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루이사 디 파르마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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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 루이사 디 파르마 공녀는 파르마 공작 필리포와 프랑스의 엘리사베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스페인의 인판타로 시작하여 파르마 공녀가 되었다. 14세에 사촌 카를로스 4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비가 되었고, 남편의 사냥으로 인한 국정 참여 기회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근위병 마누엘 데 고도이와의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해 카를로스 4세의 아이가 아닌 다른 자녀를 낳았다는 소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나폴레옹의 강제 퇴위 이후 망명 생활을 하다가 로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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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루이사 디 파르마 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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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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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아나 |
출생 | 1751년 12월 9일 |
출생지 | 파르마, 파르마 공국 |
사망 | 1819년 1월 2일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팔라초 바르베리니 |
매장지 | 엘 에스코리알 |
가문 | 부르봉-파르마 가문 |
아버지 | 파르마 공작 필리프 |
어머니 | 루이즈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카를로스 4세 |
결혼일 | 1765년 9월 4일 |
자녀 | 목록 참조 |
스페인 왕비 | |
재위 기간 | 1788년 12월 14일 – 1808년 3월 19일 |
유형 | 재위 |
자녀 |
2. 생애
마리아 루이사는 인판테 필리포와 인판타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스페인의 인판타였으나,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파르마 공녀의 직함을 얻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프랑스의 엘리사베타는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딸로, 프랑스 공주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랑스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4세가 되던 해, 사촌 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와 결혼하였다. 1788년 12월 14일 남편 카를로스가 카를로스 4세로 즉위하면서 그녀 역시 스페인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4세는 사냥을 즐겨 궁을 자주 비웠고, 이 시기 마리아 루이사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며 근위병 출신의 마누엘 데 고도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의 자녀 중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와 마리아 이사벨 공주가 고도이의 아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개입으로 스페인 왕위가 호세 1세에게 넘어가고 아들 페르난도 7세가 강제로 폐위되자,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 여러 지역을 떠돌았다. 결국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펠리페 5세의 넷째 아들인 파르마 공작 필리포와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의 장녀인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공주의 막내딸로 파르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본래 스페인의 인판테였으나,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파르마 공작령을 받으면서 1749년부터 파르마 공작이 되었다.[2] 어머니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딸로, 결혼하면서 이름을 스페인식인 이사벨(Isabelspa)로 개명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왕가와 프랑스 왕가의 혈통을 모두 이었다. 처음에는 스페인의 인판타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파르마 공녀의 직함을 얻었다.
세례명은 외조부모와 어머니가 아끼던 이모 프랑스의 앙리에트 공주의 이름을 따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안나'''(Luisa Maria Teresa Annaita)였지만, 일반적으로 스페인식 이름인 마리아 루이사(María Luisaspa)로 알려져 있다.[1] 루이사(Luisaita)는 그녀가 사적으로 사용한 이름이었다.[2]
프랑스 공주였던 어머니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영향으로 프랑스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오빠 페르디난트와 함께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야크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콩디야크가 실제로 파르마에 도착한 것은 1768년으로, 마리아 루이사가 17세가 된 이후였다.[2]
언니 이사벨라만큼 아름답다고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키가 작았음에도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마리아 루이사를 프랑스 왕위 계승 서열에 있던 외사촌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와 약혼시키려 했으나, 루이 조제프가 1761년 9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2. 2. 아스투리아스 공비 시절

마리아 루이사는 원래 프랑스 왕위 계승자였던 도팽 루이 페르디낭의 아들 부르고뉴 공작 루이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1761년 그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듬해인 1762년, 그녀는 사촌인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훗날 카를로스 4세)와 약혼했다. 1763년 언니 이사벨라가 사망하자 잠시 언니의 남편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와의 혼담이 오갔으나, 이는 거절되고 카를로스와의 약혼이 확정되었다. 두 사람은 1765년 9월 4일 라 그란하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 카를로스는 당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였으므로, 마리아 루이사는 결혼과 함께 아스투리아스 공비(왕세자빈)가 되었다. 당시 스페인에는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시조모이자 왕대비였던 엘리사베트 파르네세마저 결혼 몇 달 후 사망하면서, 마리아 루이사는 마드리드 궁정에서 가장 지위 높은 여성이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지적이고 야심이 많으며 지배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결혼 당시에는 아름다운 외모로 평가받았으며, 패션과 보석에 관심이 많아 우아함과 사치스러움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서른 살 무렵에는 거듭된 출산과 병치레, 혹은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조기 노화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대사는 "거듭된 출산, 병치레, 아마도 유전적인 질병으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시들어버렸다. 그녀의 피부의 노란빛과 이빨의 손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기록했다.[2] 그럼에도 왕비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옷차림에 많은 신경을 썼으며, 특히 자신의 아름다운 팔을 드러내기 위해 소매가 짧은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그린 여러 초상화를 통해 그녀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다. 동시대 사람들 중 일부는 그녀를 추하고 심술궂으며 거친 여성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남편 카를로스와의 관계는 원만했던 것으로 보이나, 마리아 루이사가 초기부터 남편을 휘어잡았다고 전해진다. 남편은 정치에 소극적이고 사냥이나 기계 등에 더 관심을 보인 반면, 마리아 루이사는 국정 운영에 큰 관심을 보였다. 시아버지인 카를로스 3세는 아들과 며느리가 국정에 간섭하는 것을 경계하여 마리아 루이사를 경박하다고 여기고 그녀의 사생활을 통제하고 감시하려 했으나, 그녀의 개인적인 자유를 제한하는 데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점차 남편을 중심으로 모인 반대파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궁정 내에서는 알바 공작 부인, 오스나 공작 부인 등과 사교계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으며, 시누이인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와도 경쟁 관계에 있었다.
2. 3. 스페인 왕비 시절
1788년 12월 14일, 남편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가 부친 카를로스 3세의 뒤를 이어 카를로스 4세로 즉위하면서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왕비가 되었다. 시어머니 마리아 아말리아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마리아 루이사는 아스투리아스 공작 부인 시절부터 마드리드 궁정의 실질적인 안주인 역할을 했다. 왕비가 된 후,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각료들이 처음 만났을 때 마리아 루이사가 참석했는데, 이는 주목을 받았고 남편의 통치 기간 동안 관례가 되었다.[3] 결혼 생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마리아 루이사는 카를로스 4세를 지배했고, 그에 따라 정부를 지배했지만, 한편으로는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지배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마리아 루이사는 수많은 염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와의 관계였는데, 당시 소문은 그를 오랫동안 연인으로 지목했다. 고도이는 1784년 그는 근위병이었으나 카를로스와 마리아 루이사가 왕위에 오르면서 여러 계급으로 진급했고, 1792년에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일부에서는 마리아 루이사의 자녀 중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와 마리아 이사벨 공주는 카를로스 4세의 아이가 아닌 고도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1791년, 플로리다블랑카 장관은 고도이가 여왕의 연인이라고 비난했고, 그 결과 플로리다블랑카는 직위를 잃었다. 고도이 외에도 그녀의 연인으로 몇몇 남자가 지목되었는데, 그중에는 시종 말로도 있었다.
프랑스 대사 알키에를 포함한 여러 동시대 인물, 외국 대사들이 이러한 소문에 대해 당시 외교 서신에서도 언급했다.[2] 하지만 그 진실성은 의문시되며, 일부 문제는 왕실과 외국 세력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조작되거나 과장되었을 수 있다. 그녀가 연인이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여왕의 고해 신부 프라이 후안 알마라즈는 자신의 유언장에서 그녀가 "죽음의 순간"에 "아들딸 중 누구도, 적통 결혼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 인정했다고 썼다.[4] 하지만 그 증언의 진실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4] 카를로스 4세 국왕은 여왕의 정절에 대해 의심이나 의문을 표명한 적이 없다. 마리아 루이사와 고도이는 그 성격에 관계없이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그들의 서신에서 그녀가 생리 중단과 폐경으로 인한 우울증과 같은 매우 사적인 문제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했고, 그는 그녀에게 위로를 주었으며 그녀가 삶의 새로운 상태에서도 만족감을 찾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2]
그녀의 소문난 염문 외에도 그녀에 대해 몇 가지 다른 유명한 소문이 돌았다. 여왕과 오수나 공작부인, 알바 공작부인 사이의 경쟁은 주목을 받았고, 1802년 알바 공작부인이 사망했을 때, 그녀는 여왕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802년 그녀의 아들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와 결혼했다.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가 1806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 역시 여왕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리아 루이사는 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안토니아를 몹시 싫어했다. 마리아 안토니아가 어머니인 나폴리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의 사주를 받아 스페인 궁정의 안주인 자리를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아브란테스 공작 부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마리아 루이사는 이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마리아 루이사의 용모는 스페인 유명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몇 점의 왕비 초상화로 유명하다. 그녀는 많은 동시대인들로부터 추하다고(다만 젊은 시절에는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심술궂고 거친 여성으로, 남편인 국왕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녀의 용모는 14번의 거듭된 출산으로 현저히 쇠퇴했고, 이조차 잃었다. 그러나 왕비는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아름답게 옷을 입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의 자랑은 아름다운 팔이었고, 팔을 드러내기 위해 소매가 짧은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1792년, 마리아 루이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마리아 루이사 여왕 훈장을 창설하여 여성에게만 수여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음악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프란시스코 고야를 포함한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알려졌다.
여왕의 총리 고도이와의 소문난 관계는 그녀의 평판이 정치적인 영향력과 결합되어 대중의 고도이의 나폴레옹 프랑스와의 조약에 대한 불만을 샀는데, 이 조약으로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에 주둔하게 되었고, 한 사건에서 여왕은 폭도에게 위협을 받아 그녀의 호위병에 의해 보호받아야 했다. 1808년, 프랑스에 대한 정책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아란후에스에서 봉기로 이어졌다.
2. 4. 퇴위 이후의 삶
1808년 3월 19일, 남편 카를로스 4세는 나폴레옹 1세의 압력으로 아들인 페르난도 7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같은 해 4월,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 카를로스 4세, 그리고 마누엘 고도이와 함께 프랑스 바욘으로 가서 나폴레옹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마리아 루이사는 나폴레옹에게 아들로부터 스페인 왕위를 되찾도록 중재를 요청하려 했다. 그들의 아들 페르난도 7세 역시 이 회담에 참석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자리에서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 모두에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대신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세우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폐위를 선언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여러 팜플렛은 그녀를 퇴위의 원인으로 지목했다.강제로 퇴위당한 이후, 마리아 루이사는 카를로스 4세, 마누엘 고도이와 함께 나폴레옹의 포로 신세가 되어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콩피에뉴와 엑상프로방스에 머물렀고, 그 후 마르세유로 이주하여 4년 동안 거주했다. 1812년에는 교황의 보호 아래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에 정착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왕위에 복위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와 고도이가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것을 금지했다. 1815년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이 일시적으로 프랑스에서 권력을 되찾았을 때,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스 4세, 고도이는 잠시 프랑스로 떠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의 최종 몰락 후에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로마에 거주하는 동안, 마리아 루이사와 카를로스 4세는 예술품 수집에 몰두하여 티치아노, 코레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루카스 크라나흐, 안드레아 델 사르토, 파르미지아니노, 브론치노, 팔마 일 베키오, 틴토레토, 베로네세, 푸생, 가스파르 두게, 알레산드로 투르키 등 저명한 예술가들의 그림으로 구성된 대규모 미술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 컬렉션은 훗날 마드리드로 옮겨졌다.
마리아 루이사는 1819년 초 이탈리아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남편 카를로스 4세 역시 아내가 사망한 지 3주 후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루이사는 유언을 통해, 망명 생활을 함께하며 재산을 잃은 마누엘 고도이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정했다.
3. 자녀
스페인 왕자

–
1774년 3월 7일
포르투갈 여왕

–
1830년 1월 7일
스페인 공주
–
1782년 7월 2일
스페인 공주

–
1798년 7월 22일
스페인 공자

–
1783년 6월 11일
에트루리아 여왕
루카 여공작

–
1824년 3월 13일
스페인 공자

–
1784년 11월 11일
스페인 공자
–
1784년 10월 18일
스페인 국왕

–
1833년 9월 29일
몰리나 백작
–
1855년 3월 10일
양시칠리아 여왕

–
1848년 9월 13일
스페인 공주

–
1794년 11월 2일
스페인 공자

–
1794년 3월 1일
카디스 공작

–
1865년 8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