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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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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이와 겐지는 세이와 천황의 후손으로, 미나모토노 쓰네모토를 시조로 하는 무가(武家) 가문이다. 미나모토노 미쓰나카의 자손들은 셋쓰 겐지, 야마토 겐지, 가와치 겐지로 나뉘어 각지에서 세력을 떨쳤다. 특히 가와치 겐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배출하며 무가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세이와 겐지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들이 할거했으며,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가문 또한 세이와 겐지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현재에도 세이와 겐지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관련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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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 겐지
개요
미나모토 가문의 문장. 세이와 겐지의 한 분파
미나모토 가문의 문장, 세이와 겐지의 한 분파
본성미나모토 아손
가조제56대 세이와 천황의 황자 및 제왕
근거지셋쓰국
씨족 정보
가문 유형황별
창시자미나모토노 쓰네모토 (源 經基)를 비롯한 세이와 천황의 아들/손자
마지막 통치자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설립 연도10세기
주요 분가아시카가 씨
하타케야마 씨
호소카와 씨
이마가와 씨
모리 씨
난부 씨
닛타 씨
마쓰다이라 씨
도쿠가와 씨
오가사와라 씨
오타 씨
사타케 씨
사토미 씨
시바 씨
다케다 씨
도키 씨
이시카와 씨
기타
주요 분파
분파셋쓰 겐지
야마토 겐지
가와치 겐지

2. 역사

세이와 천황의 여섯째 황자인 사다즈미 친왕(貞純親王)의 아들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経基)가 신적강하하여 미나모토(源) 성을 받으면서 세이와 겐지가 시작되었다. 쓰네모토의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源満仲)는 셋쓰국(摂津国) 가와베군(川辺郡) 다다(多田, 현재 효고현(兵庫県) 가와니시시(川西市))를 근거지로 무사단을 형성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미쓰나카의 세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頼光), 미나모토노 요리치카(源頼親),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頼信)는 각각 셋쓰 겐지(摂津源氏), 야마토 겐지(大和源氏), 가와치 겐지(河内源氏)를 형성했다.

미나모토노 요리노부는 헤이지 다다쓰네의 난(平忠常の乱, 조겐의 난)을 진압하고,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요시(頼義)는 전9년의 역(前九年役)에서, 손자 미나모토노 요시이에(義家)는 후3년의 역(後三年役)에서 활약하며 가와치 겐지는 동국(東国)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무공을 통해 세이와 겐지 내에서 사실상 본류 지위를 확보했지만, 시라카와 법황(白河法皇)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1] 요시이에 사후 가와치 겐지는 내분으로 일시 쇠퇴했으나,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와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義朝) 대에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을 거쳐 요시토모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헤이시(平氏)를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수립하여 무가 정권 시대를 열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를 열면서 세이와 겐지는 무가의 동량(棟梁)으로서 명실상부한 지위를 확립했다.[1] 그러나 요리토모 직계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대에 단절되었고, 이후 가마쿠라 막부는 셋칸케(摂関家)나 다른 겐지 일족이 계승하였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 아시카가 다카우지겐무 신정에 반기를 들고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세이와 겐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겐지 장자가 되었으며, 이후 쇼군(将軍)이 겐지 장자를 겸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1]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씨를 비롯한 여러 세이와 겐지 분파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는 각지의 세이와 겐지 후손들이 할거하며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세이와 겐지 후손을 자처하며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수립하고 260여 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도쿠가와 가문은 세이와 겐지 혈통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했지만, 실제 혈통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2. 1. 기원과 초기 발전

세이와 천황의 여섯 번째 황자인 사다즈미 친왕(貞純親王)의 아들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経基)를 시조로 한다. 쓰네모토신적강하하여 미나모토(源) 성을 받았다.[1]

쓰네모토의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源満仲) 대에 이르러 무사단을 형성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미쓰나카셋쓰국(摂津国) 가와베군(川辺郡) 다다(多田, 현재 효고현(兵庫県) 가와니시시(川西市))를 근거지로 삼았다. 그의 세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頼光), 미나모토노 요리치카(源頼親),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頼信)는 각각 셋쓰 겐지(摂津源氏), 야마토 겐지(大和源氏), 가와치 겐지(河内源氏)를 형성하여 발전했다.

2. 1. 1. 양성원씨설(陽成源氏説) 논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역사학자 호시노 코우(星野恒)는 사학잡지(史学雑誌)에 발표한 논문 「육손왕은 청화원씨가 아닌 고찰」(六孫王ハ清和源氏ニ非ザルノ考)에서 청화원씨(清和源氏)의 시조가 사실은 청화천황(清和天皇)이 아니라 양성천황(陽成天皇)이지만, 폭군(暴君)이라고 여겨지는 양성천황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청화원씨를 자칭했다는 설을 제기했다.[1] 이 설은 이시미즈하치만궁(石清水八幡宮) 사관 다나카가(田中家) 문헌 속에,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頼信)가 오진 천황릉(応神天皇陵)에 봉납했다고 하는 영승(永承) 원년 고문(告文)에 "선인신발(先人新発), 기선경기(其先経基), 기선원평친왕(其先元平親王), 기선양성천황(其先陽成天皇), 기선청화천황(其先清和天皇)"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했다.[1]

하지만 이 설은 여러 사료를 통해 부정되었다.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経基)와 그 자손이 "정관(貞観)어후", 즉 청화천황의 자손임을 동시대에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은 틀림없다고 증명되었다.[1] 예를 들어, 권기(権記)에 인용된 천력(天暦) 7년(953년)의 왕씨작 부정 사건에서, 청화천황의 자손이면서 양성천황 자손을 사칭했다고 벌을 받은 미나모토노 쓰네타다(源経忠)는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経基) 또는 그 형제로 추정된다.[1]

결론적으로,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経基)가 청화원씨이든 양성원씨이든, 무사의 집안이 된 계통의 성질에 차이는 없으며, 이미 '청화원씨'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으므로, '양성원씨'로 명칭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2. 2. 가와치 겐지의 성장과 무가 정권 수립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頼信)는 헤이지 다다쓰네의 난(平忠常の乱, 조겐의 난)을 진압하며 무공을 세웠고,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요시(頼義)는 전9년의 역(前九年役)에서, 손자 미나모토노 요시이에(義家)는 후3년의 역(後三年役)에서 활약하며 동국(東国)에서의 세력을 확대했다. 이처럼 가와치 겐지는 무공을 통해 세이와 겐지 내에서 사실상 본류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지만, 시라카와 법황(白河法皇)의 견제로 인해 억압받기도 했다.[1] 요시이에의 사후, 가와치 겐지는 내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쇠퇴했지만,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와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義朝) 대에 이르러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을 거치며, 요시토모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헤이시(平氏)를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수립하여 무가 정권 시대를 열었다.

미나모토노 마나나카(源満仲)의 아들들 중에서도 특히 셋째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리노부는 조겐 원년(1028년) 보소 삼국(상총국, 하총국, 안방국)에서 일어난 헤이지 다다쓰네의 난을 진압하는 등의 무공을 세웠다. 또한 요리노부의 아들인 요리요시는 고헤이 5년(1062년)부터 무쓰국 오쿠 육군에 난립하는 포수의 우두머리 아베씨를 토벌하였고(전9년의 역), 요리요시의 아들인 하치만타로 요시이에는 동족인 미나모토노 쿠니후사, 미나모토노 시게무네와 전투를 벌였으며, 간지 원년(1087년)에는 데와국의 포수 우두머리 시와라씨의 내분을 수습하여(후3년의 역) 명성을 높였고, 요리노부 계열의 가와치 겐지는 동국에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번영은 당시 권력자인 시라카와 법황의 경계를 불러, 가와치 겐지는 억압을 받았다 (단, 연구의 진전으로 재검토되고 있다). 가와치 겐지가 셋쓰 겐지처럼 교토를 활동 무대로 하지 않고 반토를 근거지로 한 것은,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미쓰, 미나모토노 요리치카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를 측근으로 섬긴 것과 달리, 요리노부는 우에노스케나 히타치스케 등 수입이 적은 동국 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처럼 무공을 쌓아, 요시이에, 요시쓰나(미노노카미), 요시미쓰(신라사부로) 형제 무렵에는 세이와 겐지 최대의 세력이 되었다 (단, 요시이에와 요시쓰나의 사이는 나빴고, 요시쓰나는 중앙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요시이에의 말년에 차남 요시치카가 조정에 반항했기 때문에 요시이에는 곤경에 처했고, 가와치 겐지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요시이에의 장남은 요절했다). 또한, 동생인 신라사부로 요시미쓰(히타치 겐지, 카이 겐지의 시조)와 넷째 아들인 아라카가 뇨도 요시쿠니(우에노 겐지, 시모쓰케 겐지의 시조)가 가쇼 원년(1106년)에 히타치 합전을 일으켜, 양자가 칙간을 받게 된다. 더욱이 덴닌 2년(1109년), 요시이에의 사후 가독을 계승하고 영광을 자랑했던 요시이에의 셋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타다가 암살당했고, 당초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던 동생 요시쓰나(미노노카미)가 시라카와 법황의 명을 받은 미나모토노 요시치카의 아들 미나모토노 타메요시와 미나모토노 미쓰쿠니(미노 겐지)의 토벌을 받아 궤멸되었고, 사건 후 진범이 신라사부로 요시미쓰였던 것이 밝혀지는 등, 가와치 겐지 내부의 분열은 명백해지고, 권세는 한동안 쇠퇴했다.

源義忠의 뒤를 이은 源為義는 백하법황을 가까이 모셨으나, 자신과 가신들, 팔남인 진제팔랑 다메토모의 난행으로 신임을 잃어 섭관가에 접근하였다. 한편 장남인 源義朝는 남간토(南関東)로 내려가 세력을 넓히고 백하법황을 섬겨 아버지와는 별도로 행동하였다. 義朝는 요시타다의 동생으로 우에노쿠니와 시모쓰케쿠니에 영지를 소유한 源義国과도 손을 잡는 데 성공하여 간토에서 세력을 키웠고, 더 나아가 인(院)의 영향 아래 교토로 복귀하였다. 한편 아버지인 다메요시는 요시토모의 동생인 源義賢을 요시토모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북간토로 파견하였다. 지치부씨의 다툼에도 연루되어 요시카타는 요시토모의 장남인 源義平과 대립하였으나, 규주 2년(1155년)의 大蔵合戦에서 요시카타가 전사하고 요시히라 측이 승리하였다.

다메요시와 요시토모의 대립은 호겐 원년(1156년)의 保元の乱에서 결착을 보았다. 아버지와 동생을 처형한 요시토모는, 마찬가지로 고시라카와 법황 측에 섰던 시모쓰케겐지의 아시카가 요시야스가 급사한 것도 있어 일족을 압도하고 가와치 겐지의 총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교토에서는 信西 일문·二条天皇 친정파·고시라카와 인정파(院政派)라는 세 그룹의 대립이 일어나, 헤이지 원년(1160년), 藤原信頼과 결탁한 요시토모는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고 平治の乱을 일으켰다. 일시 천하를 손에 넣은 요시토모였지만, 平清盛 등이 비밀리에 법황 등을 구출함으로써 형세가 역전되어 패퇴하고 을 떠나 동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도중에 심복인 鎌田政清의 장인인 尾張国의 長田忠致의 손에 살해당하였고, 源光保 등도 고시라카와 법황에 의해 주살되었다.

2. 3. 가마쿠라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를 열면서 세이와 겐지는 무가의 동량(棟梁)으로서 명실상부한 지위를 확립하고 무가 정권을 수립했다.[1] 그러나 요리토모의 직계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대에 단절되었고, 이후 가마쿠라 막부는 셋칸케(摂関家)나 다른 겐지 일족이 계승하였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 아시카가 다카우지겐무 신정에 반기를 들고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세이와 겐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겐지 장자가 되었으며, 이후 쇼군(将軍)이 겐지 장자를 겸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1]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씨를 비롯한 여러 세이와 겐지 분파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2. 4.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는 각지의 세이와 겐지 후손들이 할거하며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세이와 겐지의 후손을 자처하며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수립하고 260여 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도쿠가와 가문은 세이와 겐지의 혈통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했지만, 실제 혈통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3. 분파

세이와 겐지는 세이와 천황의 황자들로부터 분기되어 다양한 분파를 형성했다. 경기(源経基)의 후손이 번성하였으며, 그의 아들 미쓰나카(源満仲)는 셋쓰국(摂津国) 가와베군(川辺郡) 다다(多田)를 근거지로 무사단을 형성했다. 미쓰나카의 아들들은 각각 셋쓰 겐지(摂津源氏), 야마토 겐지(大和源氏), 가와치 겐지(河内源氏) 등의 분파를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세이와 겐지로 알려져 있어도, 칭호를 사칭했을 가능성이 있는 씨족도 있다.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분파시조주요 후손
셋쓰 겐지요리미쓰(頼光)다다, 미노, 도키, 아케치
야마토 겐지요리치카(頼親)무쓰 이시카와, 우노
가와치 겐지요리노부(頼信)이시카와, 우에노, 시모쓰케, 미카와, 히타치, 카이, 아시카가, 닛타



이 외에도 미나모토노 마사마사(源満政), 미나모토노 마스키(源満季), 미나모토노 마스카이(源満快) 등의 후손과, 그 외 다수의 분파가 존재한다.

3. 1. 셋쓰 겐지 (摂津源氏)

미쓰나카의 장남 요리미쓰를 파조로 하며, 셋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요리미쓰의 손자 요리쓰나 계통은 다다 겐지라고 불리며, 다다, 바바 등 여러 씨족으로 분파되었다. 쿠니후사의 후손은 미노 겐지로 불리며, 도키, 아케치 등 여러 씨족으로 분파되었다.[1]

3. 2. 야마토 겐지 (大和源氏)

大和源氏일본어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源満仲)의 차남 요리치카(頼親)를 파조로 하며, 야마토국(大和国)을 중심으로 활동했다.[4] 무쓰 이시카와 씨(陸奥石川氏), 우노 씨(宇野氏), 가타오카 씨(片岡氏) 등 여러 씨족으로 분파되었다.[4]

3. 3. 가와치 겐지 (河内源氏)

미쓰나카의 셋째 아들 요리노부를 시조로 하며, 가와치국(지금의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쓰보이)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가와치 겐지는 세이와 겐지 중에서도 가장 번성한 분파로, 요리요시, 요시이에를 거치며 무가의 동량(棟梁, 우두머리)으로 성장했다.[1]

요리노부는 조겐의 난(1028년)을 진압하는 등 무공을 세웠다. 요리요시는 전9년의 역에서 아베씨를 토벌했고, 요시이에는 후3년의 역에서 시와라씨의 내분을 수습하여 가와치 겐지는 동국(간토 지방)에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가와치 겐지는 무공을 세워, 세이와 겐지의 서류(庶流, 본가에서 갈라져 나온 집안)였던 지위에서 사실상 본류(本流, 본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이에 말년에 차남 요시치카가 조정에 반항했기 때문에 요시이에는 곤경에 처했고, 가와치 겐지에도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요시이에 사후 가독(家督, 집안의 우두머리)을 계승한 요시타다가 암살당하고, 진범이 요시미쓰였던 것으로 밝혀지는 등, 가와치 겐지 내부의 분열은 명백해지고, 권세는 한동안 쇠퇴했다.

요시이에의 후손들은 이시카와 겐지, 우에노 겐지, 시모쓰케 겐지, 미카와 겐지 등으로 분파되었으며, 아시카가 씨, 닛타 씨, 야마나 씨, 사토미 씨 등 수많은 씨족을 배출했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의 후손은 히타치 겐지와 카이 겐지로 분파되었으며, 사타케 씨, 다케다 씨, 오가사와라 씨 등 여러 씨족으로 분파되었다.

4. 현대의 세이와 겐지

현대 일본에는 세이와 겐지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관련 단체들도 활동하고 있다.


  • 다다 미쓰나카 동족회(多田満仲同族会): 1962년에 결성되었다. 미쓰나카를 제신으로 하는 도쿄도 나카노구에 있는 타다 신사에서 경신 숭조(敬神崇祖)를 목적으로 활동한다.[2]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 세이와 겐지는 일본 무가 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가문으로, 역사 연구 및 문화 교류의 대상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참조

[1] 간행물 世ノ所謂淸和源氏ハ陽成源氏ニ非サル考-源朝臣經基の出自をめぐつて- 2003-01
[2] 문서 高田氏の祖・盛員の父
[3] 논문 源義忠の暗殺と源義光 https://yone.repo.ni[...] 山形県立米沢女子短期大学 2009-12
[4] 문서 河内源氏・源忠宗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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