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마틴 (영국의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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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이클 마틴은 영국의 정치인으로, 1979년부터 2009년까지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000년부터 2009년까지 하원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노동당 소속으로, 1973년 글래스고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스코틀랜드 대위원회 위원장, 제1 부의장을 거쳤다. 하원 의장 재임 기간 동안 경비 문제와 데이미언 그린 체포 사건 등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2009년 사임 후 종신 귀족 작위를 받았다. 그는 2018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폴 마틴은 스코틀랜드 의회 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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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마틴 (영국의 정치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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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 각하 |
이름 | 마이클 존 마틴, 스프링번의 마틴 남작 |
원어 이름 | Michael John Martin, Baron Martin of Springburn |
![]() | |
출생 | 1945년 7월 3일,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
사망 | 2018년 4월 29일,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
정당 | 크로스벤치 |
기타 정당 | 의장 (2000–2009) 노동당 (1966–2000) |
배우자 | 1966년 메리 맥레이와 결혼 |
자녀 | 2명 (폴 포함) |
경력 | |
직위 | 영국 하원 의장 |
임기 시작 | 2000년 10월 23일 |
임기 종료 | 2009년 6월 21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
이전 | 베티 부스royd |
이후 | 존 버코우 |
직위 2 | 하원 부의장, 방식 및 수단 제1부의장 |
임기 시작 2 | 1997년 5월 14일 |
임기 종료 2 | 2000년 10월 23일 |
의장 2 | 베티 부스royd |
이전 2 | 제프리 로프thouse |
이후 2 | 실비아 힐 |
직위 3 | 귀족원 의원 세속 귀족 |
임기 시작 3 | 2009년 8월 25일 |
임기 종료 3 | 2018년 4월 29일 (사망) |
직위 4 | 국회의원 글래스고 북동부 선거구 글래스고 스프링번 선거구 (1979–2005) |
임기 시작 4 | 1979년 5월 3일 |
임기 종료 4 | 2009년 6월 22일 |
이전 4 | 리차드 뷰캐넌 |
이후 4 | 윌리 베인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마이클 마틴은 1945년 7월 3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윌리엄 스트리트에서 상선 선원인 아버지와 학교 청소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5][6] 그는 다섯 자녀 중 한 명으로, 글래스고 앤더스턴의 테너먼트 지역 사회에서 성장했다.[7] 14세 때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 스프링번으로 이사했다.[8] 세인트 패트릭 남자 학교에 다녔으며, 15세 생일 며칠 전에 학교를 떠나 Heatovent라는 공장에서 판금 기술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5] 이후 노스 브리티쉬 칼레도니안 철도에서 기차 엔진 제작자로 스프링번 철도 야드에서 근무하며 전국 판금 노동자 및 구리 세공인 조합에 참여했다.[7]
21세에 노동당에 입당했으며,[9] 1960년부터 1976년까지 롤스로이스 스코틀랜드 힐링턴 공장에서 판금 기술자로 일했다.[10] 20대 중반에는 엔지니어링 노동자 연합의 전임 상점 간부로 활동했다.[11]
26세 때인 1973년, 글래스고 시의회 노동당 시의원으로 선출되어 스코틀랜드 고반 지역의 페어필드 구를 대표했다. 1974년에는 글래스고 시 구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스코틀랜드 발로노크 구를 대표했다.[9] 1976년부터 1979년까지는 전국 공공 노무원 노조(NUPE)의 노동 조합 조직원이었다.[10]
2. 1. 노동조합 활동
2. 2. 정치 입문
3. 의회 경력
마이클 마틴은 1978년 리처드 뷰캐넌의 뒤를 이을 5명의 후보 중 한 명으로 노동당에 의해 선출되었다.[5][7] 그는 1979년 영국 총선에서 글래스고 스프링번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마틴은 당의 우파에 속하는 로이 해터슬리와 데니스 힐리를 지지했으며,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그들의 의회 비서관으로 활동했다.[12][10] 그는 1983년 영국 총선, 1987년 영국 총선, 1992년 영국 총선, 1997년 영국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그는 노동당의 우익과 관련되어, 낙태 및 동성애와 같은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12] 1994년, 마틴은 동성애자의 합의 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는 것에 반대한 13명의 노동당 의원 중 한 명이었다.[13]
마틴은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스코틀랜드 대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11] 그는 1987년부터 2000년까지 의장단에 참여했으며, 1997년 5월에는 제1 부 의사 (3명의 부의장 중 한 명)로 임명되었다.[10] 30년의 긴 하원 경력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정부 측 의석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평의원이었을 때는 소속 정당이 집권하지 않았고, 부의장으로 승진한 후에야 정당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베티 부스로이드가 의장직에서 물러난 후 2000년 10월 23일, 12명의 후보가 출마한 선거에서 마틴은 종교 개혁 이후 처음으로 가톨릭 신자로서 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12] 그는 오랜 관례에 따라 노동당에서 사임했다.[12] 많은 하원 의원, 특히 노동당 의원들은 유력 후보였던 보수당의 조지 영이 당의 전면 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일반 의원들과 충분히 소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경쟁은 2000년 10월 23일에 6시간 넘게 진행된 일련의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고, 마틴의 경쟁자들은 차례로 탈락했으며 영의 후보는 하원에서 거부되었다.[14][15] 마틴은 의장으로서 전통적인 복장인 가발, 실크 스타킹, 무릎바지를 착용하지 않았다.[16] 그의 글래스고 억양 때문에 웽틴 레츠는 그를 "고르발스 믹"이라고 별명을 붙였다.[17]
마틴의 의장 임명은 최근 하원에서 의장직이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에서 교대로 이루어진 패턴에 반하여 이루어졌다.[18] 그의 전임자인 베티 부스로이드가 노동당 의원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의장은 보수당 측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19]
2001년 총선에서 마틴은 재선되었으며,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은 그에게 도전하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국민당 (SNP)은 자당 후보에게 약간의 지지를 얻었다.[20] 총선에서 당선된 후, 그는 의장 자리를 놓고 경쟁에 직면하지 않았는데, 이는 총선 이후 하원으로 복귀한 이전 의장들이 겪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영의 추천으로 의장으로 재선되었다.[21]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2003년에 하원이 자체 하누키아를 갖도록 주선했다. 이는 매년 사용되고 있다.[22]
2005년 총선에서 그는 새로운 글래스고 노스이스트 선거구에 출마했으며, SNP는 다시 그를 상대로 후보를 냈다. 그는 의회로 복귀했다.[23] 그는 의장 선거에서 반대 없이 당선되었다.[24] 2005년 선거 직후, 자유민주당 의원 패치 칼튼이 휠체어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등록부에 서명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하원에 들어섰을 때, 마틴은 전통을 깨고 의장석에서 나와 그녀의 손을 잡고 뺨에 키스하며 "집에 온 것을 환영해요, 패치"라고 말했다.[25] 막 재선된 칼튼은 말기 유방암을 앓고 있었고 사흘 후에 사망했다.[26]
2006년 2월 17일, 마틴은 막힌 관상 동맥으로 인해 글래스고 로열 인펌러리에서 혈관 성형술을 받았다.[27] 그의 사무실은 2월 26일에 이를 확인하고 수주 동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28] 그는 4월 18일에 의장석으로 복귀했다.[27]
2006년 11월 1일, 영국 총리 질의 시간 동안 마틴은 영국 하원에서 야당 대표 데이비드 캐머런이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에게 노동당의 미래 지도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질문을 무효 처리하면서 격분을 일으켰다. 마틴은 총리 질의 시간의 목적은 하원이 정부의 행동에 대해 총리에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마틴은 회의 중단을 위협했다. 캐머런은 질문을 수정하여 블레어의 노동당 대표가 아닌 총리로서의 미래에 대해 질문했고, 마틴은 이를 허용했다. 보수당 의원들은 비슷한 일이 다시 발생할 경우 퇴장하겠다고 위협했다.[30]
2007년, 마틴은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는 데 공금을 사용했다. 카터-럭이라는 언론 법률 회사가 3개월 동안 2만 파운드 이상을 들여 고용되었다. 자유민주당 의원 노먼 베이커는 납세자의 돈을 보도 자료를 배포하는 "매우 비싼" 방식으로 사용한 것을 비판했고, 납세자 연합 역시 불만을 표했다. 마틴은 또한 정보 공개법에 따라 국회의원들의 연간 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출장 경비 내역 공개를 막으려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30]
2008년 2월 24일, 존 라이언, 의회 윤리 위원장은 납세자 연합의 요청에 따라 마틴이 의회 경비와 수당을 남용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게 되었다. 라이언은 그러한 모든 불만을 조사해야 했지만, 불만이 근거 없다고 판결할 수도 있었다. 이 일은 마틴의 대변인이자 PR 회사 루터 펜드래건의 베테랑 화이트홀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인 마이크 그라나트가 스피커의 부인 메리 마틴이 사용한 4,000파운드 이상의 택시 경비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더 메일 온 선데이''를 속였다는 것을 인정한 후 사임하면서 벌어졌다. 그라나트는 익명의 관계자를 탓했지만, 마틴 부인이 리셉션을 위한 음식을 사기 위해 공무원과 함께 쇼핑을 갔기 때문에 경비가 적법하다고 그에게 잘못 알려준 것에 대해서는 스피커를 탓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가정부가 그녀와 동행했었다; 그러한 리셉션을 위한 케이터링은 의회 케이터링 담당자의 책임이다.[31]
2008년 3월 29일,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마이클 마틴의 관저인 스피커 하우스의 개보수가 7년 동안 170만 파운드에 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집은 웨스트민스터 궁전 안에 있다.[32] 2009년 5월 14일,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마틴이 셀틱 파크(셀틱 FC) 방문과 지역 고용 지원 센터 방문을 포함하는 기사 딸린 차를 이용하는 데 1,400파운드를 청구했다고 보도했다.[33]
2008년 11월, 보수당 이민 대변인 데이미언 그린이 내무부에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보에 대한 경찰 수사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 국회의원은 9시간 동안 구금되었으며, 그의 자택과 하원 사무실이 수색되었다. 그린은 어떤 범죄 혐의로도 기소되지 않았다. 하원 건물에 대한 급습은 많은 국회의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이를 의회의 민주적 특권 침해로 간주했다.[34][35]
마틴의 대변인은 그가 런던 경시청이 수색 영장 없이 그린의 하원 사무실을 수색하는 것을 승인했는지 질문을 받았고, "따라야 할 절차가 있었고 그 절차가 지켜졌다."라고 대답했다.[34] 며칠 후 의회가 재개되었을 때, 마틴은 국회의원들에게 성명을 읽으며, "경찰이 의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바와 같이, (하원 수위관 질 페이)에게 동의할 의무가 없거나 영장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마틴은 또한 페이가 하원 서기와 상의하지 않고 수색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런던 경시청은 마틴의 사건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며, 내무부 장관 재키 스미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경찰이 페이에게 "수사의 성격과 수색의 목적을 설명"했으며 "수위관이 영장이 없는 한 경찰이 수색할 권한이 없으며 따라서 그녀의 서면 동의 또는 의장의 동의가 있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점에 만족했다"고 썼다.[36]
마틴은 나중에 페이가 하원 사무실 급습 계획과 국회의원 체포 계획을 자신에게 알렸지만, 체포가 테러와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하원 위원회에 대한 후속 진술에서 마틴은 페이가 자신이 서명한 동의서를 바탕으로 수색이 진행되었고 수색 영장을 바탕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35] 마틴은 페이의 행동과 이 사건과 관련된 하원 서기 말콤 잭의 행동을 비판했다.[35] 2010년에 발표된 조사 보고서는 마틴을 비판하며, 그가 의장으로서 "통제권을 행사하고 단순히 통보받기를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썼으며, "올바른 질문을 하고 ... 그의 높은 직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했다"고 썼다.[37] 또한 보고서는 다른 하원 관리, 영국 공무원 및 경찰을 포함한 여러 당사자의 "실패"를 비판하며, 그들이 그린을 "매우 불필요하게" 그리고 "엉성하게 실행된" 체포를 했다고 결정했다.[37]
2009년, 마틴은 영국 문화원이 지원하는 국회의원 해외 출장과 관련한 경비 문제에 연루되었다. 2008년 보수당 국회의원 마크 랭커스터는 영국 문화원과 함께 2일간의 컨퍼런스를 위해 방콕으로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하여 5,018파운드의 비용을 지출했다. 노동당 국회의원 샐리 키블은 이코노미 클래스로 출국하여 비즈니스 클래스로 귀국했으며 2,452파운드의 비용이 들었다. 국회의원은 일반적으로 외부 기관으로부터 받는 모든 접대를 신고해야 하며, 영국 문화원은 선물 제공이 면제되는 단체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마틴은 "의회 특권"을 내세우며 이러한 출장에 대한 정보 공개를 막는 특별 증명서에 서명했다.
2009년 5월 12일, BBC는 마이클 마틴이 사임 압박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39] 5월 17일, 자유민주당 대표 닉 클레그는 마이클 마틴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며, 그가 국회 개혁에 필요한 많은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말했다.[40] 5월 19일, 더글러스 카스웰은 불신임안을 제출했고, 22명의 하원 의원이 서명했다.[41] 그날 늦게, 마틴은 2009년 6월 21일을 기해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3] 만약 불신임안이 투표에서 통과되었다면, 마틴은 1695년 존 트레버 이후 불신임안으로 인해 강제로 물러난 최초의 국회의장이 되었을 것이다.[42] 마틴은 사임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30년 전 이 하원에 온 이후로, 하원이 단결할 때 최고의 모습을 보인다고 항상 느꼈습니다.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저는 6월 21일 일요일에 국회의장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원은 6월 22일 월요일에 새로운 국회의장을 선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다."[43][44]
그는 같은 날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날 수 있도록 노스스테드 영지의 관리인 및 집행관으로 임명되었으며,[4][45] 그의 선거구인 글래스고 노스이스트에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46] 6월 22일에는 국회의장 선거가 열렸으며, 존 버코가 당선되었다.[47]
국회의장은 일반적으로 은퇴할 때 귀족원으로 승진하며, 정부는 이를 "형식적인 절차"로 간주한다고 말했다.[48] 귀족원 심사 위원회는 고든 브라운 총리에게 지명자가 하원의 위상을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일부 노동당 의원들은 이를 마틴에 대한 비방으로 해석했다. 16명의 의원이 하원 의안에 서명하여 이 책임을 맡은 제이 남작에게 그의 발언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49] 전통에 따라, 마틴의 후임자가 국회의장으로 임명되자마자 하원에서 통과된 첫 번째 의안은 여왕에게 "이 하원에서 탁월한 능력과 위엄으로 의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뛰어난 공로에 대한 그녀의 왕실의 호의의 특별한 표시" (즉, 귀족 작위)를 수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겸손한 주소를 제출하라는 결의안이었다.[50][51]
3. 1. 초기 의정 활동 (1979-2000)
마이클 마틴은 1978년 리처드 뷰캐넌의 뒤를 이을 5명의 후보 중 한 명으로 노동당에 의해 선출되었다.[5][7] 그는 1979년 영국 총선에서 글래스고 스프링번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마틴은 당의 우파에 속하는 로이 해터슬리와 데니스 힐리를 지지했으며,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그들의 의회 비서관으로 활동했다.[12][10] 그는 1983년 영국 총선, 1987년 영국 총선, 1992년 영국 총선, 1997년 영국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그는 노동당의 우익과 관련되어, 낙태 및 동성애와 같은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12] 1994년, 마틴은 동성애자의 합의 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는 것에 반대한 13명의 노동당 의원 중 한 명이었다.[13]마틴은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스코틀랜드 대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11] 그는 1987년부터 2000년까지 의장단에 참여했으며, 1997년 5월에는 제1 부 의사 (3명의 부의장 중 한 명)로 임명되었다.[10] 30년의 긴 하원 경력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정부 측 의석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평의원이었을 때는 소속 정당이 집권하지 않았고, 부의장으로 승진한 후에야 정당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3. 2. 하원 의장 (2000-2009)
베티 부스로이드가 의장직에서 물러난 후 2000년 10월 23일, 12명의 후보가 출마한 선거에서 마틴은 종교 개혁 이후 처음으로 가톨릭 신자로서 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12] 그는 오랜 관례에 따라 노동당에서 사임했다.[12] 많은 하원 의원, 특히 노동당 의원들은 유력 후보였던 보수당의 조지 영이 당의 전면 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일반 의원들과 충분히 소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경쟁은 2000년 10월 23일에 6시간 넘게 진행된 일련의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고, 마틴의 경쟁자들은 차례로 탈락했으며 영의 후보는 하원에서 거부되었다.[14][15] 마틴은 의장으로서 전통적인 복장인 가발, 실크 스타킹, 무릎바지를 착용하지 않았다.[16] 그의 글래스고 억양 때문에 웽틴 레츠는 그를 "고르발스 믹"이라고 별명을 붙였다.[17]마틴의 의장 임명은 최근 하원에서 의장직이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에서 교대로 이루어진 패턴에 반하여 이루어졌다.[18] 그의 전임자인 베티 부스로이드가 노동당 의원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의장은 보수당 측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19]
2001년 총선에서 마틴은 재선되었으며,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은 그에게 도전하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국민당 (SNP)은 자당 후보에게 약간의 지지를 얻었다.[20] 총선에서 당선된 후, 그는 의장 자리를 놓고 경쟁에 직면하지 않았는데, 이는 총선 이후 하원으로 복귀한 이전 의장들이 겪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영의 추천으로 의장으로 재선되었다.[21]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2003년에 하원이 자체 하누키아를 갖도록 주선했다. 이는 매년 사용되고 있다.[22]
2005년 총선에서 그는 새로운 글래스고 노스이스트 선거구에 출마했으며, SNP는 다시 그를 상대로 후보를 냈다. 그는 의회로 복귀했다.[23] 그는 의장 선거에서 반대 없이 당선되었다.[24] 2005년 선거 직후, 자유민주당 의원 패치 칼튼이 휠체어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등록부에 서명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하원에 들어섰을 때, 마틴은 전통을 깨고 의장석에서 나와 그녀의 손을 잡고 뺨에 키스하며 "집에 온 것을 환영해요, 패치"라고 말했다.[25] 막 재선된 칼튼은 말기 유방암을 앓고 있었고 사흘 후에 사망했다.[26]
2006년 2월 17일, 마틴은 막힌 관상 동맥으로 인해 글래스고 로열 인펌러리에서 혈관 성형술을 받았다.[27] 그의 사무실은 2월 26일에 이를 확인하고 수주 동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28] 그는 4월 18일에 의장석으로 복귀했다.[27]
== 주요 사건 및 논란 ==
2006년 11월 1일, 영국 총리 질의 시간 동안 마틴은 영국 하원에서 야당 대표 데이비드 캐머런이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에게 노동당의 미래 지도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질문을 무효 처리하면서 격분을 일으켰다. 마틴은 총리 질의 시간의 목적은 하원이 정부의 행동에 대해 총리에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마틴은 회의 중단을 위협했다. 보수당 의원들은 비슷한 일이 다시 발생할 경우 퇴장하겠다고 위협했다.[30]
2007년, 마틴은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는 데 공금을 사용했다. 자유민주당 의원 노먼 베이커는 납세자의 돈을 보도 자료를 배포하는 "매우 비싼" 방식으로 사용한 것을 비판했고, 납세자 연합 역시 불만을 표했다. 마틴은 또한 정보 공개법에 따라 국회의원들의 연간 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출장 경비 내역 공개를 막으려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30]
2008년 2월 24일, 존 라이언은 납세자 연합의 요청에 따라 마틴이 의회 경비와 수당을 남용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게 되었다. 이 일은 마틴의 대변인이자 PR 회사 루터 펜드래건의 베테랑 화이트홀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인 마이크 그라나트가 마틴의 부인 메리 마틴이 사용한 4,000파운드 이상의 택시 경비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더 메일 온 선데이''를 속였다는 것을 인정한 후 사임하면서 벌어졌다.[31]
2008년 3월 29일,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마이클 마틴의 관저인 스피커 하우스의 개보수가 7년 동안 170만 파운드에 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집은 웨스트민스터 궁전 안에 있다.[32] 2009년 5월 14일,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마틴이 셀틱 파크(셀틱 FC) 방문과 지역 고용 지원 센터 방문을 포함하는 기사 딸린 차를 이용하는 데 1,400파운드를 청구했다고 보도했다.[33]
2008년 11월, 보수당 이민 대변인 데이미언 그린이 내무부에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보에 대한 경찰 수사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 하원 건물에 대한 급습은 많은 국회의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이를 의회의 민주적 특권 침해로 간주했다.[34][35] 마틴의 대변인은 경찰이 수색 영장 없이 그린의 하원 사무실을 수색하는 것을 승인했는지 질문을 받았고, "따라야 할 절차가 있었고 그 절차가 지켜졌다."라고 대답했다.[34] 며칠 후 의회가 재개되었을 때, 마틴은 성명을 통해 하원 수위관 질 페이)에게 영장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런던 경시청은 마틴의 사건 설명에 의문을 제기했다.[36]
마틴은 나중에 페이가 하원 사무실 급습 계획과 국회의원 체포 계획을 자신에게 알렸지만, 체포가 테러와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하원 위원회에 대한 후속 진술에서 마틴은 페이가 자신이 서명한 동의서를 바탕으로 수색이 진행되었고 수색 영장을 바탕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35] 마틴은 페이의 행동과 이 사건과 관련된 하원 서기 말콤 잭의 행동을 비판했다.[35] 2010년에 발표된 조사 보고서는 마틴을 비판하며, 그가 의장으로서 "통제권을 행사하고 단순히 통보받기를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썼다.[37]
2009년, 마틴은 영국 문화원이 지원하는 국회의원 해외 출장과 관련한 경비 문제에 연루되었다. 마틴은 "의회 특권"을 내세우며 이러한 출장에 대한 정보 공개를 막는 특별 증명서에 서명했다.
== 사임 ==
2009년 5월 12일, BBC는 마이클 마틴이 사임 압박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39] 5월 17일, 자유민주당 대표 닉 클레그는 마이클 마틴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며, 그가 국회 개혁에 필요한 많은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말했다.[40] 5월 19일, 더글러스 카스웰은 불신임안을 제출했고, 22명의 하원 의원이 서명했다.[41] 그날 늦게, 마틴은 2009년 6월 21일을 기해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3] 만약 불신임안이 투표에서 통과되었다면, 마틴은 1695년 존 트레버 이후 불신임안으로 인해 강제로 물러난 최초의 국회의장이 되었을 것이다.[42] 마틴은 사임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30년 전 이 하원에 온 이후로, 하원이 단결할 때 최고의 모습을 보인다고 항상 느꼈습니다.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저는 6월 21일 일요일에 국회의장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원은 6월 22일 월요일에 새로운 국회의장을 선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다."[43][44]
그는 같은 날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날 수 있도록 노스스테드 영지의 관리인 및 집행관으로 임명되었으며,[4][45] 그의 선거구인 글래스고 노스이스트에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46] 6월 22일에는 국회의장 선거가 열렸으며, 존 버코가 당선되었다.[47]
국회의장은 일반적으로 은퇴할 때 귀족원으로 승진하며, 정부는 이를 "형식적인 절차"로 간주한다고 말했다.[48] 귀족원 심사 위원회는 고든 브라운 총리에게 지명자가 하원의 위상을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일부 노동당 의원들은 이를 마틴에 대한 비방으로 해석했다. 16명의 의원이 하원 의안에 서명하여 이 책임을 맡은 제이 남작에게 그의 발언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49] 전통에 따라, 마틴의 후임자가 국회의장으로 임명되자마자 하원에서 통과된 첫 번째 의안은 여왕에게 "이 하원에서 탁월한 능력과 위엄으로 의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뛰어난 공로에 대한 그녀의 왕실의 호의의 특별한 표시" (즉, 귀족 작위)를 수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겸손한 주소를 제출하라는 결의안이었다.[50][51]
3. 2. 1. 주요 사건 및 논란
2006년 11월 1일, 영국 총리 질의 시간 동안 마틴은 영국 하원에서 야당 대표 데이비드 캐머런이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에게 노동당의 미래 지도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질문을 무효 처리하면서 격분을 일으켰다. 마틴은 총리 질의 시간의 목적은 하원이 정부의 행동에 대해 총리에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마틴은 회의 중단을 위협했다. 캐머런은 질문을 수정하여 블레어의 노동당 대표가 아닌 총리로서의 미래에 대해 질문했고, 마틴은 이를 허용했다. 보수당 의원들은 비슷한 일이 다시 발생할 경우 퇴장하겠다고 위협했다.[30]2007년, 마틴은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는 데 공금을 사용했다. 카터-럭이라는 언론 법률 회사가 3개월 동안 2만 파운드 이상을 들여 고용되었다. 자유민주당 의원 노먼 베이커는 납세자의 돈을 보도 자료를 배포하는 "매우 비싼" 방식으로 사용한 것을 비판했고, 납세자 연합 역시 불만을 표했다. 마틴은 또한 정보 공개법에 따라 국회의원들의 연간 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출장 경비 내역 공개를 막으려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30]
2008년 2월 24일, 존 라이언, 의회 윤리 위원장은 납세자 연합의 요청에 따라 마틴이 의회 경비와 수당을 남용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게 되었다. 라이언은 그러한 모든 불만을 조사해야 했지만, 불만이 근거 없다고 판결할 수도 있었다. 이 일은 마틴의 대변인이자 PR 회사 루터 펜드래건의 베테랑 화이트홀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인 마이크 그라나트가 스피커의 부인 메리 마틴이 사용한 4,000파운드 이상의 택시 경비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더 메일 온 선데이''를 속였다는 것을 인정한 후 사임하면서 벌어졌다. 그라나트는 익명의 관계자를 탓했지만, 마틴 부인이 리셉션을 위한 음식을 사기 위해 공무원과 함께 쇼핑을 갔기 때문에 경비가 적법하다고 그에게 잘못 알려준 것에 대해서는 스피커를 탓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가정부가 그녀와 동행했었다; 그러한 리셉션을 위한 케이터링은 의회 케이터링 담당자의 책임이다.[31]
2008년 3월 29일,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마이클 마틴의 관저인 스피커 하우스의 개보수가 7년 동안 170만 파운드에 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집은 웨스트민스터 궁전 안에 있다.[32] 2009년 5월 14일,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마틴이 셀틱 파크(셀틱 FC) 방문과 지역 고용 지원 센터 방문을 포함하는 기사 딸린 차를 이용하는 데 1,400파운드를 청구했다고 보도했다.[33]
2008년 11월, 보수당 이민 대변인 데이미언 그린이 내무부에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보에 대한 경찰 수사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 국회의원은 9시간 동안 구금되었으며, 그의 자택과 하원 사무실이 수색되었다. 그린은 어떤 범죄 혐의로도 기소되지 않았다. 하원 건물에 대한 급습은 많은 국회의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이를 의회의 민주적 특권 침해로 간주했다.[34][35]
마틴의 대변인은 그가 런던 경시청이 수색 영장 없이 그린의 하원 사무실을 수색하는 것을 승인했는지 질문을 받았고, "따라야 할 절차가 있었고 그 절차가 지켜졌다."라고 대답했다.[34] 며칠 후 의회가 재개되었을 때, 마틴은 국회의원들에게 성명을 읽으며, "경찰이 의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바와 같이, (하원 수위관 질 페이)에게 동의할 의무가 없거나 영장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마틴은 또한 페이가 하원 서기와 상의하지 않고 수색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런던 경시청은 마틴의 사건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며, 내무부 장관 재키 스미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경찰이 페이에게 "수사의 성격과 수색의 목적을 설명"했으며 "수위관이 영장이 없는 한 경찰이 수색할 권한이 없으며 따라서 그녀의 서면 동의 또는 의장의 동의가 있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점에 만족했다"고 썼다.[36]
마틴은 나중에 페이가 하원 사무실 급습 계획과 국회의원 체포 계획을 자신에게 알렸지만, 체포가 테러와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하원 위원회에 대한 후속 진술에서 마틴은 페이가 자신이 서명한 동의서를 바탕으로 수색이 진행되었고 수색 영장을 바탕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35] 마틴은 페이의 행동과 이 사건과 관련된 하원 서기 말콤 잭의 행동을 비판했다.[35] 2010년에 발표된 조사 보고서는 마틴을 비판하며, 그가 의장으로서 "통제권을 행사하고 단순히 통보받기를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썼으며, "올바른 질문을 하고 ... 그의 높은 직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했다"고 썼다.[37] 또한 보고서는 다른 하원 관리, 영국 공무원 및 경찰을 포함한 여러 당사자의 "실패"를 비판하며, 그들이 그린을 "매우 불필요하게" 그리고 "엉성하게 실행된" 체포를 했다고 결정했다.[37]
2009년, 마틴은 영국 문화원이 지원하는 국회의원 해외 출장과 관련한 경비 문제에 연루되었다. 2008년 보수당 국회의원 마크 랭커스터는 영국 문화원과 함께 2일간의 컨퍼런스를 위해 방콕으로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하여 5,018파운드의 비용을 지출했다. 노동당 국회의원 샐리 키블은 이코노미 클래스로 출국하여 비즈니스 클래스로 귀국했으며 2,452파운드의 비용이 들었다. 국회의원은 일반적으로 외부 기관으로부터 받는 모든 접대를 신고해야 하며, 영국 문화원은 선물 제공이 면제되는 단체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마틴은 "의회 특권"을 내세우며 이러한 출장에 대한 정보 공개를 막는 특별 증명서에 서명했다.
3. 2. 2. 사임
2009년 5월 12일, BBC는 마이클 마틴이 사임 압박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39] 5월 17일, 자유민주당 대표 닉 클레그는 마이클 마틴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며, 그가 국회 개혁에 필요한 많은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말했다.[40] 5월 19일, 더글러스 카스웰은 불신임안을 제출했고, 22명의 하원 의원이 서명했다.[41] 그날 늦게, 마틴은 2009년 6월 21일을 기해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3] 만약 불신임안이 투표에서 통과되었다면, 마틴은 1695년 존 트레버 이후 불신임안으로 인해 강제로 물러난 최초의 국회의장이 되었을 것이다.[42] 마틴은 사임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저는 30년 전 이 하원에 온 이후로, 하원이 단결할 때 최고의 모습을 보인다고 항상 느꼈습니다.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저는 6월 21일 일요일에 국회의장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원은 6월 22일 월요일에 새로운 국회의장을 선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다."[43][44]
그는 같은 날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날 수 있도록 노스스테드 영지의 관리인 및 집행관으로 임명되었으며,[4][45] 그의 선거구인 글래스고 노스이스트에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46] 6월 22일에는 국회의장 선거가 열렸으며, 존 버코가 당선되었다.[47]
국회의장은 일반적으로 은퇴할 때 귀족원으로 승진하며, 정부는 이를 "형식적인 절차"로 간주한다고 말했다.[48] 귀족원 심사 위원회는 고든 브라운 총리에게 지명자가 하원의 위상을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일부 노동당 의원들은 이를 마틴에 대한 비방으로 해석했다. 16명의 의원이 하원 의안에 서명하여 이 책임을 맡은 제이 남작에게 그의 발언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49] 전통에 따라, 마틴의 후임자가 국회의장으로 임명되자마자 하원에서 통과된 첫 번째 의안은 여왕에게 "이 하원에서 탁월한 능력과 위엄으로 의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뛰어난 공로에 대한 그녀의 왕실의 호의의 특별한 표시" (즉, 귀족 작위)를 수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겸손한 주소를 제출하라는 결의안이었다.[50][51]
4. 의장 사임 이후
마틴은 2009년 8월 25일, '글래스고 시 포트 던다스'의 '''스프링번 남작'''으로 종신 귀족이 되었다.[52] 그는 2009년 10월 13일 귀족원에서 소개되었으며,[53] 이전의 국회의장들이 귀족으로 승격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소속 귀족으로 활동했다.[10]
마틴은 2017년 9월 13일 귀족원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10] 그는 짧은 질병을 앓은 후 2018년 4월 29일 사망했다.[54][55] 당시 노동당 대표였던 제러미 코빈, 마틴의 후임인 존 버코, 그리고 전 영국 총리인 고든 브라운을 포함한 현직 및 전직 정치인들이 조의를 표했다.[55]
4. 1. 종신 귀족 (2009)
마틴은 2009년 8월 25일, '글래스고 시 포트 던다스'의 '''스프링번 남작'''으로 종신 귀족이 되었다.[52] 그는 2009년 10월 13일 귀족원에서 소개되었으며,[53] 이전의 국회의장들이 귀족으로 승격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소속 귀족으로 활동했다.[10]마틴은 2017년 9월 13일 귀족원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10] 그는 짧은 질병을 앓은 후 2018년 4월 29일 사망했다.[54][55] 당시 노동당 대표였던 제러미 코빈, 마틴의 후임인 존 버코, 그리고 전 영국 총리인 고든 브라운을 포함한 현직 및 전직 정치인들이 조의를 표했다.[55]
4. 2. 사망 (2018)
마틴은 짧은 질병을 앓은 후 2018년 4월 29일 사망했다.[54][55] 당시 노동당 대표였던 제러미 코빈, 마틴의 후임인 존 버코, 그리고 전 영국 총리인 고든 브라운을 포함한 현직 및 전직 정치인들이 조의를 표했다.[55]5. 개인사
마틴은 조립 노동자로 일하던 메리 맥클레이를 히토벤트 공장에서 만나 1966년에 결혼했다.[5][59] 부부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8] 그의 아들 폴 마틴은 1999년부터 2011년까지 스코틀랜드 의회 노동당 스코틀랜드 의회 의원 (MSP)으로 글래스고 스프링번을 대표했으며, 2011년부터 2016년 스코틀랜드 선거에서 패배할 때까지 글래스고 프로번 선거구를 대표했다.[60]
마틴은 열렬한 백파이프 연주자였으며, 매년 열리는 번스 나이트 만찬에서 손님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연주했다.[61] 세인트 앤드루스 데이 리셉션 직전에, 마틴은 의회 구역에서 백파이프 연주를 허용하려는 하원 집행관의 결정을 뒤집고 SNP 그룹을 위해 특별히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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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 Treasury
201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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