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바라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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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바라번은 센고쿠 시대부터 아리마 가문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이후 마쓰쿠라 가문, 고리키 가문,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도다 가문을 거쳐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이 다시 통치하며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1637년 마쓰쿠라 가문의 가혹한 통치와 기독교 탄압에 반발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시마바라 현이 되었다. 시마바라 번은 다양한 가신과 문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카즈는 메이지 유신에 협력하여 메이지 대학 설립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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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바라번 - 시마바라성
시마바라성은 마쓰쿠라 시게마사가 1618년부터 1624년에 걸쳐 축조한 성곽으로, 시마바라의 난의 배경이 되었으며 현재는 복원되어 역사 자료관 및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 고리키씨 - 하마마쓰번
하마마쓰번은 에도 시대 도토미국 하마마쓰에 있던 번으로, 여러 후다이 다이묘 가문이 번주를 역임하며 '출세성'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점이기도 했으며, 폐번치현 이후 시즈오카현에 편입되었다. - 고리키씨 - 고리키 다다후사
고리키 다다후사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겨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 참전 후 하마마쓰 번주를 거쳐 시마바라 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시마바라의 난 이후 영지 부흥에 노력하고 나가사키 경비를 맡아 막부의 규슈 지역 통제에 기여했지만, 아들의 실정으로 가문 몰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 마쓰쿠라씨 - 마쓰쿠라 가쓰이에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아버지와 함께 시마바라성을 건설하고 가혹한 수탈과 기리시탄 탄압을 자행했으며, 시마바라의 난 발발 후 개역되어 참수형에 처해진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 마쓰쿠라씨 - 마쓰쿠라 시게마사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을 세워 번주가 되었으나, 과도한 세금 징수와 기독교 탄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시마바라의 난 발발의 원인을 제공했다.
| 시마바라번 | |
|---|---|
| 개요 | |
| 공식 명칭 (1600–1618) | 히노에 번 |
| 로마자 표기 (1600–1618) | Hinoe-han |
| 공식 명칭 (1618–1871) | 시마바라 번 |
| 로마자 표기 (1618–1871) | Shimabara-han |
| 존속 기간 | 1600년–1614년, 1614년–1871년 |
| 시대 | 에도 시대 |
| 위치 | 나가사키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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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 | |
| 정부 형태 | 다이묘 |
| 다이묘 가문 |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
| 이전 수도 (1600–1618) | 히노에성 |
| 수도 (1618–1871) | 시마바라성 |
| 역사 | |
| 설립 | 1600년 |
| 폐번치현 | 1871년 |
| 주요 사건 | 시마바라의 난 |
| 통계 | |
2. 번의 역사
센고쿠 시대에 시마바라는 아리마 씨(有馬氏)가 다스렸다.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영지를 유지했으나, 1612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 이후 가이 국에 유폐되어 세푸쿠를 명받았다. 아들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는 아버지와 달리 도쿠가와 쇼군과 가까워 영지를 상속받았으나, 1614년 휴가 국 노베오카 번으로 이봉되었다. 이후 시마바라는 잠시 쇼군 직할령이 되었다.[7]
1616년,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가 야마토고죠 번에서 4만 석으로 시마바라에 부임했다. 그는 백성을 압제하고 기리시탄을 가혹하게 대했으며, 시마바라 성을 짓고 행정 중심지를 히노에 성에서 옮겼다. 시게마사의 뒤를 이은 마쓰쿠라 가쓰이에(松倉勝家)는 더욱 가혹한 정치를 펼쳤다. 세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을 겉옷을 입혀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미노 오도리"라는 처형을 하거나, 아이들까지 잡아 처형하는 등 시마바라는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 또한 4만 석의 수입을 10만 석으로 부풀려 쇼군에게 알렸다.[7]
1637년,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를 지도자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다. 마쓰쿠라 군은 진압에 실패했고, 에도 막부는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重昌)가 이끄는 평정군을 보냈으나 실패했다. 로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松平信綱)가 이끄는 12만 대군이 3개월 만에 진압했고, 반란군은 학살당했다.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반란을 초래한 책임을 물어 참수되었다.[7]
하마마쓰 번에서 고리키 타다후사(小栗忠房)가 이봉되어 지역 복구에 힘썼다. 농업 정책과 이주 장려로 지역을 재정착시켰으나, 아들 고리키 타카나가(小栗高直)는 실정을 거듭하여 1668년 영지가 몰수되었다. 후쿠치야마 번에서 마쓰다이라 다다후사(松平忠房)가 6만 5천 석으로 부임하여 5대 동안 시마바라를 다스렸다. 1747년 우쓰노미야 번 도다 다다미쓰(戸田忠盈)와 교체되어 7만 7천 석으로 늘었으나, 1774년 다시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이 6만 5천 석으로 돌아와 8대 동안 지배했다.[7]
마지막 다이묘 마쓰다이라 다다카즈(松平忠和)는 1863년 군사 개혁을 했지만, 사가 번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이복동생이라 1864년 제1차 조슈 정벌과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쇼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존왕양이 운동을 지지하는 하급 무사들 사이에 불만이 있었고, 일부는 번을 이탈하여 덴추구미 사건과 덴구토 반란에 가담했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정부에 귀순하여 북부의 친 도쿠가와 잔당과 싸웠다. 1869년 시마바라 번 지사로 임명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도쿄로 이주,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7]
시마바라는 온난한 기후지만, 척박한 화산 지대여서 실제 수확량은 공식 고쿠다카보다 적었다.[7]
2. 1. 아리마 가문 통치 시대 (1600년 ~ 1614년)
센고쿠 시대 시마바라 지역은 기독교 다이묘인 아리마 하루노부가 통치했다. 하루노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영지를 유지했으나, 1612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으로 가이 국에 유폐된 후 할복했다.[7]그의 아들 아리마 나오즈미는 아버지와 달리 막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영지를 계승했으나, 1614년 휴가국 노베오카번으로 이봉되었다.[7]
아리마 가문은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조선에 출병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2. 2. 막부 직할령 (1614년 ~ 1616년)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가 휴가국 노베오카번으로 이봉된 후, 시마바라 지역은 잠시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7]2. 3. 마쓰쿠라 가문 통치 시대 (1616년 ~ 1638년)
야마토 고조 번(大和郡山藩)에서 4만 석으로 입봉한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는 시마바라 번주가 되어 백성들을 압제하고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는 시마바라 성(島原城)을 축성하고 행정 중심지를 히노에 성(日野江城)에서 옮겼다.[7]마쓰쿠라 가쓰이에(松倉勝家)는 아버지보다 더 가혹한 정치를 펼쳤다. 세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짚으로 만든 옷을 입혀 산 채로 불태우는 "미노오도리"라는 잔혹한 처형을 하거나, 세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의 자녀들까지 잡아 처형하는 등 시마바라 지역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또한 막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4만 석의 석고(石高)를 10만 석이라고 신고했다.[7]
1637년, 마쓰쿠라 가쓰이에의 압제에 분노한 백성들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를 총대장으로 하여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을 일으켰다.[7]
2. 4. 시마바라의 난 (1637년 ~ 1638년)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의 뒤를 이은 마쓰쿠라 가쓰이에(松倉勝家)는 아버지보다 더 가혹한 정치를 펼쳤다. 세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을 겉옷을 입혀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미노 오도리(美濃踊り)"라는 처형을 하거나, 세금을 내지 못한 자들의 아이들까지 잡아 처형하는 등 시마바라는 지옥과 같았다고 묘사된다. 또한, 보고된 4만 석의 수입은 쇼군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10만 석으로 부풀려졌다.[7]이러한 가혹한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결국 1637년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으로 이어졌다. 반란군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를 중심으로 하라 성(原城)을 점령했다. 마쓰쿠라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기에 부족했고, 일부는 반란군 측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쇼군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重昌)가 이끄는 진압군을 파견했으나, 이타쿠라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를 대신하여 총사령관이 된 것은 로쥬(老中) 마쓰다이라 노부쓰나(松平信綱)였다. 노부쓰나는 여러 다이묘로부터 약 12만 명의 군대를 모아 하라 성을 포위했다. 이 군대에는 노련한 무장인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란군은 해상에서 네덜란드 함대의 포격 지원을 받은 잘 무장된 쇼군의 군대에 필적할 수 없었고, 3개월 후 반란은 진압되었다. 아마쿠사 시로를 포함한 반란군은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반란 진압 후,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잘못된 통치로 반란을 초래한 책임에 대해 심한 비난을 받았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영예로운 처벌인 세푸쿠(切腹)가 아닌 일반 범죄자처럼 참수형에 처해진 것은 쇼군이 그의 죄의 심각성을 얼마나 중대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7]
2. 5. 고리키 가문 통치 시대 (1638년 ~ 1668년)
다다후사는 시마바라의 난으로 황폐해진 시마바라 지역 부흥에 힘썼다. 그는 뛰어난 농업 정책과 이민 장려 정책을 통해 시마바라 지역을 재정착시켰다. 현재 시마바라에 많은 방언이 있는 것은 다다후사가 각국의 무사의 차남, 삼남과 농민 등의 이민을 장려하여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시마바라에 정착했기 때문이다.[7] 그러나 다다후사의 뒤를 이은 다카나가는 번 체제 확립에 매달린 나머지 폭정을 많이 저질러 쇼군의 견책을 받고 1668년에 개역되었다.[7]2. 6.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통치 시대 (1668년 ~ 1749년, 1774년 ~ 1871년)
마쓰다이라 다다후사(松平忠房)가 후쿠치야마 번(福知山藩)에서 6만 5천 석으로 시마바라 번에 입봉하였다.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후 5대에 걸쳐 시마바라 번을 통치했다.[7] 그러나 1747년 우쓰노미야 번(宇都宮藩)의 도다 다다미쓰(戸田忠盈)와 교체되어, 시마바라 번은 7만 7천 석으로 증가했다. 도다 가문은 2대에 걸쳐 시마바라 번을 다스렸지만, 1774년 다시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과 교체되어 6만 5천 석으로 시마바라 번에 복귀했다. 이후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은 8대에 걸쳐 시마바라 번을 다스리다가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7]마지막 번주인 마쓰다이라 다다카즈(松平忠和)는 1863년 해안 방위 강화의 필요성에 따라 군사 개혁을 실시했지만, 인접한 사가 번(佐賀藩)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이복동생이었기 때문에 1864년 제1차 조슈 정벌과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쇼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존왕양이 운동을 지지하는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있었고, 일부는 번을 이탈하여 덴추구미 사건(天誅組事件)과 덴구토 반란에 참여했다. 1868년 1월 보신 전쟁(戊辰戦争)이 발발하자, 그는 메이지 정부(明治政府)에 귀순하여 일본 북부의 친 도쿠가와 잔당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1869년 6월, 그는 시마바라 번의 지사(知県)로 임명되었고,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도쿄로 이주했다. 같은 해 11월, 그는 정부로부터 유럽과 미국 여행 허가를 받았다. 1873년 10월 영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왔고, 나중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
2. 7. 도다 가문 통치 시대 (1749년 ~ 1774년)
1747년 우쓰노미야 번(宇都宮藩)에서 도다 다다미쓰일본어)가 7만 7천 석으로2. 8. 메이지 유신 이후
마쓰다이라 다다카즈(松平忠和)는 1863년 해안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 개혁을 실시했지만, 인접한 사가 번(佐賀藩)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이복동생이었기 때문에 1864년 제1차 조슈 정벌과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쇼군을 지지했다.[7] 그러나 쇼군 지지 행위는 존왕양이 운동을 지지하는 하급 무사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했고, 일부는 번을 이탈하여 덴추구미 사건과 텐구토 반란에 참여했다.[7]1868년 1월 시작된 보신 전쟁 중, 마쓰다이라 다다카즈는 메이지 정부에 귀순하여 일본 북부의 친 도쿠가와 잔당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1869년 6월 그는 시마바라 번의 지사(知県)로 임명되었고,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과 함께 도쿄로 이주했다. 같은 해 11월, 그는 정부로부터 유럽과 미국 여행 허가를 받았다. 1873년 10월 영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나중에 자작(子爵)이라는 가족(華族) 작위를 받았다.[7]
폐번치현으로 시마바라 번은 폐지되어 시마바라 현이 되었다가, 이후 나가사키 현에 통합되었다.[7]
3. 역대 번주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
| 1 | 아리마 하루노부 (有馬晴信일본어) | 1600년 ~ 1612년 |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으로 유폐 후 할복 |
| 2 | 아리마 나오즈미 (有馬直純일본어) | 1612년 ~ 1614년 | 휴가국 노베오카번으로 이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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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4년 ~ 161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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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마쓰쿠라 시게마사 (松倉重政일본어) | 1616년 ~ 1630년 | |
| 2 | 마쓰쿠라 가쓰이에 (松倉勝家일본어) | 1630년 ~ 1638년 | 시마바라의 난 이후 참수 |
| -- 고리키 가문, 1638년 ~ 1668년 (후다이 다이묘) | |||
| 1 | 고리키 다다후사 (高力忠房일본어) | 1638년 ~ 1655년 | |
| 2 | 고리키 다카나가 (高力高長일본어) | 1655년 ~ 1668년 | 영지 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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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마쓰다이라 다다후사 (松平忠房일본어) | 1669년 ~ 1698년 | |
| 2 | 마쓰다이라 다다오 (松平忠雄일본어) | 1698년 ~ 1735년 | |
| 3 | 마쓰다이라 다다미 (松平忠俔일본어) | 1735년 ~ 1738년 | |
| 4 | 마쓰다이라 다다토키 (松平忠刻일본어) | 1738년 ~ 1749년 | |
| 5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松平忠祗일본어) | 1749년 | |
| 1 | 도다 다다미쓰 (戸田忠盈일본어) | 1749년 ~ 1754년 | |
| 2 | 도다 다다토 (戸田忠寛일본어) | 1754년 ~ 1774년 | |
|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재봉), 1774년 ~ 1871년 (후다이 다이묘) | |||
| 1 | 마쓰다이라 다다히로 (松平忠恕일본어) | 1774년 ~ 1792년 | |
| 2 | 마쓰다이라 다다요리 (松平忠馮일본어) | 1792년 ~ 1819년 | |
| 3 | 마쓰다이라 다다코레 (松平忠侯일본어) | 1819년 ~ 1840년 | |
| 4 | 마쓰다이라 다다나리 (松平忠誠일본어) | 1840년 ~ 1847년 | |
| 5 | 마쓰다이라 다다키요 (松平忠精일본어) | 1847년 ~ 1859년 | |
| 6 | 마쓰다이라 다다아쓰 (松平忠淳일본어) | 1859년 ~ 1860년 | |
| 7 | 마쓰다이라 다다치카 (松平忠愛일본어) | 1860년 ~ 1862년 | |
| 8 | 마쓰다이라 다다카즈 (松平忠和일본어) | 1862년 ~ 1871년 | 폐번치현으로 시마바라 번은 폐지됨. |
3. 1. 아리마 가문
아리마 하루노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영지를 유지했으나, 1612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으로 가이 국에 유폐되어 할복형을 받았다.[7] 그의 아들 아리마 나오즈미는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도쿠가와 쇼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영지를 상속받았다.[7] 1614년, 나오즈미는 휴가 국 노베오카 번으로 이봉되었다.[7]|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
| 아리마 가문, 1600년 – 1614년 (외양) | |||
| 1 | 아리마 하루노부 (有馬晴信) | 1600년 – 1612년 |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으로 유폐 후 할복 |
| 2 | 아리마 나오즈미 (有馬直純) | 1612년 – 1614년 | 휴가 국 노베오카 번으로 이봉 |
3. 2. 마쓰쿠라 가문
1616년,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가 야마토고조 번(大和郡山藩)에서 4만 석(石)의 영지를 받아 시마바라 번(島原藩)에 부임하였다. 시게마사의 아버지 마쓰쿠라 시게노부(松倉重信)는 존경받는 장군이었지만, 시게마사는 백성을 압제하고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시마바라 성(島原城)이 건설되었고, 행정 중심지는 히노에 성(日野江城)에서 시마바라 성으로 옮겨졌다.[7]시게마사의 뒤를 이은 마쓰쿠라 가쓰이에(松倉勝家)는 아버지보다 더 가혹한 정치를 시행했다. 연간 세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을 짚으로 만든 옷을 입혀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미노오도리(美濃踊り)"라는 처형 방법을 시행했고, 세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의 자녀들까지 잡아다 처형하는 등 시마바라는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 또한, 도쿠가와 쇼군(徳川将軍)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실제 4만 석의 수입을 10만 석으로 부풀려 보고했다.[7]
가쓰이에의 압제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결국 1637년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으로 폭발했다. 반란군의 지도자인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는 하라 성(原城)을 점령했다. 마쓰쿠라 군대의 일부는 반란군 편으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마쓰쿠라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쇼군은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重昌)가 이끄는 평정군을 파견했지만, 이 군대는 효과가 없었고 이타쿠라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를 대신하여 총사령관이 된 것은 로주(老中) 마쓰다이라 노부쓰나(松平信綱)였다. 노부쓰나는 여러 다이묘(大名)로부터 약 12만 명의 군대를 모아 하라 성을 포위했다. 이 군대에는 노련한 무장인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3개월 후 반란은 진압되었고, 아마쿠사 시로를 포함한 반란군은 모두 학살당했다.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반란을 초래한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해졌는데, 세푸쿠(切腹)가 아닌 일반 범죄자처럼 참수된 것은 쇼군이 그의 죄를 얼마나 중대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7]
3. 3. 고리키 가문
1638년 마쓰쿠라 가쓰이에가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참수당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던 오랜 가신인 고리키 다다후사가 하마마쓰 번에서 4만 석으로 시마바라 번에 부임하였다.[7] 다다후사는 반란으로 황폐해진 시마바라 지역의 부흥에 힘썼으며, 뛰어난 농업 정책과 이민 장려 정책 등을 실시하여 시마바라를 재건하였다.[7] 현재 시마바라에 여러 지역의 방언이 남아있는 것은 다다후사가 각 지역 무사의 차남, 삼남과 농민 등의 이민을 장려하여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시마바라에 정착했기 때문이다.[7]그러나 다다후사의 뒤를 이은 고리키 다카나가는 번의 체제 확립에만 매달려 여러 실정을 저질렀고, 1668년 에도 막부로부터 영지를 몰수당하는 처벌을 받았다.[7]
3. 4.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1669년, 마쓰다이라 다다후사가 탄바 국(丹波国) 후쿠치야마 번(福知山藩)에서 6만 5천 석으로 시마바라 번에 부임했다.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후 5대에 걸쳐 시마바라 번을 지배했다.|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
| 1 | 마쓰다이라 다다후사 | 1669년 ~ 1698년 |
| 2 | 마쓰다이라 다다오 | 1698년 ~ 1735년 |
| 3 | 마쓰다이라 다다미 | 1735년 ~ 1738년 |
| 4 | 마쓰다이라 다다토키 | 1738년 ~ 1749년 |
| 5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 1749년 |
1747년,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은 우쓰노미야 번(宇都宮藩)의 도다 다다미쓰(戸田忠盈)와 자리를 맞바꾸면서 시마바라 번을 떠났고, 번의 고쿠다카는 7만 7천 석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774년에 다시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이 시마바라 번으로 돌아왔다.
3. 5. 도다 가문
시마바라 번은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이 5대에 걸쳐 통치했으나, 1749년 우쓰노미야 번(宇都宮藩)의 도다 다다미쓰와 자리를 바꿨고, 번의 고쿠다카(石高)는 7만 7천 석으로 증가했다. 도다 가문은 2대에 걸쳐 시마바라 번을 통치했고, 1774년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과 다시 자리를 바꿨다.
3. 6.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재봉)
안에이 3년(1774년) 우쓰노미야 번에서 마쓰다이라 다다히로가 6만 5천 석으로 다시 입봉되었고, 이후 8대에 걸쳐 시마바라 번을 다스렸다.|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 1 | 마쓰다이라 다다히로 | 1774년 ~ 1792년 | |
| 2 | 마쓰다이라 다다요리 | 1792년 ~ 1819년 | |
| 3 | 마쓰다이라 다다코레 | 1819년 ~ 1840년 | |
| 4 | 마쓰다이라 다다나리 | 1840년 ~ 1847년 | |
| 5 | 마쓰다이라 다다키요 | 1847년 ~ 1859년 | |
| 6 | 마쓰다이라 다다아쓰 | 1859년 ~ 1860년 | |
| 7 | 마쓰다이라 다다치카 | 1860년 ~ 1862년 | |
| 8 | 마쓰다이라 다다카즈 | 1862년 ~ 1871년 | 폐번치현으로 시마바라 번은 폐지됨. |
마지막 번주인 마쓰다이라 다다카즈는 1863년 해안 방어 강화의 필요성에 따라 군사 개혁을 실시했지만, 인접한 사가 번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이복동생이었기 때문에 1864년 제1차 조슈 정벌과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쇼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쇼군 지지 행위는 존왕양이 운동을 지지하는 하급 무사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했고, 일부는 번을 이탈하여 덴추구미 사건과 덴구토의 난에 참여했다.
1868년 1월 시작된 보신 전쟁 중에 그는 메이지 정부에 귀순하여 일본 북부의 친 도쿠가와 잔당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1869년 6월 그는 시마바라 번의 지사(知県)로 임명되었고,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과 함께 도쿄로 이주했다. 같은 해 11월 그는 정부로부터 유럽과 미국 여행 허가를 받았다. 1873년 10월 그는 영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왔고, 나중에 자작(子爵)이라는 화족 작위를 받았다.
4. 주요 가신
| 가문 | 석고 | 비고 |
|---|---|---|
| 반도쿠라 하치에몬 가문 | 1700석 | 대로(大老), 이타쿠라 요시시게의 자손, 가신 필두, 당주 세습명 하치에몬 |
| 마쓰다이라 칸케이유 가문 | 1200석 | 대로(大老), 마쓰다이라 야스사다(마쓰다이라 요스케의 동생)의 자손, 당주 세습명 칸케이유, 다수의 분가, 당주만 마쓰다이라 성 허용, 그 외 오쿠히라 성 |
- 역대 반도쿠라 하치에몬 가문 당주: 이타쿠라 요시시게 - 타다시게 - 토시나오 - 후사카쓰 - 가쓰사다 - 요시카타 - 가쓰소 - 가쓰주 = 가쓰타케(가쓰소의 아들) = 가쓰히데(가쓰주의 아들) = 가쓰나오(가쓰히데의 장남 가쓰아키의 아들) - 가쓰무네
- 역대 마쓰다이라 칸케이유 가문 당주: 마쓰다이라 야스사다 - 사다히로 - 히로쓰구 - 후사쓰구 - 쓰구아키 - 히로쓰나 = 사다카타(쓰구아키의 아들, 후에 본가·마쓰다이라 타다오의 양자) - 히로노리(후에 기본·마쓰다이라 타다쓰네의 양자) = 요시아키(쓰구아키의 아들) = 사다토모(분가·오쿠히라 사다카타의 아들, 요시아키와 동일인물인가) - 사다무라 = 사다하루(본가·마쓰다이라 타다후사의 아들) = 히로나리(분가·오쿠히라 히로타카의 아들) - 사다카쓰
5. 에도 시대 말기의 영지
6. 번저
시마바라 번의 에도 저택은 유라쿠초·스키야바시 교차로 부근의 조야시키(上屋敷)와 미타의 쓰나사카에 있던 나카야시키(中屋敷)로 나뉘어 있었다.[11][12]
7. 히젠 시마바라 마쓰다이라 문고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은 대대로 학문을 좋아하고 깊이 있는 학문을 하는 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쓰다이라 다다후사(松平忠房)는 이러한 가풍에 따라 문학, 역사, 병법, 그림 등 다양한 분야의 귀중한 책과 희귀본을 수집했다. 역대 번주들도 학문을 좋아하고 고전을 사랑하여 이러한 풍토를 계승했다.[13][14]
시마바라 마쓰다이라 문고는 문학, 역사, 종교, 정치, 경제, 교육, 풍속, 자연과학, 의학, 산업,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 질적, 양적으로 우수한 자료를 갖추고 있어 매우 귀중하며, 조사 연구 대상으로 폭넓게 활용되어 전국 각지에서 방문객들이 찾아오고 있다.[13][14]
소장 자료 중에는 일본 유일의 전본인 『이세 이야기 문서 초(伊勢物語聞書抄)』와 가장 오래된 사본 중 하나인 『밤 잠에서 깨어남(夜寝覚)』, 가이 다케다 씨의 분국법 사본인 『가이 식목(甲州式目)』(가장 오래된 사본)이 있다. 그 외에도 『영화 이야기(栄花物語)』처럼 목판 활자로 인쇄된 자료, 다채롭게 그려진 『조수 도감(鳥獣図鑑)』 등 시마바라 번의 본초학 성과를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13][14]
8. 관련 인물
(주어진 소스에 관련 인물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기무라 나리쓰구'에 대한 내부 링크만 유지합니다.)
기무라 나리쓰구
참조
[1]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2]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3]
서적
Death and Social Order in Tokugawa Japan: Buddhism, Anti-Christianity, and the Danka System
https://books.google[...]
BRILL
2020-03-23
[4]
서적
大名の日本地図
文藝春秋
2003
[5]
서적
肥前有馬藩「新人民御来社
New People's Onraisha
1997
[6]
서적
Hagakure: The Secret Wisdom of the Samurai
https://books.google[...]
Tuttle Publishing
2014-05-27
[7]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8]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987
[9]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987
[10]
웹사이트
Genealogy (jp)
https://reichsarchiv[...]
[11]
웹사이트
キャンパスは武家屋敷!? ~明治初年の東京都市計画と明治法律学校開校地~
https://www.meiji.ac[...]
明治大学
[12]
웹사이트
慶應義塾機関誌|三田評論
https://www.keio-up.[...]
慶應義塾大学出版会
[13]
웹사이트
肥前島原松平文庫
https://www.city.shi[...]
島原市
[14]
웹사이트
肥前島原松平文庫
https://www.pref.nag[...]
長崎県の文化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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