 중산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1975년 로베르 에르쌍을 거쳐 2004년부터 세르주 다소가 소유하고 있다.[12]
2006년에는 이슬람 모욕 기사로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금지되었고,[23][24] 2009년 베를린 판형으로 전환했다.[25] 뉴욕 타임스와의 협력을 통해 국제적인 관계를 강화했다.[26]
2. 1. 창간과 초기 (1826년 ~ 1866년)

1826년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에서 이름과 표어를 따와 풍자 주간지로 창간되었다.[12][13] 이 희곡은 특권층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르 피가로의 표어는 "비판할 자유가 없다면 아첨하는 칭찬도 없다"(Sans la liberté de blâmer, il n'est point d'éloge flatteur)는 의미로, 희곡 마지막 장면 피가로의 독백에서 따온 것이다. 1833년 편집장 네스토르 로크플랭은 르 피가로의 기사에 불쾌감을 느낀 갈루아 대령과 결투를 벌여 부상을 입었으나 회복했다.[14] 알베르 울프, 에밀 졸라, 장바티스트 알퐁스 카르, 테오필 고티에, 쥘 아르센 아르노 클라레티 등이 초기 기고가로 참여했다. 1854년 쥘 빌메상이 인수하기 전까지는 발행이 다소 불규칙적이었다.
1866년 르 피가로는 일간 신문이 되었다.[15] 1866년 11월 16일자 첫 일간 신문은 5만 6천 부가 판매되어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발행 부수를 기록했다. 당시 편집 방향은 왕당파적이었다.[16] 폴린 사바리도 당시 기고가 중 한 명이었다.
2. 2. 일간지 전환과 발전 (1866년 ~ 1914년)
1866년, 르 피가로는 일간 신문이 되었다.[15] 첫 일간 신문은 1866년 11월 16일에 발행되었으며 5만 6천 부가 판매되어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발행 부수를 기록했다. 당시 편집 방향은 왕당파적이었다.[16] 폴린 사바리(Pauline Savari)도 당시 기고가 중 한 명이었다.1909년 2월 20일, 르 피가로는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미술계에 미래주의(Futurism)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17]
2. 3.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14년 ~ 1975년)
1914년 3월 16일, 르 피가로의 편집장 가스통 칼메트는 남편 조제프 칼유 재무장관의 직무 청렴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편지를 발표한 후, 그의 아내 앙리에트 칼유에 의해 암살당했다.[18] 1922년, 르 피가로는 향수 재벌 프랑수아 코티에게 매각되었다.[19] 프랑수아 코티는 1929년 3월 신문 이름을 단순히 피가로로 바꾸었는데, 이는 1933년까지 유지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21]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르 피가로는 프랑스 최고의 신문이 되었다. 전쟁 후에는 상류 중산층의 목소리가 되었고,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2. 4. 로베르 에르쌍과 세르주 다소 시대 (1975년 ~ 현재)
1975년, 르 피가로는 로베르 에르쌍(Robert Hersant)의 소크프레스(Socpresse)에 매각되었다.[12] 1999년, 칼라일 그룹(The Carlyle Group)이 신문 지분 40%를 확보했으나, 2002년 3월에 매각했다. 2004년 3월부터 르 피가로는 보수적인 사업가이자 정치인인 세르주 다소(Serge Dassault)의 지배를 받고 있다.[12] 그는 아버지이자 다소 항공(Dassault Aviation) 창업자인 마르셀 다소(Marcel Dassault, 1892~1986)로부터 회사를 상속받았다. 다소는 미디어 자회사 피가로 그룹(Groupe Figaro)을 통해 신문 지분 80%를 소유하고 있다.[12]세르주 다소의 소유 이후, 르 피가로는 우파적 성향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6년에는 이슬람을 모욕하는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23][24]
2009년, 르 피가로는 베를린 판형으로 전환했다.[25] 또한, 2009년부터 매주 금요일 뉴욕 타임스 인터내셔널 위클리(The New York Times International Weekly)를 8페이지 분량의 부록으로 발행하고 있으며,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기사 중 일부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게재하는 등 국제적인 협력을 강화했다.[26] 2010년에는 Lefigaro.fr에 영어로 된 르 피가로 섹션을 만들었으나, 2012년에 폐쇄되었다.[26][27]
2010년대에는 르 피가로에서 에릭 젬무르(Éric Zemmour)의 칼럼이 독자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모았고, 이는 그의 정치 경력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28]
3. 편집 성향과 논란
르 피가로는 전통적으로 보수주의 성향을 띠며 프랑스 상류층과 중산층의 의견을 대변해왔다.[9]
신문 소유주인 세르주 다소는 주요 군수업체를 소유하고 인민운동연합에서 정치적 직책을 겸임했기 때문에 이해 상충 문제가 제기되었다.[29] 그의 아들 올리비에 다소도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이었다.[29] 다소는 2004년 프랑스앵테르 라디오 인터뷰에서 "신문은 건전한 사상을 전파해야 하며 좌익 사상은 건전한 사상이 아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30]
2012년 2월, 에티엔 무주트 편집장 시절 르 피가로가 집권 여당인 인민운동연합과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을 옹호하는 편향적인 보도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기자들은 총회를 열어 결의안을 채택하고, 더 많은 다원주의와 정직성을 요구하며 신문의 일방적인 정치 보도를 비난했다. 무주트는 앞서 르 피가로가 정부와 우파를 당황하게 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31][32][33] 무주트는 "우리의 편집 방향은 독자들에게 만족스럽고, 효과가 있다. 왜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반박했다.[34]
3. 1. FigaroVox
알렉시 브레제(Alexis Brézet)가 2014년에 르 피가로의 온라인 섹션으로 설립하였다. 브레제는 파트릭 뷔송(Patrick Buisson)의 조언을 받아 FigaroVox를 설립했는데,[54] 뷔송은 2012년 니콜라 사르코지의 극우 성향에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54] FigaroVox는 인쇄 매체의 "토론 및 의견" 섹션을 인터넷으로 확장한 것이었다.[56] 르 피가로 웹사이트의 메인 페이지에 게재된 FigaroVox 기사들은 이 일간지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했다.[54]FigaroVox는 주로 우파, 가톨릭, 그리고 "프랑스 신반동주의자들(Nouveaux réactionnaires)"의 교차점에 위치한 인물들이 기고했다.[57] 뱅상 트레몰레 드 빌레르(Vincent Trémolet de Villers)가 이끌었으며, 편집장은 아틀랑티코(Atlantico) 사이트 출신 기자 알렉상드르 데벡시오(Alexandre Devecchio)였다.[54] 기고가로는 막심 탕도네(Maxime Tandonnet)와 질-윌리엄 골드나델(Gilles-William Goldnadel) 등이 있었다.[54]
FigaroVox는 주로 "공화주의 학교의 쇠퇴, 부실하게 관리되는 이민, 그리고 국가 정체성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서의 이슬람"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61]
사회학자 필립 코르퀴프(Philippe Corcuff)는 FigaroVox를 "극우 보수" 섹션으로 간주했다.[58] 잡지 ''에스프리''(Esprit)의 사회학자 장-루이 슈레겔(Jean-Louis Schlegel)은 그것을 ''코죄르''(Causeur)나 ''발뢰르 악튀엘''(Valeurs actuelles)과 유사한 "우익 중에서도 가장 우익"을 위한 플랫폼으로 묘사했다.[59] 뤼89(Rue89)의 놀웬 르 블레브네크(Nolwenn Le Blevennec)는 극우를 위한 플랫폼으로 묘사했다.[61]
가엘 브뤼스티에(Gaël Brustier), 장-뤼크 멜랑숑(Jean-Luc Mélenchon), 토마 귈놀레(Thomas Guénolé)[56] 등 좌파 인물들도 "때때로"[61] 초청되었거나, 로랑 부베(Laurent Bouvet)처럼 더 자주 초청되었다.[63] 에릭 제무르(Éric Zemmour)와 알랭 핑켈크라우트(Alain Finkielkraut)는 매우 환영받는 인물이었다.[61]
2019년부터는 기욤 페로(Guillaume Perrault)가 이 섹션을 이끌고 있으며, 알렉상드르 데벡시오(Alexandre Devecchio)가 부편집장을 맡았다.[65] 2020년에는 베르틸 바야르(Bertille Bayart), 니콜라 바베레즈(Nicolas Baverez), 르노 지라르(Renaud Girard), 마티외 보크-코테(Mathieu Bock-Côté), 뤼크 페리(Luc Ferry), 이반 리우폴(Ivan Rioufol) 등 6명의 고정 칼럼니스트와 초청 기고가들이 있었다.[56]
4. 발행 부수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르 피가로의 발행 부수는 391,533부로, 르 파리지앵의 451,159부보다 적었다.[35] 1990년대 중반에는 르 파리지앵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했다.
연도 | 1999년 | 2000년 | 2001년 | 2002년 | 2003년 | 2004년 | 2005년 | 2006년 | 2007년 | 2008년 | 2009년 | 2010년 | 2011년 | 2012년 | 2013년 | 2014년 |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 2019년 | 20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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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부수 | 366,690 | 360,909 | 366,529 | 369,108 | 369,706 | 365,083 | 337,118 | 332,818 | 338,618 | 330,482 | 323,991 | 325,509 | 329,367 | 330,952 | 324,170 | 320,732 | 317,152 | 311,127 | 312,994 | 313,694 | 329,462 | 331,927 |
2000년대 이후 발행 부수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으나, 여전히 프랑스 주요 일간지 중 하나이다.
5. 르 피가로 그룹
르 피가로는 마르셀 다소 산업 그룹의 자회사인 피가로 그룹(Groupe Figaro)에 속해 있다.[36] 2011년, 소크프레스(Socpresse)는 공식적으로 다소 미디어(피가로 그룹)가 되었다.[36]
피가로 그룹은 다양한 자회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여러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주요 자회사는 다음과 같다.
- 미디어 피가로(Media Figaro)
- 메테오 컨설트(Météo Consult) 및 라 셰인 메테오(La Chaîne Météo)
- 파르티큘리에 에 피낭스 에디시옹(Particulier et Finances Éditions)
- 피가로 클래시파이드(Figaro Classifieds)
- 마르코 바스코(Marco Vasco)
또한, 르 피가로는 1970년부터 피가로 솔리테르(Solitaire du Figaro) 요트 경주를 후원하고 있으며, 파리정치대학 정치연구센터와 협력하여 정치 연구를 발표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르 몽드를 대신하여 프로그램 "르 그랑 쥐리"의 파트너가 되었다.
2006년 sport24.com을 인수하였고,[66] 2007년에는 evene.fr을 인수하여 르 피가로스코프(Le Figaroscope)와의 시너지를 만들었다.[67] 같은 해 티켓팅 서비스 Ticketac.com을 인수했다.[68] 2008년에는 메테오 컨설트(Météo Consult)를,[69] 2009년에는 파르티큘리에 에 피낭스 에디시옹(Particulier et Finances Éditions)을 인수했다.[69] 2010년에는 아덴클래시파이드(Adenclassifieds)를 인수하여 자회사 피가로 클래시파이드(Figaro Classifieds)를 설립했고,[70] 2015년에는 CCM 벤치마크 그룹(CCM Benchmark Group)을 인수했다.[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