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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가브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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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이탈리아의 트라피스트회 수녀로, 본명은 마리아 사게두이다. 1914년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 오빠들을 잃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심을 키웠다. 20세에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여 '마리아 가브리엘라'라는 수녀명을 받았으며,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하여 1938년 그리스도인 일치 주간에 자신의 삶을 영적 제물로 봉헌했다. 결핵으로 투병하다 1939년 4월 23일 선종했으며,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녀는 교회 일치 운동의 모범으로 여겨지며, 요한복음 17장을 묵상하며 에큐메니컬 운동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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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가브리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게두의 도르갈레스 전통 의상 차림
존칭 접두사복녀
이름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
존칭 접미사O.C.S.O.
출생일1914년 3월 17일
출생지이탈리아 왕국 사르데냐 도르갈리
사망일1939년 4월 23일
사망지이탈리아 로마현 그로타페라타
축일4월 22일
시복일1983년 1월 25일
시복 장소이탈리아 로마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시복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수호에큐메니즘
병자
주요 성지이탈리아 비테르보현 비토르키아노, 성 요셉 성모 수도원, 일치의 경당

2. 생애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1914년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의 도르갈리에서 '''마리아 사게두'''(Maria Saggheduit)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6][1].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거치며 신앙심이 깊어졌고, 특히 가톨릭 행동 연합(아지오네 카톨리카) 활동을 통해 신앙 교육과 봉사에 힘썼다[8][1].

20세가 되던 1935년, 로마 근교 그로타페라타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 입회하여[6] '마리아 가브리엘라'라는 수녀명을 받았다[3]. 수도원 생활 중 당시 아베스(수녀원장)였던 마리아 피아 굴리니 수녀의 영향으로 에큐메니즘(교회 일치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8][3], 1938년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기독교 교회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했다[8][1].

이후 결핵 진단을 받고 약 15개월간 투병하다가 1939년 4월 23일 선종했다[2]. 그녀의 삶은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헌신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있다.

2. 1. 출생과 유년 시절

마리아 수녀는 1914년 3월 17일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동부 해안의 마을인 도르갈리에서 '''마리아 사게두'''(Maria Saggheduit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1][6] 아버지는 마르칸토니오 사게두, 어머니는 카테리나 쿠카였으며, 양치기 가정의 8남매 중 다섯째였다.[1] 1919년 아버지와 오빠 한 명이 사망했고, 다른 두 오빠도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다.[1][7]

어린 시절 사게두는 고집이 센 것으로 알려졌지만, 동시에 순종적이어서 "말로는 거절하지만 한번에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8][2] 때로는 게으름을 피우는 경향도 있었다고 전해진다.[2] 초등학교를 마친 후, 집안일을 돕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7][3] 학교에서는 주의력이 깊고 총명했으며, 다른 과목보다 산수를 특히 잘했다.[3] 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집안일에 진지하고 헌신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싫어하는 일에 대해서는 빠르게 비판하고 원하는 것을 재빨리 요구하는 면도 있었다.[3]

2. 2. 신앙의 성장과 가톨릭 활동

1932년, 마리아 사게두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여동생 조반나 안토니아(1915년 출생)가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그녀가 신앙을 더욱 깊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고[2], 얼마 지나지 않아 가톨릭 행동 연합(아지오네 카톨리카)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8][2]

가톨릭 행동 연합 활동을 통해 그녀는 지역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신앙교리를 가르치고, 마을의 노인들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8][1]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기도 생활을 포함한 영적 생활과 묵상 생활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처음에는 손에 막대기를 들고 교리를 가르쳤으나, 어느 날 지역 신부가 그녀에게서 막대기를 빼앗으며 "막대기가 아닌 인내심으로 무장하라"는 쪽지를 건네주었다. 마리아는 이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이후 교육 방식을 바꾸었다.[8][3]

2. 3. 트라피스트회 입회와 수도 생활

로마 근교 그로타페라타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마리아 사게두는 멜로니 신부에게 종교 생활에 대한 자신의 꿈을 털어놓았고,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결정을 지지했지만, 더 일찍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꾸짖었다. 반면, 그녀의 오빠 중 한 명은 그녀의 결정에 반대하며 집에 불명예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3][2]

1935년 9월 30일, 그녀는 로마 근처 그로타페라타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 입회하여[6] '마리아 가브리엘라'라는 수녀명을 받았다.[3] 그녀는 1936년 4월 13일에 처음으로 수도복을 입었고, 1937년 10월 31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서원을 했다.[3]

당시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마리아 피아 굴리니 수녀는 아베 폴 쿠튀리에의 노력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서 형성된 에큐메니즘(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수도원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8][3]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 역시 이 대의에 깊이 공감하고 헌신하여, 1938년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 동안 기독교 교회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영적인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8][3] 이 봉헌 이후 그녀는 결핵에 걸렸고, 15개월간 투병하다 1939년 4월 23일 저녁에 선종했다.[2] 주목할 점은 그녀가 선종한 주간의 복음서에는 "양 떼 하나와 목자 하나가 있을 것이다"(요한복음 10장 16절)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2. 4. 교회 일치를 위한 헌신과 선종

당시 수도원의 아베스는 마리아 피아 굴리니 O.C.S.O. 수녀였는데, 그녀는 아베 폴 쿠투리에의 노력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서 형성된 교회일치운동(에큐메니즘)에 대한 열정을 다른 수녀들에게도 전파했다[8][3].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이 대의에 깊이 헌신하게 되었고, 1938년 그리스도인 일치 주간 동안 기독교 교회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영적인 희생 제물로 봉헌했다[8][1].

이 헌신 직후, 그녀는 결핵 진단을 받았으며[2], 1939년 4월 23일 저녁 선종하기 전까지 약 15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했다. 의사들은 이미 1938년 5월에 그녀의 상태가 불치임을 선언한 바 있었다[2]. 그녀가 선종한 주간의 복음서 말씀에는 "양 떼도 하나가 되고 목자도 하나가 될 것이다"(γενήσονται μία ποίμνη, εἷς ποιμήνgre)라는 요한복음 10장 16절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8].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의 유해는 이탈리아 비테르보 근처 비토르키아노에 위치한 트라피스트회 수녀원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다. 1957년 유해 발굴 당시, 시신이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1].

3. 영성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의 영성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감사와 신뢰,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한 헌신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녀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김으로써 내적인 평화를 얻었다. 특히 요한복음 요한복음 17장에 담긴 예수의 기도에 깊이 공감하며, 자신의 삶과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을 위해 헌신했다.[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83년 1월 25일 마리아 가브리엘라를 시복하였으며, 교황 회칙인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 Ut unum sintla)에서 그녀를 세상과 분리되어 오직 기도와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 삶을 바친 모범적인 인물로 제시했다. 교황은 그녀의 삶이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일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사례라고 강조했다.[9]

3. 1. 하느님 은총에 대한 감사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당신과의 깊은 관계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느꼈다. 다른 가톨릭 성인들처럼, 그녀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김으로써 내면의 불안으로부터 평화를 찾았다.[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교황 회칙인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la)에서 마리아 가브리엘라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그녀의 삶을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3. 2. 하느님 뜻에 대한 신뢰

가브리엘라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당신과의 일치로 이끄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했다. 다른 가톨릭 성인들처럼, 그녀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신뢰하며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내면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찾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83년 1월 25일 시복된 마리아 가브리엘라를 교황 회칙인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 Ut unum sintla)에서 그리스도교 일치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일치 부족을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각자가 기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해야 하는 깊은 개인적 대화에서, 일치에 대한 관심은 빠질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의무를 재확인하기 위해, 1983년 1월 25일에 시복한 트라피스트 수녀인 복자 마리아 가브리엘라 디 우니타(Maria Gabriella of Unity)의 모범을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 앞에 제시했다. 세상과 동떨어지라는 소명을 받은 수녀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요한 복음 17장에 집중된 묵상과 기도에 헌신하며,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수녀 마리아 가브리엘라의 모범은 교훈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치를 위한 특별한 시간, 상황 또는 기도의 장소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아버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는 항상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모범으로 제시된다.[9]

3. 3. 요한복음 17장 묵상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당신과의 연합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에 대한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다른 가톨릭 성인들처럼, 그녀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신뢰를 통해 내적인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찾았다.

특히 그녀는 요한복음 17장을 중심으로 한 묵상과 기도에 삶을 바쳤다. 이는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와 같은 구절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염원에 깊이 공감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헌신한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영성은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중요한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83년 1월 25일 마리아 가브리엘라를 시복하며, 자신의 회칙인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la)에서 그녀를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 일치를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인 사이의 일치 부족을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깊은 개인적 대화 속에서, 일치에 대한 관심이 제외될 수 없습니다. … 이 의무를 재강화하기 위해 나는 보편 교회의 신도들 앞에 1983년 1월 25일에 내가 시복한 트라피스트 수녀, 일치의 복녀 마리아 가브리엘라라는 내가 모범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을 설정했습니다. 마리아 가브리엘라 자매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라는 수도 성소의 부름을 받아, 요한복음 17장에 중심한 묵상과 기도에 그의 삶을 헌신하고, 그의 삶을 그리스도인 일치에 바쳤습니다. … 마리아 가브리엘라 자매의 사례는 교훈적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일치를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 특별한 시간, 상황, 또는 장소를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기도는 모두,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모델로서 제시됩니다.[9]

4. 시복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1983년 1월 25일, 그녀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하는 데 영향을 준 그리스도인 일치주간의 마지막 날에 로마의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다.[10][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시복을 통해 그녀의 삶이 지닌 거룩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으며, 특히 에큐메니즘 운동과 관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역할 모델로 그녀를 제시하였다.[10][5]

4. 1. 시복 절차

1958년 프라스카티에서 시복 절차가 시작되었고,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하느님의 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절차의 공식적인 시작은 1965년 7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후 1981년 5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영웅적 덕행을 확인하고 그녀를 가경자로 선포했다.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1983년 1월 25일,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의 마지막 날에 로마의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다.[10][5] 이 날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된 날이기도 하다.[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복을 통해 그녀의 행동이 지닌 거룩함을 확인하였으며, 특히 에큐메니즘 활동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역할 모델로 그녀를 제시했다.[5]

현재 이 절차의 공익 변호인은 트라피스트 수녀 아우구스타 테스카리이다.

4. 2. 시복의 의미

1983년 1월 25일, 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는 로마의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다.[10] 이 날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는 데 영향을 준 그리스도인 일치주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5] 시복을 통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리아 가브리엘라의 삶과 행동이 지닌 거룩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특히 에큐메니즘과 관련된 활동에 있어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했다.[10][5]

마리아 가브리엘라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가 사용하던 성경에서 요한복음 17장 부분이 자주 읽혀 낡고 누렇게 변색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 장은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담고 있다. 특히 그녀가 주목한 구절은 예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기도하는 부분이다. 이 구절들은 오늘날 에큐메니컬 운동의 중요한 표어로 사용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 가브리엘라가 자신의 삶 전체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한 제물로서 하느님께 봉헌했다고 가르친다.

5. 평가

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당신과의 일치로 부르신 하느님에 대한 깊은 감사에 감동했다. 그녀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신뢰를 통해 내적인 평화를 찾았다.[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83년 1월 25일 마리아 가브리엘라를 시복했으며, 자신의 교황 회칙인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la)에서 그녀를 교회 일치 운동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9]

참조

[1] 웹사이트 Blessed Maria Gabriella Sagheddu http://catholicsaint[...] Saints SQPN 2017-04-24
[2] 웹사이트 Blessed Maria Gabriella http://www.prophetie[...] Propheties On Line 2015-04-07
[3] 웹사이트 Spiritual Newsletter http://www.clairval.[...] Abbey of Saint-Joseph de Clairval 2008-07-22
[4] 웹사이트 John Paul II, "Ut Unim Sint" http://www.catholicn[...] Catholic News Agency 1995-05-25
[5] 뉴스 The Patroness of Christian Unity https://www.scross.c[...] The Southern Cross 2018-05-29
[6] 웹인용 Maria Gabriella Sagheddu http://www.trappiste[...] 2016-11-27
[7] 웹사이트 Bl. Maria Gabriella of Unity http://www.theangloc[...]
[8] 웹인용 Weddell, Sherry Anne, "Blessed Maria Gabriella Sagheddu of Unity ", Catherine of Siena Institute http://www.siena.org[...] 2016-11-27
[9] 웹인용 John Paul II, "Ut Unim Sint", May 25, 1995, Catholic News Agency http://www.catholicn[...] 2016-11-27
[10] 웹인용 Blessed Maria Gabriella Sagheddu http://trappists.org[...] 2016-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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