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기요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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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1511년에 태어나 1535년 암살당한 인물로, 미카와 국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확장했다. 1523년 가독을 계승하고 세이와겐지의 후손을 자처했으며, 손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쿠가와 씨로 개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미카와 국을 통일하고 오와리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25세에 가신 아베 야시치로 마사토요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모리야마의 변'으로 불리며, 그의 아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가문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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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야마의 변은 1535년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가신에게 암살당한 사건으로, 마쓰다이라 가문의 세력 다툼과 주변 가문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여 가문의 혼란을 초래했다.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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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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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
본명 |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松平 清康) |
출생 | 1511년 9월 28일 |
사망 | 1535년 11월 29일 |
통칭 | 지로사부로 (次郎三郎) |
어린 시절 이름 | 다케치요 (竹千代) → 기요타카 (清孝) |
계명 | 젠토쿠인덴 넨소 도후 다이코지 (善徳院殿年叟道甫大居士) |
묘소 | 아이치현오카자키시가모다정 다이주지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몬젠정 즈이넨지 |
가문 정보 | |
씨족 | 마쓰다이라 씨 (자칭 세이와 겐지세라다 씨) |
아버지 | 마쓰다이라 노부타다 |
어머니 | 미즈노 씨 |
배우자 | 정실: 오하루 (春姫, 마쓰다이라 마사야스의 딸) 계실: 화양원 |
자녀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슌케이니 (기라 요시야스의 부인) 우스이히메 (마쓰다이라 마사타다의 부인 → 사카이 다다쓰구의 부인) 조교 |
양녀 | 히사 (마쓰다이라 노리카쓰의 부인 → 스즈키 시게나오의 부인) 세토노오오헤야 (기라 모치히로의 부인) |
친척 | 도쿠가와 이에야스 (손자) |
관직 및 직위 | |
봉사 | 이마가와 씨 |
소속 부대 | 마쓰다이라 씨 |
마쓰다이라 씨 당주 | 1531년 ~ 1535년 |
이전 당주 | 마쓰다이라 노부타다 |
다음 당주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군사 활동 | |
주요 전투 | 미카와 캠페인 |
2. 생애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4대에 걸친 분쟁 끝에 사가이 씨를 굴복시키고 미카와 국 북부 지역을 장악했다. 이후 세력을 확장하여 오카자키 성을 마쓰다이라 가문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1535년, 기요야스는 오와리 국의 모리야마 성을 공격하던 중 가신 아베 마사토요에게 갑작스럽게 살해당했다.[1] 당시 향년 25세였다. 기요야스의 죽음을 둘러싸고 아베 마사토요가 개인적인 원한을 품었다는 설[1], 혹은 기요야스의 명령을 오해하여 벌어진 비극이라는 설[2]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요야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마쓰다이라 가문은 혼란에 빠졌으나, 그의 아들인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었다.
2. 1. 미카와 통일
1523년(다이에이 3년), 일문중(一門衆)은 아버지 마쓰다이라 노부타다를 은거시키고 기요야스에게 가독을 계승시켰다. 1525년에는 아시스케 성의 스즈키 시게마사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1526년(다이에이 6년, 또는 1524년)에는 오카자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야마나카 성을 공격하여 사이고 노부사다(마쓰다이라 마사야스)를 굴복시켰다. 이후 노부사다의 거성이었던 옛 오카자키 성을 파기하고, 현재 위치에 새로운 오카자키 성을 건설하여 마쓰다이라 씨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14][15] 오카자키에서는 오카자키 5인중, 대관, 소대관을 두어 지배 체제를 정비하고, 마쓰다이라 가문의 보리사(菩提寺)인 다이주지의 칙원사화 및 수축, 다보탑 신축, 롯소 신사 및 류카인 창건 등을 통해 지역 기반을 다졌다.[16] 다만, 기요야스가 마쓰다이라 마사야스의 사위가 되어 평화적으로 오카자키 마쓰다이라 가문을 계승했다는 다른 설도 존재한다.[12]
니시미카와(西三河)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하면서, 기요야스는 기존 지배층이었던 미카와 기라 씨에 대한 권위를 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 세이와 겐지의 한 갈래인 닛타 씨 일문의 도쿠가와 씨 서류(庶流)인 세라타 씨를 내세워 스스로 '''세라타 지로사부로'''라고 칭했다. 이는 훗날 그의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성을 바꾸는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당시 기요야스의 실제 이름은 기라 모치키요에게서 편휘(偏諱)를 받은 '기요타카'(清孝)였으며[5][6], 현존하는 당시 문서에는 '기요야스'라는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실제 개명 여부나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7][8][9][13]
기요야스는 미카와 국 통일을 목표로 삼고 동서로 군대를 보내 세력을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 1529년(교로쿠 2년): 니시오시에 위치한 오지마 성(尾島城, 또는 오지마 성小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1529년 5월 28일 (양력 7월 3일): 히가시미카와(東三河)로 진출하여 미카와 마키노 씨의 이마하시 성(今橋城, 후일의 요시다 성)을 함락시켰다.[17] 기요야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요시다 성 남쪽 아쓰미 군의 다하라로 진군했다. 도다 씨는 전투 없이 항복했고, 기요야스는 요시다 성으로 돌아와 10일간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북쪽 시타라 군의 야마가 삼방중(스가누마 씨, 오쿠다이라 씨)과 호이 군 우시쿠보의 마키노 씨 등 히가시미카와의 고쿠닌슈(国人衆) 대부분이 기요야스에게 복속하였다.
- 1530년(교로쿠 3년): 오와리로 출병하여 이와사키 향(닛신시 이와사키)과 시나노 향(세토시 시나노 정)을 점령했다.
- 1530년 11월 23일(음력 11월 4일): 미카와 동쪽 끝 야나 군의 우리 성을 지키던 구마가이 씨만이 복속을 거부하자, 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29][30]
우리 성 함락을 끝으로 기요야스는 미카와 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우리 성 공략전에서 오테몬(大手門)을 공격하던 숙부 마쓰다이라 지카모리(후쿠가마 마쓰다이라 가)가 전사했는데, 이때 지원이 늦었다는 이유로 기요야스가 또 다른 숙부인 마쓰다이라 노부사다(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를 질책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 일화가 후대의 창작이라는 견해도 있다.[18]
2. 2. 모리야마의 변
1535년(덴분 4년) 미카와 국 통일의 기세를 몰아 1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와리 국으로 진군하였다. 같은 해 12월, 오다 노부히데의 동생 오다 노부미쓰가 지키는 모리야마 성을 공격했으나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진영을 갖추었다.모리야마에 머물던 중인 12월 29일(음력 12월 5일), 기요야스는 성의 오테몬(大手門, 정문) 부근에서 가신 아베 마사토요에게 갑작스럽게 살해당했다. 이를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이라고 부른다. 당시 기요야스의 나이는 향년 25세였다.
기요야스 암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 오해설: 아베 마사토요의 아버지 아베 사다요시가 오다 가문과 내통한다는 소문이 돌자, 기요야스가 이를 의심하여 부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건 당일, 진영에서 말이 날뛰자 기요야스가 "말을 붙잡아 묶으라"고 외쳤는데, 아베 마사토요가 이를 아버지를 체포하라는 명령으로 잘못 듣고 혼란 속에서 기요야스를 베었다는 설이다.[31][2] 이 설은 A. L. 새들러가 전한 이야기와 유사하다.[2]
- 음모설: 기요야스의 숙부인 마쓰다이라 노부사다가 오다 노부히데(노부사다의 아내는 노부히데의 누이였다)와 짜고 기요야스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이다. 기요야스가 오다 노부히데와 대립하던 오다 도자에몬노조(織田藤左衛門尉)를 지원하자, 이에 반발한 오다 노부히데와 노부사다가 공모했다는 것이다.[21]
- 가신 대립설: 기요야스 아래 통합된 안조 마쓰다이라 가신단과 오카자키 마쓰다이라 가신단 사이에 대립이 있었고, 이것이 모반(쿠데타)으로 이어졌다는 설이다. 아베 씨가 이마가와 씨의 지원을 받는 오카자키 파에 속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견해도 있다.[22]
아베 마사토요가 기요야스를 살해할 때 사용한 칼은 센고 무라마사(千子村正)라고 전해진다.[31][23][24] 이 때문에 훗날 무라마사가 도쿠가와 가문에 해를 끼치는 요도(妖刀)라는 전설이 생겨났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생전에는 그러한 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5]
기요야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쓰다이라 군대는 오와리에서 철수해야 했고, 가문은 혼란에 빠졌다. 이후 기요야스의 아들인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당시 10세)가 가독을 이었으나, 가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기요야스의 유해는 오카자키 성으로 운반되던 중 부패가 심해 니시오시 나가사와 정(長縄町)의 간논지(観音寺) 인근 밭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후에 다이주지(大樹寺)로 옮겨졌다. 가매장지에는 현재도 묘비가 남아 있다.[20]


3. 가계
- '''증조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松平信光, 1404년? ~ 1488년?)
- '''조부''': 마쓰다이라 지카타다 (松平親忠, 1431년? ~ 1501년)
지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버지 | 마쓰다이라 노부타다 (松平信忠) | 1490년 ~ 1531년 | 안조 마쓰다이라 가문 제6대 당주 |
어머니 | 오카와치 씨(大河内氏)[16] / 오코치 미쓰나리(大河内満成)의 딸 | 기록에 따라 다름 |
지위 | 이름 | 사후 이름 | 생몰년 | 부모 | 자녀 |
---|---|---|---|---|---|
정실 | 하루히메(春姫) | ? ~ ? | 마쓰다이라 마사야스 (松平昌安, 오쿠사 마쓰다이라 가문)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
계실 | 오토미노카타(於富の方) | 가요인(華陽院) | 1492년 ~ 1560년 | 오코치 미쓰나리(大河内満成), 오코치 모토쓰나(大河内元綱), 또는 아오키 이치무네(青木一宗)의 딸로 추정 | 마쓰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 우스이히메(碓井姫) |
- 계실 가요인은 마쓰다이라 씨가 미즈노 씨를 격파했을 때 강화 조건으로 맞이했다는 설이 있다. 기요야스 사후 여러 무장에게 재가했으나 모두 남편보다 오래 살았다.
이름 | 사후 이름 | 생몰년 | 어머니 | 배우자 | 자녀 |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松平広忠) | 오세이도칸다이코지(岡崎道 großes 大居士) | 1526년 ~ 1549년 | 하루히메 | 정실: 오다이노카타(於大の方,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계실: 마키히메(真喜姫, 도다 야스미쓰의 딸) | (오다이노카타 소생) 마쓰다이라 모토노부, 다케히메(多却姫) (마키히메 소생) 이치바히메(市場姫) (측실 소생) 마쓰다이라 다다마사(松平忠政), 에사이(恵最, 승려), 야다히메(矢田姫), 마쓰다이라 이에모토(松平家元), 나이토 노부나리(内藤信成), 마쓰다이라 지카요시(松平親能) |
코주인(香樹院) | 1529년 ~ 1605년 | 불명 | 기라 요시아스 (吉良義安) | 기라 요시사다(吉良義定) | |
마쓰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 | ? ~ 1540년 | 오토미노카타 | |||
우스이히메(碓井姫) | 코키인(洪基院) | 1529년 ~ 1605년 | 오토미노카타 | 첫 남편: 마쓰다이라 마사타다(松平政忠,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 두 번째 남편: 사카이 다다쓰구 (酒井忠次) | (마사타다 소생) 마쓰다이라 야스타다(松平康忠) (다다쓰구 소생) 사카이 이에쓰구(酒井家次), 혼다 야스토시(膳所藩주)와 결혼한 딸 |
''*주석: 코주인과 우스이히메의 생몰년(1529년 ~ 1605년)이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확인이 필요하다.''
4. 평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4대에 걸친 분쟁 끝에 사가이 씨를 굴복시키고 북부 미카와 국 전체를 장악하는 등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1] 그는 오카자키 성을 건설하여 마쓰다이라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의 군사적 역량은 당대에도 인정받아 다케다 노부토라나 오다 노부카쓰와 같은 인물들과 교류할 정도였다.[2] 에도 시대 중기의 일화집 『조잔기담』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인 기요야스를 "병사를 아끼고 용맹과 재능을 겸비하여 사람들이 그의 덕을 따랐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통치에는 불안정한 요소도 많았다. 가신 아베 마사토요에게 원한을 사 모리야마 성 공격 중 진중에서 무라마사 칼에 암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1]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숙부 마쓰다이라 노부사다가 기요야스의 본거지인 안조 성을 노린다는 소문과 충신 아베 사다요시가 내통했다는 헛소문이 겹치면서 혼란이 발생했고, 아베 사다요시의 아들 야시치가 아버지가 위험에 처했다고 오해하여 기요야스를 살해했다고도 전해진다.[2] 이처럼 대대로 내려온 중신 아베 씨나 도다 씨 같은 지역 호족들의 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의 한계로 지적된다. 또한 친족인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문의 숙부 노부사다와도 갈등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요야스의 죽음 이후 이다노 전투가 벌어졌으나,[3] 결국 그의 아들인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버지)가 가문을 계승했다.
현대 연구에서는 기요야스의 생애를 다르게 보기도 한다. 『안조시사』를 집필한 무라오카 미키오는 기요야스가 안조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이지만, 한때 오카자키 마쓰다이라 가문을 기반으로 독자 세력을 형성하여 숙부 노부사다와 대립하다가 화해하고 안조 가문을 계승했다고 분석했다.[26] 이는 『미카와 이야기』 등에서 기요야스를 안조 가문의 정통 계승자로 묘사하며 가문을 중흥시켜 히로타다와 이에야스로 이어지게 한 인물로 그린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에도 막부는 『미카와 이야기』의 관점을 공식 역사로 채택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요야스가 일시적으로 안조 가문에 대항했던 사실 등 불편한 진실이 가려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7]
종합적으로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미카와 지방을 통일하고 마쓰다이라 가문의 세력을 크게 확장했지만, 가신단 및 친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하지 못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룬 업적은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5. 가문의 문장
마쓰다이라 향이 위치한 서미카와의 가모 군은 가모 신사의 신령과 관련이 깊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가모 신사의 씨족이었기 때문에 아오이 문양(三つ葉葵|미쓰바아오이일본어)을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아오이 문양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신편 류에이 속비감』 12권에는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시대에 안쇼 성을 공격할 때 사카이 가문에게 세 잎 아욱 문양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설로는, 기요야스의 할아버지인 마쓰다이라 나가치카 시대에 미카와를 침공한 이마가와 군의 이세 모리토키(호조 소운)에 의해 이와쓰 본가가 멸망한 후, 사카이 가문의 무공을 기려 마쓰다이라 가문의 문장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사카이 가문은 이후 괭이밥 문양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아라이 하쿠세키가 저술한 『반한보』(각 다이묘 가문의 계보와 사적을 기록한 책)에는 다른 설이 기록되어 있다.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요시다 성을 공격할 때, 이나 성주인 명가 혼다 마사타다로부터 타치아오이(立葵|타치아오이일본어) 문양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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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1535年(天文4年)に約10,000人もの大軍を従え、織田信秀の弟・織田信光が城主であった守山城に攻め入ったのです。
https://www.touken-w[...]
Touke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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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章 岡崎市の歴史的風致形成の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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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編安城市史1通史編 原始・古代・中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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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草・岡崎松平家の光重・貞光父子と初期形原松平家
岩田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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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에서는 기요야스는 '안쇼의 사부로도노(案(安)祥之三郎殿)'라고 하는 호칭으로 등장한다.
[29]
문서
기요야스의 요시다 성 공격을 우리 성 공격의 직후라고 하는 설도 있고, 또 이때에 항복한 요시다의 마키노 씨가 [[1532년]](덴분 원년)에 다시 배반한 것으로 재차 이것을 공격해 멸했다고 여겨진다.
[30]
문서
《미카와 이야기》에서는 기요야스가, 구마가이가 성으로 밀려들어갈 즈음에, 서쪽에서 철포를 쏘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1530년(교로쿠 3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철포기]](鉄炮記)》의 기술과는 모순되지만, 이때 이미 철포를 장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가 닌자(伊賀忍者) [[핫토리 야스나가]](服部保長)도 기요야스의 시대에 임관하고 있던 것에서, 화약과 철포의 취급에 익숙해져 있던 이가슈로부터 초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 때에 서 미카와 사람 8,000명을 동원하고 있어 석고가 낮은 미카와 국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엿보인다.
[31]
문서
이후 무라마사라고 하는 칼은 '요도 무라마사'로 불리며 도쿠가와 가에 재앙을 가져온다는 불길한 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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