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루이즈 다미앙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리 루이즈 다미앙(1889–1978)은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로, 샹송 레알리스트 장르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모델과 배우로 활동을 시작하여 1911년 데뷔 후 모리스 슈발리에와 함께 공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인들을 위문했으며, "어두운 일요일"과 같은 논란이 있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일본 순회 공연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었고, 1954년부터 1955년까지 페어웰 투어를 진행했다. 다미아는 레즈비언으로 건축가 아일린 그레이와 연인 관계였으며, 영화 《나폴레옹》에 출연하는 등 배우로도 활동했다. 그녀는 에디트 피아프에 이어 두 번째로 위대한 샹송 레알리스트 가수로 평가받으며, 일본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성소수자 가수 - 조세핀 베이커
조세핀 베이커는 1906년 미국에서 태어나 댄서, 가수, 배우, 시민운동가로 활동했으며, 프랑스에서 성공을 거두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우다 1975년 사망 후 프랑스 팡테옹에 헌정되었다. - 프랑스의 성소수자 가수 - 샤를 트르네
샤를 트르네는 프랑스 샹송에 스윙 재즈 리듬을 결합한 독창적인 스타일로 "기쁨이 있네", "라 메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프랑스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의 싱어송라이터이다. - 19세기 성소수자 사람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초기 논리실증주의를 대표하고 『철학적 탐구』로 후기 일상언어철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언어 게임 개념을 제시하여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세기 성소수자 사람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거시경제 이론을 통해 현대 경제학과 정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을 옹호하는 그의 사상은 현대 경제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프랑스의 여자 가수 - 에디트 피아프
에디트 피아프는 1915년 파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노래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작은 참새'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가수 겸 배우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 설, "장미 인생" 등의 히트곡, 이브 몽탕 등의 후배 가수 성공 기여, 마르셀 세르당과의 비극적인 사랑, 약물 중독, 올랭피아 극장 공연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가수로 기억된다. - 프랑스의 여자 가수 - 카트린 리베이로
프랑스 가수이자 배우인 카트린 리베이로는 알프스 그룹 협업 및 솔로 활동으로 정규, 라이브 음반, EP, 싱글 등을 발매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고,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마리 루이즈 다미앙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명 | 루이즈 마리 다미앙 |
출생일 | 1889년 12월 5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제3공화국 |
사망일 | 1978년 1월 30일 |
사망지 | 라 셀-생-클루, 프랑스 |
묻힌 곳 | 팡탱 시립 묘지 |
국적 | 프랑스 |
다른 이름 | 마리즈 다미아, 마리제 다미아 |
직업 | 가수, 배우 |
활동 기간 | 1911년 - 1955년 |
배우자 | Gab Sorère (1928년–1961년, 그의 사망까지) |
2. 초기 생애
마리 루이즈 다미앙은 1889년 12월 5일 파리 13구의 잔 다르크 거리에서 마리 조제핀 루이즈(결혼 전 성씨는 클로드)와 니콜라 다미앙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로렌 출신의 경찰 상사였으며, 8명의 형제자매가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방랑벽이 있었고, 개과 학교에 보내진 후 집을 나와 15세에 파리로 갔다.[2]
다미앙은 초기에는 샤틀레 극장에서 단역을 맡으며 모델과 배우로 활동했다.[1] 1909년에는 마리즈 다미아라는 예명으로 런던에서 막스 데어리와 함께 무용수로 활동했다.[1][2] 런던에서 돌아온 후, 임프레사리오 로베르 홀라드의 권유로 로베르티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시작하여, 1911년 쁘페니에르에서 데뷔했다. 이후 알함브라-모리스 슈발리에, 알카자르 데테 등에서 모리스 슈발리에와 함께 공연했다.[1]
3. 경력
펠릭스 마욜에게 발탁되어 그의 콘서트에 고용되었으며, 미국인 무용가 로이 풀러의 무대 연출 도움을 받아 가수로 성공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몽마르트르에 "르 콘세르 다미아"를 열고 전선에서 노래하며 병사들을 위문했다. "샹송 레알리스트" 장르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 중 한 명으로, "샹송의 비극 여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6년 발표한 Sombre Dimanche|어두운 일요일프랑스어는 프랑스와 일본에서 방송/발매 금지되는 등 큰 논란을 일으켰다. 1953년에는 일본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일본에서도 뿌리 깊은 인기를 얻었으며, 도쿄, 나고야,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 센다이 등에서 공연했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 페어웰 투어를 진행했고, 파리 올랭피아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3. 1. 주요 작품
4. 사생활
다미아는 레즈비언으로, 1922년경 건축가 아일린 그레이와 연인 관계였다.[2] 아일린 그레이는 로이 풀러와 그의 연인 가브 소레르,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 로메인 브룩스 등이 속한 레즈비언 서클의 일원이었다.[2] 1928년 풀러가 사망한 후, 다미아는 가브 소레르와 연인이 되었다.
5. 영화 출연
아벨 강스가 감독하고 초기 무성 영화 스타 앙토냉 아르토, 필리프 에리아, 아나벨라, 수잔 비앙체티가 출연한 영화 ''나폴레옹''(1927)에 출연했다.[1] 그녀는 안소니 퀸과 함께 "솔라"와 "노트르담 드 파리"에도 출연했다.[1]
- ''칼레-도버'' (1931)
- ''알론'' (1931)
- ''어떤 남자의 목'' (1933)
6. 사망
다미아는 1978년 1월 30일 파리 서부 교외에 있는 라 셀 생 클루에서 사망하여, 팡탱 묘지에 안장되었다.
7. 평가 및 영향
에디트 피아프에 이어 두 번째로 위대한 샹송 레알리스트프랑스어 가수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삶과 예술은 아와야 노리코, 이와야 토키코, 아사카와 마키, 고 히데오, 이시이 요시코 등 일본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 1936년에 녹음·발표된 ''Sombre Dimanche''프랑스어(한국어 제목: 어두운 일요일)는 한국에서도 금지곡으로 지정된 바 있다.[1]
참조
[1]
서적
Damia: une diva française
Perrin
2010
[2]
서적
The Queer Encyclopedia of the Visual Arts
https://books.google[...]
Cleis Press
2012-03-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