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맹강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맹강녀는 중국 4대 민간 전설 중 하나로, 만리장성을 쌓는 과정에서 남편을 잃은 맹강녀가 통곡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남편의 유해를 수습했다는 이야기이다. 춘추 시대의 기록에서 시작하여 한나라, 당나라 시대를 거치며 진시황과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맹강녀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정절과 유교적 가치관, 민중 저항, 정치적 상징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으며, 한국 전래 설화와 유사성을 보인다. 맹강녀를 기리는 묘가 중국 산하이관에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진나라를 배경으로 한 작품 - 진용 (영화)
    진용은 진시황 시대를 배경으로 장군 몽천방과 불로불사약을 찾는 소녀 동아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판타지 액션 로맨스 영화이며, 장예모와 공리가 주연을 맡아 진시황릉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생을 넘나드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펼친다.
  • 진나라 사람 - 장창 (전한 초기)
    장창은 전한 초기의 관료이자 학자로, 순자에게서 좌전을 배우고 진나라 관리를 거쳐 유방을 섬겨 항산태수, 대나라 승상 등을 역임하고 북평후에 봉해졌으며, 소하의 천거로 어사대부를 지낸 후 승상이 되어 한나라의 역법과 음률을 정비하는 데 기여했고, 만년에는 오행설 논쟁 후 관직에서 물러나 100세 넘게 살았다.
  • 진나라 사람 - 위표
    위표는 진나라 멸망 후 위나라 재건을 시도했으나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게 붙었다가 한신에게 패하여 사로잡혔으며, 유방에게 재등용되었으나 살해당한 위나라 왕족 출신 인물이다.
맹강녀

2. 전개

맹강녀 이야기는 중국에 전해오는 4대 민간 전설의 하나다.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의 주인공이다. 전국시대 진의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천하에 인부 동원령을 내렸다. 제나라 여인이었던 맹강녀의 남편 범희량(范喜良)도 인부로 징용됐다. 혼인한 지 사흘만이었다. 남편이 떠나고 맹강녀는 날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시 황제의 만리장성 보다 맹강녀가 흘린 그리움의 눈물이 먼저 만리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르고 엄동설한, 겨울이 깊었다. 도저히 집에 머무를 수 없었던 맹강녀는 두툼한 솜옷을 지어 길을 나섰다.[5]

몇날 며칠이 지나 만리장성 축조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성벽 아래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묻혔다고 했다. 원통 분통, 맹강녀는 통곡을 했다. 사흘 밤낮을 그렇게 울부짖었다. 하늘이 답했다. 만리장성 800리가 무너졌다. 맹강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백골 뿐, 남편의 유골을 찾는 게 불가능했다.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마다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그 중 한 유골이 피를 빨아들였다. 남편이었다. 맹강녀는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내고 남편의 무덤 앞에서 굶어 죽었다.[5]

맹강녀 이야기는 여러 시대를 거치며 내용과 형식이 변화하며 발전했다.

춘추 시대 연대기인 ''좌전''에는 제나라의 전사 기량의 아내가 길에서 위로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장공이 직접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위로했다는 단순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 유학자 유향은 ''설원''과 ''열녀전''에서 이 일화를 확장하여, 남편을 잃고 의지할 곳 없는 "기량의 아내"의 비극적 슬픔과 정절을 강조했다. 그녀는 성벽 아래에서 남편의 시신을 두고 울었고, 10일 후 성벽이 무너졌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맹강녀'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이야기에 다양한 세부 사항이 추가되면서, 진 시황과 만리장성이 주요 배경으로 떠오른다. 이 시기에는 징집을 피해 도망친 기량이 맹씨 집 정원에 숨어 맹강녀를 만나게 되고, 결국 둘은 결혼하게 된다는 등의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진 시황이 전형적인 악당으로 묘사되기 시작했고,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만리장성이 이야기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며, 맹강녀가 만리장성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형태는 다음과 같다. 진 시황은 만리장성을 건설하던 중 계속해서 벽이 무너지자 만시량이라는 사람을 데려오라는 조언을 듣는다. 만시량은 징집을 피해 도망치고, 맹강녀는 남편에게 겨울 옷을 전해주기 위해 만리장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죽었고, 맹강녀의 통곡에 성벽이 무너져 뼈가 드러난다. 맹강녀는 자신의 피로 남편의 뼈를 찾아내고, 진 시황은 맹강녀의 미모에 반해 청혼한다. 맹강녀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조건이 충족된 후 진 시황을 저주하며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맹강녀 변문 둔황 필사본

2. 1. 초기 형태

이 전설의 기원은 춘추 시대의 역사서인 《좌전》에 나오는 제나라 장수 기량의 아내에 대한 짧은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일화는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의 슬픔과 예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공은 길에서 기량의 아내를 만나 위로하려 했으나, 기량의 아내는 예를 갖춰 집에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한나라 시대에 유향은 《설원》과 《열녀전》에서 이 일화를 확장했다. 이 버전에서 기량의 아내는 남편의 시신을 성벽 아래에서 울부짖었고, 그녀의 슬픔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10일 후 성벽이 무너졌고,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그녀는 자살했다.

당나라 때 맹강녀 이야기는 당나라 시의 고통이라는 주제와 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로 발전했다.

2. 2. 발전 과정

맹강녀 이야기는 여러 시대를 거치며 내용과 형식이 변화하며 발전했다.

춘추 시대 연대기인 ''좌전''에는 제나라의 전사 기량의 아내가 길에서 위로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장공이 직접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위로했다는 단순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 유학자 유향은 ''설원''과 ''열녀전''에서 이 일화를 확장하여, 남편을 잃고 의지할 곳 없는 "기량의 아내"의 비극적 슬픔과 정절을 강조했다. 그녀는 성벽 아래에서 남편의 시신을 두고 울었고, 10일 후 성벽이 무너졌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맹강녀'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이야기에 다양한 세부 사항이 추가되면서, 진 시황과 만리장성이 주요 배경으로 떠오른다., 이 시기에는 징집을 피해 도망친 기량이 맹씨 집 정원에 숨어 맹강녀를 만나게 되고, 결국 둘은 결혼하게 된다는 등의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진 시황이 전형적인 악당으로 묘사되기 시작했고,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만리장성이 이야기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며, 맹강녀가 만리장성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형태는 다음과 같다. 진 시황은 만리장성을 건설하던 중 계속해서 벽이 무너지자 만시량이라는 사람을 데려오라는 조언을 듣는다. 만시량은 징집을 피해 도망치고, 맹강녀는 남편에게 겨울 옷을 전해주기 위해 만리장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죽었고, 맹강녀의 통곡에 성벽이 무너져 뼈가 드러난다. 맹강녀는 자신의 피로 남편의 뼈를 찾아내고, 진 시황은 맹강녀의 미모에 반해 청혼한다. 맹강녀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조건이 충족된 후 진 시황을 저주하며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3. 주요 내용

맹강녀(孟姜女) 이야기는 중국에 전해오는 4대 민간 전설의 하나다.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의 주인공이다.

전국시대 진의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천하에 인부 동원령을 내렸다. 제나라 여인이었던 맹강녀의 남편 범희량(范喜良)도 인부로 징용됐다. 혼인한 지 사흘만이었다. 남편이 떠나고 맹강녀는 날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시 황제의 만리장성 보다 맹강녀가 흘린 그리움의 눈물이 먼저 만리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르고 엄동설한, 겨울이 깊었다. 도저히 집에 머무를 수 없었던 맹강녀는 두툼한 솜옷을 지어 길을 나섰다.

몇날 며칠이 지나 만리장성 축조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성벽 아래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묻혔다고 했다. 원통 분통, 맹강녀는 통곡을 했다. 사흘 밤낮을 그렇게 울부짖었다. 하늘이 답했다. 만리장성 800리가 무너졌다. 맹강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백골 뿐, 남편의 유골을 찾는 게 불가능했다.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마다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그 중 한 유골이 피를 빨아들였다. 남편이었다. 맹강녀는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내고 남편의 무덤 앞에서 굶어 죽었다.[5]

3. 1. 맹강녀와 범희량의 만남

맹강녀(孟姜女)는 맹원외 집에서 자란 오이가 강씨 집 지붕에서 열매를 맺어 태어난 비범한 출생 배경을 가졌다.[5] 맹씨와 강씨가 다투었으나, 오이를 반으로 나누어 화해하고, 오이 속에서 나온 여자 아이에게 "맹강녀"라 이름짓고 두 집안의 성을 모두 쓰게 하였다.[5]

성장한 맹강녀는 '''범희량''' (또는 '''만희량'''·'''만기량''')과 혼인하지만, 범희량은 만리장성 축조에 강제 징용된다.[5] 어떤 전승에 따르면, 범희량은 산 제물로서 1만 명의 가치가 있는 특별한 인간이었기에, 국가와 산 제물을 면하고 싶어 하는 백성들에게 쫓기던 중 맹강녀를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5]

3. 2. 남편의 죽음과 맹강녀의 통곡

맹강녀는 남편을 찾아 만리장성으로 떠났으나, 남편 범희량(范喜良)은 이미 가혹한 노동으로 사망한 뒤였다.[5] 성벽 아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혔다는 소식에 맹강녀는 사흘 밤낮을 통곡했고, 이에 하늘이 답하여 만리장성 800리가 무너졌다.[5] 맹강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마다 핏방울을 떨어뜨렸고, 그 중 한 유골이 피를 빨아들이는 것을 보고 남편임을 확인했다.[5] 맹강녀는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를 지내고 남편의 무덤 앞에서 굶어 죽었다.[5]

일부 전승에 따르면, 만리장성 건설에는 1리에 한 명의 산 제물이 필요했는데, 범희량은 1만 명의 가치가 있는 특별한 인간이었기에 징용을 피하려다 맹강녀와 결혼하게 되었다고도 한다.[5]

최종적으로, 장성이 붕괴된 곳에 진시황이 방문하여 맹강녀에게 결혼을 청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5] 이 전설에서 맹강녀는 진시황에게 범희량의 매장 등 여러 요구를 하고, 모두 이루어진 후 진시황을 비판하며 사라진다.[5]

3. 3. 진시황과의 만남 (일부 전승)

전국시대 진의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천하에 인부 동원령을 내렸다. 맹강녀의 남편 범희량(范喜良)도 징용되었는데, 맹강녀가 통곡하자 만리장성이 무너졌다는 전설이 있다.[5] 이 때 장성이 붕괴된 곳에 진시황이 방문하여 맹강녀의 미모에 반해 혼인을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 맹강녀는 진시황에게 남편의 장례를 포함한 여러 요구를 하고, 모든 요구가 이루어진 뒤 진시황을 비판하고 사라졌다고 한다.[5]

4. 다양한 변형과 각색

맹강녀 이야기는 중국에 전해오는 4대 민간 전설의 하나로,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의 주인공이다.[5]

둔황 문서에서 발견된 변문에 맹강녀가 등장하며, 아서 웨일리가 번역하였다.[5] 변문은 맹강녀의 남편 기량이 죽어 성벽에 묻히고, 그의 혼이 아내에게 "땅속의 불쌍한 병사는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5] 아내는 남편의 뼈를 찾기 위해 흐느껴 울었지만, 성벽이 무너지면서 너무 많은 뼈가 드러나 남편의 뼈를 구별할 수 없었다.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내 남편이라면, 이 피가 뼈 속으로 깊이 스며들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피가 스며든 유골을 남편으로 확인했다.[5] 그녀는 다른 외로운 해골들에게 가족에게 전할 말을 부탁했고, 죽은 자들의 혼은 "우리는 영원히 봄과 겨울을 노란 모래 속에서 보낸다"며 아내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전해달라고 부탁했다.[5]

후대의 민요 "맹강녀십이월화"(孟姜女十二月花)는 맹강녀의 슬픔과 남편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다.[5]

:첫째 달은 매화의 달이네

:모든 집안이 붉은 등불을 걸었네

:"이웃집 남편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 남편만 만리장성을 짓느라 멀리 떠났네!"

19세기 변형된 이야기에서는 한 제국 관리가 맹강녀의 남편을 죽이고, 그녀가 그의 시신을 찾으려 하자 유혹하려 한다. 그녀는 황제에게 바칠 예복을 그에게 주어 그를 속였고, 예복이 황제의 색인 노란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밝혀지자 황제는 그를 처형한다. 맹강녀는 그 후 황제에게 진짜 용포를 바친다. 또 다른 후기 이야기에선, 맹강녀가 남편의 관을 싣고 바다로 떠내려간다. 진시황제가 그녀를 찾기 위해 바다를 메우고 용왕의 궁전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자, 맹강녀를 대신하는 여자가 황제의 침실로 간다. 몇몇 버전에서는, 그녀는 항우의 어머니로, 진나라를 대체하기 위해 싸우고 진나라 궁전을 불태운다. 또 다른 버전은 맹강녀를 하늘에서 내려와 남편을 따르는 여신으로 묘사하며, 남편은 만리장성을 건설하기 위해 희생될 10,000명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선택한다.

1926년 천일 영화사 영화 "맹강녀", 주연 호접


《맹성 만리장성 여행기》 (1878) 삽화, 조지 카터 스텐트 번역


20세기까지 이 전설은 모든 종류의 지역 드라마와 발라드 또는 노래로 각색되어, 등장인물, 그들의 행동, 그리고 청중에게 기대되는 태도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강영녀서의 여서로 쓰인 한 버전은 맹강녀의 감정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녀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남편의 뼈와 함께 매일 밤 잠자리에 드는 슬픔을 이야기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중국 민속학자들의 연구는 재구성된 전설을 주요 중국 민담으로 만들었다. 19세기에도 조지 카터 스텐트의 "맹성의 만리장성 여행기"라는 영어 번역본이 있었다. 1934년 제네비브 윔사트와 제프리 첸은 다른 버전을 선택하여 "긴 성벽의 여인"으로 번역했다. 아론 아브샬로모프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온 러시아 출신 작곡가로, 1945년 11월에 제작된 오페라 "만리장성"의 기초로 이 전설을 사용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서양식 오페라였다. 비록 관객들에게 환영받고 정치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 이후로 이 오페라는 널리 공연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가장 초창기 영화는 1926년 당시 가장 유명한 여배우 호접이 출연한 영화였다.[2] 그 후 여러 영화가 이어졌으며, 1970년에는 대만 장편 영화가 제작되었다.[3]

4. 1. 변문

맹강녀 이야기는 둔황 문서에서 발견된 변문에 등장한다.[5] 변문은 맹강녀의 남편 기량이 죽어 성벽에 묻히고, 그의 혼이 아내에게 "땅속의 불쌍한 병사는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내는 남편의 뼈를 찾기 위해 흐느껴 울었지만, 성벽이 무너지면서 너무 많은 뼈가 드러나 남편의 뼈를 구별할 수 없었다.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내 남편이라면, 이 피가 뼈 속으로 깊이 스며들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피가 스며든 유골을 남편으로 확인했다. 그녀는 다른 외로운 해골들에게 가족에게 전할 말을 부탁했고, 죽은 자들의 혼은 "우리는 영원히 봄과 겨울을 노란 모래 속에서 보낸다"며 아내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4. 2. 민요와 희곡

후대의 민요 "맹강녀십이월화"(孟姜女十二月花)는 맹강녀의 슬픔과 남편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다.[5]

:첫째 달은 매화의 달이네

:모든 집안이 붉은 등불을 걸었네

:"이웃집 남편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 남편만 만리장성을 짓느라 멀리 떠났네!"

맹강녀 이야기는 20세기까지 모든 종류의 지역 드라마와 발라드, 노래로 각색되어 등장인물, 행동, 기대되는 태도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19세기에도 조지 카터 스텐트의 "맹성의 만리장성 여행기"라는 영어 번역본이 있었다. 아론 아브샬로모프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온 러시아 출신 작곡가로, 1945년 11월에 제작된 오페라 "만리장성"의 기초로 이 전설을 사용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서양식 오페라였다.

이 이야기의 가장 초창기 영화는 1926년 당시 가장 유명한 여배우 호접이 출연한 영화였다.[2] 그 후 여러 영화가 이어졌으며, 1970년에는 대만 장편 영화가 제작되었다.[3]

4. 3. 여성서

맹강녀 이야기는 중국 4대 민간 전설 중 하나로,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의 주인공이다.[5] 20세기까지 이 전설은 지역 드라마, 발라드, 노래 등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었으며, 등장인물, 행동, 기대되는 태도 등에 변화를 주었다. 강영녀서의 여서로 쓰인 버전은 맹강녀의 내면 심리와 슬픔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둔황 문서에서 발견된 변문에 맹강녀가 등장하며, 아서 웨일리가 번역하였다. 변문은 남편 기량이 죽고 성벽에 묻힌 후, 그의 혼이 아내에게 "땅속의 불쌍한 병사는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내는 남편의 뼈를 찾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내 남편이라면, 이 피가 뼈 속으로 깊이 스며들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남편의 유골을 찾았다.

후대의 대중가요 "맹강녀 십이월화"(孟姜女十二月花)는 맹강녀에게 동정을 표한다. 첫째 달 매화가 피는 시기에 모든 집안이 붉은 등불을 걸지만, 맹강녀의 남편은 만리장성을 짓느라 멀리 떠나 함께하지 못하는 슬픔을 노래한다. 19세기 변형된 이야기에서는 제국 관리가 맹강녀의 남편을 죽이고 그녀를 유혹하려 하지만, 맹강녀는 기지를 발휘하여 그를 벌하고 황제에게 진짜 용포를 바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중국 민속학자들의 연구는 재구성된 전설을 주요 중국 민담으로 만들었다. 19세기에는 조지 카터 스텐트의 "맹성의 만리장성 여행기"라는 영어 번역본이 있었고, 1934년 제네비브 윔사트와 제프리 첸은 다른 버전을 선택하여 "긴 성벽의 여인"으로 번역했다. 아론 아브샬로모프는 이 전설을 바탕으로 오페라 "만리장성"을 작곡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서양식 오페라였다. 이 이야기의 가장 초창기 영화는 1926년 호접이 출연한 영화이며,[2] 이후 여러 영화가 제작되었다.[3]

4. 4. 현대적 각색

20세기까지 맹강녀 전설은 지역 드라마, 발라드, 노래 등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었으며, 등장인물, 행동, 청중에게 기대되는 태도 등에 변화가 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중국 민속학자들의 연구는 재구성된 맹강녀 전설을 주요 중국 민담으로 만들었다. 19세기에는 조지 카터 스텐트가 "맹성의 만리장성 여행기"라는 영어 번역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아론 아브샬로모프는 맹강녀 전설을 바탕으로 오페라 "만리장성"을 작곡하여 1945년 11월에 초연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서양식 오페라였다. 이 오페라는 관객들에게 환영받고 정치적인 지지도 받았지만, 이후 널리 공연되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가장 초창기 영화는 1926년 천일 영화사에서 제작하고 호접이 주연한 "맹강녀"이다.[2] 이후에도 여러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1970년에는 대만에서 장편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3]

5. 시대별 해석의 변화

맹강녀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변화를 겪었다.

== 유교적 해석 ==

맹강녀 이야기는 초기에는 맹강녀의 정절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강조되었다.[5] 맹강녀는 남편 범희량(范喜良)이 만리장성 축조에 징용된 후, 그를 그리워하며 정절을 지켰다.[5]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리장성으로 달려가 통곡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남편의 유골을 찾아 장사를 지낸 후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중요시하는 덕목을 보여준다.[5]

== 민중 저항의 상징 (신문화 운동) ==

1920년대 신문화 운동 시기, 맹강녀 이야기는 봉건적 억압과 국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재해석되었다.[5] 구제강을 비롯한 신문화 운동가들은 맹강녀 이야기를 평민, 특히 여성들의 집단적 창의성의 산물로 보았다. 이들은 맹강녀를 통해 유교 문인들이 간과했던 국가 권력에 대한 항의를 읽어냈다.

구제강유향의 한나라 시대 이야기에 나타난 기량의 아내가 남편의 시신 앞에서 공개적으로 슬퍼하는 모습이 유교적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 행동을 통해 유교적 '예(禮)'와 인간의 감정 사이의 모순을 강조했다. 유반농은 시를 통해 진 시황제나 한무제보다 맹강녀가 민중의 기억 속에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노래하며, 민간 기억의 힘을 기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현대 중국인과 서양인 청중이 낭만적 사랑을 "근대 이전 시대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곳에서" 보았다는 비판도 있다.

== 정치적 상징 (중일 전쟁, 문화 대혁명) ==

중일 전쟁 (1937–1945) 시기, 만리장성은 중국의 통일과 투쟁 의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변화하였다.[5] 이 시기 마오쩌둥마오쩌둥/毛澤東중국어은 자신을 중국의 위대한 통일자인 진 시황제와 동일시했다. 문화 대혁명 (1966–1976) 동안, 맹강녀는 진 시황제의 적으로 공격받으며 "친공자, 반법가 대독초"로 비난받았다.

5. 1. 유교적 해석

맹강녀 이야기는 초기에는 맹강녀의 정절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강조되었다.[5] 맹강녀는 남편 범희량(范喜良)이 만리장성 축조에 징용된 후, 그를 그리워하며 정절을 지켰다.[5]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리장성으로 달려가 통곡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남편의 유골을 찾아 장사를 지낸 후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중요시하는 덕목을 보여준다.[5]

5. 2. 민중 저항의 상징 (신문화 운동)

1920년대 신문화 운동 시기, 맹강녀 이야기는 봉건적 억압과 국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재해석되었다.[5] 구제강을 비롯한 신문화 운동가들은 맹강녀 이야기를 평민, 특히 여성들의 집단적 창의성의 산물로 보았다. 이들은 맹강녀를 통해 유교 문인들이 간과했던 국가 권력에 대한 항의를 읽어냈다.

구제강유향의 한나라 시대 이야기에 나타난 기량의 아내가 남편의 시신 앞에서 공개적으로 슬퍼하는 모습이 유교적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 행동을 통해 유교적 '예(禮)'와 인간의 감정 사이의 모순을 강조했다. 유반농은 시를 통해 진시황이나 한무제보다 맹강녀가 민중의 기억 속에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노래하며, 민간 기억의 힘을 기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현대 중국인과 서양인 청중이 낭만적 사랑을 "근대 이전 시대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곳에서" 보았다는 비판도 있다.

5. 3. 정치적 상징 (중일 전쟁, 문화 대혁명)

중일 전쟁 (1937–1945) 시기, 만리장성은 중국의 통일과 투쟁 의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변화하였다.[5] 이 시기 마오쩌둥마오쩌둥/毛澤東중국어은 자신을 중국의 위대한 통일자인 진 시황제와 동일시했다. 문화 대혁명 (1966–1976) 동안, 맹강녀는 진시황의 적으로 공격받으며 "친공자, 반법가 대독초"로 비난받았다.

6. 한국과의 관련성

6. 1. 한국 전래 설화와의 유사성

6. 2.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해석

7. 맹강녀묘

맹강녀묘(孟姜女庙)는 산하이관성 동부 왕푸스촌 북부 봉황산의 작은 언덕 위에 있다.[6] '정녀사'라고도 하며 송대에 세워져, 명대에 중건되었다.[6]

참조

[1] 웹사이트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China First National List 國家級非物質文化遺產名錄第一批 https://www.cultural[...] Chinese Cultural Studies Center 2021-09-19
[2] 웹사이트 Lady Meng Jiang http://www.chinesemi[...]
[3] 영화 The Great Wall (Meng Jiang Nu Ku dao Chang Cheng) https://www.imdb.com[...] Lee Ming Film Co.
[4]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5] 뉴스 무등일보 http://www.honam.co.[...] 2017-11-27
[6] 두산백과 https://terms.nave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