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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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영옥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자이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기수로 근무했으며, 퇴직 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원풍금광을 경영했다. 원풍금광 매각 대금과 별도로 국방헌금, 고사기관총 구입비, 방공모형 제작비 등을 일본에 헌납하고,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를 역임했다. 1939년에는 조선총독부에 방공모형을 기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을 받았다.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경제 부문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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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영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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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본관 | 회양(淮陽) |
출생 | 1921년 3월 15일 |
사망 | 1995년 4월 17일 (향년 74세) |
배우자 | 김정애 |
자녀 | 4남 2녀 |
종교 | 천주교 |
학력 | |
학력 | 만주국 봉천농과대학 임학과 졸업 |
경력 | |
경력 | 국회 사무총장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
약력 | |
1960년 | 민의원 사무차장 |
1961년 | 국회 사무차장 |
1963년 | 국회 사무총장 |
1967년 | 제7대 국회의원 전국구 신민당 |
1971년 | 제8대 국회의원 전국구 신민당 |
1979년 | 신민당 원내총무 |
1981년 | 제11대 국회의원 전국구 민주정의당 |
1981년 | 국회 농수산위원회 위원장 |
1985년 | 제12대 국회의원 전국구 민주정의당 |
상훈 | |
훈장 | 청조근정훈장 |
2. 생애
1913년부터 1939년까지 맹영옥은 조선총독부 관리, 광산 경영, 그리고 친일 행위로 이어지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13년 6월부터 1916년 10월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기수로 근무한 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원풍금광을 경영하였다.[1] 1937년에는 원풍금광을 매각하고 그 대금의 일부를 국방헌금으로 헌납하는 등 일본에 협력했다. 또한, 강원도 김화군에서 광업권을 획득하고 방공모형 제작비를 기부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1939년 11월에는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를 역임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을 받았다.[1] 이러한 친일 행적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으로 이어졌다.
2. 1. 조선총독부 관리 (1913년 ~ 1916년)
1913년 6월부터 1916년 10월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기수로 근무했다.[1] 퇴직 이후에는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원풍금광을 경영했다.2. 2. 광산 경영과 부의 축적
1913년 6월부터 1916년 10월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기수로 근무했으며, 퇴직 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원풍금광을 경영했다.[1] 1937년 3월 10일 원풍금광을 중외광원에 140만엔에 매각했고, 이 가운데 1만엔을 국방헌금으로 헌납했다.[1] 같은 해 7월 30일 고사기관총 1대 구입비 1만엔을 일본군 관련 기관에 헌납했다.[1]1937년 11월 22일 강원도 김화군 근동면과 원남면 소재 금광, 은광, 유화철광 900000평에 대한 광업권을 설정했으며,[1] 1937년 12월 6일 방공모형(防共模型) 제작비로 1만엔을 기부했다.[1] 1938년 8월 6일 조선총독부에 방공모형 20점을 기부했고,[1]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에 방공모형 20점을 기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紺綏褒章)을 받았다.[1]
2. 3. 친일 행적과 포상 (1937년 ~ 1939년)
1937년 3월 10일 원풍금광을 중외광원에 140만엔에 매각했고, 이 가운데 1만엔을 국방헌금으로 헌납했다. 1937년 7월 30일 고사기관총 1대 구입비 1만엔을 일본군 관련 기관에 헌납했다.[1]1937년 11월 22일 강원도 김화군 근동면과 원남면 소재 금광, 은광, 유화철광 900000m2에 대한 광업권을 설정했으며, 1937년 12월 6일 방공모형(防共模型) 제작비로 1만엔을 기부했다. 1938년 8월 6일 조선총독부에 방공모형 20점을 기부했고,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를 역임했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에 방공모형 20점을 기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을 받았다.[1]
2. 4. 친일 행적 이후
1913년 6월부터 1916년 10월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기수로 근무했으며 퇴직 이후에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원풍금광을 경영했다. 1937년 3월 10일 원풍금광을 중외광원에 140만엔에 매각했고 이 가운데 1만엔을 국방헌금으로 헌납했다. 1937년 7월 30일 고사기관총 1대 구입비 1만엔을 일본군 관련 기관에 헌납했다.1937년 11월 22일 강원도 김화군 근동면과 원남면 소재 금광, 은광, 유화철광 900000m2에 대한 광업권을 설정했으며 1937년 12월 6일 방공모형(防共模型) 제작비로 1만엔을 기부했다. 1938년 8월 6일 조선총독부에 방공모형 20점을 기부했고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를 역임했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에 방공모형 20점을 기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紺綏褒章)을 받았으며,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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