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기원전 36년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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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기원전 36년 집정관으로, 코케이우스 씨족 출신이다.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했으며, 기원전 41년 페루지아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아시아 속주 총독을 역임하며 임페라토르 칭호를 얻었고, 안토니우스의 공헌을 인정받아 기원전 36년에 집정관에 취임했다. 기원전 31년에는 신사 수행 15인 위원회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29년에는 파트리키 신분이 되었다. 그의 증손자는 로마 제국의 황제 네르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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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기원전 36년 집정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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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마르쿠스 코케유스 네르바 |
라틴어 표기 | Marcus Cocceius Nerva |
출생 및 사망 | |
출생 | 불명 |
사망 | 불명 |
출생지 | 불명 |
사망지 | 불명 |
가문 | |
출신 계급 | 평민 |
씨족명 | 코케유스 씨족 |
경력 | |
재무관 대리 겸 법무관 대리 | 기원전 41년 |
집정관 대리 | 기원전 38년 경 |
집정관 | 기원전 36년 |
신사遂行十五人委員会 | 기원전 31년 - |
속주 총독 | 아시아 속주 (기원전 38년 경) |
기타 정보 | |
지휘 전쟁 | 알려진 바 없음 |
배우자 | 알려진 바 없음 |
후계자 | 알려진 바 없음 |
2. 출신 배경
네르바는 평민인 코케이우스 씨족 출신으로, 움브리아주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8] 코케이우스 씨족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는데, 네르바 외에도 기원전 39년 보충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가 있었다.[9]
2. 1. 가문
네르바는 무명의 평민인 코케이우스 씨족 출신이다. 코케이우스 씨족은 움브리아주에서 왔다고 전해진다.[8] 이 씨족에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지자가 많이 나왔으며, 네르바 외에는 기원전 39년의 보충 집정관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등이 있다.[9]2. 2. 초기 생애
네르바는 무명의 평민인 코케이우스 씨족 출신이다. 코케이우스 씨족은 움브리아주에서 왔다고 전해진다.[8] 이 씨족에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지자가 많이 나왔으며, 네르바 외에는 기원전 39년의 보충 집정관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등이 있다.[9]3. 생애와 경력
네르바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도와 여러 직책을 맡으며 경력을 쌓았다. 기원전 41년 페루지아 전투에 참여했고, 기원전 40년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화해에 기여했다. 기원전 38년에는 아시아 속주 총독을 역임하며 라기나에서 승리하여 임페라토르(승리 장군) 칭호를 얻었다. 기원전 36년에는 집정관에 취임하였고, 기원전 31년에는 신성 의식을 수행하는 15인 위원회(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에 선출되었으며, 기원전 29년에는 파트리키(귀족) 신분이 되었다.[14]
3. 1. 페루지아 전쟁 참여
기원전 41년, 네르바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의 프로퀘스토르 프로프라에토르(재무관 대리 겸 법무관 대리)가 되어 페루지아 전투에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행동했다.[10] 네르바는 안토니우스 군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옥타비아누스와 싸우는 것을 거부했고, 그 결과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화해하게 된다.[11]3. 2.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화해 중재
기원전 41년, 네르바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에서 프로퀘스토르 프로프라에토르(재무관 대리 겸 법무관 대리)를 맡아 페루지아 전투에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참전했다.[10] 네르바는 안토니우스 군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옥타비아누스와의 전투를 거부했다. 그 결과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화해하게 되었다.[11]3. 3. 아시아 속주 총독
기원전 38년경,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네르바를 프로콘술(집정관 대리) 권한으로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했다.[12] 이 때 라기나를 둘러싼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승리 장군) 칭호를 얻었다.[13]3. 4. 집정관 취임
기원전 41년, 네르바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의 프로퀘스토르 프로프라에토르(재무관 대리 겸 법무관 대리)가 되어 페루지아 전투에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행동했다.[10] 네르바는 안토니우스 군의 장군 중 옥타비아누스와 싸우는 것을 거부한 인물 중 한 명이었고, 그 결과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화해하게 된다.[11] 기원전 38년 경, 안토니우스는 네르바를 프로콘술(집정관 대리) 권한으로 아시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12] 이 때 라기나를 둘러싼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승리 장군)의 칭호를 얻었다.[13]이러한 안토니우스에 대한 공헌의 보상으로, 네르바는 기원전 36년에 집정관에 취임했다(6월에 퇴임).[14]
3. 5. 기타 경력
기원전 41년, 네르바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의 프로퀘스토르 프로프라에토르(재무관 대리 겸 법무관 대리)가 되어 페루지아 전투에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행동했다.[10] 네르바는 안토니우스 군의 장군 중 옥타비아누스와 싸우는 것을 거부한 인물 중 한 명이었고, 그 결과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화해하게 된다.[11] 기원전 38년경, 안토니우스는 네르바를 프로콘술(집정관 대리) 권한으로 아시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12] 이때 라기나를 둘러싼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승리 장군) 칭호를 얻었다.[13]이러한 안토니우스에 대한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네르바는 기원전 36년에 집정관에 취임했다(6월에 퇴임). 기원전 31년에는 신사 수행 15인 위원회(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29년에는 파트리키(귀족) 신분이 되었다.[14]
4. 가계 및 후손
네르바에게는 동명이인 아들이 있었으며, 그는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측근이 되었다. 제12대 황제 네르바는 그의 증손자이다.
5. 사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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