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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히로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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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다다히로는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의 시마바라 번주로, 1740년에 태어나 1792년에 사망했다. 그는 형의 은거로 인해 1762년에 가문을 계승했지만, 재정난과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우쓰노미야 번주 시절에는 농민 봉기, 대홍수, 화재 등 잇따른 재해로 고통받았고, 시마바라 번으로 돌아간 후에도 시마바라 대변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는 "비운의 번주"로 불리며, 시마바라 대변 발생 직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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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히로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
기본 정보
씨명마쓰다이라 씨 (후코즈)
이름마쓰다이라 다다노리
개명야소노스케 (어린 시절 이름), 다다노리
시대에도 시대 중기
생년겐분 5년 (1740년) 또는 간포 2년 7월 4일 (1742년 8월 4일)
몰년간세이 4년 4월 27일 (1792년 6월 16일)
계명즈이오인덴 기가쿠 겐린
묘소아이치현누카타군고타정 후코즈의 혼코지
관위종5위하・주덴노, 야마토노카미, 히다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하루, 이에나리
가문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부모마쓰다이라 다다토키, 쓰치야 시게나오 딸
형제다다요리, 다다노리, 다다타카, 고세 다다치카
배우자사나다 노부야스 딸
자녀오쿠보 다다쿠니, 오쿠보 다다시게, 하나부사 모로타카, 아키모토 야스타모, 다다후사, 다다타카, 다다요시, 다다토모, 우메가이 미치토모 실, 도이 도시카쓰 계계실,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정실, 우치다 마사토요 실, 교고쿠 다카카타 정실, 마쓰다이라 다다쓰구 실
경력
시모쓰케우쓰노미야 번 번주, 히젠시마바라 번 번주
가독 상속
선대마쓰다이라 다다마사
후대마쓰다이라 다다요리
직책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당주
임기1762년 ~ 1792년
대수11
우쓰노미야 번 번주
선대마쓰다이라 다다마사
후대도다 다다토
임기1762년 ~ 1774년
대수2
시마바라 번 번주
선대도다 다다토
후대마쓰다이라 다다요리
임기1774년 ~ 1792년
대수1

2. 생애

겐분 5년(1740년), 시마바라번주 마쓰다이라 다다토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레키 12년(1762년), 형 마쓰다이라 다다나리가 은거함에 따라 가독을 이어받았다. 당시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은 간엔 2년(1749년) 영지 교체로 우쓰노미야번으로 이봉된 상태였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 등으로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다다히로는 우쓰노미야 번주 시절 재정난 타개를 위해 증세를 단행했으나, 이는 농민 봉기인 모미스리 소동으로 이어졌고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또한 연이은 대홍수와 대화재 등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안에이 3년(1774년), 다시 영지 교체를 통해 원래의 시마바라번으로 돌아갔으나, 이 과정에서도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어 재정적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칸세이 4년(1792년) 4월 1일, 후겐다케의 일부인 눈썹산(眉山)이 지진과 함께 대규모로 붕괴하는 시마바라 대변이 발생하여 1만 5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마쓰다이라 타다히로의 묘(고타정 혼코지)


평소 병약했던 다다히로는 재해 수습 과정에서 심적 부담이 겹쳐 결국 같은 해 4월 27일에 사망했다. 잇따른 재난과 어려움 속에 생을 마감하여 "비운의 번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2. 1. 우쓰노미야 번주 시절

호레키 12년(1762년), 형 마쓰다이라 다다나리가 은거하자 그 뒤를 이어 우쓰노미야번의 번주가 되었다. 당시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은 시마바라번에서 우쓰노미야번으로 영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약 6만 8500냥)을 지출하여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는 다다히로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다다토키가 급사하고 형 다다나리가 간엔 2년(1749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가독을 이으면서, 시모쓰케국 우쓰노미야번의 도다 다다미쓰와 영지를 교체하게 된 결과였다.

다다히로는 가독을 상속받은 후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부유한 상인에게 어용금을 빌리고 가신들의 봉급을 삭감했으며, 막부로부터 자금을 차용하기도 했으나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결국 메이와 원년(1764년), 다다히로는 백성들에게 증세를 명령했고, 이는 같은 해 9월 12일 모미스리 소동이라 불리는 대규모 농민 봉기로 이어졌다. 다다히로는 번의 병력 300명을 동원하여 이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쓰노미야번은 연이은 자연재해에 시달렸다. 모미스리 소동이 일어난 해(1764년)에는 대홍수가 발생하여 240채의 가옥이 유실되고 약 3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메이와 3년(1766년) 6월 18일에도 또다시 대홍수가 일어나 230채의 가옥이 물에 잠기고 118명이 사망했으며, 농경지는 심각하게 황폐화되었다. 다다히로는 이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막부로부터 6000냥을 빌려야 했다. 안에이 2년(1773년) 3월에는 성 아래 서쪽의 대장간에서 시작된 화재가 번져 41개 정(町)이 피해를 입고 사찰 등을 포함하여 총 1813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4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안에이 3년(1774년), 다다히로는 다시 영지 교체를 통해 원래의 시마바라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이사 비용으로 약 4만 냥이 소요되어 재정적 부담은 계속되었다.

2. 2. 시마바라 번주 시절 (2번째)

안에이 3년(1774년), 이전과 같은 교체 방식으로 시마바라번으로 다시 이봉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사 비용으로 약 4만 냥이 소요되어 번의 재정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

칸세이 4년(1792년) 4월 1일, 후겐다케의 일부인 눈썹산(眉山)이 지진과 함께 대규모로 붕괴하는 재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시마바라성 아래 마을 대부분이 매몰되었고, 사망자는 1만 5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참사, 이른바 시마바라 대변이 일어났다.

평소 병약했던 타다히로는 직접 피해 지역을 순시하며 상황을 살폈으나, 재해 수습에 대한 심적 부담이 겹쳐 결국 같은 해 4월 27일에 사망했다. 잇따른 재난과 어려움 속에 생을 마감하여 "비운의 번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3. 평가

마쓰다이라 다다히로는 번주로서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번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코즈 마쓰다이라가는 시마바라번에서 우쓰노미야번으로 이봉되는 과정에서 약 6만 8500냥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여, 다다히로가 가독을 상속했을 때는 이미 심각한 재정난에 처해 있었다. 그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인에게 자금을 빌리고 가신들의 봉급을 삭감했으며, 막부로부터 돈을 빌리기도 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결국 1764년, 다다히로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백성들에게 증세를 명령했고, 이는 9월 12일 모미스리 소동이라 불리는 농민 봉기를 유발했다. 다다히로는 이 봉기를 번의 군사 300명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같은 해 우츠노미야 지역에는 대홍수가 발생하여 240호의 가옥이 유실되고 약 300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1766년 6월 18일에도 또다시 홍수가 발생하여 230호의 가옥이 유실되고 118명이 사망했으며, 농경지는 심하게 황폐해졌다. 1773년 3월에는 성 아래 서쪽 대장간에서 발생한 화재가 번져 41개 정(町)이 피해를 입고 1,295호의 가옥과 사찰 등 총 1,813호가 소실되었으며 4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1774년, 다다히로는 다시 시마바라번으로 이봉되었지만, 이때도 이사 비용으로 약 4만 냥이 소요되어 재정적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1792년 4월 1일에는 후겐다케의 눈썹산(眉山)이 큰 지진과 함께 대규모로 붕괴하여 시마바라성 아래 마을 대부분이 매몰되고 약 1만 5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시마바라 대변이 발생했다. 이는 에도 시대 최악의 화산 재해 중 하나로 기록된다. 평소 병약했던 다다히로는 피해 지역을 순시하는 등 수습에 힘썼으나, 재해로 인한 심적 고통이 더해져 결국 같은 해 4월 27일에 사망했다.

잦은 이봉으로 인한 막대한 비용 지출, 연이은 자연재해, 농민 봉기와 그에 대한 강경 진압 등 다다히로의 통치 기간은 번과 백성 모두에게 큰 고통의 시기였다. 특히 시마바라 대변이라는 비극적인 재해 속에서 생을 마감하여 '비운의 번주'로 불리기도 한다.

4. 가계

마쓰다이라 다다히로는 마쓰다이라 타다토키와 츠치야 노부나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실은 사나다 노부야스의 딸인 규쥬인이며, 슬하에 오쿠보 타다쿠니, 오쿠보 타다나리, 마쓰다이라 타다카제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자세한 가족 관계는 아래 문단을 참고하라.

4. 1. 부모


  • 아버지: 마쓰다이라 타다토키
  • 어머니: 츠치야 노부나오의 딸

4. 2. 정실


  • 규쥬인 - 사나다 노부야스의 딸

4. 3. 자녀


  • 오쿠보 타다쿠니(장남) - 오쿠보 타다요시의 양자
  • 오쿠보 타다나리(삼남) - 오쿠보 타다요시의 양자
  • 하나후사 모치타카
  • 아키모토 야스토모
  • 마쓰다이라 타다카제(육남) - 생모는 정실 규쥬인(久重院|규주인일본어)
  • 마쓰다이라 타다타카
  • 마쓰다이라 타다요시
  • 마쓰다이라 타다요
  • 바이케이 츠우도의 처, 이후 우에무라 이에나가의 정실
  • 도이 토시카타의 계실
  • 마쓰다이라 노부코의 정실
  • 우치다 마사히로의 처
  • 쿄고쿠 타카카타의 정실
  • 마쓰다이라 타다노리의 처, 이후 마쓰다이라 타다야스의 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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