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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노부야스 (15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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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노부야스(1559년 ~ 1579년)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이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와 결혼하여 오카자키 성의 성주를 지냈으며,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는 등 무장으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쓰키야마 도노와 도쿠히메 사이의 불화, 그리고 노부야스의 난폭한 행실 등으로 인해, 1579년 오다 노부나가의 요구에 따라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할복했다. 노부야스의 죽음은 가문 내의 갈등과 권력 다툼,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에야스의 정치적 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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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노부야스 (155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카자키 사부로 노부야스 초상 (쇼렌지 소장)
이명지로자부로(次郎三郎), 오카자키 사부로(岡崎三郎)
출생명다케치요(竹千代)
출생일1559년 4월 13일
사망일1579년 10월 5일
배우자도쿠히메
첩 (휴가 도라아키의 딸)
자녀도쿠히메
구마히메
어머니쓰키야마도노
아버지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도쿠가와 씨
생애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씨족마쓰다이라 씨 (도쿠가와 씨)
개명다케치요(竹千代) → 노부야스(信康)
통칭지로사부로(次郎三郎), 오카자키 사부로(岡崎三郎)
묘소
묘소 정보오카자키시가모다 정 히로모토의 세이도 산 쇼안인 다이쥬지
[수총][오카자키시 아사히 정 모리조에 12]와카미야 하치만구
하마마쓰시덴류구 후타마타 정 세이류지
시즈오카시시미즈구 에지리히가시 3초메의 고조지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머니: 쓰키야마도노(쓰키야마 고젠)
형제자매노부야스
가메히메
도쿠히메
히데야스
히데타다
다다요시
후리히메
노부요시
다다테루
마쓰치요
센치요
요시나오
요리노부
요리후사
이치히메
정실도쿠히메 (오다 노부나가의 딸)
측실휴가 야마토노카미 도키마사의 딸
자녀 정보도쿠히메(登久姫,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정실)
구마히메(熊姫, 혼다 다다마사의 정실)
기타 정보
계명도운인덴 류곤초고다이고지, 세이류지덴젠산슈 다쓰이와젠쓰다이고지

2. 이름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이다.[1]

일반적으로 '''마쓰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로 표기된다. 하지만 아버지 이에야스가 노부야스의 원복(元服, 관례) 이전인 에이로쿠 9년(1566년)에 이미 도쿠가와(徳川)로 성을 바꾸었기 때문에, 생전에는 '''도쿠가와 노부야스'''(徳川信康)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은 에도 시대에 들어 에도 막부가 도쿠가와 성 사용을 도쿠가와 쇼군가와 고산케, 고산쿄로 제한하면서 노부야스가 사후에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로 격하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사쿠마 노부모리에게 보낸 덴쇼 3년(1575년) 6월 28일자 서장에서 노부야스를 "마쓰다이라 사부로"라고 칭한 사실이 확인되었다.[2] 이는 이에야스가 도쿠가와로 성을 바꾼 후에도 노부야스는 마쓰다이라 성을 계속 사용했음을 시사하며, 생전에도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생애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딸인 쓰키야마도노이다.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였으며,[1] 친누이로 가메히메가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이마가와 씨의 인질로서 스루가 국(현재의 시즈오카현)의 슨푸에서 보냈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우도노 우지나가 형제와의 인질 교환을 통해 아버지의 거점인 미카와 국(현재의 아이치현)의 오카자키성으로 돌아왔다. 일설에 따르면, 어머니와 여동생은 이미 오카자키 성에 있었고 노부야스 혼자 슨푸에 남아 인질 생활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567년 5월, 오다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와 결혼하였고, 같은 해 7월 원복을 치르고 노부나가에게서 '노부'(信) 자를 받아 '''노부야스'''(信康)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570년에는 정식으로 오카자키 성주가 되었다.[3] 이후 1573년 아시스케 성 공략을 시작으로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며,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17세의 나이로 도쿠가와 군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후에도 다케다 씨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용맹함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579년, 노부야스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난다. 아내 도쿠히메는 시어머니 쓰키야마도노와의 불화 끝에 아버지 노부나가에게 쓰키야마도노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의혹을 전해 들은 이에야스는 동맹인 노부나가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아내 쓰키야마도노를 처형했다. 노부야스 역시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오하마 성, 호리에 성을 거쳐 후타마타 성에 유폐되었다. 결국 1579년 9월 15일, 아버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할복했다.[5] 향년 21세였다. 이에야스는 노부야스가 모반에 가담하지 않았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염려하여 자결을 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부야스의 할복 이후,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등 도쿠가와 가신들은 노부야스와 연락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기도 했다(『이에타다 일기』).[5]

노부야스의 성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버지 이에야스가 1566년에 도쿠가와(徳川)로 성을 바꾸었기 때문에 노부야스 역시 생전에 '도쿠가와 노부야스'를 칭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성씨 사용이 쇼군 가문과 일부 분가로 제한되면서 사후에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575년 노부나가가 사위인 노부야스를 '마쓰다이라 사부로'(松平三郎)라고 칭한 서장이 발견되면서, 이에야스가 개성한 후에도 노부야스는 계속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2]

일부 기록에서는 노부야스가 생전에 인기가 없었으며, 특히 중신 사카이 다다쓰구가 노부야스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모반 혐의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 1. 초기

오카자키성


에이로쿠 2년(1559년) 3월 6일, 당시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장자로 슨푸(駿府)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였다.[1] 그의 어머니는 쓰키야마 도노이며, 친누이는 가메히메이다. 어린 시절, 이마가와 씨의 인질 신분으로 스루가 국(오늘날의 시즈오카현)의 수도인 슨푸에서 지냈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도쿠가와 군의 포로가 된 우도노 우지나가(鵜殿氏長)와 우지쓰구(氏次) 형제와의 인질 교환을 통해 풀려나, 아버지의 거성인 미카와 국(오늘날의 아이치현) 오카자키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설에는 어머니 쓰키야마도노와 여동생 가메히메는 모토야스가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이미 오카자키 성에 들어왔으며, 다케치요 혼자 슨푸에 인질로 남았다고도 한다. 이 경우, 이마가와 씨가 다케치요를 해치지 않은 것은 외조부인 세키구치 우지즈미(関口氏純)가 이마가와 가문의 일족이었던 점과, 훗날 모토야스를 멸망시킨 뒤 다케치요를 꼭두각시 당주로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에이로쿠 5년(1562년), 아버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 사이에 기요스 동맹이 성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에이로쿠 10년(1567년) 5월, 9세의 나이에 노부나가의 딸이자 동갑인 도쿠히메와 혼인하여 형식적인 부부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이에야스가 하마마쓰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노부야스는 오카자키 성을 물려받았다. 7월에는 원복을 치르고, 장인인 노부나가로부터 편휘(偏諱) '노부'(信)를 받아 '''노부야스'''(信康)로 개명하였다. 겐키 원년(1570년)에는 정식으로 오카자키 성주가 되었다.[3]

덴쇼 원년(1573년) 아시스케 성 공략에서 첫 출진을 경험했고, 이후 부세쓰 성을 공격했다.[3] 덴쇼 3년(1575년) 5월, 17세의 나이로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여 도쿠가와 군의 일익을 담당하는 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다케다 씨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우며 용맹함을 떨쳤다. 특히 덴쇼 5년(1577년) 8월 도토미 국 요코스카 전투에서는 퇴각하는 군대의 후방을 맡아 다케다 군이 오이가와를 넘지 못하도록 막는 공을 세웠다. 덴쇼 6년(1578년) 3월에는 고야마 성 공략에 참전하여 퇴각 시 후위를 맡아 활약했다.

노부야스는 통솔력이 뛰어나 영지인 오카자키를 잘 다스려 아버지 이에야스를 보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대 인물인 오쿠보 다다타카(大久保忠教)는 그의 저서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에서 노부야스를 전쟁 이야기를 즐기고 승마와 매사냥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무인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덴쇼 2년(1574년), 부하인 마쓰다이라 치카타쿠(松平親宅)가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듣지 않아 치카타쿠가 직무를 내려놓고 은거, 출가하는 일도 있었다(『마쓰다이라 진스케 유래서』(松平甚助由来書)). 『간세이 족보』(寛政重修諸家譜)에는 이 사건의 시기를 덴쇼 3년(1575년)으로 기록하며, 치카타쿠가 노부야스의 죽음을 슬퍼하여 출가했다고 설명하지만, 직무를 반납한 이유는 역시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4]

3. 2. 무장으로서의 활약

덴쇼 원년(1573년) 아시스케 성 공략에서 첫 출진하였고, 그 후 부세쓰 성을 공격했다[3]

덴쇼 3년(1575년) 5월의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17세의 나이로 이에야스 군의 일익을 담당하는 대장으로 참가했다. 그 후에도 다케다 씨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용맹함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덴쇼 5년(1577년) 8월 도토미 국 요코스카 전투에서 퇴각할 때에는 후위를 맡아 다케다 군이 오이가와를 건너는 것을 막는 공을 세웠다. 덴쇼 6년(1578년) 3월에는 고야마 성 공략에 참전하여, 퇴각 시에 후위를 맡아 활약했다.

무용이 뛰어난 무장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들을 남기고 있다. 동시대 인물인 오쿠보 다다타카(大久保忠教)는 저서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에서 노부야스가 평소 입에 올리는 것은 대부분 전쟁과 관련한 것이 아니면 승마나 매사냥에 대한 것밖에 없는, 전형적인 무골(武骨)이었다고 평가했다.

  • 덴쇼 3년(1575년) 이에야스가 오야마 성(小山城)에서 퇴각했을 때 군의 후미를 맡아서 성공적으로 퇴각을 완료하자, 이에야스는 아들을 크게 칭찬했다(『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
  • 다케다 군과 치른 어떤 전투에서도 후미를 맡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이에야스는 「실로 용장이로구나. 가쓰요리가 설령 10만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맞서더라도 내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감탄했다고 한다(『대천삼지』大川三志).
  • 가쓰요리의 본진을 단 한 명의 부하만 거느린 채 엿보고 돌아와서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결전을 진언하는 용맹한 모습도 보였다(『마쓰다이라 이야기』松平物語).
  • 『간겐문서』(寛元聞書)라는 문헌에서는 장인인 오다 노부나가가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를 두려워했다고 적고 있다. 사학자 다카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壽)는 노부나가가 자신의 후계자인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보다 노부야스의 기량이 뛰어난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할복을 명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4. 노부야스 할복 사건

덴쇼 7년(157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장자이자 오카자키 성 성주였던 마쓰다이라 노부야스가 아버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할복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노부야스의 생모인 쓰키야마도노 역시 처형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노부야스의 정실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딸인 도쿠히메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다. 이 편지에는 시어머니 쓰키야마도노가 다케다 가쓰요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내용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27] 이를 전해 들은 노부나가가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의 처단을 요구했고, 이에야스가 이를 받아들여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했다는 것이 오랫동안 통설로 여겨져 왔다.

이에 따라 1579년 8월 29일 쓰키야마도노가 먼저 처형되었고[28], 이어 9월 15일 노부야스가 후타마타 성에서 할복하여 향년 21세로 생을 마감했다. 노부야스의 목은 노부나가에게 보내졌다가 와카미야 하치만구(若宮八幡宮)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통설 외에도 다양한 해석과 논란이 존재한다.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와 여러 설에 대해서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4. 1. 『미카와 이야기』에 따른 통설

오다 노부나가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에 따르면, 노부야스의 자결 사건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딸이자 노부야스의 정실인 도쿠히메는 시어머니 쓰키야마도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쓰키야마도노는 자신의 친정인 이마가와 씨를 멸망시킨 오다 가문에 반감을 가졌고, 이 때문에 도쿠히메와 갈등했으며, 남편 노부야스와의 관계도 멀어졌다.

덴쇼 7년(1579년), 도쿠히메는 1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편지를 써서 아버지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이 편지는 이에야스의 중신으로 오다 가문을 방문할 예정이던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맡겨졌다. 편지의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노부야스의 여러 비행과 함께 특히 쓰키야마도노가 다케다 가쓰요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를 받은 노부나가는 사자인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고, 다다쓰구는 노부야스를 변호하지 않고 모든 내용을 사실로 인정했다.[27] 이에 격분한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아들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하라고 요구했다.

도쿠가와 가문 내부에서는 적장자인 노부야스를 죽게 할 수 없다며 반발이 심했고, 일부는 노부나가와의 동맹 파기까지 주장했다. 노부야스의 후견인이었던 히라이와 지카요시는 자신의 책임이라며 대신 할복하겠다고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중신인 다다쓰구가 이미 모든 혐의를 인정한 상황에서 노부나가의 노여움을 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결국 노부야스를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후타마타 성 터


먼저 8월 29일, 노부야스의 어머니 쓰키야마도노가 후타마타 성으로 이송되던 중 사나루 호수(佐鳴湖) 근처에서 도쿠가와 가신 오카모토 도키나카(岡本時仲)와 노나카 시게마사(野中重政)에게 살해되었다.[28] 이후 9월 15일, 후타마타 성에 유폐되어 있던 노부야스에게 할복 명령이 내려졌다. 가이샤쿠 역할은 핫토리 마사나리에게 맡겨졌으나, 그는 주군의 아들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며 거절했고 다른 인물이 대신했다. 노부야스는 향년 21세로 생을 마감했다.

노부야스의 목은 노부나가에게 보내졌다가 와카미야 하치만구(若宮八幡宮)에 묻혔다. 비슷한 시기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등 도쿠가와 가신들은 노부야스와 내통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기청문, 起請文)를 작성했다고 전해진다.

4. 2. 통설에 대한 의문과 여러 설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할복 사건은 에도 막부 성립 이후 도쿠가와 사관에 의해 정립된 『미카와 이야기』의 설명이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와 시어머니 쓰키야마도노의 불화, 쓰키야마도노의 다케다 가문 내통 의혹이 발단이 되어, 노부나가의 요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들 노부야스를 처단했다는 것이다.[27]

그러나 이 통설에는 여러 의문점이 제기된다. 노부야스의 난폭한 행동이나 도쿠히메와의 불화만으로 장인인 오다 노부나가가 사위를 죽이려 했는지, 당시 스모나 게마리 관람에 열중하던 노부나가가 동맹자인 이에야스에게 그런 압력을 가했는지[8], 사건의 발단으로 지목된 도쿠히메에게 후에 이에야스(실제로는 의붓동생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영지를 준 점, 쓰키야마도노가 독자적인 외교력을 가졌는지, 노부나가가 쓰키야마도노 처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이에야스가 연좌시킨 점[8], 노부야스를 감싸지 않은 사카이 다다쓰구가 이후에도 중용된 점 등은 통설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이에야스와 노부야스 부자간의 심각한 대립이 사건의 본질적인 원인이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아즈치 일기(安土日記)』나 『도다이키(当代記)』 등에서는, 사카이 다다쓰구가 노부나가를 방문한 이유 중 하나가 이에야스와 노부야스 부자의 불화를 상담하기 위함이었으며, 노부나가는 "노부야스를 죽이라"가 아닌 "이에야스의 뜻대로 하라"고 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에야스 자신의 판단으로 노부야스와 쓰키야마도노를 처단했음을 시사한다. 덴쇼 7년(1579년) 8월 8일 자 호리 히데마사에게 보낸 이에야스의 서장에서도 노부야스의 "불각오(不覚悟)" 때문에 오카자키 성에서 추방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타다 일기』에 따르면, 사건 전 해인 덴쇼 6년(1578년)부터 쓰키야마도노가 오카자키 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이례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이에야스는 미카와 가신들에게 오카자키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지시했으며, 노부야스 추방 후에는 오카자키 가신들에게 노부야스와 내통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기청문)를 쓰게 하는 등, 부자간의 심각한 대립 정황이 나타난다.

『다이산가와시』나 『도다이키』 등에도 노부야스가 이에야스의 말을 듣지 않고 노부나가마저 경시했으며, 이로 인해 부자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0][11][12][13]. 이에야스가 후일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보고 "사부로(노부야스)의 어릴 적 얼굴과 닮아 꺼림칙하다"고 말했다는 일화[14] 역시 부자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일화들은 후대의 기록이다.

작가 덴큐 고로는 당시 도쿠가와 가문 내에 전공을 중시하는 하마마츠 파와 후방 지원 및 외교를 담당하는 오카자키 파의 대립이 있었고, 오카자키 파가 노부야스를 옹립하여 이에야스에 대항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일종의 쿠데타 미수)으로 보기도 한다. 사건 전후로 오카자키 근무 가신 다수가 처벌되거나 출분한 것을 근거로 든다. 타니구치 카츠히로 역시 이 설을 지지하며 오카자키 무사들이 노부야스를 내세워 쿠데타를 기도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시바 히로유키, 혼다 타카나리, 쿠로다 모토키, 히라야마 마사루 등은 덴쇼 3년(1575년)의 오오카 야시로 모반 사건과의 연관성을 지적한다. 이 사건 당시 다케다 측과 내통하려 했던 오카자키 가신단과 쓰키야마도노, 그리고 이들에게 옹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노부야스가 사건 이후에도 다케다 가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고, 이것이 발각되어 처단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16][17][7][18]. 쿠로다 모토키는 특히 덴쇼 7년(1579년) 4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출생으로 후계자 문제가 해결되고, 9월 호조 가문과의 동맹(소엔 동맹) 성립으로 다케다 공격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자, 이에야스가 쓰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를 처분할 적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노부야스 자신의 성격 문제도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가신 마쓰다이라 지카타쿠를 간언한다는 이유로 추방하거나(『간세이 중수 제가보』), 여동생 가메히메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혼인에 강하게 반대하다 노부나가의 설득으로 겨우 받아들인 일화(『미카와 이야기』) 등은 그가 가신단과 마찰을 빚었음을 보여준다.

과거 다카야나기 미쓰토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아들 오다 노부타다보다 뛰어난 노부야스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제거했다는 설을 주장했으나[19], 이는 오다 노부타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추측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중 전황이 불리해지자 "노부야스가 있었다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텐데"라고 한탄하거나[3], 만년에 "부자 사이가 좋지 못했다"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전해진다.

5. 인물 및 일화

무용(武勇)이 뛰어난 무장으로 평가받으며, 미카와 이야기에 따르면 평소 대화 주제가 전쟁, 승마, 매사냥 외에는 거의 없었을 정도로 전형적인 무골(武骨)이었다고 한다.


  • 덴쇼(天正) 3년(1575년): 이에야스가 오야마 성 공격에서 퇴각할 때 군의 후미(殿)를 맡아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여 이에야스로부터 크게 칭찬받았다(도쿠가와 실기). 또한 다케다 가쓰요리 군과의 전투에서도 후미를 맡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이에야스는 "실로 용장이로구나. 가쓰요리가 설령 10만 군사를 이끌고 와도 두려울 것이 없다"며 감탄했다고 한다(대천삼지大川三志). 덴쇼 5년(1577년) 8월의 도토미 국 요코스카 전투에서도 퇴각 시 후위를 맡아 다케다 군이 오이가와를 건너는 것을 막았으며, 덴쇼 6년(1578년) 3월 고야마 성 공략에서도 퇴각 시 후위를 맡아 활약했다.
  • 가쓰요리의 본진을 단 한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정찰한 뒤 돌아와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결전을 진언하는 용맹함을 보이기도 했다(마쓰다이라 이야기).
  • 간겐문서(寛元聞書)에는 장인인 오다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학자 다카야나기 미쓰토시는 노부나가가 자신의 후계자 오다 노부타다보다 노부야스의 기량이 뛰어난 것을 두려워하여 할복을 명했다고 주장했지만[19], 2000년대 이후 노부타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 설은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아버지 이에야스로부터 푸대접을 받던 이복동생 오기마루(후의 유키 히데야스)를 불쌍히 여겨 이에야스와의 대면을 주선하는 등 인정 있는 면모도 보였다(『쓰야마 마쓰다이라 세이코 공 연보』).[20]


그러나 용맹함 이면에는 거칠고 난폭한 면도 있었다.

  • 성격이 격렬하여 평소 난폭한 행동이 많았다고 전해진다(마쓰다이라기, 미카와고후도키).
  • 영지 내 축제(봉오도리)에서 옷차림이 초라하거나 춤을 못 추는 영민을 재미 삼아 활로 쏘아 죽이고는 적의 간첩이었다고 둘러댔다(마쓰다이라기, 미카와고후도키).
  • 매사냥 중에 만난 승려가 사냥감을 줄게 한다는 미신 때문에 승려를 밧줄로 묶어 죽였다가 후에 사죄하기도 했다(마쓰다이라기, 미카와고후도키).
  • 정실 도쿠히메가 딸만 둘 낳자 부부 사이가 냉랭해졌다(마쓰다이라기, 미카와고후도키). 마쓰다이라 이에타다의 『이에타다 일기』에도 도쿠히메와의 불화는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 가신들에게 무상하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토다이키』)[6], 행실이 나빠 가신들이 고생했다는 기록도 있다(『이시카와 쇼세이 문견집』).[7]
  • 가신 마쓰다이라 지카타쿠는 노부야스의 행동에 대해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이를 듣지 않아 결국 추방당했다(간세이 중수 제가보).[4]
  • 여동생 카메히메가 다케다 가문에서 귀순한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와 혼인하는 것에 대해 "적 측의 인물을 사위로 삼는 것은 어렵다"며 강하게 반대하다가 장인 노부나가의 설득을 듣고서야 겨우 납득했다(미카와 이야기, 미카와 도카이 기).


이러한 성격과 행동은 가신들과의 갈등 및 아버지 이에야스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오오미카와시』(大三川志)는 이에야스가 노부야스를 어릴 때 너무 오냐오냐 키워 성인이 된 후 부모를 존경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부자 관계 악화와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토다이키』에도 노부야스가 이에야스의 명령을 어기고 노부나가마저 경시했으며, 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등 부모와 가신들이 그를 단념할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야스는 훗날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꺼리는 이유로 "얼굴이 괴이하고 사부로(노부야스)의 어릴 적 건방진 얼굴과 닮았다"[32], "무섭고 억센 얼굴이 꼭 어린 시절 사부로를 떠올리게 해 볼 때마다 꺼려진다"[33]고 말하며 노부야스와 닮았다는 점을 들어, 부자 간의 좋지 못했던 관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1579년 후타마타 성에 유폐되었을 때, 성주이자 이에야스의 신임이 두터웠던 오쿠보 다다요에게 자신의 결백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할복 당시 핫토리 마사나리가 가이샤쿠(介錯)를 맡기로 했으나, 차마 칼을 내리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검시역(検死役)이었던 아마가타 미치쓰나가 대신 가이샤쿠를 했다. 미치쓰나는 이후 이에야스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보고 출가했다고 전해진다(『가시와자키 이야기』). 노부야스의 죽음을 듣고 순사(殉死)한 가신들도 많았으며, 세이류지에는 순사한 가신 키라 오하츠(吉良於初)의 묘가 남아있다.

이에야스는 노부야스의 죽음과 관련하여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 고와카마이(幸若舞)의 '미쓰나카(滿仲)' 공연 중 주군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며 오쿠보 다다요와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저것 좀 보라"고 말해 두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동무담총東武談叢).
  • 훗날 사카이 다다쓰구가 아들 사카이 이에쓰구의 영지가 적다고 불평하자, 이에야스는 "자네도 자식 사랑을 아는가?"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동무담총東武談叢). 이는 노부야스 할복 당시 노부나가에게 변호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다다쓰구의 행동을 꼬집은 것으로 해석된다.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후계자 히데타다가 전투에 늦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이에야스는 "'''노부야스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이라며 크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 해는 노부야스의 21주기이기도 했다.[29]
  • 만년에는 "부자간에 사이가 좋았어야 했는데(父子の仲平ならざりし)"라며 노부야스와의 관계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야, 이에야스는 서군에 가담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그의 아들 효고노카미(兵庫頭)와 노부야스의 손녀딸과의 혼담을 제안했다. 이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와 결혼한 만텐히메의 사례와 유사하게, 이에야스가 노부야스의 혈통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노부야스의 가신들 중 일부가 후에 고다이요리아이(交代寄合)에 임명된 점도 이에야스가 노부야스에 대해 가졌던 신임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에도 시대의 설화를 바탕으로 무라오카 소이치로는 "사기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적"에서 매장된 노부야스의 유해가 가짜이며, 실제로는 동정심을 가진 가신들에 의해 구출되어 하마마쓰 산중 마을로 도망쳤다는 생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6. 가족 관계

아버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머니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인 쓰키야마 도노이다.[1] 친누나로 가메히메가 있다.

노부야스의 배우자와 자녀는 다음과 같다.

구분이름비고
정실도쿠히메오다 노부나가의 딸
장녀 (정실 소생)도쿠히메1576년 출생. 시나노 마쓰모토번주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에게 시집감.
차녀 (정실 소생)구마히메1577년 출생. 하리마 히메지번 초대 번주 혼다 다다마사에게 시집감. 혼다 다다토키의 생모.
측실아사하라 마사토키의 딸
자녀 (측실 소생)미상아사하라 마사토키 딸 소생.
측실휴가 도키마사의 딸
장남 (측실 소생)만치요휴가 도키마사 딸 소생.



역대 에도 막부 쇼군 중에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노부야스의 자손이다.[26]

7. 후세의 평가 및 관련 작품

노부야스는 생전에 인기가 없었던 인물로 여겨지며,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가 이를 보여준다. 특히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이 타다쓰구는 노부야스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노부나가에게 반역 혐의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 그러나 냉대받던 이복 동생 오기마루(후의 유우키 히데야스)를 불쌍히 여겨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면을 주선하는 등 동생을 아끼는 면모도 있었다.[20]

노부야스는 후타마타성 성주이자 이에야스의 신임이 두터웠던 오쿠보 타다요에게 자신의 결백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결국 아버지의 명령으로 할복(셋푸쿠)하게 되었다. 이때 핫토리 한조 마사나리가 가이샤쿠(介錯)를 맡았으나 차마 칼을 내리치지 못했고, 검시역이었던 아마가타 미치쓰나(야마시로노카미)가 대신 가이샤쿠를 행했다고 한다. 이 일로 미치쓰나는 가신단 내에서 입지를 잃고 출가했다고 전해진다(『가시와자키 이야기』). 하마마쓰시의 세이류지에는 노부야스를 따라 순사한 가신 키라 오하츠(하츠노조)의 묘가 남아있다.

훗날 사카이 타다쓰구가 자신의 적남 사카이 이에쓰구의 영지가 적다고 이에야스에게 불만을 토로하자, 이에야스는 "너에게도 자식은 소중한가 보구나"라며 냉담하게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도부담총』). 이는 노부야스의 죽음에 대한 이에야스의 복잡한 심정과 타다쓰구에 대한 원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날 밤, 이에야스는 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그의 적자와 노부야스의 손녀 사이의 약혼을 제안했다. 이 손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와 결혼한 만텐히메보다도 이에야스와 더 가까운 혈연이었기에, 노부야스의 혈통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무라오카 소이치로는 "사기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적"에서 에도 시대 설화를 근거로, 매장된 노부야스의 유해는 가짜이며 실제로는 동정심을 가진 가신들에 의해 구출되어 하마마쓰 산중 마을로 도망쳐 살아남았다는 생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노부야스 사후, 이에야스는 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이류지를 건립했으며, 이곳에는 시신이 묻힌 노부야스의 묘가 현재까지 남아있다.[21] 머리 무덤이 있는 오카자키시의 와카미야 하치만구에서는 노부야스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다. 또한 노부야스와 인연이 깊었던 인물들에 의해 여러 사찰과 공양탑이 세워졌다.[22]



=== 관련 작품 ===

노부야스의 비극적인 삶은 후대에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가부키'''
  • 『쓰키야마 전말』(1953년, 작: 오사라기 지로)
  • '''영화'''
  • 『반역아』(1961년, 도에이, 감독: 이토 다이스케, 배우: 나카무라 킨노스케)
  • '''드라마'''
  • 『도쿠가와 이에야스』(1964년, NET, 배우: 기타오지 긴야)
  • 『쓰키야마 전말』(1966년, 후지 TV, 배우: 이치카와 신노스케)
  • 『도쿠가와 이에야스』(198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타쿠마 신)
  • 『도쿠가와 이에야스』(1988년, 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 배우: 노무라 히로노부)
  • 『노부나가 KING OF ZIPANGU』(1992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하야카와 료)
  • 『센고쿠 최후의 승리자! 도쿠가와 이에야스』(1992년, TV 아사히, 배우: 이시바시 타모츠)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 여인』(2008년, TV 아사히, 배우: 카시와바라 슈지)
  • 여자 성주 나오토라』(2017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히라노 나루키)
  • 어떡할래 이에야스』(202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호소다 카나타, 유년기: 테라지마 마슈)
  • '''무대'''
  • 『반역아』(2009년, 쇼치쿠, 배우: 나카무라 시도)
  • '''가요곡'''
  • 미나미 하루오 "장편 가요 낭만 천룡 후타마타 성"
  • '''소설'''
  • 우에다 히데토 『몽환』(2020년, 주오코론 신샤)

참조

[1] 문서
[2] 서적 松平信康事件は、なぜ起きたのか? 柏書房
[3] 기타
[4] 서적 家康の族葉 碩文社
[5] 기타
[6] 기타
[7] 서적 徳川家康の最新研究 伝説化された「天下人」の虚像をはぎ取る 朝日新聞社
[8] 기타
[9] 논문 近世初期の自然災害記録媒体としての『当代記』の特性分析 https://cir.nii.ac.j[...]
[10] 웹사이트 今月のアーカイブ 大三川志(だいみかわし) https://www.archives[...] 국립공문서관 2015-01-27
[11] 웹사이트 大三川志 https://websv.aichi-[...] 愛知県図書館 2023-06-19
[12] 웹사이트 大三川志(稿本) 100巻 https://rmda.kulib.k[...] 京都大学貴重資料デジタルアーカイブ 2023-06-19
[13] 웹사이트 大三川志 https://kokusho.nijl[...] 국서데이터베이스 2023-06-19
[14] 웹사이트 藩翰譜巻6 https://dl.ndl.go.jp[...] 국립국회도서관디지털컬렉션
[15] 웹사이트 <論説>家忠日記の原本について https://www.hi.u-tok[...] 東京大学史料編纂所報第2号 2022-04-01
[16] 서적 徳川家康 境界の領主から天下人へ 平凡社
[17] 서적 徳川家康と武田氏 信玄・勝頼との十四年戦争 吉川弘文館
[18] 서적 徳川家康と武田勝頼 幻冬舎新書
[19] 서적 青史端紅 朝日新聞社
[20] 문서 津山松平浄光公年譜
[21] 웹사이트 施設スポット検索 - 清瀧寺 https://web.archive.[...] はままつ旅百花 - 観光情報サイト浜松だいすきネット~はままつ旅百花~
[22] 서적 徳川将軍家墓碑総覧 パレード
[23] 웹사이트 区指定・登録文化財一覧 https://www.city.shi[...] 신주쿠구
[24] 웹사이트 9.12 史跡・文化財 https://www.2020game[...] 東京都環境局 2024-12-29
[25] 웹사이트 隆岩寺 https://www.kogakank[...] 古河市観光協会 2015-01-27
[26] 웹사이트 一條家譜 https://clioimg.hi.u[...] 華族系譜30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무변잡담武辺雑談, 도쿠가와 실기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야사(野史)
[33] 문서 한칸후(藩翰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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