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연 제석천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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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하연 제석천룡도는 1855년에 제작된 불화로, 제석천과 위태천, 천룡팔부신중 4위를 묘사하고 있다.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황색 계열의 구름과 연한 하늘색을 채색하여 19세기 전반 불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화기(畵記)를 통해 제작 시기와 참여 인물을 확인할 수 있으며, 현재 부분적인 안료 박락과 화면 갈라짐이 있으나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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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연 제석천룡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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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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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하연 제석천룡도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399 |
지정일 | 2007년 1월 26일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동구 양재대로128길 53 |
시대 | 조선시대, 1855년 (철종 6년) |
소유자 | 박근태 |
수량 | 1폭 |
2. 지정 사유
마하연 제석천룡도의 색채는 적색과 녹색 위주로, 황색 계열의 구름과 연한 하늘색을 사용하여 19세기 전반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상부에는 제석천과 위태천, 좌우의 천신이 묘사되었고, 하부에는 용왕신 등 천룡팔부 신중 4위가 배치되어 있다. 부분적인 안료 박락과 화면 갈라짐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가 거의 완전하다. 봉안되었던 사찰은 명확하지 않지만, 조성 연대가 1855년으로 분명하여 자료적 가치가 높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1]
마하연 제석천룡도는 부분적으로 안료가 떨어져 나가고 화면이 갈라진 곳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1] 특히 화면 하단의 화기(畵記)를 통해 1855년이라는 조성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어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1]
3. 조사 보고서
일반적으로 19세기 중반 이후의 불화는 인물의 비례가 어색해지고 표현이 직선적으로 경직되며 색채가 탁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물의 비례가 적절하고 묘사가 자연스러우며, 황색과 연한 하늘색 계열의 색채를 사용하여 화면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을 준다. 이는 19세기 전반기 불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점으로 평가된다.[1]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및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1]
3. 1. 도상 및 양식
이 불화는 화면 상부에 제석천과 위태천, 하부에는 용왕신 등 천룡팔부 신중 4위를 그린 〈제석천룡도〉로, 1855년에 조성되었다.[1]
채색은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황색 계열의 구름과 연한 하늘색을 함께 사용하여 전반적으로 밝은 느낌을 준다.[1]
화면 하단의 화기(畵記)에는 '咸豐六年乙卯(함풍 6년 을묘)'라는 기록이 있어 1855년에 조성되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시주자는 당시 김천시 개령면 신전리에 거주하던 김암불(金岩不)과 배철담(裵哲談)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봉안되었던 사찰의 이름은 화기 일부가 훼손되어 확인하기 어렵다.[1]
마하연 제석천룡도는 부분적인 안료 박락과 화면 갈라짐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조성 연대가 분명하여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들이 존상의 비례가 맞지 않고 표현이 경직되며 색채가 탁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인물 비례가 적절하고 묘사가 자연스러우며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19세기 전반기 불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1]
3. 1. 1. 제석천과 천신
화면 상단 우측(向左, 보는 사람 기준 왼쪽)에는 제석천이 자리하고 있다. 제석천은 원형의 녹색 머리광배를 두르고 두 손으로 흰 연꽃 가지(백련, 白蓮)를 들고 있다. 얼굴은 네모난 듯하면서도 턱이 둥글고 이목구비가 단정하여 원만한 모습이다.[1] 제석천의 좌우에는 천신 2위가 그려져 있는데,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몸은 제석천 쪽으로 향한 채 두 손을 합장하고 있다. 제석천과 두 천신 모두 연한 하늘색 겉옷을 입고 있으며 소매 자락에는 치전 장식이 보인다. 세 인물의 얼굴은 서로 비슷하게 묘사되었다.[1]
제석천 좌측(向右, 보는 사람 기준 오른쪽)으로는 위태천이 그려져 있다. 위태천은 깃털 달린 투구를 쓰고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이지만, 대표적인 지물인 금강저나 삼지창은 보이지 않는다. 녹색의 원형 머리광배를 갖추었으며,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몸은 두 손을 합장한 채 제석천 쪽을 향하고 있다.[1]
3. 1. 2. 위태천
제석천 좌측으로는 깃털 달린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무장한 모습의 위태천상이 그려져 있는데, 위태천의 대표적인 지물인 금강저나 삼지창은 보이지 않는다. 녹색의 원형 머리광배를 갖추었으며,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몸은 두 손을 합장한 채 제석천 쪽을 향하고 있다.[1]
3. 1. 3. 천룡팔부신
구름으로 화면을 구분한 하단에는 천룡팔부 신중 4위가 배치되어 있다.[1] 중앙에는 정면을 향하여 하복부 쪽에서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용왕신이 자리한다.[1] 용왕신을 제외한 나머지 3위는 모두 검을 들고 있다.[1] 용왕신 좌측(향우)의 신중은 몸을 중앙 쪽으로 틀어 왼손으로 검을 잡고 있는데, 검 끝이 위를 향하고 있다.[1] 용왕신 우측(향좌)의 두 신중 역시 검을 들고 있다.[1] 이 중 바깥쪽 신중은 입을 벌리고 뒤를 돌아보는 자세로, 오른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칼날을 수평으로 받들고 있다.[1] 안쪽 신중은 입을 굳게 다문 얼굴에 오른손으로 큼직한 칼을 잡았으며, 왼손으로는 수염 끝부분을 잡고 있어 위엄 있는 모습이다.[1]
3. 2. 색채
색채는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황색 계열의 구름과 연 하늘색을 함께 채색하여 전반적으로 밝은 느낌을 준다.[1]
19세기 중반 이후의 불화는 존상의 비례감이 떨어지고 직선 위주로 경직된 경향이 있으며 색채가 탁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하연 제석천룡도는 황색과 연 하늘색 계열의 색채를 사용하여 밝은 느낌을 주며, 이는 19세기 전반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1]
3. 3. 화기
화면 하단에는 화기(畵記)가 남아 있다. 화기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에는 조성 시기와 함께 증명(證明), 금어(金魚), 회주(會主), 도감(都監), 송주(誦呪), 별좌(別座), 공양(供養), 화주(化主) 등 불화 제작에 참여한 승려들의 소임을 밝혀 놓았다. 두 번째 부분에는 시주자 명단이 적혀 있다.[1]
화기 내용 중 ‘咸豐六年乙卯六□本菴造成奉安’(함풍 6년 을묘 6월 □ 본암 조성 봉안)이라는 기록을 통해 이 불화가 1855년 (함풍 6년, 을묘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기의 일부가 훼손되어 어느 사찰에 봉안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
시주자는 당시 개령(開寧, 현 김천시 개령면) 신전리(薪田里)에 거주하던 김암불(金岩不)과 배철담(裵哲談)이었음이 확인된다.[1]
화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하단 우측 ; 향좌측〉
:咸豐六年乙卯六月□本菴造成
:奉安 緣化秩
:證明比丘誼俊 金魚比丘益贊
:會主比丘策定 都監比丘有信
:誦呪比丘敏旭 別座比丘同恩
:供養比丘昌彦 化主比丘頓宥
:
:〈하단 중앙〉
:施主秩
:開寧 薪田里 居住 金岩不 裵哲談
4. 화기
불화 화면 하단에는 제작 관련 기록인 화기(畵記)가 남아 있다.[1] 화기는 제작에 참여한 승려들의 소임과 이름, 그리고 시주자 명단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1] 화기 내용 중 ‘咸豐六年乙卯六□本菴造成奉安’(함풍 6년 을묘 6월 본 암에 조성하여 봉안함)이라는 기록을 통해 18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1] 그러나 화기의 일부가 훼손되어 어느 사찰에 봉안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 시주는 당시 개령(開寧, 현 김천시 개령면) 신전리(薪田里)에 거주하던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기록되어 있다.[1]
4. 1. 소임 기록
불화 화면 하단에는 그림 제작에 관한 정보가 담긴 화기(畵記)가 남아 있다. 화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는데, 한 부분은 조성 시기를 시작으로 증명(證明), 금어(金魚), 회주(會主), 도감(都監), 송주(誦呪), 별좌(別座), 공양(供養), 화주(化主) 등 제작에 참여한 승려들의 소임(맡은 역할)과 이름을 밝히고 있으며, 다른 한 부분은 시주자 명단을 적어 놓았다.[1]화기 가운데 ‘咸豐六年乙卯六□本菴造成奉安’(함풍 6년 을묘 6월 본 암에 조성하여 봉안함)이라는 내용을 통해 이 불화가 18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기의 일부가 훼손되어 어느 사찰에 봉안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
제작에 참여한 승려들의 소임과 이름은 다음과 같다.[1]
소임 | 이름 |
---|---|
증명(證明) | 비구 의준(誼俊) |
금어(金魚) | 비구 익찬(益贊) |
회주(會主) | 비구 책정(策定) |
도감(都監) | 비구 유신(有信) |
송주(誦呪) | 비구 민욱(敏旭) |
별좌(別座) | 비구 동은(同恩) |
공양(供養) | 비구 창언(昌彦) |
화주(化主) | 비구 돈유(頓宥) |
이 기록을 통해 당시 개령현 신전리에 거주하던 김암불과 배철담이 시주하여 불화가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1]
4. 2. 시주자 기록
화면 하단에는 불화 제작 기록인 화기(畵記)가 남아 있다. 이 화기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는 제작 시기와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의 소임과 이름을 밝힌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시주자 명단을 적은 부분이다.[1]화기 내용 중 "咸豐六年乙卯六□本菴造成奉安"이라는 기록을 통해 이 불화가 1855년 (철종 6년) 6월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화기가 일부 훼손되어 어느 사찰에 봉안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
제작에 참여한 인물과 그 소임은 다음과 같다.[1]
소임 | 이름 |
---|---|
증명(證明) | 비구 의준(誼俊) |
금어(金魚) | 비구 익찬(益贊) |
회주(會主) | 비구 책정(策定) |
도감(都監) | 비구 유신(有信) |
송주(誦呪) | 비구 민욱(敏旭) |
별좌(別座) | 비구 동은(同恩) |
공양(供養) | 비구 창언(昌彦) |
화주(化主) | 비구 돈유(頓宥) |
시주자는 당시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신전리(薪田里)에 거주하던 김암불(金岩不)과 배철담(裵哲談)으로 기록되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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