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머우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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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머우헙은 16세기 베트남 막 왕조의 황제이다. 1563년에 태어나 1564년 아버지 막푹응우옌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어렸기에 막낀디엔과 막돈니으엉이 섭정했다. 후 레 왕조와의 전쟁에서 막 왕조는 초기에 우세를 보였으나, 찐끼엠 사후 찐뚱의 반격으로 쇠퇴했다. 막머우헙은 1592년 수도 승룡이 함락되자 도주했으나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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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머우헙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막머우헙 (莫茂洽) |
칭호 | 대월의 황제 |
![]() | |
전체 이름 | 막머우헙 (莫茂洽) |
아버지 | 막선종 |
배우자 | 알 수 없음 |
자녀 | 막토안 |
계승 | 막 왕조의 황제 |
통치 기간 | 1562년–1593년 |
선임자 | 막선종 |
후임자 | 막토안 |
왕조 | 막 왕조 |
연호 | 퇀푹 (淳福, 1562년–1565년) 숭캉 (崇康, 1566년–1577년) 디엔탄 (延成, 1578년–1585년) 도안타이 (端泰, 1586년–1587년) 흥찌 (興治, 1588년–1590년) 홍닌 (洪寧, 1591년–1592년) |
묘호 | 알 수 없음 |
시호 | 알 수 없음 |
출생일 | 1560년 |
출생지 | 동도, 대월 |
사망일 | 1593년 12월 |
사망지 | 동도, 대월 |
매장지 | 박다 탑, 드엉킹 현, 하이퐁 시 |
서명 | 알 수 없음 |
2. 생애
막머우헙은 막푹응우옌의 아들로, 1563년 2월에 태어났다.[1] 1564년 아버지 막푹응우옌이 홍역으로 사망하자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다. 겸태왕(謙太王) 막낀디엔이 군사 일을 주관하고, 응왕(應王) 막돈니으엉이 내정을 주관하는 등 섭정을 받았다.[1]
1570년부터 후 레 왕조와의 전쟁이 격화되었고, 1580년 막낀디엔 사망 이후 막 왕조는 급격히 쇠락했다. 1591년부터 찐뚱이 이끄는 후 레 왕조 군대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1592년 승룡(昇龍)이 함락되면서 막머우헙은 도주 중 붙잡혀 처형당했다.[1]
2. 1. 즉위와 섭정 (1564년 ~ 1573년)
1564년, 막푹응우옌이 홍역으로 사망하자 막머우헙이 뒤를 이었다. 막머우헙이 매우 어렸으므로 겸태왕(謙太王) 막낀디엔이 군사 일을 주관하였고, 응왕(應王) 막돈니으엉(莫敦讓)이 내정을 주관했다. 부마(駙馬)인 안군공(安郡公) 막응옥리엔(莫玉輦), 석군공(石郡公) 응우옌낀(阮敬) 등과 같은 대신들이 보정대신이 되어 병권을 잡고 막머우헙을 보좌했다.[1]1570년, 찐끼엠이 사망하고 찐꼬이가 뒤를 이어 후 레 왕조의 병권을 잡았다. 찐꼬이가 주색에 빠져들면서 내분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 막 왕조는 10만 대군을 보내 대거 진격했다. 막돈니으엉, 막딘코아(莫廷科)가 신부해문(神符海門)을 굳게 지켰고, 막낀디엔이 막응옥리엔, 응우옌꾸옌(阮倦) 등과 함께 후 레 왕조 각지로 나아갔다. 찐꼬이가 막조로 투항했고, 막머우헙은 그를 충량후(忠良侯)에 봉했다. 그러나 찐뚱의 지속적인 기습 등으로 막낀디엔은 승리하지 못했다.[1]
1573년, 막머우헙이 성인이 되어 친정했고, 막낀디엔은 승룡(昇龍) 남쪽 군영에서 거주했다.[1]
2. 2. 후 레 왕조와의 전쟁 (1570년 ~ 1592년)
1570년, 찐끼엠이 죽자 찐꼬이가 뒤를 이어 후 레 왕조의 병권을 잡았다. 찐꼬이가 주색에 빠져들자 동생 찐뚱이 병란을 일으켜 그를 축출했고, 후 레 왕조의 여러 장수들도 반기를 들었다. 막 왕조는 후 레 왕조의 내분을 틈타 10만 대군을 보내 대거 진격했다. 막돈니으엉, 막딘코아(莫廷科)는 신부해문(神符海門)을 굳게 지켰고, 막낀디엔은 막응옥리엔(莫玉輦), 응우옌꾸옌(阮倦) 등과 함께 후 레 왕조 각지로 나아갔다. 찐꼬이가 막조로 투항했고, 막머우헙은 그를 충량후(忠良侯)에 봉했다. 막낀디엔이 후려조를 공격해오자 찐뚱은 막아낼 수 없었고, 막 왕조의 군대는 마칠강(馬漆江)과 람강(藍江) 일대를 횡행했다.[2] 그러나 찐뚱이 지속적으로 기습을 하자 막 왕조의 군사들은 놀라 두려워했고, 후 레 왕조로 투항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막낀디엔은 승리하지 못했다. 이에 막낀디엔은 예안(乂安)의 각 현을 공격했고, 순화(順化), 광남(廣南) 사람들이 막 왕조에 내응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응우옌호앙에게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찐뚱이 예안을 구원하러 오자 막 왕조의 군대는 격퇴되었다.[2]1572년, 후 레 왕조의 장수 레껍데(黎及第)와 찐뚱의 사이가 나빠졌고, 각자 다른 뜻을 품었다. 막낀디엔은 이를 틈타 청화, 예안 일대에 소요를 일으켰다.[2]
1573년, 막머우헙이 성인이 되어 친정했고, 막낀디엔은 나와서 승룡(昇龍) 남쪽의 군영에서 거주했다.[2]
1574년, 막머우헙은 막낀디엔, 응우옌꾸옌, 막응옥리엔 등을 보내 여러 차례 예안, 청화, 선광(宣光), 흥화(興化) 등지를 공격했고, 후 레 왕조는 계속 열세에 몰렸다.[2]
1578년, 막머우헙이 궁중에서 번개를 맞아 반신불수가 되었고, 이후 의관의 치료를 받고 호전되었다. 이로 인해 연호를 지엔타인으로 개원했다.[2]
1580년, 막낀디엔이 죽자, 막 왕조는 유력한 지도자를 잃었고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2]
1581년, 막머우헙은 막돈니으엉에게 병권을 총괄하게 했으나, 막돈니으엉은 군사적 재능이 부족하여 후 레 왕조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했다. 같은 해 막머우헙은 녹내장에 걸려 실명했고, 몇 년 후 시력을 되찾았다. 막 왕조는 계속 쇠락했고, 막 왕조의 장수들은 흩어져 후 레 왕조로 귀부했다.[2]
1585년, 후 레 왕조의 찐뚱이 반격을 개시했다. 막머우헙은 수세로 전환하기로 결정했고,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승룡의 방어를 강화했다. 그러나 찐뚱의 군대는 계속 승리했고, 찐뚱과 그의 부장인 호앙딘아이(黃廷愛), 응우옌흐우리에우(阮有僚) 등이 막 왕조의 군대를 패배시켰다.[2]
1591년, 찐뚱은 응우옌흐우리에우, 호앙딘아이, 찐도(鄭杜) 등 부(部)를 거느리고 막 왕조로 대거 진격하였고, 막 왕조는 대패했다.[2]
1592년, 후 레 왕조의 군대가 승룡성 아래에 이르렀다. 막머우헙은 성을 버리고 도주해 보제진(菩提津)에 이르렀고, 토괴관(土塊館)에 거주하였으며, 장좌들을 남겨두어 승룡을 지키도록 했다. 막머우헙이 장하에서 막응옥리엔, 응우옌꾸옌 등 부(部)를 소집해 반격을 가하게 했지만 대패하였고, 승룡은 결국 함락되었다.[2] 11월, 막머우헙은 아들 막또안을 왕으로 세우고 감국(監國)을 명하였으며 자신은 병사를 이끌고 후 레 왕조의 군대와 전투하였다. 웅례공 막낀찌가 병사를 내어 찐뚱의 군대에 저항하였으나 패배했다. 패배 후 막머우헙은 배를 타고 도망했고, 봉안현(鳳眼縣) 모계사(模桂寺)에 이르러 민간에 숨었다. 11일 후 마을 백성에게 발각되어 찐뚱의 부장에게 사로잡혔고, 승룡으로 압송되어 3일 동안 산 채로 거리에 매달렸다. 이후 보제진으로 끌려가 참수되었으며, 머리가 청화로 전해졌다. 후 레 왕조 조정은 머리의 두 눈에 못을 박은 뒤 청화의 저잣거리에 효수하여 백성들이 보도록 하였다.[2]
2. 3. 몰락과 죽음 (1591년 ~ 1592년)
1591년, 찐뚱이 응우옌흐우리에우(阮有僚), 호앙딘아이(黃廷愛), 찐도(鄭杜) 등 부(部)를 거느리고 막 왕조로 대거 진격하였고, 막 왕조는 대패했다.[1]1592년, 후 레 왕조의 군대가 승룡(昇龍)성 아래에 이르렀다. 막머우헙은 성을 버리고 도주해 보제진(菩提津)에 이르렀고, 토괴관(土塊館)에 거주하였으며, 장좌들을 남겨두어 승룡을 지키도록 했다. 막머우헙이 장하(長河)에서 막응옥리엔(莫玉輦), 응우옌꾸옌(阮倦) 등 부(部)를 소집해 반격을 가하게 했지만 대패하였고, 승룡은 결국 함락되었다.[1] 11월, 막머우헙은 아들 막또안을 왕으로 세우고, 감국(監國)을 명하였으며 자신은 병사를 이끌고 후 레 왕조의 군대와 전투하였다. 웅례공(雄禮公) 막낀찌가 병사를 내어 찐뚱의 군대에 저항하였으나 패배했다. 패배 후 막머우헙은 배를 타고 도망했고, 봉안현(鳳眼縣) 모계사(模桂寺)에 이르러 민간에 숨었다. 11일 후 마을 백성에게 발각되어 찐뚱의 부장에게 사로잡혔고, 승룡으로 압송되어 3일 동안 산 채로 거리에 매달렸다.[1] 이후 보제진으로 끌려가 참수되었으며, 머리가 청화로 전해졌다. 후 레 왕조 조정은 머리의 두 눈에 못을 박은 뒤 청화의 저잣거리에 효수하여 백성들이 보도록 하였다.[1]
3. 가족 관계
- 아버지: 막푹응우옌
- 어머니: 막푹응우옌의 후궁
- 부인: 브 티 호아잉(武氏橫, ? ~ 1592), 응우옌 티(阮氏, ? ~ 1600)
- 자녀: 첫째 아들(이름 없음), 둘째 아들 막또안
4. 묘호
막머우헙의 묘호는 처음에는 '''목종'''(穆宗)으로 불리다가, 공작 막 낑 꿍에 의해 '''영조'''(英祖)로 변경되었다.
5. 연호
연호 | 기간 | 비고 |
---|---|---|
투언푹(淳福) | 1565년 ~ 1568년 | |
숭캉(崇康) | 1568년 ~ 1578년 | |
지엔타인(延成) | 1578년 ~ 1585년 | 1578년, 막머우헙이 궁중에서 번개를 맞아 반신불수가 되었고, 이후 의관의 치료를 받고 호전되었다. 이로 인해 연호를 지엔타인으로 개원했다.[1] |
도안타이(端泰) | 1585년 ~ 1588년 | |
흥찌(興治) | 1588년 ~ 1591년 | |
홍닌(洪寧) | 1591년 ~ 1592년 |
참조
[1]
서적
The A to Z of Vietnam
[2]
간행물
Southeast Asia: A Historical Encyclopedia
[3]
서적
大越史記全書
[4]
서적
大越史記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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