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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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역사적 배경
- 3. 역대 번주
- 3.1. 모가미 가문 (도자마 다이묘)
- 3.2. 도리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
- 3.3. 호시나 가문 (신판 다이묘)
- 3.4.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
- 3.5.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
- 3.6. 오쿠다이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
- 3.7. 홋타 가문 (후다이 다이묘)
- 3.8.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재봉, 신판 다이묘)
- 3.9.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재봉, 신판 다이묘)
- 3.10. 홋타 가문 (재봉, 후다이 다이묘)
- 3.11.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
- 3.12. 아키모토 가문 (후다이 다이묘)
- 3.13. 미즈노 가문 (후다이 다이묘)
- 4. 지번
- 5. 문화
- 참조
1. 개요
야마가타 번은 도자마 다이묘인 모가미 씨가 통치했으나, 모가미 소동으로 인해 1622년 영지가 몰수된 후, 막부 요직에서 실각한 인물들의 좌천지로 활용되어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가문들이 번주로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미즈노 씨가 다스렸으며,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가했다가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1870년 미즈노 가문이 아사히야마 번으로 전봉된 후 야마가타 번은 폐지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야마가타 현의 핵심이 되었다. 야마가타 번은 잦은 번주 교체에도 불구하고 상업 도시로 발전했으며, 홍화, 옻, 청마 등의 특산물 집산지이자 데와 산잔 참배 기지로서 번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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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가타번 - 야마가타성
시바 가네요리가 1357년경 축성한 야마가타성은 모가미 씨의 거성을 거쳐 야마가타 번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현재는 가조 공원으로 정비되어 문화 시설과 벚꽃 명소로 활용되고 국가 사적으로 지정,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다. - 미즈노씨 - 가라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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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 요시모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다테 씨와의 관계 속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아들 모가미 요시아키와의 갈등 끝에 은거하고 70세에 사망했다. - 모가미씨 - 요시히메
요시히메는 모가미 요시미쓰의 여동생이자 다테 마사무네의 어머니로, 정략 결혼을 통해 다테 가문과 모가미 가문의 관계를 유지하고 가문 내외의 분쟁 해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야마가타번 | |
---|---|
개요 | |
이름 | 야마가타 번 |
원어 이름 | 山形藩 (야마가타한) |
위치 | 일본 |
행정 구역 | 데와국 |
현재 위치 | 야마가타현 |
통치 | |
정치 체제 | 다이묘 |
역사 | |
성립 | 1600년 |
소멸 | 1871년 |
주요 사건 | 성립: date: 1600년 소멸: date: 1871년 |
시대 | 에도 시대 |
이전 및 이후 | |
이전 | 데와국 |
이후 | 사카타현 아사히야마번 |
상세 정보 | |
위치 | 야마가타성 |
2. 역사적 배경
야마가타 번은 본래 도자마 다이묘인 모가미씨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모가미 소동이라는 가문 내 분쟁으로 1622년 영지가 몰수당한 뒤, 막부 요직에서 실각한 인물들의 좌천지와 같은 곳이 되어,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영주 가문들이 빈번히 교체되었다.
모가미씨가 모가미 소동으로 개역된 후, 야마가타 번에는 여러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가문들이 번갈아 가며 번주로 임명되었다. 이는 야마가타 번이 막부 요직에서 실각한 인물들의 좌천지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1622년 모가미 가문이 오모리 번으로 삭감 전봉된 후, 도리이 다다마사가 22만 석으로 야마가타의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7] 도리이 모토타다의 아들인 다다마사는 동쪽 지역을 억누르는 역할을 맡았다.[8] 그는 가신단을 증강하고 군사 조직을 편성했으며, 1623년부터 1624년까지 겐나 검지를 실시하여 성하 마을을 개조하고 정비했다. 그러나 1636년 다다마사의 아들 도리이 다다쓰네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도리이 가문은 개역되었다.[9]
이후 호시나 마사유키가 1636년 시나노 다카토 번 3만 석에서 야마가타 20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이자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이복 동생인 마사유키는 가신단을 증강하고, 봉행 제도를 정비하여 민정을 안정시켰다. 또한 163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번 내 검지를 실시했다. 1643년 마사유키는 23만 석으로 가봉된 뒤 아이즈번으로 옮겨갔다.
1644년에는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나오모토가 오노 번 5만 석에서 10만 석을 가증받아 15만 석으로 야마가타에 입봉했다. 나오모토는 오오조야 제도를 정비하여 향촌 지배를 강화했다. 1648년 나오모토는 히메지번으로 전봉되었다.
같은 해,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의 마쓰다이라 타다히로가 15만 석으로 입봉했다. 1668년, 우쓰노미야 번으로 옮겨갔다.
1668년 우쓰노미야에서 오쿠다이라씨가 9만 석으로 감봉되어 야마가타로 옮겨왔다. 이는 오바라 건과 우츠노미야 코젠지 칼부림 사건으로 인한 처벌이었다.[10] 야마가타 번은 후다이 다이묘의 좌천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685년 오쿠다이라씨는 다시 우쓰노미야로 돌아갔다.
1685년 다이로 홋타 마사토시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고가 번주 홋타 마사나카가 야마가타 번으로 좌천되었다. 1년 후, 후쿠시마번으로 전봉되었다.
이어서 마쓰다이라 나오노리가 입봉하였지만, 1692년 시라카와번으로 옮겨갔다. 시라카와 번에 있던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이 가신들의 분쟁으로 인해 좌천되어 야마가타로 돌아왔다가, 1700년 후쿠야마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후 후쿠시마 번에 있던 홋타 가문이 다시 돌아와 46년간 통치하다가 1746년 사쿠라번으로 옮겨갔다. 이때 야마가타 지역의 가시와쿠라 4만 석 영지는 사쿠라 번의 원격 영지로 남았다. 홋타 가문 다음에는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 들어왔다가 1764년 니시오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처럼 야마가타 번은 번주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영지 규모도 20만 석에서 5만 석까지 변동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미즈노씨가 야마가타 번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는 덴포 개혁에 실패한 미즈노 다다쿠니가 실각하면서 그 아들 미즈노 다다키요가 좌천되어 들어온 것이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야마가타 번은 요네자와번, 센다이번과 함께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가하였으나, 동맹의 주요 번들이 항복하는 가운데 1868년 9월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2대 번주 타다히로는 당시 13세로 어렸기 때문에, 분가 출신으로 당시 26세였던 가로 미즈노 모토노부가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1870년, 미즈노 가문은 아사히야마 번 5만 석 영지로 전봉되었고, 야마가타 번은 폐지되어 메이지 정부 직할령이 되었다. 이후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야마가타 번은 새로운 야마가타 현의 핵심이 되었다.
2. 1. 모가미 가문의 지배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센고쿠 시대 동안 데와국의 대부분은 강력한 모가미 씨족에 의해 지배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이즈에 우에스기 씨족을 배치한 후, 우에스기 가문의 중신인 나오에 가네쓰구는 인접한 요네자와 번에 2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점차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모가미 영토로 진출했다. 그러나 다테 씨족의 다테 마사무네의 도움으로 모가미 씨족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친 도요토미 세력이 패배한 후 나오에가 물러날 때까지 야마가타를 방어할 수 있었다.도쿠가와 막부 시대인 1600년에 모가미 씨족은 처음에는 57만 코쿠의 수입을 보장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 5번째로 큰 번이었다. 그러나 모가미 요시아키가 사망한 후 씨족은 여러 상속 분쟁을 겪었고, 결국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크게 축소된 야마가타 번(22만 코쿠)은 1622년에 토리이 씨족에게 배정되었다.
2. 1. 1. 모가미 요시아키의 등장과 세력 확장
모가미 씨는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우슈 탄다이를 임명받은 시바 카네요리를 시조로 하는 명문 가문이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족 간의 상속 다툼과 중신 간의 대립, 이웃 나라인 다테 씨의 내정 간섭 등으로 쇠퇴했다. 이 가운데 모가미 씨 제11대 당주로 등장한 인물이 모가미 요시아키였다. 그는 아버지 요시모리와 대립하여 항쟁을 일으켰고, 아버지를 출가 은퇴시켜 강제로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덴쇼 2년 (1574년) 요시아키의 잦은 강경책에 격노한 요시모리는 사위 다테 테루무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덴쇼 모가미의 난). 하지만 요시아키에게는 가신 중 원로들이 가담했고, 요시모리를 지지한 것은 모가미 종가에 반항적이고 자립심이 강했던 텐도 요리나가 등 무라야마 군의 호족들뿐이었다. 결국 싸움은 요시아키와 다테 씨가 시라토리 씨의 중재로 화의를 맺었고[2], 모가미 씨를 통솔한 요시아키는 이후 무라야마 군의 영토화를 추진했다.그 후에도 요시아키는 호소카와 씨, 사케노베 히데쓰나 등을 공격하여 모가미 지방을 평정했다. 또한 쇼나이 지방에도 진출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다이호지 요시우지를 덴쇼 11년 (1583년)에 멸망시켰다. 가와니시 지방 (모가미강 서안)도 시라토리 씨를 암살하고, 오에 씨를 자결하게 하여 평정했다. 하지만 쇼나이의 호족 중에는 이웃 나라인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지원을 받아 반항하는 자도 있었고, 특히 요시우지의 뒤를 이은 친동생 요시오키는 카게카츠의 중신 혼조 시게나가의 차남 요시카츠를 양자로 삼아 요시아키에게 반항했다. 덴쇼 15년 (1587년) 10월, 요시아키는 요시오키를 공격하여 자결하게 하고, 쇼나이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나 이 요시아키의 행위는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종했던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군사 행동이었고, 또한 히데요시가 내린 간토·오우 양국 소무사령에 위반되는 것이었다. 이후 쇼나이는 우에스기를 등에 업은 혼조 시게나가와 모가미 요시아키의 항쟁의 장이 되었다.
덴쇼 16년 (1588년) 8월, 모가미 씨가 오사키 전투에 구원하러 가 쇼나이가 허술해진 틈을 타 혼조 군은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이때 요시아키의 본대는 구원하지 못했고, 쇼나이 현지의 토젠지 씨나 나카야마 씨 등 모가미 측 호족의 연합군이 쓰루오카와 오야마의 중간에 위치한 주고리가하라에서 격돌했다(주고리가하라 전투). 이 전투에서 모가미 측은 대패하여 쇼나이를 잃었다. 또한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를 받아 요시아키는 빨리 조락하도록 요청받았고, 요시아키는 이를 받아들여 가신을 조락시켜 히데요시를 알현하게 했다. 덴쇼 18년 (1590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을 시작하자, 이에야스에게 오다와라 참진 요청을 받은 요시아키는 6월에 참진하여 영지 13만 석을 안도받았다. 요시아키는 차남 이에치카를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내보냈고, 한편 히데요시에게도 셋째 아들 요시치카와 사랑하는 딸 고마히메를 보내어 가문의 안태를 도모했다. 그러나 분로쿠 4년 (1595년) 히데쓰구 사건이 일어나자, 히데쓰구의 애첩이었던 고마히메는 처형되었고, 요시아키도 주라쿠다이에 감금되었다.
2. 1. 2. 세키가하라 전투와 모가미 가문의 번성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가미 요시미쓰는 도요토미 가문에 불만을 품고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서군 편인 아이즈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싸웠다. 모가미군은 병력에서 불리했지만, 우에스기군을 상대로 각지에서 분전했다. 9월 30일, 세키가하라에서 서군 본대가 괴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가미령으로 침공했던 우에스기군은 전군 철수했고, 공수가 역전되었다. 요시미쓰는 빼앗겼던 쇼나이 지방을 되찾았고, 게이초 6년(1601년) 8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후 처리에 따라 모가미 가문은 57만 석(52만 석 설도 있음)의 다이묘가 되었고, 요시미쓰는 초대 번주가 되었다.모가미 가문은 오키타마군을 제외한 야마가타현 전역과 아키타현의 일부를 소유하며 57만 석이라고 전해지지만, 21만 석[3]、51만 석[4]、57만 석[5] 등 여러 설이 있다. 이는 이에야스의 주서가 존재하지 않아 공인된 소령고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야마가타는 비옥한 땅으로, 57만 석은 표고이고, 내고는 100만 석에 가까웠다는 설도 있다.[6]
요시미쓰는 게이초 16년(1611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쇼나이·유리에서 검지를 실시했다. 또한 개발·개척을 실시하고, 성곽을 확대하고 가도를 정비했으며, 수운을 발전시켜 야마가타를 군사 도시일 뿐만 아니라, 도호쿠 지방의 정치·경제 중심지로 만들었다.
2. 1. 3. 모가미 가문의 몰락과 개역
하지만 모가미 가문 안에는 요시미쓰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복종시킨 호족과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봉사를 생각하는 반주류파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발탁되어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봉사를 생각하는 주류파의 항쟁이 있었다, 이 다툼은 반주류파에 의해 옹립된 요시미쓰의 적남 요시야스가 살해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게이초 19년 (1614년) 1월에 요시미쓰가 사망하고, 차남인 이에치카가 2대 번주가 되자, 6월에 반주류파는 쇼나이의 이치아와 헤이부가 반란을 일으키는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이는 이치아와가 주류파의 시무라 미쓰다다와 시모 히데자네를 살해하여 일어난 것이며, 이 반란을 진압한 이에치카는 반주류파에 의해 옹립된 친동생인 시미즈 요시치카를 살해했다. 이로써 오이에 소동은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지만, 겐와 3년 (1617년) 3월에 이에치카가 야마가타에서 급사함에 따라, 내분이 재연되었다. 이에치카의 후계자로는 아들인 이에노부(후의 요시토시, 요시미츠의 손자)가 세워졌지만, 겨우 13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막부로부터 가혹한 내정 간섭을 받으며 상속이 이루어졌다.겐와 8년 (1622년) 8월, 모가미 가문은 이에치카 변사의 소송 외, 이에치카의 동생 야마노베 요시타다를 옹립하려는 반주류파의 움직임 등, 이른바 모가미 소동이라고 불리는 오이에 소동으로 인해 무가 제법도 위반으로 개역되었다. 요시토시는 오미오모리 번으로 겨우 1만 석을 가지고 전봉되었다.
2. 2.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야마가타 번
모가미씨가 모가미 소동으로 개역된 후, 야마가타 번에는 여러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가문들이 번갈아 가며 번주로 임명되었다. 이는 야마가타 번이 막부 요직에서 실각한 인물들의 좌천지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1622년 모가미 가문이 오모리 번으로 삭감 전봉된 후, 도리이 다다마사가 22만 석으로 야마가타의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7] 도리이 모토타다의 아들인 다다마사는 동쪽 지역을 억누르는 역할을 맡았다.[8] 그는 가신단을 증강하고 군사 조직을 편성했으며, 1623년부터 1624년까지 겐나 검지를 실시하여 성하 마을을 개조하고 정비했다. 그러나 1636년 다다마사의 아들 도리이 다다쓰네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도리이 가문은 개역되었다.[9]
이후 호시나 마사유키가 1636년 시나노 다카토 번 3만 석에서 야마가타 20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이자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이복 동생인 마사유키는 가신단을 증강하고, 봉행 제도를 정비하여 민정을 안정시켰다. 또한 163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번 내 검지를 실시했다. 1643년 마사유키는 23만 석으로 가봉된 뒤 아이즈번으로 옮겨갔다.
1644년에는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나오모토가 오노 번 5만 석에서 10만 석을 가증받아 15만 석으로 야마가타에 입봉했다. 나오모토는 오오조야 제도를 정비하여 향촌 지배를 강화했다. 1648년 나오모토는 히메지번으로 전봉되었다.
같은 해,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의 마쓰다이라 타다히로가 15만 석으로 입봉했다. 1668년, 우쓰노미야 번으로 옮겨갔다.
1668년 우쓰노미야에서 오쿠다이라씨가 9만 석으로 감봉되어 야마가타로 옮겨왔다. 이는 오바라 건과 우츠노미야 코젠지 칼부림 사건으로 인한 처벌이었다.[10] 야마가타 번은 후다이 다이묘의 좌천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685년 오쿠다이라씨는 다시 우쓰노미야로 돌아갔다.
1685년 다이로 홋타 마사토시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고가 번주 홋타 마사나카가 야마가타 번으로 좌천되었다. 1년 후, 후쿠시마번으로 전봉되었다.
이어서 마쓰다이라 나오노리가 입봉하였지만, 1692년 시라카와번으로 옮겨갔다. 시라카와 번에 있던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이 가신들의 분쟁으로 인해 좌천되어 야마가타로 돌아왔다가, 1700년 후쿠야마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후 후쿠시마 번에 있던 홋타 가문이 다시 돌아와 46년간 통치하다가 1746년 사쿠라번으로 옮겨갔다. 이때 야마가타 지역의 가시와쿠라 4만 석 영지는 사쿠라 번의 원격 영지로 남았다. 홋타 가문 다음에는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 들어왔다가 1764년 니시오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처럼 야마가타 번은 번주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영지 규모도 20만 석에서 5만 석까지 변동되었다.
2. 2. 1. 번주 교체와 영지 변동
모가미씨가 모가미 소동으로 개역된 후, 야마가타 번에는 여러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가문들이 번갈아 가며 번주로 임명되었다. 이는 야마가타 번이 막부 요직에서 실각한 인물들의 좌천지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1622년 모가미 가문이 오모리 번으로 삭감 전봉된 후, 도리이 다다마사가 22만 석으로 야마가타의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7] 도리이 모토타다의 아들인 다다마사는 동쪽 지역을 억누르는 역할을 맡았다.[8] 그는 가신단을 증강하고 군사 조직을 편성했으며, 1623년부터 1624년까지 겐나 검지를 실시하여 성하 마을을 개조하고 정비했다. 그러나 1636년 다다마사의 아들 도리이 다다쓰네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도리이 가문은 개역되었다.[9]
이후 호시나 마사유키가 1636년 시나노 다카토 번 3만 석에서 야마가타 20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이자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이복 동생인 마사유키는 가신단을 증강하고, 봉행 제도를 정비하여 민정을 안정시켰다. 또한 163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번 내 검지를 실시했다. 1643년 마사유키는 23만 석으로 가봉된 뒤 아이즈번으로 옮겨갔다.
1644년에는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나오모토가 오노 번 5만 석에서 10만 석을 가증받아 15만 석으로 야마가타에 입봉했다. 나오모토는 오오조야 제도를 정비하여 향촌 지배를 강화했다. 1648년 나오모토는 히메지번으로 전봉되었다.
같은 해,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의 마쓰다이라 타다히로가 15만 석으로 입봉했다. 1668년, 우쓰노미야 번으로 옮겨갔다.
1668년 우쓰노미야에서 오쿠다이라씨가 9만 석으로 감봉되어 야마가타로 옮겨왔다. 이는 오바라 건과 우츠노미야 코젠지 칼부림 사건으로 인한 처벌이었다.[10] 야마가타 번은 후다이 다이묘의 좌천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685년 오쿠다이라씨는 다시 우쓰노미야로 돌아갔다.
1685년 다이로 홋타 마사토시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고가 번주 홋타 마사나카가 야마가타 번으로 좌천되었다. 1년 후, 후쿠시마번으로 전봉되었다.
이어서 마쓰다이라 나오노리가 입봉하였지만, 1692년 시라카와번으로 옮겨갔다. 시라카와 번에 있던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이 가신들의 분쟁으로 인해 좌천되어 야마가타로 돌아왔다가, 1700년 후쿠야마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후 후쿠시마 번에 있던 홋타 가문이 다시 돌아와 46년간 통치하다가 1746년 사쿠라번으로 옮겨갔다. 이때 야마가타 지역의 가시와쿠라 4만 석 영지는 사쿠라 번의 원격 영지로 남았다. 홋타 가문 다음에는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 들어왔다가 1764년 니시오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처럼 야마가타 번은 번주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영지 규모도 20만 석에서 5만 석까지 변동되었다.
2. 2. 2. 번의 역할과 사회상
호리타 마사아키와 교체되어, 마쓰다이라 노리타카가 시모사 사쿠라 7만 석에서 1만 석 감봉된 6만 석으로 입부했다. 노리타카의 아버지는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교호의 개혁 하에서 캇테가카로 활약한 노리무라이다. 노리무라는 요시무네의 후계자로 언어 구사가 불분명한 이에시게보다 총명한 동생인 무네타케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에시게로부터 매우 미움을 받아, 1745년(엔쿄 2년) 요시무네가 은거하고 이에시게가 제9대 쇼군으로 취임하자마자 이에시게의 보복을 받아 같은 해 10월에는 로주 파면과 은거를 명받았으며, 가독을 이은 노리타카도 이 처분으로 야마가타로 이봉되었다.노리타카는 18년 동안 야마가타 번주의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로 야마가타에 있었던 것은 1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야마가타성은 망루와 성문이 상당히 훼손되었다. 또한 재정난으로 호레키 2년 (1752년)에 지자전(성하 마을의 정저택과 토지에 부과되는 연공)의 부활을 꾀했지만, 마치토시요리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했으며, 그 위에 호레키 5년 (1755년)에 대흉작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나, 번정은 혼란했다.
메이와 원년 (1764년) 6월, 노리타카는 미카와 니시오번으로 전봉되었다.
2. 3.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야마가타 번은 본래 도자마 다이묘인 모가미씨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모가미 소동이라는 가문 내 분쟁으로 1622년 영지가 몰수당한 뒤, 막부 요직에서 실각한 인물들의 좌천지와 같은 곳이 되어,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영주 가문들이 빈번히 교체되었다.막부 말기에는 미즈노씨가 야마가타 번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는 덴포 개혁에 실패한 미즈노 다다쿠니가 실각하면서 그 아들 미즈노 다다키요가 좌천되어 들어온 것이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야마가타 번은 요네자와번, 센다이번과 함께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가하였으나, 동맹의 주요 번들이 항복하는 가운데 1868년 9월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2대 번주 타다히로는 당시 13세로 어렸기 때문에, 분가 출신으로 당시 26세였던 가로 미즈노 모토노부가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1870년, 미즈노 가문은 아사히야마 번 5만 석 영지로 전봉되었고, 야마가타 번은 폐지되어 메이지 정부 직할령이 되었다. 이후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야마가타 번은 새로운 야마가타 현의 핵심이 되었다.
3. 역대 번주
모가미 요시아키(1600년 ~ 1614년), 모가미 이에치카(1614년 ~ 1617년), 모가미 요시토시(1617년 ~ 1622년)가 야마가타번을 통치하였다. 모가미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로, 57만 석의 고쿠다카를 보유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데와노카미(出羽守)와 사코노에쇼쇼(左近衛権少将)를 겸임하였고, 종4위상(従四位上)이었다. 모가미 이에치카는 스루가노카미(駿河守)와 지주(侍従)를 겸임하였고 종4위(従四位)였다. 모가미 요시토시는 관위나 관직이 없었다.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1 |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일본어 | 1571–1622 | 데와노카미(出羽守) | 사코노에쇼쇼(左近衛権少将), 종4위상(従四位上) | 57만 코쿠 |
2 | 모가미 이에치카/最上家親일본어 | 1628–1656 | 스루가노카미(駿河守) | 지주(侍従), 종4위(従四位) | 57만 코쿠 |
3 | 모가미 요시토시/最上義俊일본어 | 1656–1704 | -없음- | -없음- | 57만 코쿠 |
도리이 다다마사는 1622년부터 1628년까지 야마가타번을 통치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석고(石高)는 22만 석에서 24만 석으로 조정되었다. 도리이 다다쓰네는 1628년부터 1636년까지 번을 다스렸다. 두 사람 모두 관위는 종4위하였다.
1636년부터 1643년까지 호시나 마사유키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사콘노에추조 관직을 역임하였고, 1643년까지 20만 석을 다스렸다.
나오모토는 1643년부터 1648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야마토노카미, 시지에 임명되었으며, 종4위하의 관위를 받았다.
1648년 마쓰다이라 다다히로가 야마가타번의 번주가 되었다. 다다히로는 시모사노카미(下総守)와 지주(侍従)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종4위하(従四位下)의 품계를 받았다. 1668년까지 15만 석을 다스렸다.
오쿠다이라 마사요시(오쿠다이라 마사요시/奥平昌能일본어)는 1668년부터 1672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오쿠다이라 마사요시의 재임 기간은 9만 석이었다. 관위는 종5위하, 다이젠노스케(大膳亮)였다.
오쿠다이라 마사아키라(오쿠다이라 마사아키라/奥平昌章일본어)는 1672년부터 1685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오쿠다이라 마사아키라의 재임 기간은 9만 석이었다. 관위는 종5위하,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였다.
홋타 마사나카는 1685년부터 1686년까지 야마가타번의 번주였다. 마사나카는 시모사노카미(下総守) 관직을 역임하고 종4위하(従四位下)에 봉해졌다.
마쓰다이라 나오노리()는 1686년부터 1692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그는 야마토노카미(大和守)와 지주(侍従) 관직을 역임했으며, 종4위하(従四位下)였다.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은 1692년 마쓰다이라 다다히로(재봉)가 다시 야마가타 번주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다다히로는 같은 해에 사망하였고, 마쓰다이라 다다마사가 1692년부터 1700년까지 번을 다스렸다. 이들은 신판 다이묘였다.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1 | 마쓰다이라 다다히로 | 1692년 | 종4위하 | 시모사노카미, 지주 | 10만 석 |
2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 1692년 ~ 1700년 | 종5위하 | 시모사노카미 | 10만 석 |
1700년 홋타 마사토라(홋타 마사토라/堀田正虎일본어)가 야마가타번의 번주가 되었다. 마사토라는 이즈노카미(伊豆守)에 임명되었고, 1729년까지 재임하였다. 1729년에는 홋타 마사하루(홋타 마사하루/堀田正春일본어)가 번주 자리를 계승하여 사가미노카미(相模守)에 임명되었다. 마사하루는 1731년까지 재임하였다. 1731년 홋타 마사스케(홋타 마사스케/堀田正亮일본어)가 번주가 되었고, 시모사노카미(下総守) 및 지주(侍従)에 임명되었다. 마사스케는 1746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홋타 가문은 후다이 다이묘로서 10만 석을 다스렸다.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홋타 씨 (후다이) 1700–1729 | |||||
1 | 1700–1729 | 이즈노카미(伊豆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0만 코쿠 | |
2 | 1729–1731 | 사가미노카미(相模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0만 코쿠 | |
3 | 1731–1746 | 시모사노카미(下総守); 지주(侍従) | 종4위하(従四位下) | 10만 코쿠 |
1746년부터 1764년까지 마쓰다이라 노리스케가 야마가타번을 통치하였다. 노리스케는 이즈미노카미 관직에 있었으며, 종5위하의 관위를 받았다.
1767년 아키모토 스케토모가 야마가타번의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68년 아키모토 쓰네토모가 그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고, 1810년까지 재임하였다. 1810년에는 아키모토 히사토모가 번주 자리에 올랐으며, 1839년까지 재임하였다. 1839년 아키모토 유키토모가 번주가 되었고, 1845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이들의 관위는 모두 종4위하 타지마노카미였다.
1845년 아키모토 유키토모가 무쓰국 다무라 번으로 전봉되면서, 미즈노 다다키요가 야마가타 번의 번주가 되었다. 미즈노 다다키요는 이즈미노카미, 지주를 역임하고 종4위하에 봉해졌다. 1866년에는 미즈노 다다히로가 그 뒤를 이었다.
3. 1. 모가미 가문 (도자마 다이묘)
모가미 요시아키(1600년 ~ 1614년), 모가미 이에치카(1614년 ~ 1617년), 모가미 요시토시(1617년 ~ 1622년)가 야마가타번을 통치하였다. 모가미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로, 57만 석의 고쿠다카를 보유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데와노카미(出羽守)와 사코노에쇼쇼(左近衛権少将)를 겸임하였고, 모가미 이에치카는 스루가노카미(駿河守)와 지주(侍従)를 겸임하였다. 모가미 요시토시는 관위나 관직이 없었다.#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모가미 씨 (도자마) 1600–1622 | |||||
1 |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일본어 | 1571–1622 | 데와노카미(出羽守) | 사코노에쇼쇼(左近衛権少将), 종4위상(従四位上) | 57만 코쿠 |
2 | 모가미 이에치카/最上家親일본어 | 1628–1656 | 스루가노카미(駿河守) | 지주(侍従), 종4위(従四位) | 57만 코쿠 |
3 | 모가미 요시토시/最上義俊일본어 | 1656–1704 | -없음- | -없음- | 57만 코쿠 |
3. 2. 도리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
도리이 다다마사는 1622년부터 1628년까지 야마가타번을 통치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석고(石高)는 22만 석에서 24만 석으로 조정되었다. 도리이 다다쓰네는 1628년부터 1636년까지 번을 다스렸다. 두 사람 모두 관위는 종4위하였고, 관직은 사쿄노스케(左京亮)였다.3. 3. 호시나 가문 (신판 다이묘)
1636년부터 1643년까지 호시나 마사유키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사콘노에추조 관직을 역임하였고, 1643년까지 20만 석을 다스렸다.3. 4.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
나오모토는 1643년부터 1648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야마토노카미, 시지에 임명되었으며, 종4위하의 관위를 받았다.3. 5.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
1648년 마쓰다이라 다다히로가 야마가타번의 번주가 되었다. 다다히로는 시모사노카미(下総守)와 지주(侍従)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종4위하(従四位下)의 품계를 받았다. 1668년까지 15만 석을 다스렸다.3. 6. 오쿠다이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
오쿠다이라 마사요시(오쿠다이라 마사요시/奥平昌能일본어)는 1668년부터 1672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오쿠다이라 마사요시의 재임 기간은 9만 석이었다. 관위는 종5위하, 다이젠노스케(大膳亮)였다.오쿠다이라 마사아키라(오쿠다이라 마사아키라/奥平昌章일본어)는 1672년부터 1685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오쿠다이라 마사아키라의 재임 기간은 9만 석이었다. 관위는 종5위하,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였다.
3. 7. 홋타 가문 (후다이 다이묘)
홋타 마사나카는 1685년부터 1686년까지 야마가타번의 번주였다. 마사나카는 시모사노카미(下総守) 관직을 역임하고 종4위하(従四位下)에 봉해졌다.
3. 8.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재봉, 신판 다이묘)
마쓰다이라 나오노리()는 1686년부터 1692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그는 야마토노카미(大和守)와 지주(侍従) 관직을 역임했으며, 종4위하(従四位下)였다.3. 9.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재봉, 신판 다이묘)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은 1692년 마쓰다이라 다다히로(재봉)가 다시 야마가타 번주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다다히로는 같은 해에 사망하였고, 마쓰다이라 다다마사가 1692년부터 1700년까지 번을 다스렸다. 이들은 신판 다이묘였다.#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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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마쓰다이라 다다히로 | 1692년 | 종4위하 | 시모사노카미, 지주 | 10만 석 |
2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 1692년 ~ 1700년 | 종5위하 | 시모사노카미 | 10만 석 |
3. 10. 홋타 가문 (재봉, 후다이 다이묘)
1700년 홋타 마사토라(홋타 마사토라/堀田正虎일본어)가 야마가타번의 번주가 되었다. 마사토라는 이즈노카미(伊豆守)에 임명되었고, 1729년까지 재임하였다. 1729년에는 홋타 마사하루(홋타 마사하루/堀田正春일본어)가 번주 자리를 계승하여 사가미노카미(相模守)에 임명되었다. 마사하루는 1731년까지 재임하였다. 1731년 홋타 마사스케(홋타 마사스케/堀田正亮일본어)가 번주가 되었고, 시모사노카미(下総守) 및 지주(侍従)에 임명되었다. 마사스케는 1746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홋타 가문은 후다이 다이묘로서 10만 석을 다스렸다.#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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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타 씨 (후다이) 1700–1729 | |||||
1 | 1700–1729 | 이즈노카미(伊豆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0만 코쿠 | |
2 | 1729–1731 | 사가미노카미(相模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0만 코쿠 | |
3 | 1731–1746 | 시모사노카미(下総守); 지주(侍従) | 종4위하(従四位下) | 10만 코쿠 |
3. 11.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
1746년부터 1764년까지 마쓰다이라 노리스케가 야마가타번을 통치하였다. 노리스케는 이즈미노카미 관직에 있었으며, 종5위하의 관위를 받았다.3. 12. 아키모토 가문 (후다이 다이묘)
1767년 아키모토 스케토모가 야마가타번의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68년 아키모토 쓰네토모가 그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고, 1810년까지 재임하였다. 1810년에는 아키모토 히사토모가 번주 자리에 올랐으며, 1839년까지 재임하였다. 1839년 아키모토 유키토모가 번주가 되었고, 1845년까지 야마가타 번을 다스렸다. 이들의 관위는 모두 종4위하 타지마노카미였다.3. 13. 미즈노 가문 (후다이 다이묘)
1845년 아키모토 유키토모가 무쓰국 다무라 번으로 전봉되면서, 미즈노 다다키요가 야마가타 번의 번주가 되었다. 미즈노 다다키요는 이즈미노카미, 지주를 역임하고 종4위하에 봉해졌다. 1866년에는 미즈노 다다히로가 그 뒤를 이었다.4. 지번
4. 1. 오모리 번
모가미 요시토시가 가문 내 분쟁으로 개역된 후, 겐나 8년(1622년) 오미국가모군 오모리(시가현히가시오미시)에 진야를 설치하고, 아이치군, 코카군과 미카와국 내에 1만 석을 받아 외양 대명으로써 입번했다. 요시토시는 간에이 8년 11월 22일(1632년 1월 13일)에 만 27세로 사망하였다. 다음 해 간에이 9년(1632년) 가독을 이은 세습자·요시토모가 겨우 1세였기 때문에 지행지를 가모군 주변으로 절반 감봉되어 5천 석의 고대로 요리아이가 되었고, 오모리 번은 폐번되었다. 그 후, 모가미가는 이 땅에서 고대로 요리아이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다.4. 2. 아사히야마 번
야마가타번이 신정부군에 항복한 후, 미즈노 다다히로가 오미국 아사이군 아사히야마(현 시가현 나가하마시)에 5만 석을 받아 세운 번이다.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에 패해 항복한 야마가타 번 지사 미즈노 다다히로가 같은 5만 석으로 이곳으로 옮겨졌다.1870년 8월 13일(메이지 3년 7월 17일)부터 1871년 8월 29일(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약 1년간 존속하였다. 폐번치현 후, 아사히야마 현이 되었다가, 나가하마 현·이누카미 현을 거쳐 시가 현에 편입되었다.
미즈노가는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과 동시에 화족에 포함되었고, 1884년(메이지 17년)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
5. 문화
잦은 번주 교체와 영지 감소로 인해 야마가타번에서는 대규모 성하町 문화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상업 도시로서 발전했으며, 홍화, 옻, 청마 등의 특산물 집산지이자 데와 산잔 참배 기지로서 번영했다.
모가미 요시미쓰는 성하町을 정비하고, 쇼나이 지방을 개간했으며, 모가미강 개삭 공사 등을 통해 인프라를 정비했다. 이러한 노력은 모가미강의 수운을 발달시켰고, 이후 사카타시를 기점으로 한 서쪽 항로, 동쪽 항로 등이 정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야마가타 상인이 홍화와 쌀을 운반하여 가미가타의 다양한 문화를 야마가타번에 전달했으며, 현재의 야마가타시에는 당시 야마가타 상인이 창업한 오래된 상점이 남아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Edo daimyo.net
http://www1.parkcity[...]
[2]
문서
伊達氏四代治家記録
1574-08-26
[3]
문서
禁裏御普請帳
1611
[4]
서적
徳川実紀
1617-05
[5]
문서
1622-08
[6]
문서
最上家中分限帳
[7]
서적
譜代大名の創出と幕藩体制
吉川弘文館
2015
[8]
서적
徳川実紀
[9]
서적
徳川実紀
[10]
서적
藩翰譜
[11]
문서
年寄部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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