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193년에 완공된 도리아 양식의 기념물로, 로마의 콜론나 광장에 위치해 있다. 27~28개의 카라라 대리석 블록으로 구성되었으며, 기둥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마르코만니 전쟁을 묘사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중세 시대에는 관광 명소로 이용되었으며,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의 명령으로 복원되어 현재는 성 바오로의 조각상이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탈리아의 기념물 - 트라야누스 원주
    트라야누스 원주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원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 기둥으로, 나선형 부조로 그의 업적을 묘사하며 내부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 이탈리아의 기념물 - 단테 기념비
    피렌체에 위치한 단테 기념비는 조반니 파치가 조각하고 루이지 델 사르토가 받침대를 디자인하여 1865년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해 산타 크로체 성당 앞 광장에 세워진 이탈리아 민족주의 상징 조각상이다.
  • 2세기 조각 작품 - 트라야누스 원주
    트라야누스 원주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원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 기둥으로, 나선형 부조로 그의 업적을 묘사하며 내부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 2세기 조각 작품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은 2세기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묘사한 청동 기마상으로, 아들로쿠티오 자세로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독교 황제로 오인되어 보존되어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어 캄피돌리오 광장에 설치되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명상록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우주적 관점, 윤리적 원칙, 합리성과 평정심 유지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며 삶의 여러 시기에 걸쳐 기록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책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은 2세기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묘사한 청동 기마상으로, 아들로쿠티오 자세로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독교 황제로 오인되어 보존되어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어 캄피돌리오 광장에 설치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 (라틴어)Columna Centenaria Divorum Marci et Faustinae
공식 명칭 (이탈리아어)Colonna di Marco Aurelio
위치이탈리아 로마 콜론나 광장
건축
유형전승기념비, 기념주
건축가불명
기공서기 176년
완공서기 193년
높이약 39.72m (기단 포함)
재료카라라 대리석
역사
건립 목적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마르코만니 전쟁 승리 기념
모델트라야누스 원주
복원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복원, 꼭대기에 성 베드로의 청동상 설치
구조
기둥 표면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마르코만니 전쟁과 사르마티아 전쟁 장면 묘사
나선형 계단내부 나선형 계단 존재
조명원래는 기둥 상부에 구멍이 뚫려 있어 빛을 제공
추가 정보
중요성로마의 랜드마크, 고대 로마 조각의 중요한 예시

2. 건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처음 세워질 때 새겨진 비문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생전인 176년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사르마티아인에 대한 개선을 기념하여 지어졌는지, 혹은 그의 사후인 180년 이후에 건설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인근에서 발견된 다른 비문을 통해 193년까지는 완공되었음이 확인된다.[1] 이 기념비는 아들 코모두스와 로마 원로원이 황제의 군사적 업적과 유산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로마의 지형에 따르면, 원주는 마르티우스 광장 북쪽에 위치한 사각형 광장 안에 세워졌다. 이 광장은 하드리아누스 신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신전 사이에 있었거나, 후자의 신성한 구역 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가 화장된 장소도 이 근처였다.

원주는 도리아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높이 29.6m(약 100 로마 척)의 기둥 본체와 10.1m 높이의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기단 아래에는 3m 높이의 기초(플랫폼)가 더 있었으나, 1589년 복원 과정에서 땅속에 묻혔다. 따라서 현재 원주의 총 높이는 약 39.7m이다.[1]

원주는 지름 3.7m의 카라라 대리석 블록 27개 또는 28개로 구성되어 있다. 각 블록의 내부는 비어 있어 원주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190개에서 200개의 나선형 계단을 만들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 원주와 마찬가지로, 이 계단은 기둥 표면의 부조 사이에 낸 좁은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밝혀진다.

2. 1. 부조

기둥의 세부 묘사. 다섯 개의 수평 슬릿은 내부 계단으로 빛을 통과시킨다.


나선형 부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166년부터 그의 죽음 직전까지 수행한 마르코만니 전쟁의 이야기를 묘사한다. 이야기는 로마 군대가 도나우강을 건너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이곳은 카르눈툼 부근으로 추정된다. 부조 중간에는 승리의 여신이 새겨져 두 차례의 원정을 구분한다. 묘사된 사건들의 정확한 시간 순서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최신 연구에 따르면 기념주의 하반부는 172년부터 173년까지 벌어진 마르코만니족콰디족에 대한 원정을, 상반부는 174년부터 175년까지 사르마티아인들을 상대로 거둔 성공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기둥에 묘사된 게르만 전쟁 회의 – 팅(의회)으로 알려진 초기 증거로 여겨짐


특히 부조에는 "콰디족 영토에서의 비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로마군이 콰디족 영토에서 고전하던 중, 황제가 신에게 기도를 올리자 이에 응답하듯 거센 폭풍우가 몰아쳐 로마군을 구원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은 당시 로마의 선전에도 활용되었으며, 후대에 기독교도들은 이 기적을 자신들의 신이 행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2]

트라야누스 원주와 여러 유사점을 공유하지만, 부조의 양식은 상당히 다르다. 이는 3세기의 극적인 양식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건설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인물의 머리는 관람자가 표정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신체 비율에 맞지 않게 크게 표현되었다. 조각 자체는 트라야누스 원주보다 덜 정교하지만, 돌을 더 깊게 파내어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강조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높였다. 부조는 마을이 불타고, 여성과 아이들이 포로로 끌려가며, 남성들이 살해당하는 등 전쟁의 참혹함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특히 게르만족을 비롯한 로마에 저항한 이들의 절망과 고통이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반면, 황제는 주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는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상징 언어는 트라야누스 원주의 차분하고 냉정한 균형감과는 달리,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게 보일 수 있지만 훨씬 더 명확하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이는 극적이고 감정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제국의 우월성과 황제의 권위를 강조하며, 로마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이 원주의 부조는 후기 고대 예술 양식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3세기의 위기라는 로마 제국의 혼란기를 예고하는 첫 예술적 표현으로 평가받는다.

3. 건설 이후의 역사

중세 시대에는 이 원주에 오르는 것이 매우 인기가 있어 입장료를 받을 권리가 매년 경매에 부쳐질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원주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조반니 파올로 파니니가 그린 몬테치토리오 궁전 그림 속 원주(오른쪽). 오른쪽 앞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기둥의 받침대가 보인다 (1747년).


현재 이 원주는 로마의 콜론나 광장 중심부에 서 있으며, 키지 궁전 앞에 자리 잡고 있다.

3. 1. 복원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의 명령에 따라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가 원주 전체를 복원하였다.[3][5] 이 과정에서 당시의 지면 높이에 맞춰 공사가 진행되면서, 원주 기단부의 아래쪽 약 3m가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또한, 1588년 10월 27일에는 원주 꼭대기 플랫폼에 사도 성 바오로의 청동상이 설치되었다.[3][5] 이는 트라야누스 원주 꼭대기에 성 베드로상이 올려진 것과 유사한 조치였다. 본래 원주 꼭대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면서 제거되고 성 바오로 상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3] (다른 기록에 따르면 복원 당시 이미 황제 동상은 사라진 상태였다고도 한다.[5])

복원 과정에서 기단부에 새겨져 있던 원래의 부조들도 제거되었다. 플라미니아 가도를 마주보는 면에 있던, 화환을 든 승리의 여신과 정복당한 이민족을 묘사한 부조들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소실된 상태이다.[3][5] 대신 그 자리에는 새로운 비문이 새겨졌는데, 이 비문은 해당 원주를 안토니누스 원주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현재 안토니누스 피우스 원주는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5]

라틴어 원문한국어 번역
SIXTVS V PONT MAXM
COLVMNAM HANC
COCLIDEM IMP
ANTONINO DICATAM
MISERE LACERAM
RVINOSAMQ(UE) PRIMAE
FORMAE RESTITVIT
A. MDLXXXIX PONT IVla
식스토 5세, 대사제(교황)는 황제 안토니누스에게 봉헌되었으며, 심하게 파손되고 무너져가던 이 나선형 기둥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589년, 교황 재위 4년.



이러한 복원 과정은 고대 로마 황제의 기념물에 기독교적 상징을 덧씌우고, 이전 시대의 표현(정복된 이민족 묘사 등)을 제거하려는 당시의 경향을 보여준다.

4. 디자인

원주 본체의 높이는 29.62m(약 100 로마 척)이며, 10.1m 높이의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다. 원래 이 받침대 아래에는 3m 높이의 기초가 더 있었으나, 1589년 복원 과정에서 땅속에 묻혔다. 따라서 현재 지상에서 보이는 받침대를 포함한 기둥의 높이는 약 39.72m이다.[1] 총 높이가 100 로마 피트에 달했기 때문에, 동시대 로마인들은 이 기념물을 'Columna centenaria'(100피트 기둥)라고 불렀으며,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columna cochlis'(달팽이 기둥)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는 트라야누스 원주에도 붙었던 별명이다.

원주는 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재료는 북부 로마에서 가져온 이탈리아산 백색 카라라 대리석이다. 총 27개 또는 28개의 대리석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블록의 지름은 3.7m이다. 블록 내부는 비워져 있어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190개에서 200개의 나선형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트라야누스 원주와 유사하게, 계단은 기둥 표면의 부조 사이에 난 좁은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밝혀진다.

기둥 몸체는 20개의 대리석 드럼(원통형 기둥 부재)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표면의 프리즈는 기둥이 세워진 후에 조각되었다. 이 프리즈에는 다뉴브강 북쪽에서 벌어진 마르코만니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받침대는 큰 직사각형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변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현재는 소실되었다. 원래 기둥 꼭대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상이 있었으나, 16세기에 성 바오로의 조각상으로 교체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트라야누스 원주와 자주 비교되며, 유사하게 황제를 기리는 기념비 역할을 한다. 그러나 트라야누스의 유해가 원주 내부에 안치된 것과 달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해는 이곳에 없으므로 엄밀히 말해 케노타프(가묘)에 해당한다. 황제가 화장된 장소는 원주 근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 세부 치수[4]
구분높이/지름
기단 높이1.58m
기둥 몸체 높이26.49m
드럼(원통형 기둥 부재) 평균 높이1.56m
기둥 몸체 지름3.48m
주두(기둥머리) 높이1.55m
기둥 자체 높이29.62m (약 100 로마 척)
받침대 높이약 10.1m
지면에서 기둥 상단까지의 높이약 39.72m


5. 원주 관람



원주에 새겨진 부조의 사건들은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지 않았다. 마르코만니 전쟁 중 로마군이 다뉴브 강을 건너는 장면, 승리 장면, 그리고 소위 '기적의 비' 장면 등이 서로 겹쳐서 나타나는 것이 그 증거이다. 특히 '기적의 비' 장면은 로마 군인들이 북쪽으로 전쟁을 치르러 지나갔던 비아 플라미니아를 향하는 원주의 정면, 즉 가장 잘 보이는 면의 아래쪽에 배치되었다. 이는 연대순 배열보다는 관람객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2]

부조를 관람할 때 몇 가지 시각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주와 비교하면, 인물들의 머리가 신체 비율에 맞지 않게 다소 크게 조각되었는데, 이는 보는 사람이 인물의 표정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조각 자체는 트라야누스 원주보다 덜 정교하지만, 돌을 더 깊게 파내어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강하게 만들어 이미지가 더 눈에 띄도록 했다.

묘사 방식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트라야누스 원주가 사건을 비교적 냉정하고 차분하게 묘사하는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훨씬 극적이고 감정적이다. 마을이 불타고, 여성과 아이들이 포로로 잡혀 끌려가며, 남성들이 살해당하는 장면 등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야만인'으로 묘사된 적들의 절망과 고통이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주변을 통제하는 중심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 방식은 다소 어색해 보일 수 있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더욱 명확하다. 부조는 로마 제국의 군사적 우위와 황제의 권위를 강조하며 그의 리더십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는 후기 고대 예술 양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3세기에 더욱 심화될 로마 제국의 혼란을 예고하는 첫 예술적 표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6. 의미와 상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출신이다. 이 시기(서기 96년~180년) 로마 제국은 비교적 안정된 국경, 경제적 번영, 그리고 공공의 선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들을 통해 안정적인 통치를 누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적이고 현명한 황제로 존경받았으며, 개인적인 이익보다 제국의 발전을 우선시하는 시민적 미덕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 아래 로마 제국은 영향력의 정점에 달했으며, 그 영토는 현재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일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지중해는 제국 내 소통과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다양한 사상과 물자의 교류를 촉진했다.

이 원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자 서기 166년부터 공동 황제였던 코모두스에 의해 세워졌다. 로마의 기념물 건립 전통에 따라 선대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특히 트라야누스 원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의 유일한 직접적인 선례로 여겨진다. 트라야누스 원주의 요소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에 반영된 것은 두 황제 가문 간의 연결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트라야누스 원주보다 더 높고 조각이 더 깊게 새겨졌는데, 이는 코모두스가 자신의 가문을 로마 사회의 정점으로 끌어올리고 아버지와 자신의 통치를 더욱 존경받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6. 1. 종교와의 연관성

원주에는 신적인 존재의 개입을 묘사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기적의 비' 장면은 로마군 병사들 위에 적인 기운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장면은 트라야누스 원주에도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어, 당시 로마 제국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원주의 종교적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겪었다. 16세기에 교황 비오 5세는 도메니코 포티고에게 원주 복원을 지시하면서 일부 변경을 가했다. 지진으로 손상된 기단을 교체하면서 새로운 비문을 새겼는데, 이는 교회가 '야만인'으로 간주되던 세력을 억제하고 성 바오로를 기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과정에서 원주 꼭대기에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은 철거되고 성 바오로의 동상으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 제국의 권력 상징물이었던 원주가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되었음을 보여준다.

6. 2. 예술로서의 상징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역사적인 사건을 담은 부조 덕분에 중요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원주의 부조 양식은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주와 여러 유사점을 가지면서도 완전히 다른 예술적 특징을 보여준다. 트라야누스 원주가 냉정하고 차분한 균형미를 추구했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극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에 집중한다.

부조에 묘사된 인물들의 머리는 의도적으로 크게 조각되어 관람자가 그들의 표정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조각 기법 면에서도 트라야누스 원주보다 덜 정교하지만, 돌을 더 깊게 파내어 만들어진 강한 음영 대비는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높인다. 이러한 기법은 특히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기여한다. 마을이 불타고, 여성과 아이들이 포로로 끌려가며, 남성들이 살해당하는 장면들 속에서 게르만족 등 로마에 적대했던 이들의 절망과 고통이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강렬하게 표현된다.[2]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주변을 통솔하는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이 원주의 부조는 배경이나 풍경 묘사를 과감히 생략하고, 대신 인물, 무기, 병사 등 사건의 핵심 요소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화면을 채운다. 이는 관람자의 시선을 사건 자체와 인물의 감정에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언뜻 보기에 다소 거칠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상징적인 의미 전달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명확하고 강력하다. 제국의 우월성과 권위를 강조하고 황제의 리더십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의 양식은 3세기 미술의 극적인 경향을 예고하며, 곧이어 건설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더 나아가 이는 후기 고대 예술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이자, 3세기의 위기로 치닫는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상황을 반영하는 최초의 예술적 표현 중 하나로 해석되기도 한다.

6. 3. 기적의 비

'기적의 비' 장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이 장면 자체만으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이 장면에 담긴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이 장면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가 기록한 사건을 묘사한다. 마르코만니 전쟁콰디족과의 전투에서, 로마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유리한 지점에서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로마 병사들은 방패를 맞대고 용감하게 싸웠지만, 극심한 더위와 갈증으로 인해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콰디족은 로마군이 지쳐 항복할 것이라 예상하고 포위망을 좁혀 물을 구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로마군은 피로, 부상, 더위, 갈증으로 인해 극한 상황에 몰렸고, 더 이상 싸우거나 후퇴할 수도 없이 전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신에게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며 강력한 비가 쏟아졌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를 신의 개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적인 사건으로 기록했다. (일설에는 황제와 동행했던 이집트 마법사 아르누피스가 공기의 신 메르쿠리우스를 포함한 여러 신에게 주술을 부려 비를 내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비가 내리자 목마른 로마 병사들은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빗물을 받아 마셨으며, 방패와 투구에도 물을 받아 갈증을 해소했다. 물을 마시면서도 동시에 적과 싸움을 이어갔고, 부상자 중 일부는 투구에 흘러든 자신의 피와 빗물을 함께 삼키기도 했다.

로마 병사들이 물을 마시는 데 집중하는 사이 적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할 뻔했으나, 갑자기 격렬한 폭풍우와 함께 수많은 번개가 적진에 떨어졌다. 한쪽에서는 로마군이 비를 맞으며 생기를 되찾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적군이 불벼락을 맞아 불타 죽어가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불은 로마군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고, 설령 닿더라도 즉시 꺼졌지만, 적군에게 내린 비는 마치 기름처럼 불길을 더욱 키웠다. 그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타는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물을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부는 불을 끄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냈고, 또 다른 일부는 구원의 물이 로마군에게만 있다고 믿고 로마군 측으로 투항하기도 했다.

이 극적인 승리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병사들로부터 일곱 번째로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았다. 그는 전통적으로 로마 원로원의 승인 전에 칭호를 받는 것을 꺼렸지만, 이번에는 하늘이 내린 선물로 받아들이고 원로원에 이 소식을 전했다.

'기적의 비' 사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은 북부 전역 초기에 발생했으며, 로마인들에게 '야만족'을 정복하는 것이 신이 부여한 권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후대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이 기적을 일으킨 신이 바로 기독교의 신이라는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다.

7. 역사적 의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군사 활동이었던 마르코만니 전쟁과 당시의 문화를 기록한 역사적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1] 원주 표면을 나선형으로 감싸고 있는 부조는 166년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벌어진 마르코만니 전쟁의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이야기는 로마 군대가 다뉴브 강을 건너는 장면(아마도 카르눈툼 부근)에서 시작하여, 마르코만니족콰디족에 대한 원정(172년-173년, 원주 하단부)과 사르마티아인들에 대한 군사적 성공(174년-175년, 원주 상단부)을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다.[1]

이 부조들은 당시 로마 군대의 전투 방식, 무기, 복장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시각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로마의 적이었던 게르만족과 사르마티아족의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게르만족의 전쟁 회의를 묘사한 장면은 초기 팅(의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되기도 한다.

원주에는 역사적 사실 외에도 로마의 선전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콰디 영토에서의 비의 기적' 장면인데, 황제의 간절한 기도에 신이 응답하여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목마름과 적의 위협에 시달리던 로마군을 구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황제의 신성함과 로마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훗날 기독교인들은 이 기적을 자신들의 신이 행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2]

예술사적 관점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약 60년 전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주와 자주 비교되지만, 양식 면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트라야누스 원주가 비교적 차분하고 객관적인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인물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를 위해 인물들의 머리를 신체 비율보다 과장되게 크게 조각하여 표정을 강조했으며, 조각을 깊게 파내어 강한 음영 대비를 만들어냄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높였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전쟁의 참혹함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낳는다. 불타는 마을, 포로로 끌려가는 여성과 아이들, 살해당하는 남성들의 모습 등 전쟁으로 인해 '야만인'으로 불렸던 이들이 겪는 고통과 절망이 강렬하게 묘사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군대를 지휘하고 주변을 통제하는 중심 인물로 그려져, 로마 제국의 우월성과 황제의 리더십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에서 나타나는 극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양식은 3세기 로마 미술의 특징을 예고하며, 고전주의에서 후기 고대 예술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양식의 변화가 점차 심화되던 로마 제국의 위기 상황을 반영하는 예술적 표현의 시작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이 원주는 후대에 중요한 역사 연구 자료로 활용되었다. 특히 19세기 말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원주 부조가 초기 게르만족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고, 원주에 대한 학술 연구와 상세한 사진 기록 작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가 로마의 전쟁 기록을 넘어, 고대 유럽 민족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하는 귀중한 역사적 유물임을 보여준다.

8. 1588년 종교적 재건

1588년, 지진으로 손상된 원주 기단을 복원하기 위해 교황 식스토 5세는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재건을 위임했다.[3] 이 과정에서 폰타나는 원주 전체를 복원하고 당시 높아진 지면 높이에 맞추었는데, 이로 인해 기둥 하단의 약 3m가 땅 속에 묻히게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원주의 종교적 의미를 바꾸는 것이었다. 1588년 10월 27일, 원주 꼭대기에는 원래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상 대신 성 바오로의 청동상이 세워졌다.[3][5] 이는 트라야누스 기둥 꼭대기에 성 베드로 상을 세운 것과 같은 맥락의 조치였다. 원래 꼭대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복원 당시에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5]

기단 부분의 부조 역시 변경되었다. 플라미니아 가도를 마주보는 면에 있던, 화환을 든 승리의 여신과 정복당한 야만족을 묘사한 부조는 손상되거나 파괴되어 제거되었고, 새로운 비문으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4개의 면에 있던 원래 비문도 모두 변경되었으며, 원본은 유실되었다.

새롭게 새겨진 비문들은 가톨릭 교회의 관점을 반영하며 원주의 새로운 기독교적 역할을 강조했다.


  • 북쪽 면 비문: 원주가 성 바오로와 야만주의 격퇴에 헌정되었음을 명시.
  • 동쪽 면 비문: 성 바오로와 함께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역할을 기록.
  • 남쪽 면 비문: 도메니코 폰타나와 교황 식스토 5세 치하에서의 복원 사실을 기록.
  • 서쪽 면 비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의 전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원주를 헌정했다는 내용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기둥과 혼동한 오류이다).[5]


1589년에 복원이 완료되면서 추가된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 비문 역시 원주를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기둥으로 잘못 언급하고 있다.

라틴어 원문한국어 번역
SIXTVS V PONT MAXM
COLVMNAM HANC
COCLIDEM IMP
ANTONINO DICATAM
MISERE LACERAM
RVINOSAMQ(UE) PRIMAE
FORMAE RESTITVIT
A. MDLXXXIX PONT IVla
식스토 5세, 최고 교황(Pontifex Maximus)은, 황제 안토니누스에게 봉헌되었으나 비참하게 부서지고 파손된 이 나선형 기둥을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1589년, 교황 재위 제4년.



이러한 재건축과 비문 변경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를 기독교의 승리와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재탄생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비록 176년 원주 건립 당시의 의미는 희석되었지만, 1588년 이후 로마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9. 프로쿠라토르 - 아드라스투스

아드라스투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의 프로쿠라토르(관리인)였으나, 그의 구체적인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명확하지 않다. 그에 대한 정보는 주로 원주 건설 이후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아드라스투스는 원주 건설이 완료된 후, 원주가 위치한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에 영구적인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특히 이례적인 점은 그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해당 토지를 영구적으로 소유하고 사후에는 상속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권한까지 얻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로마의 중요 지역에서 일반 공무원에게 토지 소유권을 부여하는 매우 드문 사례였다. 그의 집 입구 문턱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건물의 존재를 허가하는 법령 외의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아드라스투스의 역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있다. 첫째, 그가 원주 건설 기간 동안 관리인으로서, 건축가는 아니었지만 로마 관료로서 약 17년에 걸친 기념비의 계획 및 건설 과정을 감독하는 현장 책임자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 경우, 그의 오랜 헌신에 대한 보상으로 집과 토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원주가 완공된 후의 관리인으로서, 기념비의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내부 계단을 오르내리는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아드라스투스의 집에 있던 비문에는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 건설에 사용되었던 자재를 재활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다. 원주 건설이 서기 193년에 종료된 점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아드라스투스의 집 건설 역시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원주의 계획부터 완공까지 총 17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뒷받침한다.

참조

[1] 서적 Height of shaft, base and above ground
[2] 웹사이트 Justin Martyr's First Apology http://www.newadvent[...]
[3] 서적 Art in Renaissance Italy By John T. Paoletti, Gary M. Radke https://books.google[...]
[4] 서적
[5] 서적 Art in Renaissance Italy By John T. Paoletti, Gary M. Radke https://books.googl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