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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히로 (16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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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다다히로(1631년)는 에도 시대 전기의 다이묘이다. 그는 1644년 아버지 마쓰다이라 타다아키의 사망으로 히메지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이후 야마가타번, 우쓰노미야번, 시라카와번을 거쳐 1692년 야마가타번으로 이봉되었다. 시라카와번 시대에 가신단의 후계자 분쟁인 시라카와 소동으로 인해 가신들이 처벌받고, 본인은 은거했으며, 가독은 손자인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에게 상속되었다. 1700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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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히로 (1631년)
기본 정보
씨족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이름마쓰다이라 다다히로
개명쓰루마쓰마루 (유명)
기요사다 (초명)
다다히로
묘소와카야마현이토군고야정고야산의 주세이인
계명능가원전전사품습유단옹도엄대거사
시대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출생 및 사망
출생간에이 8년 11월 8일 (1631년12월 30일)
사망겐로쿠 13년 5월 16일 (1700년7월 2일)
관직
관위종5위하시모사노카미
종4위하시종
정치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미쓰
이에쓰나
쓰나요시
하리마히메지번 번주
데와야마가타번 번주
시모쓰케우쓰노미야번 번주
무쓰시라카와번 번주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어머니: 미요시 씨
형제자매다다히로
기요미치
무리히메
오쿠보 다다쓰구 정실
교고쿠 다카카타 정실
시조 다카스에 실
사카키바라 기요테루 실
오사와 나오치카 정실
배우자정실: 호소카와 다다토시의 딸, 후지히메
자녀기요테루
산시
조후쿠시
지요시
나베시
양자다다히사
다다마사
기타
번주 이력
히메지번 번주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전임: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후임: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대수: 2
임기: 1644년 ~ 1648년
야마가타번 번주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전임: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후임: 오쿠다이라 마사요시
임기: 1648년 ~ 1668년
우쓰노미야 번 번주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전임: 오쿠다이라 마사요시
후임: 혼다 다다히라
임기: 1668년 ~ 1681년
시라카와번 번주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전임: 마쓰다이라 나오노리
후임: 마쓰다이라 나오노리
임기: 1681년 ~ 1692년
야마가타번 번주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재봉)전임: 마쓰다이라 나오노리
후임: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대수: 1
임기: 1692년

2. 생애

마쓰다이라 다다히로는 야마토국 고리야마번주 마쓰다이라 타다아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후 12세의 나이로 히메지번 18만 석[1]을 상속받았으나, 어린 나이를 이유로 곧 데와국 야마가타번으로 옮겨졌다. 이후 오쿠다이라 가문의 내분 여파로 시모쓰케국 우쓰노미야번으로, 다시 무쓰국 시라카와번으로 여러 차례 영지를 옮겨 다녔다.

시라카와 번주 시절,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가신단 사이에 심각한 분쟁인 '시라카와 소동'이 발생했다. 이 소동은 막부에까지 알려져 영지 몰수라는 가혹한 처분을 받을 뻔했으나, 선대의 공적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혈통임이 참작되어 10만 석 감봉과 함께 야마가타번으로 다시 옮겨지는 것으로 감경되었다.[2] 다다히로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은거하였으며, 손자인 사이구(훗날의 다다마사)가 가독을 계승했다. 1700년 향년 70세로 사망하였다.[1][2]

2. 1. 가독 상속과 전봉

야마토국 고리야마번주 마쓰다이라 타다아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44년(간에이 21년), 아버지 타다아키가 사망하자 12세의 나이로 히메지번 18만 석[1]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상속 직후에는 동생에게 3만 석을 나누어 주었다.

4년 뒤인 1648년(게이안 원년), 어린 나이를 이유로 데와국 야마가타번 15만 석으로 영지가 옮겨졌다. 이후 1668년(간분 8년)에는 시모쓰케국 우쓰노미야번으로 다시 전봉되었다.

이 우쓰노미야 전봉은 다다히로 본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우쓰노미야번의 번주였던 오쿠다이라 마사요시(다다히로의 사촌인 오쿠다이라 타다마사의 아들) 가문에서 오이바라 사건과 우쓰노미야 고젠지 참극 사건이라는 가신 간의 심각한 내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오쿠다이라 가문은 다다히로의 종가에 해당하는데, 이 사건의 여파로 다다히로가 있던 야마가타번과 영지를 맞바꾸게 된 것이다. 다다히로는 우쓰노미야번에서 영지 내 새로운 논밭(新田, 신덴)에 대한 검지를 실시하기도 했으나, 1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기 때문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치적은 남기지 못했다[2].

이후 1681년(덴와 원년)에는 무쓰국 시라카와번으로 다시 영지를 옮기게 되었다.

2. 2. 시라카와 소동

우쓰노미야를 거쳐 시라카와에 입봉한 이후, 다다히로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가신단 사이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다다히로에게는 장남 주세이 기요테루 외에도 세 명의 아들이 더 있었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유일하게 남은 기요테루마저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에 다다히로는 차녀 쵸후쿠히메의 남편인 마쓰다이라 노리히사의 장남 노리모리를 양자(마쓰다이라 다다나가, 통칭 충상(忠尚))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충상의 아들 센치요가 요절하고, 반년 뒤 쵸후쿠히메마저 사망하면서 양자 충상의 입지는 약해졌다. 50세가 넘은 다다히로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자 가신들 사이에서도 불안감이 커졌다.

결정적으로 후계 구도에서 멀어졌던 기요테루에게 아들 사이구(훗날의 사젠 다다마사)가 태어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로 인해 가신들은 양자 충상을 지지하는 '사위파'와 손자 사이구를 지지하는 '손자파'로 나뉘어 대립했고, 이는 '시라카와 소동'이라 불리는 심각한 분열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가신 93명이 연이어 번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 소동은 결국 막부에까지 알려졌다. 다다히로의 먼 친척이자 당시 노중이었던 오쿠보 타다토모는 막부의 공식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다다히로의 가신을 불러 그의 자발적인 은거를 권유했다. 그러나 이후 내려진 처분은 양 파벌의 핵심 인물이었던 가로 두 명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다다히로의 영지마저 몰수한다는 매우 가혹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다음 달, 처분 내용이 일부 변경되었다. 영지 몰수 대신 10만 석 감봉과 함께 야마가타로 영지를 옮기는 것으로 처분이 완화되어, 가문이 단절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이는 선대 번주들의 충성심과 다다히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혈통(신군 이에야스)이라는 점이 고려된 결과로 여겨진다.

다다히로는 소동의 책임을 지고 은퇴했으며, 가독은 손자인 사이구에게 물려주었다. 당시 9세였던 사이구는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를 배알함과 동시에 다다히로의 은거 또한 승인받았다.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에서는 시모사노카미(下総守)가 당주의 상징이었으므로, 은거한 다다히로는 형부대보(刑部大輔)를 칭하게 되었다.

2. 3. 은거와 사망

1692년 (겐로쿠 5년) 7월 21일, 무쓰 시라카와에서 데와 야마가타번으로 다시 영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영지 규모는 이전의 15만 석에서 10만 석으로 감봉되었다. 같은 날 은거하였다.[1][2] 1700년 (겐로쿠 13년)에 향년 70세로 사망하였다.[1][2]

3. 관직 이력

연도관직
1645년 (쇼호 2년)종5위하, 시모사노카미
1653년 (조오 2년)종4위하
1663년 (간분 3년)시종


4. 가계

(내용 없음)

4. 1. 부모


  • '''아버지''': 마쓰다이라 다다아키
  • '''어머니''': 미요시 씨 (측실)

4. 2. 정실


  • 후지히메 - 호소카와 타다토시의 딸

4. 3. 자녀


  • 장남: 마쓰다이라 기요테루
  • 아들: 요절
  • 아들: 요절
  • 아들: 요절
  • 딸 산코(三子): 시조 다카네의 부인
  • 딸: 마쓰다이라 다케모토의 부인
  • 딸 조후쿠코(長福子):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의 정실
  • 딸 지요코(千代子): 오쿠보 다다마스의 정실
  • 딸 나베코(鍋子): 구와야마 가즈요리의 정실, 후에 오사와 모토츠네의 정실

4. 4. 양자

참조

[1] 문서 5年前の寛永16年([[1639年]])に転封した。
[2] 서적 宇都宮藩・高徳藩 現代書館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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