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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매스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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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거릿 매스터먼은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이자, 1955년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를 설립하여 이끌면서 전산 언어학 분야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언어의 중복성과 의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공 지능 및 기계 번역 분야에 기여했다. 그녀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비판하여 쿤이 해당 개념을 '비공약성'으로 전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CLRU를 통해 언어 처리 연구에 기여했으며, 시소러스를 활용한 의미론적 접근 방식은 연구소의 주요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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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매스터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거릿 매스터먼
마거릿 매스터먼
출생1910년 5월 4일
출생지영국, 런던
사망1986년 4월 1일
사망지영국, 케임브리지
국적영국
학문 분야
분야전산 언어학
직업
직업언어학자, 철학자
직장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시 캐번디시 칼리지
학력
모교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칼리지
연구 활동
알려진 업적케임브리지 언어 연구 유닛
수상
수상해당 사항 없음
가족 관계
배우자R. B. 브레이스웨이트(1932년 결혼)
자녀2명
부모찰스 F. G. 매스터먼, 루시 블랑쉬 리틀턴

2. 생애

(내용 없음)

2. 1. 가족 관계

마거릿 매스터먼은 1910년 5월 4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의 급진적인 자유당 정치인이자 전쟁 선전국의 수장이었던 찰스 마스터먼이며, 어머니는 정치인이자 시인, 작가였던 루시 마스터먼이다. 1932년 철학자 리처드 베반 브레이스웨이트와 결혼하여 아들 루이스 찰스(1937년생)와 딸 캐서린 루시(1940년생)를 두었다.

3. 학문적 배경

마거릿 매스터먼은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의 강좌를 들었던 6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이때 작성된 그녀의 노트는 이후 ''청색 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는 데 기여했다.[1]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칼리지에서 현대 언어학과 도덕 과학(당시에는 철학으로 불림)을 공부했다.

1955년, 매스터먼은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ambridge Language Research Unit, CLRU)를 설립하고 이끌었다. CLRU는 비공식 토론 모임으로 시작하여 전산 언어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 센터로 발전했다. 연구소는 극동 미술품이 소장된 아디 박물관(Adie's Museum)이라는 작은 건물에 자리 잡았으며, 1953년부터 약 20년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공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기계 번역, 전산 언어학, 양자 물리학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소 운영 자금은 주로 미국 국방 고등연구계획국(AFOSR), 미국 해군 연구국(ONR), 미국 국립과학재단(NSF)과 같은 미국 기관 및 영국 정부 기관(OSTI), 이후에는 유럽 연합(EU)의 지원을 통해 마련되었다. 당시 연구소의 컴퓨터 시설은 구식 ICL 1202 컴퓨터 등으로 열악하여, 주요 계산 작업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 연구소의 컴퓨터나 연구소 방문자들이 미국에서 수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LRU는 10명 미만의 적은 인원으로도 마틴 케이, 캐런 스파르크 존스, 요릭 윌크스와 같이 미국 전산 언어학회(ACL)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연구자들을 배출하며 큰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매스터먼은 당시 기준으로 약 20년 앞선 선구적인 연구자였다. 그녀가 컴퓨터를 이용한 언어 처리에 대해 제시했던 많은 아이디어는 오늘날 인공 지능(AI) 및 기계 번역(MT) 분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디어가 발표될 당시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이후 제자들이나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재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그녀의 기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녀의 핵심적인 생각 중 하나는 언어가 가진 일관성중복성을 언어 분석 과정에서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언어에 대한 초기 "정보 이론적" 관점을 계승한 것으로, 글쓴이가 같은 내용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함으로써 의미의 모호성을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때때로 시(詩)와 같이 리듬감 있고 반복적인 구조를 가진 글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영어 문장에서도 이러한 중복성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관점은 후기에 그녀가 말할 때의 리듬, 강세, 숨 쉬는 단위(호흡 그룹) 등이 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즉, 언어는 규칙적으로 숨을 쉬는 존재(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구조를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 언어학계를 주도하던 노엄 촘스키의 이론과는 거리가 멀었고, 숨쉬기 단위나 강세 패턴을 객관적으로 식별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매스터먼은 촘스키의 구문 중심 이론이 강세를 얻던 시기(1951년~1966년)에도 언어 처리에서 의미론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 이는 R. H. 리첸스(R. H. Richens)가 제안한, 고유한 문법 구조를 가진 의미론적 기본 단위(semantic primitive)를 사용하여 언어를 분류하고 설명하려는 시도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제 프로그램 개발에 적용하기도 했지만, 특정 의미론적 기본 단위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어떤 제한된 하위 언어나 논리 체계만으로는 전체 자연어의 복잡성을 담아낼 수 없다는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녀는 의미론적 기본 단위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하며, 자연어와 마찬가지로 다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미 모호성 해결이나 기계 번역의 중간 언어로서 이러한 기본 단위의 기능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의미론적 기본 단위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그녀는 실제 텍스트를 경험적으로 분류하는 절차를 사용하거나(오늘날의 연결주의적 접근과 유사), 시소러스(유의어 사전) 구조에 대한 형식 이론을 개발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시소러스 분석을 통해 어휘 분류로서의 "기본 단위"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격자 이론을 시소러스의 기본 구조로 탐구했다.

그녀의 지적 관심사 중 다른 두 가지 중요한 축은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의 동료였던 마이클 할리데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첫째, 구문 이론이 근본적으로 의미론적이거나 실용적이라는 생각, 즉 문법 범주나 규칙이 의미 정보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기능한다는 관점이다. 그녀는 테리 위노그라드보다 훨씬 먼저 할리데이의 영향을 받은 초기 AI 연구자 중 한 명이었다. 둘째, 그녀는 한동안 중국어 표어 문자의 본질과 기능에 몰두했다.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진리 그림 이론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을 경험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표어 문자의 원리를 과도하게 일반화하여, 영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매우 모호하고 굴절이 거의 없는 의미 단위로 구성된 중국어와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주류 언어학이나 전산학계에서 큰 공감을 얻지 못했다.

CLRU는 1978년경 사실상 연구 활동을 중단했다. 매스터먼은 1980년에 윌리엄 윌리엄스(William Williams)[2]와 함께 연구소를 재개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새로 등장한 마이크로컴퓨터를 이용하여 자연어 번역 알고리즘 개발을 이어가고자 했으며, 케임브리지 밀링턴 로드에서 오웰까지 약 11.27km를 걸어가 인텔리전트 아티팩츠(Intelligent Artefacts, ST 로보틱스 참조)로부터 노스스타 호라이즌(North Star Horizon) 컴퓨터 두 대를 구입했다. 이 컴퓨터에는 포스(Forth) 프로그래밍 언어가 설치되었고, 여러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들이 매스터먼의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당시 그녀의 번역 방식은 문장을 "호흡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을 번역한 뒤 재조합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사전과 규칙 기반 시스템인 Systran과 같은 당시 주류 기술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그러나 1986년 매스터먼이 사망하자 윌리엄 윌리엄스는 CLRU를 최종적으로 폐쇄했고, 연구소의 귀중한 초기 기계 번역 관련 자료들은 두 대학 기관의 보관 제안에도 불구하고 폐기되었다.

학문적 활동 외에도, 매스터먼은 루시 캐번디시 칼리지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초대 부회장(1965–1975)을 역임했다. 이 칼리지의 이름은 그녀의 고모할머니인 루시 캐번디시의 이름을 딴 것이다. 또한 그녀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 종교적 실천 형태 연구에 헌신하는 단체인 에피파니 철학자(Epiphany Philosophers)의 창립자이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단체는 CLRU와 일부 회원을 공유하기도 했다.

1965년 런던에서 열린 제4회 국제 과학 철학 콜로키움에서 매스터먼은 "패러다임의 본질(The Nature of a Paradigm)"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3] 이 논문에서 그녀는 토마스 쿤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1962)에 대한 상세한 텍스트 분석을 제시하며, 이 책이 "과학적으로는 명료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모호하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쿤을 "우리 시대의 뛰어난 과학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패러다임 개념을 "과학 철학의 근본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최소 21가지의 다른 의미로 모호하고 일관성 없이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이 21가지 의미를 메타패러다임, 사회학적 패러다임, 인공물/구성 패러다임의 세 그룹으로 분류하고, 쿤에 대한 비판가들이 주로 메타패러다임 측면에만 집중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매스터먼의 비판은 토마스 쿤 자신에게도 수용되어, 이후 그가 '패러다임' 개념 대신 '비공약성(incommensurability)' 개념을 더 강조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4]

4.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 (CLRU)

마거릿 매스터먼은 1955년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를 설립하고 이끌었다.[1] CLRU는 언어에 대한 철학적, 전산적 관점을 공유하는 비공식 토론 모임에서 시작하여, 전산 언어학과 기계 번역 분야의 중요한 연구 센터로 발전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공식적인 구조와는 별개로 운영되었으며, 견고한 철학적 기반 위에 언어 처리 연구를 수행하는 독특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 시대를 앞선 연구 방향, 특히 의미론과 시소러스 활용에 대한 강조는 CLRU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소규모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틴 케이, 캐런 스파르크 존스, 요릭 윌크스 등 해당 분야의 주요 연구자들을 배출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연구소는 기술적,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매스터먼의 노력으로 20년 이상 유지되었으나, 1986년 그녀의 사망 이후 최종적으로 폐쇄되었다.

4. 1. 연구 활동

마거릿 매스터먼은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의 강좌를 들었던 6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으며, 그녀가 필기한 노트는 나중에 ''청색 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1] 1955년, 그녀는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를 설립하고 이끌었다. CLRU는 비공식 토론 모임으로 시작하여 전산 언어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 센터로 성장했다. 매스터먼은 케임브리지 뉴넘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현대 언어학과 도덕 과학(당시 철학)을 전공했다. CLRU는 아디 박물관(Adie's Museum)이라는 작고 아름다운 건물에 자리 잡았는데, 이곳에는 극동 미술품과 함께 벽에 박힌 작은 불교 조각들, 조각된 문 등이 있었다. 1953년부터 약 20년간 CLRU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공식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기계 번역, 전산 언어학, 양자 물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소 운영 자금은 미국 기관(AFOSR, ONR, NSF)과 영국 정부 기관(OSTI), 그리고 나중에는 룩셈부르크의 EU 기금을 통해 지원받았다. 컴퓨터 시설은 구식 ICL 1202 컴퓨터를 사용하는 등 낙후되었으며, 주요 계산 작업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 연구소의 컴퓨터나 CLRU 방문자들이 미국 현지에서 수행했다. CLRU는 10명 미만의 소규모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 연구원 중 세 명(마틴 케이, 캐런 스파르크 존스, 요릭 윌크스)이 미국 전산 언어학회(ACL)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했다.

매스터먼은 시대를 약 20년 앞서간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컴퓨터를 이용한 언어 처리에 대한 그녀의 여러 신념과 제안들은 오늘날 인공 지능(AI) 및 기계 번역(MT) 분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아이디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디어가 발표될 당시에는 수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제자들이나 다른 연구자들이 나중에 유사한 내용을 발표했을 때, 특히 10년 이상 된 연구가 잘 참조되지 않는 분야의 특성상 그녀의 기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언어 처리에 대해 가졌던 핵심 신념 중 하나는 언어가 가진 일관성, 즉 신호로서의 중복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언어에 대한 초기 "정보 이론적" 관점을 계승한 것으로, 언어 분석 과정에서 반복적이고 중복적인 구조를 고려해야 하며, 작가는 명확성을 위해 동일한 내용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생각은 때때로 그녀가 운문의 리듬과 반복에서 나타나는 명시적인 중복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평범한 영어 텍스트 역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는 후년에 그녀가 리듬, 강세, 그리고 숨쉬기 묶음(breath-groups)과 이것이 텍스트 이해 과정에 부여하는 경계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연구로 이어졌다. 그녀는 언어가 규칙적인 간격으로 숨을 쉬는 존재에 의해 생성되기 때문에 현재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촘스키의 언어관이 지배적이던 시기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또한 그녀는 숨쉬기 묶음과 강세 패턴을 식별할 체계적인 표면적 기준을 제시하거나 이를 구문론, 형태론 등 다른 기준과 연결하지 못했으며, 음성 패턴의 물리적 측면을 깊이 다루지도 않았다.

매스터먼은 촘스키의 구문론 중심 접근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1951년-1966년)에도 언어 처리에서 의미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R. H. 리첸스가 제안한, 자체 구문론을 가진 의미론적 원시 언어(semantic primitive language)를 사용하여 언어를 분류하고 설명하려는 견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표면 텍스트에 대한 의미론적 패턴 매칭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그녀가 의미론적 원시의 존재 자체를 강하게 옹호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그녀는 어떤 제한된 하위 언어나 논리가 전체 언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적인 회의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의미론적 원시가 경험적 발견 기준을 가질 때, 그리고 그것들 역시 자연어처럼 다의성을 가질 것이라는 이론적 이해가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미 모호성 해결이나 기계 번역을 위한 중간 언어(interlingua)로서 원시의 기능적 역할을 항상 강조했다.

의미론적 원시의 기원 문제에 대해 그녀는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나는 실제 텍스트에 대한 경험적 분류 절차를 사용하는 것(오늘날 대규모 연결주의 학습을 통해 원시를 도출하는 방식과 유사)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어의 의미 관계 구조를 명시적으로 만드는, 즉 시소러스 구조에 대한 적절한 형식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원시"는 어휘 분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으로 보았다. 수년간 그녀와 동료들은 이러한 시소러스의 기본 형식 구조로서 격자 이론(lattice theory)을 탐구했다.

그녀의 지적 활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또 다른 두 가지 관심사는 마이클 할리데이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할리데이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국어 강사로 재직하며 CLRU의 동료였다. 매스터먼은 할리데이로부터 구문론적 이론이 근본적으로 의미론적이거나 실용적이라는 생각, 즉 구문 범주와 정의가 의미 정보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기능한다는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테리 위노그라드보다 훨씬 앞서 할리데이의 영향을 받은 초기 AI 연구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녀는 한동안 중국어 표어(ideogram)의 본질과 기능에 몰두했는데,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진리의 그림 이론(picture theory of truth)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을 경험적으로 명확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표어 원리의 일반성을 다소 과장하여, 영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중국어와 매우 유사한, 즉 의미 원자들로 구성되고 거의 굴절되지 않는 언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지배적인 언어학적, 전산적 흐름과는 거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1953년에 시작되어 약 20년간 지속된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는 그녀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이다. CLRU는 철학적, 전산적 관점에서 언어에 관심을 가진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들이 모인 비공식 토론 그룹에서 출발했다. 이후 견고한 철학적 기반 위에 언어 처리 프로그램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연구소 작업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과 의미론 연구의 주요 수단으로 시소러스를 활용한 것은 CLRU가 해당 분야 전체에 기여한 주요 업적으로 평가되며, 매스터먼이 이를 주도했다. 컴퓨터 기술이 매우 초보적이던 시절, 언어 처리와 그 가능성에 대한 그녀의 비전은 놀라웠다. 실제로 CLRU의 많은 작업은 컴퓨터의 전신 격인 홀러리스 천공 카드 기계(Hollerith punched-card machinery)를 사용해야 했다. 또한, 막대한 자금 조달 노력을 통해 연구소를 설립하고 유지하려는 그녀의 결단력은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연구에 대한 대중적 지원을 얻기 어려웠던 시기를 거쳐 수십 년간 연구소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끈기와 매력 덕분이었다. 오늘날 인공 지능이 상용화되고 강력한 개인용 컴퓨터가 보편화된 시대에는 당시 언어 처리 연구에 필요한 재정적, 기술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실감하기 어렵다.

매스터먼의 언어 처리 연구, 특히 기계 번역 작업에 대한 평가는 다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왔다. 초기 높은 기대와 달리 실질적인 성과 부족으로 1966년 이후 기계 번역 연구는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나 1985년 미국 인공 지능 학회(AAAI) 회장 연설에서, 해당 분야의 원로인 우디 블레드소(Woody Bledsoe)는 1950년대와 60년대 기계 번역을 시도했던 이들에 대해 "그들은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시도한 것은 옳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시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평가했다.

매스터먼과 CLRU가 시도했던 작업은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간 것이었다. 당시 현대 디지털 손목시계 수준의 성능을 가진 컴퓨터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것이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구소는 정보 검색, 자동 분류 등 언어 및 관련 주제에 대해 수많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0년 이상 CLRU는 해당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항상 언어 이해의 기본적인 의미론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매스터먼은 구문 분석만으로 충분하다거나, 다른 작업을 수행하기 전에 완벽한 구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접근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늘날 언어의 의미론이 기계 이해의 핵심 부분으로 간주되면서 CLRU의 아이디어는 매우 현대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거릿 매스터먼이 CLRU에 기여한 핵심은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지적 자극이었으며, 이는 더 넓은 자연어 처리 커뮤니티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광범위한 관심사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시소러스를 색인화, 번역 등 다양한 언어 처리 작업의 수단으로 제안한 것이 대표적이다. 알고리즘을 강조하고 이를 실제로 테스트하려 했던 그녀의 노력은 CLRU의 언어 처리 연구 발전에 매우 중요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지적인 탁월함뿐만 아니라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1978년경 CLRU에서의 본격적인 연구는 중단되었으나, 1980년 매스터먼은 윌리엄 윌리엄스[2]와 함께 CLRU를 재개하려고 시도했다. 새로운 마이크로컴퓨터를 활용하여 자연어 번역을 위한 자신의 알고리즘을 개발할 수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밀링턴 로드에서 오웰까지 약 11.27km를 걸어가 인텔리전트 아티팩츠(ST 로보틱스 참조)로부터 노스스타 호라이즌 컴퓨터 두 대를 구입했다. 이 컴퓨터에는 데이비드 샌즈가 작성한 포스 프로그래밍 언어가 설치되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들이 그녀의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사용했다. 당시 그녀의 자연어 번역 방식은 문장을 "숨쉬기 묶음" 단위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각 숨쉬기 묶음은 고유한 의미를 가지며 대상 언어로 번역될 수 있고, 번역된 묶음들을 재구성하여 대상 문장을 생성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당시 주류였던 사전 및 규칙 기반 시스템인 Systran과는 대조적인 접근이었다. 1986년 매스터먼이 사망하자 윌리엄 윌리엄스는 CLRU를 폐쇄했고, 초기 기계 번역(MT) 문서들이 보관된 고유한 도서관은 두 대학 기관이 보존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폐기되었다.

그녀는 루시 캐번디시 칼리지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초대 부회장(1965–1975)이었다. 또한 CLRU와 일부 회원을 공유하며 과학과 종교의 관계, 종교적 실천 형태 연구에 헌신하는 단체인 에피파니 철학자의 창립자이자 주요 영감을 준 인물이었다.

1965년 마거릿 매스터먼은 런던에서 열린 제4회 국제 과학 철학 콜로키움에서 "패러다임의 본질"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3] 이 논문에서 그녀는 토마스 쿤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1962)에 대한 상세한 텍스트 비평을 통해 이 책을 "과학적으로 명료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모호하다"고 평가했다. 매스터먼은 쿤을 "우리 시대의 뛰어난 과학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패러다임 개념을 "과학 철학의 근본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칭찬하면서도,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모호하고 일관성 없이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이 용어가 최소 21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메타패러다임, 사회학적 패러다임, 인공물 또는 구성 패러다임의 세 그룹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매스터먼은 쿤의 비판자들이 주로 메타패러다임에만 초점을 맞추었으며, 다양한 개념들이 가진 통찰과 함의를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토마스 쿤 자신에게도 수용되어, 그가 "패러다임" 개념 대신 "비공약성" 개념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4]

4. 2. 연구 자금 및 시설

마거릿 매스터먼은 1955년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를 설립하고 이끌었다. CLRU는 처음에는 비공식 토론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전산 언어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 센터로 발전했다. 연구소는 아디 박물관(Adie's Museum)이라는 작지만 아름다운 건물에 자리 잡았는데, 이곳은 원래 극동 미술품을 소장하던 곳이었다. 건물 벽에는 작은 불교 조각들이 박혀 있었고 문은 조각되어 있었다.[1]

1953년부터 약 20년간 CLRU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공식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기계 번역, 전산 언어학, 양자 물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소 운영 자금은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지원받았다.

CLRU 연구 자금 지원 기관
국가기관
미국공군 과학연구실(AFOSR), 해군 연구청(ONR), 국립과학재단(NSF)
영국정부 기관 (OSTI)
EU룩셈부르크 EU 기금 (후기)



당시 연구소의 컴퓨터 시설은 매우 구식이었다. 오래된 ICL 1202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기 때문에, 주요 계산 작업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 연구소의 컴퓨터를 이용하거나, CLRU 방문 연구원들이 미국 현지 시설을 통해 수행해야 했다. 컴퓨터가 매우 초보적이었던 시절이었고, 심지어 CLRU의 많은 작업은 컴퓨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홀러리스 천공 카드 기계를 사용해야 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CLRU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0명도 채 안 되는 적은 인원으로 운영되었지만, 미국 전산 언어학회(ACL)의 연례 평생 공로상을 CLRU 출신 연구자 세 명(마틴 케이, 캐런 스파르크 존스, 요릭 윌크스)에게 수여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연구소를 설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마거릿 매스터먼의 자금 확보 노력과 결단력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인공 지능이나 전산 언어학과 같은 분야에 대한 대중적 지원을 얻기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끈기와 매력 덕분에 연구소는 수십 년간 유지될 수 있었다. 오늘날 강력한 개인용 컴퓨터가 보편화되고 인공 지능 기술이 시장에 진출한 시대에는 당시 언어 처리 연구에 필요한 재정적, 기술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실감하기 어렵다.

1978년경 CLRU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은 중단되었다. 마거릿 매스터먼은 1980년에 윌리엄 윌리엄스[2]와 함께 CLRU를 다시 시작하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새로운 마이크로컴퓨터를 활용하여 자연어 번역 알고리즘 개발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를 위해 케임브리지 밀링턴 로드에서 오웰까지 약 11.27km를 걸어가 ST 로보틱스(당시 인텔리전트 아티팩츠)로부터 노스스타 호라이즌 컴퓨터 두 대를 구입했다. 이 컴퓨터에는 데이비드 샌즈가 작성한 포스 프로그래밍 언어가 설치되었고, 여러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들이 매스터먼의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참여했다.

하지만 1986년 마거릿 매스터먼이 사망하자 윌리엄 윌리엄스는 CLRU를 최종적으로 폐쇄했다. 안타깝게도, 두 개의 대학 기관에서 보관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던 초기 기계 번역(MT) 관련 문서들은 폐기물 처리장에 버려졌다.

4. 3. 주요 연구자

마거릿 매스터먼은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의 강좌를 들었던 6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으며, 그녀의 노트는 ''청색 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1] 1955년, 매스터먼은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를 설립하고 이끌었다. CLRU는 비공식 토론 모임으로 시작하여 전산 언어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 센터로 성장했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뉴넘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현대 언어학을 전공한 뒤, 당시 철학으로 불리던 도덕 과학을 공부했다.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는 극동 미술품을 소장한 작고 아름다운 건물인 아디 박물관(Adie's Museum)에 자리 잡았다. 건물 벽에는 작은 불교 조각들이 박혀 있었고 문은 조각되어 있었다. 1953년부터 약 20년 동안 이 연구소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공식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기계 번역, 전산 언어학, 양자 물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소 운영 자금은 미국 공군 과학 연구실(AFOSR), 미국 해군 연구청(ONR), 미국 국립 과학 재단(NSF)과 같은 미국 기관과 영국 정부 기관(OSTI)의 보조금으로 충당되었으며, 나중에는 룩셈부르크의 유럽 연합(EU) 기금에서도 지원을 받았다. 컴퓨터 시설은 구식 ICL 1202 컴퓨터를 사용하는 등 낙후된 편이었다. 주요 계산 작업은 당시 수학 연구소 내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컴퓨터나 CLRU 방문 연구자들이 미국 현장에서 수행했다. CLRU의 영향력은 10명 미만의 적은 직원 수에도 불구하고, 마틴 케이, 캐런 스파르크 존스, 요릭 윌크스 등 CLRU 출신 연구자 세 명이 미국 전산 언어학회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매스터먼은 시대를 약 20년 앞서간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컴퓨터를 이용한 언어 처리에 대한 그녀의 여러 생각과 제안은 오늘날 인공 지능(AI) 및 기계 번역(MT) 분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아이디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디어를 발표했을 당시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제자들이 나중에 글을 쓰거나 다른 연구자들이 독립적으로 같은 아이디어를 "발견"했을 때, 특히 10년 이상 된 연구가 거의 다시 읽히지 않는 분야의 특성상 그녀의 기여는 종종 간과되었다.

매스터먼이 언어 처리에 대해 가졌던 핵심 신념 중 하나는 언어가 가진 일관성, 즉 신호로서의 중복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언어에 대한 오래된 "정보 이론적" 관점을 일부 계승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언어 분석 과정이 언어의 반복적이고 중복적인 구조를 고려해야 하며, 글쓴이는 같은 내용을 여러 방식으로 반복해서 전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신호의 모호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때때로 그녀가 리듬감 있고 반복적인 시(詩)에서 발견되는 명시적인 중복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평범한 영어 문장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와 같다고 주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는 후년에 그녀가 리듬, 강세, 숨쉬기 묶음(breathing-groups)과 이것이 텍스트와 이해 과정에 부여하는 경계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간단히 말해, 언어가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비교적 규칙적인 간격으로 숨을 쉬는 존재에 의해 생성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촘스키의 견해가 언어 연구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녀는 숨쉬기 묶음과 강세 패턴을 표면 단서로 식별하거나 구문론, 형태론 등 다른 기준으로 환원할 수 있는 체계적인 표면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고, 음성 패턴의 실제 물리학 연구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1951년에서 1966년 사이 촘스키의 구문론 중심 접근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도 매스터먼은 언어 처리에서 의미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견해는 R. H. 리첸스가 제안한, 자체 구문론을 가진 의미론적 원시 언어(semantic primitive language)를 사용하여 의미를 분류하고 설명하려는 시도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표면 텍스트에 대한 의미론적 패턴 매칭과 관련된 주장들과 함께 실제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그녀가 카츠(Katz)나 샹크(Schank)와 같은 의미에서 의미론적 원시의 존재를 믿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사실과는 달랐다. 그녀는 어떤 제한된 하위 언어나 논리 체계라도 전체 언어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적인 회의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의미론적 원시 개념이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경험적 기준이 있고, 그 원시들 역시 모든 상위 언어나 자연어와 마찬가지로 다의성을 가질 것이라는 이론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미 모호성 해결이나 기계 번역을 위한 중간 언어로서 원시의 기능적 역할을 항상 강조했다.

매스터먼은 의미론적 원시의 기원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 가지 방향을 생각했다. 하나는 실제 텍스트에 대한 경험적 분류 절차를 사용하는 것(오늘날 대규모 연결주의 학습을 통해 원시를 도출하는 방식과 유사)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어 의미 관계의 특정 기본 구조를 명시적으로 만드는, 즉 "원시"가 어휘 분류로 자동 등장하는 시소러스 구조에 대한 적절한 형식 이론을 갖추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그녀와 동료들은 이러한 시소러스의 기본 형식 구조로서 격자 이론을 탐구했다.

그녀의 지적 여정에 영향을 미친 다른 두 가지 관심사는 마이클 할리데이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국어 강사로 CLRU의 동료였던 시기에서 비롯되었다. 할리데이로부터 그녀는 구문론적 이론이 근본적으로 의미론적이거나 실용적이라는 생각, 즉 범주와 기본 정의 또는 구문이 의미 정보를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역할 측면에서 그렇다는 생각을 얻었다. 그녀는 테리 위노그라드보다 훨씬 앞서 할리데이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AI 연구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녀는 한동안 중국어 표어(ideogram)의 본질과 기능에 몰두했는데,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소위 진실의 그림 이론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을 경험적으로 명확히 해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표어 원리의 일반성을 과장하여, 영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마치 중국어와 매우 유사한 언어, 즉 의미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매우 모호하며 거의 굴절되지 않는 언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지배적인 언어학적 또는 전산적 흐름과는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1953년에 시작된 그녀의 주요 창조물은 20년 동안 지속된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철학적 및 전산적 관점에서 언어에 관심을 가진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비공식 토론 그룹에서 출발했다. 이후 견고한 철학적 기반을 가진 언어 처리 프로그램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연구소 작업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언어 처리 방식과 시소러스를 의미론 작업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한 특정 형태는 연구소가 해당 분야 전체에 기여한 주요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매스터먼이 그 중심 역할을 했다. 컴퓨터가 매우 초보적이었던 시기에 그녀가 가졌던 언어 처리와 그 가능성에 대한 비전은 놀라웠다. 실제로 CLRU의 많은 작업은 컴퓨터의 전신 격인 홀러리스(Hollerith) 천공 카드 기계로 수행되어야 했다. 또한, 막대한 자금 조달 노력을 통해 연구소를 설립하고 유지하려는 매스터먼의 결단력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연구에 대한 대중의 지원을 얻기 어려웠던 시기를 거쳐 수십 년 동안 연구소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끈기와 매력 덕분이었다. 인공 지능이 대중화되고 강력한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한 오늘날에는 당시 언어 처리 연구에 필요한 재정적 자원과 실제 실험 수행에 필요한 기술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실감하기 어렵다.

매스터먼의 언어 처리 연구, 특히 기계 번역 작업 착수에 대한 평가는 다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왔다. 기계 번역은 초기의 높은 기대와 일부 과장된 주장 이후, 1966년 자금 지원 기관들이 실질적인 성과를 보지 못하면서 외면받았다. 1985년 미국 인공 지능 학회 회장 연설에서, 언어와는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던 해당 분야의 오랜 리더 중 한 명인 우디 블레드소(Woody Bledsoe)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기계 번역을 시도했던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시도한 것은 옳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시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매스터먼과 CLRU가 시도했던 일은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간 것이었다. 당시 현대 디지털 손목시계 수준의 성능을 가진 컴퓨터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구소는 정보 검색 및 자동 분류를 포함하여 언어 및 관련 주제에 대해 수많은 간행물을 발표했다. 10년 이상 연구소는 이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항상 언어 이해의 기본적인 의미론적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매스터먼은 구문 분석만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작업을 수행하기 전에 완벽한 구문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늘날 언어의 의미론이 기계에 의한 이해의 기본 부분으로 간주됨에 따라, CLRU의 아이디어는 매우 현대적으로 평가받는다.

매스터먼은 CLRU 연구에 지속적인 지적 자극을 제공하며 더 넓은 자연어 처리 커뮤니티에 기여했다. 그녀는 폭넓은 관심사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시소러스를 색인화 및 번역 등 다양한 언어 처리 작업의 도구로 제안했다. 매스터먼이 알고리즘 개발과 테스트를 강조한 것은 CLRU의 언어 처리 연구 발전에 매우 중요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지적인 깊이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영감과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1978년경 CLRU의 주요 연구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1980년 매스터먼은 윌리엄 윌리엄스(William Williams)[2]와 함께 연구소 재개를 시도했다. 새로운 마이크로컴퓨터를 활용하여 자신의 자연어 번역 알고리즘 개발을 이어가고자 희망했기 때문이다. 매스터먼은 케임브리지 밀링턴 로드에서 오웰(Orwell)까지 약 11.27km 거리를 직접 걸어가 인텔리전트 아티팩츠(ST 로보틱스 참조)로부터 노스 스타 호라이즌 컴퓨터 두 대를 구매했다. 이 컴퓨터에는 데이비드 샌즈(David Sands)가 개발한 포스 프로그래밍 언어가 설치되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들이 매스터먼의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사용했다. 당시 매스터먼의 자연어 번역 접근법은 문장을 의미 단위인 '호흡 그룹(breathing group)'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각 호흡 그룹을 개별적으로 번역한 뒤, 이를 조합하여 대상 언어 문장을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사전과 규칙 기반 시스템을 사용하는 당시 주류 기계 번역 기술(예: Systran)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1986년 매스터먼이 사망한 후 윌리엄 윌리엄스는 CLRU를 폐쇄했다. 두 대학 기관에서 보관 제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계 번역(MT) 관련 귀중한 자료들은 안타깝게도 폐기되었다.

매스터먼은 루시 캐번디시 칼리지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초대 부회장(1965–1975)을 역임했다. 그녀는 칼리지 이름의 유래가 된 루시 캐번디시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CLRU와 일부 회원을 공유하며 과학과 종교의 관계, 종교적 실천 형태 연구에 중점을 둔 에피파니 철학자 그룹의 창립자이자 핵심적인 영감을 제공한 인물이었다.

1965년 런던에서 개최된 제4회 국제 과학 철학 콜로키움에서 매스터먼은 "패러다임의 본질(The Nature of a Paradigm)"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3] 이 논문에서 그녀는 토마스 쿤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1962)를 상세히 분석하며 "과학적으로는 명료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모호하다"고 평가했다. 매스터먼은 쿤을 "우리 시대의 뛰어난 과학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패러다임 개념을 "과학 철학의 근본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최소 21가지의 다른 의미로 모호하고 일관성 없게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이 의미들을 메타패러다임, 사회학적 패러다임, 인공물(또는 구성) 패러다임의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했다. 매스터먼은 과학 철학계의 쿤 비판이 주로 메타패러다임에만 집중되어 있으며, 다른 패러다임 개념들이 가진 통찰과 함의를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비판은 쿤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가 이후 '패러다임' 대신 '비공약성' 개념에 더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4]

5. 언어 철학 및 자연어 처리 연구

마거릿 매스터먼은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 형성에 기여한 인물 중 하나로, 1933년부터 1934년까지 그의 강좌를 들었던 학생 6명 중 한 명이었으며, 그녀의 노트는 ''청색 책''으로 출판되는 데 기여했다.[1]

1955년, 매스터먼은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를 설립하고 이끌었다. 비공식 토론 모임에서 시작된 CLRU는 전산 언어학 분야의 주요 연구 센터로 성장했으며, 기계 번역, 전산 언어학, 양자 물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다. CLRU는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의 공식 구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했으며, 미국과 영국 정부 기관, 그리고 유럽 연합(EU)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연구소는 10명 미만의 소규모 인원으로 운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틴 케이, 캐런 스파르크 존스, 요릭 윌크스 등 미국 전산 언어학회(ACL) 평생 공로상 수상자를 세 명이나 배출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했다.

매스터먼은 시대를 약 20년 앞서간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컴퓨터를 이용한 언어 처리에 대한 그녀의 여러 아이디어는 오늘날 인공 지능(AI) 및 기계 번역(MT) 분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독창적인 기여는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재발견되거나 독립적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와 CLRU의 시도는 당시 기술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초기 기계 번역 연구의 어려움 속에서도 중요한 지적 자산을 남겼다.

그녀의 연구는 언어의 의미론적 측면과 시소러스 구조 활용에 중점을 두었으며, 언어의 중복성, 리듬과 강세의 역할, 중국어 표어 분석 등 다양한 주제를 탐구했다. 특히, 촘스키의 구문론 중심 접근이 주류였던 시기에도 언어 처리에서 의미론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으며, 이는 마이클 할리데이와 같은 학자들의 영향 속에서 발전했다. 그녀는 언어 연구에 있어 철학적 기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CLRU의 연구 방향을 설정했다.

1965년에는 토머스 쿤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 나타난 '패러다임' 개념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논문 "패러다임의 본질"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매스터먼은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최소 21가지 다른 의미로 혼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개념의 명료화를 촉구했고, 이는 쿤 자신도 수용하여 이후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3][4]

CLRU는 1978년경 연구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매스터먼은 1980년 마이크로컴퓨터를 활용하여 자연어 번역 알고리즘 개발을 재개하려 시도했다. 그녀는 문장을 '호흡 그룹'으로 나누어 번역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제안했으나, 1986년 그녀의 사망으로 CLRU는 최종적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연구소의 귀중한 초기 기계 번역 관련 자료들은 안타깝게도 폐기되었다.

5. 1. 의미론 중심 접근

마거릿 매스터먼은 언어 처리가 언어 고유의 일관성, 즉 신호로서의 중복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언어에 대한 오래된 "정보 이론적" 관점을 일부 계승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언어 분석 과정이 언어의 반복적이고 중복적인 구조를 고려해야 하며, 작가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 동일한 내용을 여러 방식으로 반복해서 전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때때로 그녀가 리듬이나 반복적인 운문에서 발견되는 명시적인 중복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평범한 영어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후년에 이러한 생각은 리듬, 강세, 숨쉬기 묶음(breath-groups)과 이것이 텍스트와 이해 과정에 부여하는 경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언어가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비교적 규칙적인 간격으로 숨을 쉬는 존재에 의해 생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촘스키의 견해가 언어 연구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또한 그녀는 숨쉬기 묶음이나 강세 패턴을 표면 단서로 식별하거나 다른 기준(구문, 형태론 등)으로 환원할 수 있는 체계적인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음성 패턴의 실제 물리학적 측면까지 다루지는 않았다.

언어 처리에서 의미론의 중요성에 대한 그녀의 견해는 촘스키의 구문론 중심 접근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1951년-1966년)에도 꾸준히 유지되었다. 이는 R. H. 리첸스가 제안한, 자체 구문론을 가진 의미론적 원시(semantic primitive)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를 분류하고 설명하려는 견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표면 텍스트에 대한 의미론적 패턴 매칭과 관련된 주장들과 함께 실제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그녀가 카츠(Katz)나 샹크(Schank)와 같은 의미에서 의미론적 원시의 존재를 믿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어떤 제한된 하위 언어나 논리 체계가 전체 언어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의미론적 원시 개념이 경험적인 발견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 역시 다른 모든 상위 언어나 자연어처럼 다의성(polysemy)을 가질 것이라는 이론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의미 모호성을 해결하고 기계 번역을 위한 중간 언어(interlingua)로서 원시의 기능적 역할을 항상 강조했다.

매스터먼은 의미론적 원시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실제 텍스트에 대한 경험적 분류 절차를 사용하는 것(이는 오늘날 대규모 연결주의 학습을 통해 원시를 도출하는 방식과 유사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어의 의미 관계에 내재된 특정 기본 구조를 명시적으로 만드는, 즉 시소러스 구조에 대한 적절한 형식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원시"는 어휘 분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다. 수년 동안 그녀와 동료들은 이러한 시소러스의 기본 형식 구조로서 격자 이론(lattice theory)을 탐구했다.

그녀의 지적 여정에는 마이클 할리데이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 할리데이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국어 강사로 재직하며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의 동료였던 시기에, 매스터먼은 그로부터 구문론적 이론이 근본적으로 의미론적이거나 실용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즉, 구문 범주나 기본 정의는 의미 정보를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역할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테리 위노그라드보다 훨씬 앞서 할리데이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인공 지능(AI) 연구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녀는 한동안 중국어 표어(ideogram)의 본질과 기능에 몰두했는데,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그림 이론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을 경험적으로 명확히 해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표어 원리의 일반성을 다소 과장하여, 영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중국어와 매우 유사한, 즉 의미 원자(semantic atom)로 구성된 매우 모호하고 굴절이 거의 없는 언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언어학이나 전산학의 주류 흐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5. 2. 시소러스 활용

매스터먼은 의미론적 원시(semantic primitive)의 기원에 대한 문제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실제 텍스트에 대한 경험적 분류 절차를 사용하거나, 시소러스 구조에 대한 적절한 형식 이론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러한 이론이 자연어에서 의미 관계의 특정 기본 구조를 명시적으로 만들고, '원시'가 자동으로 어휘 분류로 나타나게 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와 동료들은 수년 동안 시소러스의 기본 형식적 구조로서 격자 이론을 탐구했다.

CLRU의 언어 처리 방식, 특히 시소러스를 의미론적 작업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는 특정 형태는 연구소가 전체 분야에 기여한 주요 업적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매스터먼이 이에 대한 주요 책임자였다. 그녀는 시소러스를 색인번역과 같은 많은 개별 언어 처리 작업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제안하는 등 광범위한 관심사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5. 3.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영향

마거릿 매스터먼은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의 강좌를 들었던 6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기록한 노트는 훗날 ''청색 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저작의 일부가 되었다.[1]

매스터먼의 언어 연구에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영향이 나타난다. 특히 그녀는 어떤 제한된 하위 언어나 논리 체계가 복잡한 자연어 전체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적인 회의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그녀가 의미론 연구에서 '의미론적 원시(semantic primitives)' 개념을 다루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의미론적 원시가 의미를 가지려면 경험적인 검증 기준이 있어야 하며, 자연어와 마찬가지로 다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특정 형식 체계만으로 언어의 모든 의미를 포착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매스터먼은 중국어 표어의 본질과 기능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초기에 제시했던 '진리의 그림 이론'과 관련된 문제들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녀는 표어 연구가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 연구는 영어가 근본적으로는 의미의 원자들로 이루어진, 매우 모호하고 굴절이 적은 언어라는 다소 급진적인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당시 주류 언어학이나 전산 언어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5. 4. 중국어 표어 연구

C.L.R.U.의 동료이자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국어 강사였던 마이클 할리데이의 영향으로, 매스터먼은 한동안 중국어 표어의 본질과 기능 연구에 몰두했다. 그녀는 이 연구가 비트겐슈타인이 '진실의 그림 이론'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을 경험적으로 명확히 밝혀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는 그녀가 표어 원리의 일반성을 다소 과장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매스터먼은 영어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마치 의미 원자를 가지며 모호하고 굴절이 거의 없는 중국어와 유사하게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듯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주류 언어학계나 전산 언어학계로부터 큰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6. 과학 철학: 패러다임 개념 비판

1965년 런던에서 열린 제4회 국제 과학 철학 콜로키움에서 마거릿 매스터먼은 "패러다임의 본질"(The Nature of a Paradigmeng)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3] 이 논문에서 그녀는 토마스 쿤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1962)에 대한 상세한 텍스트 비평을 제시하며, 이 책을 "과학적으로 명료하고 철학적으로 모호하다"고 평가했다. 매스터먼은 쿤을 "우리 시대의 뛰어난 과학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하고, 패러다임 개념 자체는 "과학 철학의 근본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녀는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명확한 정의 없이 최소 21가지나 되는 서로 다른 의미로 모호하고 일관성 없게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매스터먼은 이 다양한 용례들을 메타패러다임(metaparadigmeng), 사회학적 패러다임(sociological paradigmeng), 인공물 또는 구성 패러다임(artifact or construct paradigmeng)의 세 가지 주요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녀는 과학 철학계에서 이루어진 쿤에 대한 비판들이 주로 메타패러다임 측면에만 집중되어 있으며, 패러다임 개념이 가진 다양한 통찰과 함의를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매스터먼의 이러한 날카로운 비판은 토마스 쿤 자신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쿤은 매스터먼의 지적을 상당 부분 수용했으며, 이후 자신의 논의에서 "패러다임" 개념의 사용을 줄이고 비공약성(incommensurability) 개념으로 초점을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4]

7. 루시 캐번디시 칼리지

마거릿 매스터먼은 루시 캐번디시 칼리지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초대 부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그녀는 칼리지의 이름이 유래된 인물인 루시 캐번디시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했다.

8. 에피파니 철학자

마거릿 매스터먼은 에피파니 철학자의 창립자이자 주요 영감을 준 인물이었다. 이 단체는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와 일부 회원을 공유했으며, 과학과 종교의 관계 및 종교적 실천 형태에 대한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9. 후기 연구 및 CLRU 폐쇄

1978년경 CLRU에서 주요 연구 활동이 중단되었다. 마거릿은 1980년 윌리엄 윌리엄스[2]와 함께 CLRU를 다시 시작하려 시도했다. 새로운 유형의 마이크로컴퓨터자연어 번역을 위한 그녀의 알고리즘 개발에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를 위해 마거릿은 케임브리지 밀링턴 로드에서 오웰까지 약 11.27km를 걸어가 인텔리전트 아티팩츠(ST 로보틱스 참조)로부터 노스 스타 호라이즌 컴퓨터 두 대를 구입했다. 이 컴퓨터에는 데이비드 샌즈가 작성한 포스(Forth) 프로그래밍 언어가 설치되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들이 마거릿의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사용했다.

당시 마거릿이 추구했던 자연어 번역 방식은 문장을 '호흡 그룹'(breathing group) 단위로 나누는 것이었다. 각 호흡 그룹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므로 개별적으로 번역한 뒤, 이를 재조합하여 목표 언어의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당시 주류 번역 기술, 특히 사전과 규칙 기반 시스템인 Systran과는 대조적인 접근법이었다.

마거릿이 1986년에 사망하자 윌리엄 윌리엄스는 CLRU를 폐쇄했다. 이 과정에서 초기 기계 번역(MT) 관련 귀중한 자료들이 담긴 도서관은 두 대학 기관에서 소장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폐기되었다.

10. 유산 및 평가

마거릿 매스터먼은 1933-34년 비트겐슈타인의 강좌를 들었던 학생 6명 중 한 명으로, 그의 노트는 ''청색 책''으로 출판되는 데 기여했다.[1] 그녀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955년 케임브리지 언어 연구소(CLRU)를 설립하고 이끈 것이다. CLRU는 비공식 토론 모임에서 시작하여 전산 언어학 분야의 주요 연구 센터로 성장했으며, 이는 매스터먼의 주도적인 역할과 비전 덕분이었다. 연구소는 미국과 영국 정부 기관, 그리고 이후 EU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으나, 초기에는 ICL 1202와 같은 구식 컴퓨터 설비와 훌러리스 천공 카드 기계를 사용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연구를 지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LRU는 10명 미만의 적은 인원으로도 마틴 케이, 캐런 스파르크 존스, 요릭 윌크스와 같이 미국 전산 언어학회(ACL) 평생 공로상 수상자를 세 명이나 배출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했다.

매스터먼은 시대를 약 20년 앞선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녀가 제안한 컴퓨터를 이용한 언어 처리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는 현재 인공 지능(AI) 및 기계 번역(MT) 분야에서 보편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녀의 아이디어가 급진적이어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그녀의 기여는 종종 제자들의 업적이나 후대의 독립적인 발견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녀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언어 처리가 언어 자체의 일관성, 즉 정보 이론적 관점에서 본 중복성(redundancy)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분석 과정에서 언어의 반복 구조를 고려해야 하며, 작가가 같은 내용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함으로써 모호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후기에는 리듬, 강세, 호흡 단위(breathing group) 등이 텍스트 이해에 중요한 경계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이는 언어가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존재에 의해 생성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지만, 촘스키의 이론이 주류였던 시대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으며, 이러한 패턴을 식별할 체계적인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촘스키의 구문론 중심 접근이 강했던 시기에도, 매스터먼은 의미론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 이는 R. H. 리첸스의 영향을 받아 의미 원시(semantic primitive)를 사용한 분류 체계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으나, 동시에 특정 하위 언어나 논리가 전체 언어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의미 원시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해야 하며, 자연어와 마찬가지로 다의성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실제 텍스트의 경험적 분류나, 시소러스 구조에 대한 형식 이론(특히 격자 이론)을 탐구하여 어휘 분류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마이클 할리데이의 영향으로 구문론이 근본적으로 의미론적이거나 화용론적 기능을 갖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였으며, 이는 테리 위노그라드보다 앞서 할리데이 이론을 AI에 접목한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중국어 표어 문자 연구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을 명확히 하려 했으나, 이로 인해 영어가 근본적으로 중국어와 유사한 의미 원자의 집합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CLRU의 연구는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갔으며, 기본적인 의미론적 문제에 집중했다. 기계 번역 연구가 침체되었던 시기 이후, 1985년 미국 인공 지능 학회 회장 우디 블레드소는 초기 MT 연구자들을 평가하며 "그들은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시도한 것은 옳았다. 우리는 그들이 어려운 일에 도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매스터먼과 CLRU의 노력을 간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매스터먼은 구문 분석만이 언어 이해의 전부라고 보지 않았으며, 이러한 관점은 의미론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대 언어 처리 연구에서 재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연구소에 지속적인 지적 자극을 제공했으며, 특히 시소러스를 다양한 언어 처리 작업의 도구로 제안하는 등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1978년경 CLRU에서 심각한 연구가 중단되었고, 마거릿은 1980년에 윌리엄 윌리엄스[2]와 함께 CLRU를 재개하려고 시도했다. 새로운 마이크로컴퓨터(노스스타 호라이즌)를 활용하여 포스 언어로 자신의 번역 알고리즘(문장을 "호흡 그룹" 세그먼트로 나누어 번역 후 재구성하는 방식)을 개발하고자 했다. 이 접근법은 당시 주류였던 Systran과 같은 사전 및 규칙 기반 시스템과 대조되었다. 그러나 1986년 그녀가 사망하자 윌리엄 윌리엄스가 CLRU를 폐쇄했고, 귀중한 초기 MT 문서들은 안타깝게도 폐기되었다.

또한 그녀는 루시 캐번디시 칼리지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초대 부회장(1965–1975)이었다. 그녀는 칼리지의 이름이 유래된 루시 캐번디시의 고모할머니였다. 그녀는 또한 CLRU와 일부 회원들을 공유하고 과학과 종교의 관계 및 종교적 실천 형태에 대한 연구에 헌신하는 단체인 에피파니 철학자의 창립자이자 주요 영감이었다.

1965년 마거릿 매스터먼은 런던에서 열린 제4회 국제 과학 철학 콜로키움에서 "패러다임의 본질"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3] 그녀는 토머스 쿤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1962)에 대한 상세한 텍스트 비평을 통해 이 책을 "과학적으로 명료하고 철학적으로 모호하다"고 특징지었다. 매스터먼은 쿤을 "우리 시대의 뛰어난 과학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하면서도, '패러다임' 개념이 최소 21가지 다른 의미(메타패러다임, 사회학적 패러다임, 인공물 또는 구성 패러다임의 세 그룹으로 요약 가능)로 모호하고 일관성 없이 사용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토마스 쿤 자신도 수용하여, 이후 '패러다임' 개념 대신 '비공약성'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

참조

[1] 서적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y and Language Routledge 2002
[2] 논문 Margaret Masterman: In Memoriam 1987-01-01
[3] 간행물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간행물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y and Language 2002
[6] 인용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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