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스 노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에스 노르는 1943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바타비아에서 태어난 인도네시아 배우였다. 1952년 영화 《풀랑》으로 데뷔하여 1950년대 인도네시아 영화계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으며, 1955년에는 다섯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56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 인도네시아 대표단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60년 출산 후 복귀하여 영화에 출연했으나, 1961년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도네시아의 여자 영화 배우 - 바비 후와에
바비 후와에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배우, 모델, 점성가로 활동했으며, 영화 출연과 걸 그룹 활동, 패션쇼 개최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다가 수카르노 대통령 관련 스캔들에 연루된 후 점성가로 활동하며 사망했다. - 인도네시아의 여자 영화 배우 - 친타 라우라
친타 라우라는 인도네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배우, 가수, 모델로 활동하며, 인도네시아 국가대표 수영 선수 경력과 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 전공을 가지고 있으며, 2007년 배우 데뷔 후 앨범 발매, 할리우드 진출, 사회 활동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다. - 1961년 출생 - 박래군
박래군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생 박래전의 죽음을 계기로 인권 운동에 참여하여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및 정책실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국 국장, 다산인권재단 상임이사,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및 소장,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 전문위원 및 부위원장, 2014년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인권 운동가이다. - 1961년 출생 - 이진숙 (언론인)
이진숙은 문화방송의 기자 및 간부로 활동하다가 대전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했고, 걸프 전쟁 등 다양한 보도 활동을 펼쳤으며, 자유한국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2024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직무가 정지되었다. - 살아있는 사람 - 릴 테르셀리우스
릴 테르셀리우스는 위키백과 문서에서 관련 문서와 추가 자료를 제시하는 데 사용되는 구성 요소이다. - 살아있는 사람 - 마그달레나 툴
폴란드의 가수 마그달레나 툴은 2007년 데뷔 앨범 발매 후 2011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폴란드 대표로 참가했으며, 이후에도 앨범 발매와 유로비전 관련 활동, 방송 출연 등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리에스 노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엘리자 노르 |
다른 이름 | 엘리사 피르만샤 노르 |
출생일 | 1943년 7월 12일 |
출생지 | 바타비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
사망일 | 1961년 3월 14일 (17세) |
사망지 |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
묘지 | 카렛 비박 묘지 |
국적 | 인도네시아 |
직업 | 배우 모델 |
활동 기간 | 1952년–1961년 |
배우자 | 피르만샤 (aka 딕 닌케울라) (1955년 결혼) |
자녀 | 1명 |
2. 생애
리에스 노르는 1943년 7월 12일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라덴 마스 모하마드 노어 푸스파위자야이다. ''Varia''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문이 배우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보수적인 집안이라고 밝혔다.
1952년, 자카르타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바수키 에펜디 감독의 영화 ''풀랑''(귀향)에 출연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마리아 울파 산토소를 롤 모델로 삼아 연기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다. ''풀랑''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데 니우슈기어''는 노르를 활기차고 매력적인 배우라고 평했다.
이후 노르는 인도네시아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으며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1953년 ''렌총 단 수랏'', 1954년 ''코프랄 지오노'' 등에 출연했다. 1954년 8월, 잡지 ''필름 바리아''는 노르를 인도네시아 영화의 새로운 희망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밝은 미래를 기대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필름 바리아'' 잡지에서 "실버 스크린의 여왕" 후보에 올랐으나, 티티엔 수마르니에게 돌아갔다.
1955년은 노르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해로, ''가갈''(실패), ''페리스티와 디다나우 토바''(토바 호수 사건), ''삼파이 베르드jumpa 켐발리''(다시 만날 때까지), ''이부 단 푸트리''(어머니와 딸), ''오, 이부쿠''(오, 나의 어머니) 등 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당시 그녀는 자카르타에서 제작된 영화 한 편당 10000IDR, 자카르타 외곽에서 제작된 영화 한 편당 12500IDR을 받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아완 단 쳄마라''(구름과 소나무, 1955)에서는 낮은 출연료 때문에 주연을 거절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인도네시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홍콩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 참석했다. 같은 해 ''멜라티 센자''(황혼의 재스민), ''페리스티와 10 노펨베르''(11월 10일 사건), ''라주안 알람''(자연의 부름) 등 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57년에는 ''라주안 알람''으로 도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 참석했다.
1960년 우스마르 이스마일 감독의 영화 ''페주앙''(자유를 위한 전사들)으로 복귀했고, 1961년 마지막 영화 ''페산 이부''(어머니의 메시지)에 출연했다. ''산당 판간''(1961)에 캐스팅되었으나,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다.
1955년, 고등학교 졸업 직후 국영 영화 제작소 직원인 피르만샤(일명 딕 닝케울라)와 결혼했다. 아들 리오 마르셀 닝케울라를 낳고 잠시 연기 활동을 중단했다가, 1959년 ''Varia''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자라면 배우로 복귀할 것이라고 밝혔다.
1961년 3월 12일 뇌염으로 자카르타의 치키니 병원에 입원했으나, 이틀 뒤인 3월 14일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월 15일 카레 비박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장례식에는 자말루딘 말릭, Turino Djunaedy|투리노 주나에디id, 바수키 에펜디를 포함한 많은 영화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2. 1. 초기 생애
리에스 노르는 1943년 7월 12일, 바타비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라덴 마스 모하마드 노어 푸스파위자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잡지 ''Varia''와의 인터뷰에서 연기를 원치 않는 구식 가문 출신이라고 밝혔다.2. 2. 배우 경력
자카르타에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2년, 바수키 에펜디 감독은 노르에게 자신의 영화 ''풀랑''(귀향)에 출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리아 울파 산토소를 롤 모델로 삼아, 노르는 연기 이후 곧바로 사회 개선을 위해 일하려고 생각하며 역할을 받아들였다. ''풀랑''은 호평을 받으며 개봉했고, ''데 니우슈기어''는 노르를 활기차고 포토제닉하다고 평했다.노르는 연기로 인도네시아에서 급속도로 인기를 얻었고, 곧 다른 감독과 제작자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1953년 ''렌총 단 수랏''에 출연했고, 1954년에는 ''코프랄 지오노''에 출연했다. 1954년 8월, 잡지 ''필름 바리아''의 기사에서 하즈남 라흐만은 노르를 인도네시아 영화의 새로운 희망이라고 묘사하며, 짧은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미래가 밝기를 바라며, 가부웅안 아르티스 필름(영화 예술가 협회, GAF)에서 퍼사리나 페르피니와 같은 더 큰 스튜디오로 이주할 것을 권장했다. 1954년 9월, ''필름 바리아'' 잡지에 의해 "실버 스크린의 여왕"으로 지명되었지만, 이 상은 티티엔 수마르니에게 돌아갔다.
노르는 1955년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여 ''가갈''(실패), ''페리스티와 디다나우 토바''(토바 호수 사건), ''삼파이 베르드jumpa 켐발리''(다시 만날 때까지), ''이부 단 푸트리''(어머니와 딸), ''오, 이부쿠''(오, 나의 어머니) 등 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자카르타에서 제작된 영화 한 편당 10000IDR을, 자카르타 외곽에서 제작된 영화 한 편당 12500IDR을 요구할 수 있었다. Honey Motion Pictures로부터 ''아완 단 쳄마라''(구름과 소나무, 1955)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7500IDR만 제안받아 주연을 거절했고, 그 역할은 신인 트리아나에게 돌아갔다.
1956년, 노르는 인도네시아 대표단과 함께 제3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 그 해 그녀는 ''멜라티 센자''(황혼의 재스민), ''페리스티와 10 노펨베르''(11월 10일 사건), ''라주안 알람''(자연의 부름) 등 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중 마지막 영화는 노르가 밤방 헤르만토|Bambang Hermanto|밤방 헤르만토id와 함께 말라리아에 대처해야 하는 부부로 출연했다. 1957년 노르는 ''라주안 알람''으로 도쿄에서 그녀의 공동 출연자와 함께 제4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 참석했으며, 이 영화는 ''집, 아내, 노래하는 새''라는 제목으로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다.
출산 후 연기 활동을 중단했던 노르는 1960년 우스마르 이스마일이 감독한 영화 ''페주앙''(자유를 위한 전사들)으로 영화계에 복귀했으며,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 독립 혁명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소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61년 마지막 영화 ''페산 이부''(어머니의 메시지)를 만들었으며, 이 영화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젊은 여성을 연기했다. 노르는 ''산당 판간''(1961)에 캐스팅되었지만, 영화가 완성되지 않은 채 사망했다.
2. 3. 개인사 및 사망
노르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55년, 영화 ''풀랑'' 촬영장에서 만난 국영 영화 제작소 직원인 피르만샤(일명 딕 닝케울라)와 결혼했다. 외아들 리오 마르셀 닝케울라를 낳은 후, 배우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 1959년 ''Varia''와의 인터뷰에서 리오가 배우로 복귀할 만큼 자랄 때까지 리오를 키우는 데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1961년 3월 12일, 노르는 자카르타의 치키니 병원에 입원하여 뇌염 치료를 받았다. 이틀 후 1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3월 15일에 카레 비박 묘지에 매장되었다. 장례식에는 자말루딘 말릭, Turino Djunaedy|투리노 주나에디id, 바수키 에펜디를 포함한 여러 영화계 인물들이 조사를 낭독했다. 치트라 데위, 소피아 발디, 빙 슬라메트, 달리아, 아스타만, 렐리 술라스트리 등이 조문객으로 참석했다.
3. 출연 작품
리에스 노르는 9년간의 경력 동안 1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제목 | 연도 |
---|---|
풀랑 | 1952 |
렌종 단 수랏 | 1953 |
코프랄 조노 | 1954 |
가갈 | 1955 |
떠오바 호수의 사건 | 1955 |
다시 만날 때까지 | 1955 |
어머니와 딸 | 1955 |
오, 나의 어머니 | 1955 |
라주안 알람 | 1956 |
멜라티 센자 | 1956 |
11월 10일 사건 | 1956 |
페주앙 | 1960 |
어머니의 메시지 | 1961 |
산당 판간 | 1961 (미완성)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