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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셀러스트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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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은 1872년 12월, 대서양에서 선원과 선장이 모두 사라진 채 발견된 유령선 사건이다. 1861년에 건조된 이 배는 '아마존'으로 시작해 '메리 셀러스트'로 개명되었으며, 1872년 11월, 뉴욕에서 알코올을 싣고 이탈리아 제노바로 향하던 중이었다. 12월 4일, 다른 배에 의해 발견되었을 당시 메리 셀러스트호에는 돛이 펼쳐져 있었고, 선실에는 개인 물품이 남아 있었으나, 선원과 선장의 가족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이후, 수많은 가설들이 제기되었지만, 승무원들이 배를 버리고 사라진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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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셀러스트호 사건 - [배(Ship)]에 관한 문서
개요
1861년 아마존으로서의 메리 셀레스트호 (무명 화가 그림)
1861년 아마존으로서의 메리 셀레스트호 (무명 화가 그림)
선박 종류브리간틴
원래 이름아마존
발견 당시 이름메리 셀레스트
국적캐나다, 미국
선박 정보
건조1861년, 조슈아 듀이스, 스펜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
1872년 재건조, 뉴욕 (조선소 미상)
진수1861년 5월 18일
최후1885년, 아이티 해안에서 고의로 좌초됨
선박 등록 정보
등록파르스보로, 노바스코샤 (초기), 주로 뉴욕 또는 보스턴 (후기)
선박 제원
톤수1861년 건조 시: 198.42 총 톤수
1872년 재건조 후: 282.28 총 톤수
길이1861년 건조 시: 99.3 피트 (30.3 m)
1872년 재건조 후: 103 피트 (31 m)
너비1861년 건조 시: 22.5 피트 (6.9 m)
1872년 재건조 후: 25.7 피트 (7.8 m)
깊이1861년 건조 시: 11.7 피트 (3.6 m)
1872년 재건조 후: 16.2 피트 (4.9 m)
갑판1861년 건조 시: 1개
1872년 재건조 후: 2개
돛대브리간틴
선박 역사
이전 이름아마존 (1861–1868)
메리 셀레스트 (1869–1885)
사건디 그라티아 호에 의해 발견된 무인선
1867년글레이스 베이, 노바스코샤에서 좌초, 인양되어 미국인 소유가 됨

2. 사건 발생 전

메리 셀러스트호는 1861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에서 '아마존'이라는 이름으로 건조되었다. 초기에는 여러 사고를 겪기도 했으며, 1867년 좌초된 후 수리되어 미국의 선주에게 매각되었다. 1868년 '메리 셀러스트'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등록되었고, 몇 차례 소유주가 변경된 후 1872년 벤저민 브리그스가 새로운 선장이자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브리그스 선장은 같은 해 11월, 가족 및 선원들과 함께 뉴욕을 출발하여 제노아로 향하는 항해에 나섰는데, 이것이 메리 셀러스트호의 마지막 항해가 되었다.

2. 1. 건조 및 초기 이력

2011년에 촬영된 스펜서 섬


훗날 ''메리 셀러스트''호가 되는 배의 용골은 1860년 말, 노바스코샤 주 펀디 만 기슭에 있는 스펜서 섬 마을의 조슈아 듀이스(Joshua Dewis) 조선소에서 놓였다.[2][157] 배는 현지에서 베어진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두 개의 돛대를 갖춘 브리간틴이었다. 선체는 판자가 겹치지 않고 평평하게 이어지는 카벨 공법으로 제작되었다.[3]

1861년 5월 18일에 진수되어 ''아마존''(Amazo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같은 해 6월 10일 인근 파르스보로(Parrsboro)에 등록되었다.[4][5][158][159][160] 등록 서류에 따르면 길이는 30.3m, 폭은 7.8m, 깊이는 3.6m였으며, 총 등록 톤수는 198.42톤이었다.[4][5] 배는 건조자인 듀이스를 포함한 9명의 지역 컨소시엄이 소유했으며, 공동 소유자 중에는 배의 첫 번째 선장인 로버트 맥렐란(Robert McLellan)도 있었다.[6][161]

1861년 6월, ''아마존''호는 첫 항해로 노바스코샤주 파이브 아일랜드(Five Islands)로 가서 대서양을 건너 런던으로 갈 목재를 실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선적 작업을 감독하던 맥렐란 선장은 폐렴에 걸려 상태가 악화되었고, 배가 스펜서 섬으로 돌아온 후인 6월 19일에 사망했다.[7][8][162][163]

맥렐란의 뒤를 이어 존 너팅 파커(John Nutting Parker)가 선장직을 맡아 런던으로의 항해를 재개했다.[5] 하지만 항해 중 ''아마존''호는 메인 주 이스트포트(Eastport) 앞바다의 좁은 수로에서 어구나 어선과 충돌하는 사고를 겪었다.[5] 이후 런던을 떠나서는 영국 해협에서 다른 브리그와 충돌하여 상대 선박을 침몰시키기도 했다.[5]

파커는 약 2년간 선장으로 재직하며 주로 서인도 제도 무역에 종사했다. 1861년 11월에는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로 항해했으며,[9] 이 항해 중 마르세유에 들렀을 때, 유명 해양 화가 오노레 드 펠레그린(Honoré de Pellegrin)의 그림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0][11]

1863년, 파커의 뒤를 이어 윌리엄 톰슨(William Thompson)이 선장이 되었고, 1867년까지 배를 지휘했다.[5] 이 시기는 비교적 평온했으며, 당시 ''아마존''호의 한 선원은 훗날 "우리는 서인도 제도, 잉글랜드, 지중해로 갔는데, 이걸 해외 무역이라고 불렀죠. 특이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5][164]

그러나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1867년 10월, 케이프브레턴 섬에서 ''아마존''호는 거센 폭풍우를 만나 해안으로 밀려 좌초되었고, 선체가 심하게 손상되어 소유주들은 배를 난파선으로 포기했다.[12][165] 같은 해 10월 15일, ''아마존''호는 노바스코샤주 글레이스 베이(Glace Bay)의 알렉산더 맥빈(Alexander McBean)에 의해 버려진 상태로 인수되었다.[13][14][166][167]

2. 2. 소유권 및 이름 변경



''메리 셀러스트''호는 1860년 말, 노바스코샤주 펀디만 기슭에 있는 스펜서 섬 마을의 조슈아 듀이스 조선소에서 용골이 놓였다.[2] 배는 현지에서 베어진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두 개의 돛대가 있는 브리간틴으로 건조되었다. 선체는 판자가 겹치지 않고 평평하게 이어 붙이는 카벨 공법으로 제작되었다.[3]

배는 1861년 5월 18일에 진수되어 '아마존'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1861년 6월 10일 인근 파르스보로에 등록되었다.[4][5][158][159][160] 등록 서류에는 범선의 길이가 30.3m, 폭 7.8m, 깊이 3.6m이며, 총 등록 톤수가 198.42톤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4][5] 배는 듀이스를 포함한 9명의 지역 주민 컨소시엄 소유였으며, 공동 소유자 중에는 배의 첫 번째 선장인 로버트 맥렐란도 있었다.[6][157]

1861년 6월 첫 항해로 '아마존'호는 노바스코샤주 파이브 아일랜드로 가서 런던으로 운송할 목재를 실었다.[161] 선적 작업을 감독하던 맥렐란 선장은 병에 걸렸고 상태가 악화되어 '아마존'호는 스펜서 섬으로 돌아왔다. 맥렐란은 1861년 6월 19일, 선장으로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렴으로 사망했다.[7][8][162][163] 그의 뒤를 이어 존 너팅 파커가 선장이 되어 런던으로의 항해를 재개했다.[161] 하지만 항해 중 메인주 이스트포트 앞바다의 좁은 수로에서 어선과 충돌했고,[5] 런던을 떠난 후에는 영국 해협에서 다른 브리그선과 충돌하여 침몰시키는 사고를 겪었다.[5] 이후 파커 선장은 해임되었다.[161]

파커는 2년 동안 선장직을 유지했으며, 이 기간 동안 '아마존'호는 주로 서인도 제도 무역에 종사했다. 1861년 11월에는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로 항해했으며,[9] 마르세유에서 유명한 해양 화가 오노레 드 펠레그린의 그림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0][11] 1863년, 파커의 뒤를 이어 윌리엄 톰슨이 선장이 되어 1867년까지 배를 지휘했다.[5] 이 시기는 비교적 평온했으며, 당시 '아마존'호의 한 선원은 "우리는 서인도 제도, 영국, 지중해를 항해했는데, 이것을 해외 무역이라고 불렀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고 회상했다.[5][164] 그러나 1867년 10월, 케이프브레턴 섬에서 '아마존'호는 폭풍우에 휩쓸려 해안가에 좌초되었고,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소유주들은 배를 난파선으로 포기했다.[12][165] 1867년 10월 15일, 배는 노바스코샤주 글레이스 베이의 알렉산더 맥빈에 의해 유기물로 인수되었다.[13][14][166][167]

한 달 안에 맥빈은 난파선을 지역 사업가에게 팔았고, 이 사업가는 1868년 11월에 뉴욕 출신의 미국인 선원 리처드 W. 헤인스에게 다시 팔았다.[15][168] 헤인스는 난파선 구매에 1750USD를 지불했고, 이후 수리 및 복원에 8825USD를 사용했다.[16][169] 그는 직접 선장이 되었고, 1868년 12월 '메리 셀러스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뉴욕 항구 세관에 미국 선박으로 등록했다.[5][170]

1869년 10월, '메리 셀러스트'호는 헤인스의 채권자들에게 압류되어[18][171] 제임스 H. 윈체스터가 이끄는 뉴욕 컨소시엄에 매각되었다. 이후 3년 동안 컨소시엄의 구성원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지만, 윈체스터는 최소 절반 이상의 지분을 계속 보유했다. 이 기간 동안 '메리 셀러스트'호의 구체적인 무역 활동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5] 1872년 초, 배는 10000USD의 비용으로 대대적인 수리를 거쳤다.[172] 이 수리로 배의 길이는 31m, 폭 7.8m, 깊이 4.9m로 늘어났다.[19][20][173] 구조적으로는 두 번째 갑판이 추가되었고, 검사관의 보고서에는 선미루 확장, 새로운 선미 설치, 다수의 목재 교체 등이 언급되었다.[5] 이 작업으로 배의 총 등록 톤수는 282.28톤으로 증가했다.[172] 1872년 10월 29일, 컨소시엄의 지분 구조는 윈체스터가 6주, 소액 투자자 2명이 각각 1주를 소유했으며, 나머지 12주 중 4주는 배의 새로운 선장인 벤저민 스푸너 브리그스가 보유하게 되었다.[21][174]

벤저민 스푸너 브리그스 선장의 모습

2. 3. 브리그스 선장과 선원들

벤자민 브리그스는 1835년 4월 24일 매사추세츠주 워럼에서 태어났으며, 선장 네이선 브리그스의 다섯 아들 중 한 명이었다. 다섯 아들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아들이 바다로 나갔고, 그 중 두 명이 선장이 되었다.[22] 벤자민은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 모임에서 종종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23] 1862년, 그는 사촌 사라 엘리자베스 콥과 결혼했고, 자신의 스쿠너 ''포레스트 킹''호에서 지중해 신혼여행을 즐겼다. 두 자녀가 태어났는데, 1865년 9월에 아들 아서가, 1870년 10월에 딸 소피아 마틸다가 태어났다.[24]

딸 소피아가 태어날 무렵, 브리그스는 선장으로서 높은 지위에 도달해 있었다.[25] 그는 바다 생활에 지쳐 은퇴하고, 마찬가지로 선원 생활에 싫증을 느끼던 형제 올리버와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각자 모은 돈을 배의 지분에 투자했다. 올리버는 ''줄리아 A. 홀록''호에, 벤자민은 ''메리 셀러스트''호에 투자했다.[5] 1872년 10월, 벤자민은 뉴욕에서 대대적인 수리를 마친 ''메리 셀러스트''호의 지휘를 맡아 이탈리아의 제노아로 향하는 첫 항해에 나섰다. 그는 아내와 어린 딸 소피아도 함께 배에 타도록 했고,[26] 학교에 다닐 나이인 아들 아서는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집에 남겨졌다.[27]

브리그스는 이번 항해를 위해 신중하게 선원을 선택했다.[28] 1등 항해사 앨버트 G. 리처드슨은 배의 공동 소유주인 제임스 H. 윈체스터의 조카와 결혼했으며, 이전에도 브리그스 밑에서 항해한 경험이 있었다.[29] 2등 항해사 앤드루 길링은 약 25세로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덴마크계였다.[30] 스튜어드(선내 살림 담당자)인 에드워드 윌리엄 헤드는 윈체스터의 개인적인 추천으로 고용되었다. 네 명의 일반 선원은 프리지아 제도 출신의 독일인이었는데, 폴커트 로렌젠과 보즈 로렌젠 형제, 아리안 마르텐스, 그리고 고틀리프 구드샬이었다. 이후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평화롭고 일류 선원들"이었다. 항해 직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리그스는 배와 선원들에 대해 매우 만족한다고 밝혔다.[5] 아내 사라 브리그스 역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원들이 "처음처럼 계속 잘 해준다면" 조용하고 유능해 보인다고 전했다.[31]

3. 사건 발생

1872년 11월 7일, 벤저민 브리그스 선장이 이끄는 메리 셀러스트호는 알코올 원액을 싣고 미국 뉴욕 항구를 떠나 이탈리아 제노바로 향했다. 브리그스 선장의 아내와 어린 딸도 이 항해에 동행했다.[5][188][35]

그러나 약 한 달 뒤인 12월 4일(또는 5일[43]),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해안 사이의 대서양 해상에서 캐나다 선박 디 그라티아호에 의해 발견되었다.[195][44] 발견 당시 메리 셀러스트호는 선원이나 승객 없이 홀로 표류하는 유령선 상태였다. 배에는 약간의 침수가 있었고 돛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항해는 가능한 상태였으며, 화물칸의 알코올 원액은 그대로 실려 있었다.[197][46][198][47] 하지만 배의 유일한 구명정은 사라졌고, 선장의 항해 도구와 일부 서류도 없어진 상태였다.[200][49]

디 그라티아호의 선장 데이비드 모어하우스는 메리 셀러스트호를 지브롤터로 인양하기로 결정했고, 두 배는 며칠 뒤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부해사 법원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50] 이 사건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진 선원들의 행방 때문에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3. 1. 뉴욕 출항

19세기 뉴욕 항구를 그린 조지 맥코드의 그림


1872년 10월 20일, 벤저민 브리그스 선장은 1,701 배럴의 알코올 원액 선적을 감독하기 위해 뉴욕시 이스트 강에 있는 50번 부두에 도착했다.[185][32][186][187] 일주일 후 그의 아내 사라(Sarah)와 어린 딸 소피아 마틸다(Sophia Matilda)가 합류했다.[5] 11월 3일 일요일, 브리그스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화요일에 출항할 예정이라고 알리며, "우리 배는 아름다운 상태이며,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188][35]

1872년 11월 5일 화요일 아침, 메리 셀러스트는 브리그스 선장과 그의 아내, 딸, 그리고 일곱 명의 선원을 태우고 50번 부두를 떠나 뉴욕 항구로 이동했다. 그러나 날씨가 불안정하여 브리그스는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189] 그는 배를 스태튼아일랜드 바로 앞에 정박시켰고,[190][36] 사라는 이 지연을 이용해 시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아서(브리그스 선장의 아들)에게, 그에게서 받을 편지에 크게 의존할 것이고, 항해 중에 그가 듣고 기뻐할 만한 일이 있으면 기억하려고 노력할 겁니다."라고 썼다.[191][37] 이틀 후인 11월 7일, 날씨가 개자 메리 셀러스트는 항구를 떠나 대서양으로 진입했다.[5]

메리 셀러스트가 항해를 준비하는 동안, 캐나다의 2기 범선 디 그라티아(Dei Gratia)는 뉴저지주 호보컨에 정박하여 지브롤터를 거쳐 제노바로 향하는 석유 화물을 기다리고 있었다.[192][38] 선장 데이비드 모어하우스(David Morehouse)와 1등 항해사 올리버 드보(Oliver Deveau)는 노바스코샤 출신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존경받는 선원들이었다.[193][39] 브리그스 선장과 모어하우스 선장은 공통 관심사를 공유했으며, 일부 작가들은 그들이 우연히라도 서로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5] 몇몇 기록에서는 그들이 메리 셀러스트가 출항하기 전날 저녁에 함께 식사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사건 발생 50년 후 모어하우스 선장의 미망인이 회상한 내용에 국한된다.[194][5][40] 디 그라티아는 메리 셀러스트가 출항한 지 8일 후인 11월 15일에 같은 일반 항로를 따라 지브롤터로 출발했다.[5]

3. 2. 유령선 발견

발견될 당시의 메리 셀러스트호를 묘사한 판화


'디 그라티아'호는 1872년 12월 4일 수요일 오후 1시경(육지 시간 기준, 해상 시간으로는 12월 5일 목요일[43])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해안 사이의 중간 지점인 북위 38도 20분, 서경 17도 15분 해상에 도달했다.[195] 모어하우스 선장이 갑판에 올라왔을 때, 조타수는 약 약 9.66km (약 9.7km) 떨어진 곳에서 어떤 범선 한 척이 불안정하게 '디 그라티아'호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배는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뱃머리의 삼각돛과 앞 돛대의 스테이 세일만 펼친 기이한 모습이었다.[196][44]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어하우스 선장은 배에 신호를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배가 가까워지자 갑판 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사를 위해 1등 항해사 올리버 드보(Oliver Deveau)와 2등 항해사 존 라이트(John Wright)를 보트에 태워 보냈다. 두 사람은 기이하게 항해하는 범선의 뱃머리에서 '메리 셀러스트'라는 이름을 확인했다.[45]

드보와 라이트는 '메리 셀러스트'호에 올라탔고, 배가 버려진 상태임을 발견했다. 돛들은 부분적으로만 펼쳐져 있었고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일부는 아예 사라진 상태였다. 돛대의 밧줄 상당수가 손상되었고, 어떤 밧줄들은 배 옆으로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다. 중앙 화물칸 덮개(main hatch cover)는 닫혀 있었지만, 앞쪽 화물칸과 선미 쪽 작은 창고(라자렛, lazarette)의 해치는 열려 있었고 덮개는 갑판 위에 놓여 있었다. 배의 유일한 구명정인 작은 요트는 사라진 상태였다. 배의 나침반을 담는 보관함(binnacle)은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었고 유리 덮개가 깨져 있었다.[197][46] 선창에는 약 약 1.07m (약 1.1m) 깊이의 물이 차 있었지만, 배의 크기를 고려하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고 항해는 가능한 상태였다.[198][47] 갑판 위에는 임시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수심 측정 막대(sounding rod)가 버려져 있었다.[199][48]

1등 항해사 드보는 선실에서 항해일지를 발견했다. 마지막 기록은 배가 발견되기 9일 전인 11월 25일 오전 8시에 작성된 것이었다. 당시 '메리 셀러스트'호의 위치는 아조레스 제도의 산타마리아섬 근처인 북위 37도 1분, 서경 25도 1분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디 그라티아'호가 배를 발견한 지점으로부터 거의 400 nmi (약 740km) 떨어진 곳이었다.[5] 드보는 선실 내부가 열린 문과 채광창으로 들어온 물 때문에 젖고 어수선했지만, 그 외에는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고 보았다. 브리그스 선장의 선실에서는 침대 밑에서 칼집에 넣어진 검을 포함하여 개인 소지품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선장의 항해 도구들과 함께 배의 중요 서류 대부분은 사라진 상태였다. 주방 설비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조리 중이거나 준비된 음식은 없었지만 창고에는 식량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화재나 폭력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황상 선원들이 사라진 구명정을 이용해 질서 있게 배를 떠난 것으로 보였다.[200][49]

드보는 이러한 발견 사실을 모어하우스 선장에게 보고했고, 모어하우스는 버려진 '메리 셀러스트'호를 약 600 nmi (약 1100km) 떨어진 지브롤터까지 인양하기로 결정했다.[201] 해상법에 따르면, 구조자는 구조된 선박과 화물 가치의 상당 부분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모어하우스는 '디 그라티아'호의 선원 8명을 나누어, 드보와 숙련된 선원 두 명을 '메리 셀러스트'호로 보내고, 자신과 다른 네 명은 '디 그라티아'호에 남았다. 지브롤터로 가는 동안 날씨는 대체로 잔잔했지만, 두 배 모두 심각한 인원 부족으로 항해 속도는 느렸다. '디 그라티아'호는 12월 12일에 지브롤터에 도착했고, 안개를 만났던 '메리 셀러스트'호는 다음 날 아침 도착했다. '메리 셀러스트'호는 도착 즉시 해난 구조 심리를 위해 지브롤터 부해사 법원(Vice Admiralty Court)에 압류되었다.[50] 드보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양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메리 셀러스트'호에 대해 후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51]

4. 진상조사

19세기 지브롤터


진상조사는 1872년 12월 17일, 지브롤터에서 제임스 코크란 경 대법원장의 주재로 시작되었다. 조사는 프레데릭 설리-플러드 지브롤터 검찰 총장이 진행했으며, 그는 또한 해군부의 변호사이자 여왕의 소송 대리인이기도 했다. 플러드는 ''메리 셀러스트'' 사건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오만함과 거만함이 IQ에 반비례하는 사람"[52]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 일단 결정을 내리면, 마음을 바꿀 수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53] ''데이 그라티아''호 선원인 드보와 라이트의 증언은 플러드에게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으며,[54] 이는 12월 21일 뉴욕의 ''해운 및 상업 목록''에도 "추론은 어딘가에 반칙이 있었고, 술이 그 밑바닥에 있다는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205][55]

12월 23일, 플러드는 선박 검사관 존 오스틴과 다이버 리카르도 포르투나토에게 ''메리 셀러스트''호에 대한 검사를 명령했다. 오스틴은 선수 양쪽에 날카로운 도구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 절단 자국을 발견했고, 선장의 칼에서 혈흔으로 의심되는 흔적을 찾았다고 보고했다. 그는 배가 악천후를 겪은 것 같지 않다고 강조하며, 제자리에 똑바로 세워져 있던 재봉틀 기름 바이알을 근거로 들었다.[56] 오스틴은 바이알이 배가 버려진 이후 교체되었을 가능성을 간과했으며, 법원 역시 이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57] 포르투나토는 선체를 조사한 후 배가 충돌하거나 좌초된 적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58] 왕립 해군 선장들의 추가 검사 결과, 선수에 난 절단 자국이 고의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오스틴의 의견이 지지되었다. 그들은 또한 배의 난간에서 혈흔으로 추정되는 얼룩과 도끼로 찍힌 듯한 깊은 자국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59] 이러한 발견들은 플러드가 이 사건이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의 소행이라는 의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5]

1873년 1월 22일, 플러드는 런던의 무역 위원회에 보고서를 보내면서 자신의 결론을 덧붙였다. 그는 선원들이 술에 취해 브리그스 가족과 선장을 살해하는 광란을 벌였고, 충돌을 위장하기 위해 선수에 흠집을 낸 뒤, 구명정을 타고 도주하여 불확실한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60] 플러드는 ''데이 그라티아''호의 선장 모어하우스와 그의 선원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특히 ''메리 셀러스트''호가 실제 발견 지점보다 더 동쪽에서 버려졌으며 항해 일지가 조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메리 셀러스트''호가 선원 없이 그렇게 먼 거리를 표류했을 리 없다고 판단했다.[61]

선주 중 한 명인 제임스 윈체스터는 1월 15일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메리 셀러스트''호가 언제 화물을 싣고 제노바로 출항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플러드는 윈체스터에게 1.5만달러의 보증금을 요구했으나, 윈체스터는 그럴 만한 자금이 없었다.[63][64] 윈체스터는 플러드가 자신이 브리그스와 선원들을 살해할 사람을 고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65] 1월 29일, 윈체스터는 플러드와의 격렬한 논쟁 속에서 브리그스 선장의 훌륭한 인품을 증언하며, 그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배를 버릴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했다.[66]

플러드의 반란 및 살인 가설은 칼과 배의 다른 곳에서 발견된 얼룩에 대한 과학적 분석 결과 혈액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67] 또한, 지브롤터 주재 미국 영사 호레이쇼 스프라그가 미국 해군 샤펠트 선장에게 의뢰한 보고서 역시 플러드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샤펠트 선장은 선수에 있는 자국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배의 목재에 가해진 자연적인 바다의 작용으로 생긴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68]

자신의 의심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한 플러드는 결국 1873년 2월 25일, 마지못해 ''메리 셀러스트''호를 법원의 관할에서 해제했다. 2주 후, ''메리 셀러스트''호는 매사추세츠 출신의 조지 블래치포드 선장이 이끄는 현지에서 모집된 선원들과 함께 제노바로 향했다.

구조 보상에 대한 문제는 4월 8일에 결정되었다. 코크란 판사는 총 1700GBP의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는데, 이는 선박과 화물 가치 총액의 약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69] 이는 통상적인 예상보다 훨씬 적은 액수였다. 한 전문가는 난파선을 항구로 인양하는 데 따르는 위험 수준을 고려할 때 보상금이 그 두세 배는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70] 코크란은 판결을 내리면서, 모어하우스 선장이 구조한 ''메리 셀러스트''호의 화물을 운송하기 위해 자신의 배 ''데이 그라티아''호를 보낸 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모어하우스가 법원의 처분에 따라 지브롤터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비판이었다.[71] 역사학자 힉스에 따르면, 코크란의 이러한 태도는 모어하우스와 그의 선원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인상을 주었고, 결국 그들이 "...대중 여론의 재판에서 영원히 의심받게 만들었다."[72]

5. 제기된 가설들

(내용 없음)

5. 1. 범죄 행위

지브롤터에서 수집된 증거는 플러드의 살인 및 공모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했지만, 타살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플러드와 일부 신문 보도는 메리 셀러스트호가 과도하게 보험에 가입되었다는 점을 들어 선주 윈체스터의 보험 사기 가능성을 잠시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윈체스터는 이러한 주장을 성공적으로 반박했으며, 보험사들도 보험 증권 발행과 관련하여 어떠한 조사도 진행하지 않았다.[73]

1931년 분기 검토지(Quarterly Review)의 한 기사에서는 데이 그라티아호의 선장 모어하우스가 메리 셀러스트호를 기다렸다가, 브리그스 선장과 선원들을 자신의 배로 유인해 살해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폴 베그는 데이 그라티아호가 메리 셀러스트호보다 느린 배였으며, 8일 늦게 뉴욕을 출발했기 때문에 지브롤터 도착 전에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 이론을 반박했다.[74][75]

또 다른 이론으로는 브리그스와 모어하우스가 구난 보상금을 나누기 위해 사전에 공모했다는 가설이 있지만,[76] 두 선장 사이에 특별한 친분이 있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77] 힉스는 "만약 모어하우스와 브리그스가 그런 사기를 계획했다면, 이렇게 세간의 이목을 끄는 미스터리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브리그스가 영구적으로 사라질 계획이었다면 왜 아들 아서를 남겨두고 갔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5]

1870년대 모로코 해안에서 활동하던 리프족 해적에 의한 습격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찰스 에디 페이는 해적들이 배를 약탈했다면 값나가는 개인 소지품까지 그대로 남겨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78] 1925년 역사가 존 길버트 로크하트는 브리그스 선장이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혀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러나 로크하트는 이후 브리그스의 후손들과 대화한 뒤 사과했으며, 자신의 저서 후속판에서 이 이론을 철회했다.

범죄 행위 외의 가능성으로, 브리그스의 사촌 올리버 콥은 요트(소형 보트)로 인원을 옮긴 것이 일시적인 안전 조치였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드보의 보고서에 나타난 장비와 밧줄 상태를 근거로, 배의 주 할리어드를 이용해 요트를 배에 연결해 두었다가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돌아올 계획이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만약 이 밧줄이 끊어졌다면, 메리 셀러스트호는 빈 배로 계속 항해하고 요트에 탄 사람들은 표류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5] 하지만 베그는 승무원들이 폭발이나 침몰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배에 요트를 묶어두는 것은 비논리적이라고 반박했다.[79] 맥도날드 헤이스팅스는 브리그스가 경험 많은 선장으로서 당황하여 배를 버리는 행동을 했을 리 없다고 주장하며, "만약 메리 셀러스트호가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면, 배의 보트보다는 그 배 자체가 더 나은 생존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헤이스팅스에 따르면, 브리그스가 메리 셀러스트호 대신 보트에 생존을 걸었다면 "어리석거나, 더 나쁘게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행동한 것"이다.[80]

20세기 초 해양 미스터리 조사 전문가였던 뉴욕 보험 감정사 아서 N. 풋만은 구명 보트 중 단 하나만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며 유사한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보트의 밧줄이 풀린 것이 아니라 잘려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는데, 이는 메리 셀러스트호를 급하게 포기했음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배의 항해일지에는 화물칸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와 작은 폭발음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알코올 화물은 자연적으로 폭발성 가스를 방출하므로 이러한 소리는 드물지 않다. 풋만은 더 강력한 폭발이 있었고, 이에 대응하여 선원 중 한 명이 불을 붙인 채 또는 시가를 물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가 가스에 불을 붙여 해치 덮개를 날려버릴 정도의 폭발을 일으켰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실제로 해치는 평소와 다른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풋만은 공황 상태에 빠진 선장과 그의 가족, 그리고 승무원들이 유일한 구명 보트에 올라 밧줄을 끊고 메리 셀러스트호를 버렸다고 가정했다.[81]

5. 2. 자연 현상

브리그스의 사촌 올리버 콥은 승무원들이 요트(소형 보트)로 옮겨간 것이 일시적인 안전 조치였을 수 있다고 보았다.[5] 그는 배의 장비 상태 보고서를 근거로, 주 할리어드(돛 올림줄)를 이용해 요트를 ''메리 셀레스트''에 연결해 두었다가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만약 이 밧줄이 끊어졌다면, ''메리 셀레스트''는 빈 채로 항해하고 요트에 탄 사람들은 표류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5] 그러나 베그는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배에 요트를 묶어두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79] 맥도날드 헤이스팅스 역시 브리그스는 경험 많은 선장이므로 당황해서 배를 버리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메리 셀레스트''가 산산조각 나지 않는 한, 배의 보트보다 배 자체가 더 안전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80]

20세기 초 해양 미스터리를 조사했던 뉴욕 보험 감정사 아서 N. 풋만은 구명 보트 하나만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보트의 밧줄이 풀린 것이 아니라 잘려 있었다는 점에서 승무원들이 매우 급하게 배를 포기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항해일지에는 화물칸에서 나는 소리와 작은 폭발에 대한 기록이 있었는데, 풋만은 알코올 화물이 자연적으로 폭발성 가스를 방출하며 이런 소리는 흔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더 강력한 폭발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선원 중 누군가가 불을 붙인 채 또는 시가를 물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가 가스에 불이 붙어 해치 뚜껑이 날아갈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치는 평소와 다른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풋만은 이 폭발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진 선장과 가족, 승무원들이 급히 구명 보트에 올라 밧줄을 자르고 ''메리 셀레스트''를 떠났을 것으로 추정했다.[81]

5. 3. 기타 가설

브리그스의 사촌인 올리버 콥은 요트(소형 보트)로 옮겨 탄 것이 임시적인 안전 조치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드보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배의 주 할리어드(돛 올림줄)를 이용해 요트를 배에 연결해 두었다가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려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만약 밧줄이 끊어졌다면, ''메리 셀러스트''호는 빈 채로 항해하고 요트는 사람들과 함께 표류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5] 그러나 베그는 승무원들이 폭발하거나 침몰할 위험이 있는 배에 요트를 묶어두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79] 맥도날드 헤이스팅스 역시 경험 많은 브리그스 선장이 당황해서 배를 버리는 행동을 했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메리 셀러스트''호가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면, 배의 보트보다 배 자체가 더 안전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헤이스팅스는 브리그스가 배 대신 보트에 생존을 걸었다면 "어리석거나 겁에 질린 사람처럼 행동한 것"이라고 평가했다.[80]

20세기 초 해양 미스터리 전문가인 뉴욕 보험 감정사 아서 N. 풋만은 배에서 단 하나의 구명 보트만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며 비슷한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보트 밧줄이 풀린 것이 아니라 잘려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배를 포기하는 결정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배의 항해일지에는 화물칸에서 여러 차례 불길한 소리와 작은 폭발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알코올 화물은 자연적으로 폭발성 가스를 방출하므로 이런 소리는 흔할 수 있다. 풋만은 이보다 더 큰 폭발이 있었고, 선원 중 누군가가 불을 붙인 채 또는 시가를 물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가 연기에 불이 붙어 해치 뚜껑이 날아갈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실제로 해치는 평소와 다른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풋만은 공황 상태에 빠진 선장과 가족, 승무원들이 급히 구명 보트에 올라 밧줄을 끊고 ''메리 셀러스트''호를 버렸다고 결론지었다.[81]

6. 이후의 역사

`메리 셀러스트`는 1873년 6월 26일 제노바를 출발하여 9월 19일 뉴욕에 도착했다.[111] 지브롤터 청문회에서 불거진 살인 사건 의혹 등에 대한 언론 보도로 인해 배의 평판은 크게 떨어졌다. 해스팅스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부두에서 썩어갔다"고 기록할 정도였다.[112] 1874년 2월, 기존 소유주 컨소시엄은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고 배를 뉴욕 사업가들에게 매각했다.[117]

곤아브 섬, 아이티 곤아브 만에 위치. 로셸루아 뱅크는 섬과 본토 사이의 남쪽 해협에서 희미하게 식별할 수 있다.


새로운 소유주 아래에서, `메리 셀러스트`는 주로 서인도 제도인도양 항로를 운항했지만, 계속해서 손실을 기록했다.[5] 1879년 2월에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기항했는데,[118] 당시 선장이었던 에드거 튜틸이 병에 걸려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는 배에서 조기에 사망한 세 번째 선장으로, 배가 저주받았다는 소문을 더욱 부추겼다.[5] 1880년 2월, 배는 웨슬리 고브가 이끄는 보스턴 사업가들에게 다시 매각되었다. 토마스 L. 플레밍이 1884년 8월까지 선장을 맡았고, 이후 길먼 C. 파커가 그 뒤를 이었다.[119] 이 시기 배의 등록 항구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항해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연구자 브라이언 힉스는 소유주 고브가 배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120][121]

1884년 11월, 파커 선장은 보스턴의 화주들과 공모하여 보험 사기를 계획했다. 가치 없는 화물을 싣고 서류에는 고가품으로 허위 기재한 뒤, 3만달러 상당의 보험에 가입했다. 12월 16일, 파커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향해 출항했다.[122] 1885년 1월 3일, `메리 셀러스트`는 포르토프랭스로 접근하던 중 곤아브 섬과 아이티 본토 사이의 로셸루아 뱅크(Rochelois Bank)라는 거대한 산호초에 의도적으로 좌초되었다. 파커는 배를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시킨 뒤 선원들과 함께 해안으로 탈출했다. 이후 그는 구조 가능한 화물을 미국 영사에게 500USD에 판매하고 보험금을 청구했다.[123][124]

그러나 영사가 구매한 화물이 거의 가치 없음을 보고하면서[125] 보험 회사는 조사를 시작했고, 곧 사기극의 전모가 드러났다. 1885년 7월, 파커와 화주들은 보스턴에서 보험 사기 공모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파커는 당시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던 배임(barratry) 혐의로도 기소되었다. 공모 혐의 재판은 8월 15일, 배심원단이 평결에 이르지 못하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부 배심원들은 유죄 평결이 이어질 배임죄 재판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판사는 재심 대신 피고들이 보험 청구를 철회하고 부당 이득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중재했다. 파커에 대한 배임 혐의는 기소 유예되었고 그는 석방되었다.[126] 하지만 이 사건으로 파커의 명성은 완전히 실추되었고, 그는 3개월 후 빈곤 속에서 사망했다. 공모자 중 한 명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자살했다. 베그는 이를 두고 "인간의 법정이 처벌하지 못한다면... 배를 괴롭혔던 저주가 끔찍한 보복을 가한 것"이라고 평했다.[126]

2001년 8월, 해양 고고학자이자 작가인 클라이브 커슬러가 이끄는 탐험대가 로셸루아 암초에서 `메리 셀러스트`호의 잔해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일부 목재와 금속 유물이 인양되었으나, 대부분은 산호 속에 묻혀 있었다.[127] 초기 목재 분석 결과는 1872년 개조 당시 뉴욕 조선소에서 사용된 종류와 일치하여 `메리 셀러스트`의 잔해일 가능성을 높였다.[128] 하지만 캐나다 지질 조사국의 스콧 세인트 조지가 실시한 후속 연륜연대기 분석 결과, 해당 목재는 배가 침몰한 지 약 10년 후인 1894년경까지도 자라고 있었던 나무(주로 미국 조지아 주산)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져, 발견된 잔해가 `메리 셀러스트`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29]

7. 대중문화 속 메리 셀러스트호

사실과 허구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뒤얽혔다. 1883년 6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지어낸 세부 사항을 덧붙여 ''메리 셀러스트''호 이야기를 다시 썼다. "모든 돛이 펴져 있고, 키는 고정되었으며, 밧줄 하나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 난로에 불이 타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맛도 보지 못하고 거의 차갑지 않았다 ... 발견된 시간까지 로그가 기록되어 있었다."[93] 1906년 11월 ''오버랜드 월간 및 서부 잡지''는 ''메리 셀러스트''호가 실제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1400nmi 떨어진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표류했다고 보도했다. 많은 부정확한 내용 중에는 일등 항해사가 "브리그스라는 남자"였으며, 배에 살아있는 닭이 있었다는 점 등이 포함되었다.[94]

많은 논평가에 따르면 가장 영향력 있는 재현은 ''메리 셀러스트'' 사건을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만든 1884년 1월 ''콘힐 매거진''의 이야기였다.[95][96] 이 이야기는 당시 25세의 젊은 의사였던 아서 코난 도일의 초기 작품이었다. 도일의 이야기 "J. 하바쿡 젭슨의 진술"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는 배의 이름을 ''마리 셀레스트''로 바꾸었고, 선장의 이름은 J. W. 팁스였으며, 치명적인 항해는 1873년에 이루어졌으며, 보스턴에서 리스본으로 향했다. 그 배에는 등장인물인 젭슨을 포함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97] 이야기 속에서 백인에 대한 증오심을 품은 셉티미우스 고링이라는 광신도는 승무원들을 매수하여 팁스를 살해하고 배를 서아프리카 해안으로 가져가도록 한다. 배의 나머지 일행은 모두 죽고, 젭슨은 고링과 그의 공범자들이 숭배하는 마법의 부적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도일은 자신의 이야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지만, 당시 지브롤터에서 미국 영사로 재직하고 있던 스프라그는 이야기의 일부가 사실일 수 있는지 문의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99]

''J. 하바쿡 젭슨의 진술''이라는 아서 코난 도일의 1884년 단편 소설은 ''메리 셀러스트'' 신화를 널리 퍼뜨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13년, ''스트랜드 매거진''은 ''메리 셀러스트''호의 스튜어드였던 아벨 포스디크의 설명이라는 생존자의 주장을 실었다. 이 버전에서는 승무원들이 수영 경기를 보기 위해 임시 수영 플랫폼에 모였는데, 플랫폼이 갑자기 무너졌다. 포스디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익사하거나 상어에게 잡아먹혔다는 내용이다. 도일의 이야기와 달리, 이 잡지는 이것을 수수께끼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으로 제시했지만, 브리그스를 "그리그스"로, 모어하우스를 "보이스"로, 브리그스의 딸을 7살이 아닌 2살로, 승무원을 13명으로 잘못 기재하고, 항해 용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등 많은 간단한 실수를 포함했다.[5] 1920년대 아일랜드 작가 로렌스 J. 키팅이 저지른 그럴듯한 문학적 사기극에 의해 더 많은 사람들이 설득되었으며, 이 이야기는 존 펨버턴이라는 생존자의 이야기로 다시 제시되었다. 이것은 살인, 광기, 그리고 ''데 그라티아''와의 공모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일의 이름("마리 셀레스트")을 사용하고 핵심 인물을 잘못 명명하는 등 기본적인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다.[1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매우 설득력 있게 전해져서 1926년 7월 26일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그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도했다.[101] 헤이스팅스는 키팅의 사기를 "상상력이 풍부한 남자의 뻔뻔한 속임수"라고 묘사한다.[102]

1924년,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메리 셀러스트''호의 전 뱃사공이었던 R. 루시 선장의 이야기를 게재했다.[103] 하지만 그러한 인물은 등록된 승무원 명단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104] 이 이야기에서 브리그스와 그의 승무원은 포식자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버려진 증기선을 발견하고 배에 올라 안전 금고에 3500GBP 상당의 금과 은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돈을 나누고 ''메리 셀러스트''호를 버리고 스페인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로 결정했는데, 증기선의 구명정을 사용하여 스페인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헤이스팅스는 그러한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가 한동안 널리 믿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독자들이 "인쇄물의 마법에 속았다"고 말한다.[5]

1904년 9월 17일자 ''챔버스 저널''은 ''메리 셀러스트''호의 전체 선원이 거대한 문어 또는 오징어에게 하나씩 잡혔다고 추측했다.[105]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 따르면, 거대한 오징어(''대왕 오징어'')는 길이가 15m에 달할 수 있으며[106] 배를 공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107] 베그는 그러한 생물이 승무원을 골라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요트와 선장의 항해 장비를 가져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108] 다른 설명으로는 초자연적 개입이 제안되었다. 연도가 없는 ''영국 점성술 저널''은 ''메리 셀러스트'' 이야기를 "신비로운 경험"으로 묘사하며 "위대한 기자 피라미드 단지,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 영국 이스라엘주의"와 연결시켰다.[109] ''메리 셀러스트''호가 대서양의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버뮤다 삼각지대가 언급되기도 했다.[110] 유사한 환상에는 비행 접시를 타고 온 외계인의 납치 이론이 포함되어 있다.[5]

8. 유산 및 기념

''메리 셀러스트''는 공해상에서 기이하게 버려진 배로 보고된 최초의 사례는 아니었다. 해군 장교이자 해양 미스터리 연구가인 루퍼트 굴드는 1840년에서 1855년 사이에 발생한 다른 유사 사건들을 언급하기도 했다.[130][131]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널리 기억되는 것은 ''메리 셀러스트''이다. 이 배의 이름, 또는 종종 잘못 표기되는 ''마리 셀레스트''는 설명할 수 없는 유기(遺棄) 사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게 되었다.[132]

1955년 10월에는 70톤급 모터선 조이타(Joyita)호가 25명의 승객을 태우고 사모아토켈라우 사이를 항해하던 중 남태평양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33] 이 배는 한 달 뒤, 원래 항로에서 약 965.60km 떨어진 바누아레부 북쪽 해상에서 표류하는 상태로 발견되었다.[134] 배에 탔던 사람들은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고, 조사 위원회도 명확한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이 사건을 연구한 데이비드 라이트는 이를 "...''메리 셀러스트''에 버금가는 고전적인 해양 미스터리"라고 평가했다.[135]

작가 브라이언 힉스는 그의 저서 ''유령선''(2004)에서 ''메리 셀러스트'' 사건에 대해 "어떤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 미스터리는 잃어버린 선원들의 가족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헛되이 노력한 수백 명의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유령선은 바다가 그 비밀을 결코 내놓지 않는다는 옛 격언의 가장 좋은 예일지도 모른다."라고 언급했다.[136]

''메리 셀러스트'' 이야기는 여러 창작물에 영감을 주었다. 1930년대에는 L. 듀 가드 피치와 팀 힐리가 각각 쓴 두 편의 라디오 연극이 호평을 받았고,[137][138] 1949년에는 피치의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139] 여러 편의 소설도 출판되었는데, 대부분 초자연적인 설명보다는 현실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140] 1935년에는 영국 영화사 해머 필름 프로덕션이 ''메리 셀러스트의 미스터리''라는 영화를 제작했으며, 벨라 루고시가 정신 이상 선원 역으로 출연했다.[141] 이 영화는 미국에서는 ''유령선''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으나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142] 1938년에는 단편 영화 ''죽은 배''가 제작되어 반란, 알코올 증기 폭발 공포, 초자연적 현상 등 다양한 유기 가설들을 극화하여 보여주었다.[143]

2007년 11월, 스미소니언 채널은 ''메리 셀러스트의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여 사건의 여러 측면을 탐구했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펌프 막힘과 기기 오작동 가능성을 제기했다. ''메리 셀러스트''는 알코올을 싣기 전에 석탄을 운반했는데, 이로 인해 석탄 먼지가 펌프를 막히게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펌프가 갑판 위에서 분해된 채 발견되었으므로, 선원들이 이를 수리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선체는 화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선장이 거친 바다에서 배 안으로 물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제작진은 크로노미터에 결함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했는데, 이로 인해 브릭스 선장이 실제 위치보다 약 193.12km 더 동쪽인 산타 마리아 섬 근처에 있다고 착각하고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144]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의 스펜서 섬에는 ''메리 셀러스트''호와 실종된 선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배가 건조된 장소로, 기념비와 함께 배의 선체 모양을 본떠 만든 야외 영화관이 있다.[145] 또한, 지브롤터몰디브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몰디브 우표 중 하나에는 배 이름이 ''마리 셀레스트''로 잘못 표기되기도 했다.[1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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